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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한 사회’ 속에서 신자가 ‘구별’되는 법.|

장대선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9. 6. 28.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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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信者)들이 이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해야한다는 것은 거의 누구나 알고 있는 내용이라 할 것이지만, 정작 신자가 그처럼 빛으로 소금으로 구별되는 경우를 찾아보기 어렵게 되어버린 것이 작금의 우리 사회다.

 

특별히 정치의 부패지수는 거의 밑바닥에까지 추락한 지 오래며, 한동안 개혁의 기치(旗幟)아래 숨죽이던 온갖 부정부패가 그야말로 만연해 있는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임을 부인하는 양심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안타까운 것은 그런 사회 가운데에 있는 기독교회들의 실상이 현실의 세속사회와 거의 다르지 않다는 사실로서, 가히 기독교회들이 부패하는 만큼 이 사회가 부패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쳐내기 어려울 만큼 이 사회는 총체적으로 타락과 부패가 창궐해 있다.

 

그렇다면 신자에게는 누구에게나 거의 상식인 빛과 소금의 사명이 왜 사회 가운데서 바르게 실현되지 않을까?

 

이 문제에 거의 대부분의 신자들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문제의식과 대답을 되뇌고 있을 뿐인데, 그것이 얼마나 신빙성이 없는 대답인지는 그렇게 되뇌어 대답하는 신자들 자신의 무미건조하고 확신 없는 외침들이 단적으로 증명해주고 있다.

 


사실 부패한 사회 속에서 신자들이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은 단순히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청결하게 살아가는 것으로 되는 문제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교회로 모인 신자들 대부분은 정결함으로 모인 것이 아니라, 그 부패와 무능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놓은 채로 모인 것(죄에 대한 철저한 고백-드러냄-은 회개에 앞서는 필연적인 것이다)이기 때문이다.

 

그런즉 회개(悔改)는 신자들의 가장 단적인 구별됨이요, 희생을 당하는 짐승들의 울부짖는 소리들만큼 속죄하는 백성들의 낙망과 회개가 드러나는 것이 구약 제사의 외형적인 특징이었다.

 

그러므로 이 사회의 부패와 타락을 개혁하는 빛과 소금의 사역을 신자들이 감당하고자 한다면, 그 주된 관심을 부패하고 타락한 사회로 향할 것이 아니라 교회로 모이는 본질과 자신들의 신앙에 두는 것이 마땅하다.

 

한편, 민주주의 사회의 청렴도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것 가운데 하나가 권력분립 즉 삼권분립(三權分立)’인데, 그런 민주주의 삼권분립의 역설적인 한계는 그것이 자칫 서로를 견제하는 수단으로만 기능할 경우에는 오히려 어떤 정책이나 법안도 제대로 시행할 수 없도록 하는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현대 민주주의의 근간을 제공한 장로교회의 구조, 즉 가르치는 장로로서의 목사와 치리하는 장로, 그리고 봉사하는 집사가 각각 수평적이면서도 전혀 독립적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연합하는 독특한 구조의 실현이야말로, 삼권(입법, 사법, 행정)이 분립하되 서로 견제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유기적으로 작용하여 합리적이고 효과적인 실질행정을 최대한으로 이끌어내도록 하는 민주주의 사회의 이상적인 모델(Model)이라 할 것인데, 그런 장로교회의 구현 가운데서 신자는 모든 관심을 사회로 향하지 않으면서도 사회에 빛과 소금이 되는 문화적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민주주의와 함께 자본주의로 대표되는 현대사회는 갈수록 사회구성원인 국민들의 양분(兩分)을 촉진시키는 방향으로 급격히 타락해 가고 있는데, 자본가가 노동자들의 시간과 생산성을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한 끌어낼 수 있는 방안을 추구하는 것을 우리 사회는 급격히 지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갈수록 이 사회의 노동구조는 산업혁명시기의 영국과 미국에서의 노동력 착취, 즉 미취학 아동들까지 최대한의 시간을 짜내 공장의 노동력으로 삼던 시대의 경험을 되살리는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런 사회 가운데서 신자들만이라도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을 잘 추구하여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함으로서 예배자의 삶을 구현해 나간다면, 그것이야말로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폐단 가운데 하나인 지나치게 노동집약적인 생산성 고취(鼓吹), 즉 일하는 시간에 쫓겨 저녁조차 없는 회색도시(Michael Ende의 동화 모모에 나오는 도시)의 삶으로 내몰리는 현대 자본주의사회에 적절한 대안(代案)과 모범(模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9:6절을 보면 제사장들이 항상 첫 장막에 들어가 섬기는 예식을 행하고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성소(a sanctum)’에서 제사장이 아침저녁으로 제사를 드리던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실천적 의미로는 아침저녁으로 신자가 들이는 가정예배를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2:9)인 신자들이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는 살전 5:16-18절의 말씀을 실천하는 모범을 구약의 맥락까지 잘 살려 구현하는 실천으로서 개혁교회들의 전통 가운데 하나였던 가정예배를 아침저녁으로 드리는 경건한 신앙의 삶을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신자들이 자신의 사업체 혹은 업소에서 이러한 경건을 실천하여, 신자들인 직원들의 아침저녁의 경건한 가정예배를 보장하고 그러한 것이 비록 불신자일지라도 모든 직원들에게 보장된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아침과 저녁이 있는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특정 정당대표의 슬로건을 모범적으로 구현해 보이는 빛과 소금으로서의 사명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사회 가운데 있는 장로교회들 가운데 장로정치의 모범을 구현하는 교회가 희소(稀少)하며, 노동생산성을 기반으로 하는 기업경쟁력강화(노동집약적 생산성 향상)라는 경영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신앙의 실천(현대 서구사회의 복지제도들의 근간을 제공하는 원리들 가운데 상당수가 기독교적인 배경 가운데서 태동(胎動)한 것이다)으로서 이 사회에 빛과 소금으로 드러나는 신자들을 보기가 너무나 어렵게 되어버린 것이 엄연한 이 사회 가운데 있는 기독교, 그 가운데서 장로교회들과 신자들의 현실이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사회 가운데 있는 수많은 교회들과 신자들이 이 사회에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빛과 소금으로 드러나지 못하는 현실은 우리가 지향하는 방향이 잘못되어 있는 것을 단적으로 증명해 주는 예().

 

즉 신자들이 추구하는 방향은 교회(敎會)다움이요 신자(信者)다움에 있는 것으로, 이 사회 가운데서 어떻게 빛과 소금이 될 것인가의 문제는 그 다음의 문제일 뿐 아니라 교회다움과 신자다움을 실천하는 가운데서 자연스럽게 수반(隨伴)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요지(要旨)인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바 마땅히 행할 바에 대한 신앙을 무엇보다 자신의 삶에 온전히 적용하고 실천하는 것으로서의 신앙이야말로, 이 사회에서 신자들이 얼마나 밝게(), 그리고 얼마나 짜게(소금) 그 맛을 유지할 것인지에 대한 가장 확실한 목표요 방향이라는 사실을 깊이 상고(詳考)하고 우선하여 착념(着念)함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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