잘 아는바 고린도전서 12장은 “신령한 것” 곧 성령의 은사에 관하여 언급하는데, 특별히 4-6절에서 이르기를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즉 성령으로 인하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즉 모든 직분이 주를 위하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라고 했다. 즉 모든 은사들과 직분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각각 있는 것이다.
또한 12절에서는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고 하여, 교회를 이루는 모든 지체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이라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특별히 27절은 이를 더욱 분명히 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 했는데, 그러므로 28절에서는 역사 가운데 있었던 교회의 거의 모든 직분들을 언급하여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고전 13:28절에서 말하는 사도와 선지자와 교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가르치는 직분으로서, 말씀(logos)이신 그리스도(요 1:14)의 통치와 구현의 방식과 관련된 핵심적인 가치(value)를 드러내는 직분들이다.
하지만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21절)고 하여서, 말씀을 가르치는 직분과 다스리는 직분, 그리고 섬기는 직분들이 각각 동등하게 그리스도를 이루는 몸으로서의 성직의 직분(the ministry)임을 언급하고 있다.
더욱이 25절에서 사도는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고 하여, 각 직분이 동등함과 아울러 구별이 있음에 대해서도 분명히 밝히고 있어서, 교회에서의 모든 직분이 혼재(mixed loading)하지 않고 분명하게 구별되어 동등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때문에 사도는 14:33절에서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 했는데, 그것은 단순히 차례대로 교훈할 것만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직분들의 질서에 대해서까지 적용되는 언급이다.
무엇보다 고전 14:27절의 “차례를 따라 하고”라는 말씀은 단순히 예언(한글로는 ‘방언’이라고 되어 있으나, 그것은 ‘하늘의 언어’를 말하는 것이다)을 순서대로 하라는 말이 아니라, 하늘의(혹은 하나님의) 교훈을 모든 사람들(회중)이 알아듣고 배울 수 있도록 권면하게 하라는 의미라는 점에서, 교회의 직분들이 갖는 차별적인 질서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각 직분은 혼재하지 않고 질서 있게 구별됨이 마땅한 것이다.
특별히 구별되는 질서의 개념이란, 각 직분들이 맡겨진 은사의 범위를 넘어서지 않는 질서의 개념이다. 즉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몸의 지체들이 자신이 담당하는 기능을 넘어서지 않는 예로써의 질서를 말하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질서에 있어 중요한 것이 바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하는 “사랑”(agape)이다. 특별히 그 사랑은 “오래 참고……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고전 13:4-7)는 것이니, 참으로 질서를 따르는 가장 바탕이 되는 중요성을 지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SNS 상에서 활동하시는 분들 가운데, 자신의 직분을 넘어서는 영역에 지나치게 많은 관심과 의견을 피력하는 모습들에 적잖은 조심함을 바라게 된다.
특히나 지교회에서 봉사와 구제에 힘쓰는 직분을 맡았으면서도 교리와 신학을 가르치는 일에 더욱 힘쓰거나, 목회직을 전혀 감당하지 않는 입장에서도 목회자에 대해 이러저러한 견해를 반복하여 피력하는 경우라면, 자신이 혹여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하는 사랑을 벗어나거나, 심지어 14장에서 말한 질서를 깨뜨리는 것(넘어서는 것)이 아닌지 조심함이 마땅할 것이다.
더구나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는 남자와 여자의 창조질서에 따른 원리와 적용조차도 너무나 쉽게 깨뜨리고 넘어서는 일이 일반화 되어 있는 이 시대에, 우리들이 회복할 종교개혁의 중요한 내용이 또한 그러한 성경적 질서임을 생각한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고린도전서를 기록한 사도는 또한 야고보서에서 이르기를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약 3:1)고 하면서,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약 3:13)고 했다. 이제 막 진리(성경의 진리)에 눈 뜬 자가 아니라, 원숙함에 이른 사도로서 자신이 말하는 진리의 엄중함이 얼마나 무겁고 두려운 것인지(13절의 언급)를 실감하며 권면하는 말씀인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교회에서 말하는 직분은, 그 말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가늠하고 있다. 바로 그러한 부담과 두려움으로 인해, 많은 사역자들이 한사코 그 직분을 거절하고 회피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직분(입술의 직분)을 감당하는 신실한 자들은, 이 땅의 모든 즐거움과 낙을 실제로 포기하고서 기꺼이 그 무게를 감당했었던 자들이었다. 마찬가지로 또 다른 그 직분(손과 발의 직분)을 감당했던 신실한 자들은, 이 땅의 모든 영예와 찬사를 버리고서 기꺼이 그(사랑의) 뜨거움을 감당했었던 자들이었다. 바로 그러한 질서 가운데서 각 지체들이 온전히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 것(고전 12:27)이다. 비록 현실에서는 늘 입이 손과 발을 낮게 여긴다 할지라도, 성경은 늘 변함없이 그러한 진리의 질서를 따라 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룰 것을 말씀하고 있다.
http://cafe.daum.net/largoviva/WoXQ/41
주일을 거룩하게 함에 관하여 (0) | 2019.05.15 |
---|---|
헌금, 반드시 예배 중에 드려야(혹은 있어야) 하는가? (0) | 2019.05.15 |
“말씀을 통해서(per Verbum)”와 “말씀과 함께(cum Verbo)”의 차이 (0) | 2019.04.25 |
교직(목사직)은 왜 동등한가?| (0) | 2019.04.22 |
종교개혁, 500년을 거슬러 루터(Martin Luther)인가?| (0) | 2019.04.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