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쉽게 비유해 본 ‘장로교회’의 원리

장대선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9. 7. 2. 09:22

본문

가만히 보면, 한국에서 목사안수를 받으시는 분들은 집사로 시작해서 장로가 되었다가 결국에는 목사가 되는 것 같다.

 

섬김으로 시작해서 다스리는 자가 되었다가 결국 교황과 같이 군림하는 자로서의 목사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목사직분의 그러한 변화들은 사실 한국 장로교역사를 그대로 대변해 주고 있다.

 

조선에 장로교가 선교사들에 의해 전파되어 아직 신학적으로 장로회의 정신과 원리를 재정립하기도 전에 일제강점과 6·25사변 등 근·현대사의 비극적이고 비정상적인 격동을 겪는 가운데서 장로교회들은 경이로운 교세확장이라는 명부(明部)를 보여주었는가 하면, 장로교회의 원리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기형적인 자연종교로서의 암부(暗部)를 계속해서 드러내 보이고 있는 것이다.

 

특히 한국의 개신교회, 그 가운데서도 장로교회들은 모교회가 성장하여 목회자를 파송하여 세워지는 예는 거의 드물고 대부분은 목사 스스로가 개척을 통해 세워진 경우들로서, 그런 교회의 목사들은 처음에 집사처럼 섬기고 봉사하다가 교회가 어느 정도 자립하고 성장하게 되면 치리하는 장로와 같이 되다가 중·대형교회가 되면 결국 군림하는 교황이나 다를 바 없는 담임목사요 당회장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장로교회의 목사는 M·Div로 시작해서 Th·M을 거쳐 D·DPh·D 혹은 D·Min에 이르게 되어야 마땅하다.

 

즉 목회학석사(Master of Divinity)로 시작하여 신학석사(Masters In Theology)가 되며, 최종적으로는 신학박사(Doctor of Divinity)나 철학박사(Doctor of Philosophy) 혹은 목회학박사(Doctor of Ministry)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물론 목사에 대한 이러한 비유(metaphor)는 그처럼 학위과정을 이수하여 학위증을 받아야만 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처럼 성장(성숙)해 가야 한다는 말이다.

 

바로 그런 점에서 목사란 교회의 학자(scholar)가 되는 것이 주된 사역이지, 몸으로 섬기는 자나 몸으로 다스리는 자가 되는 것이 주된 사역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행 6:4절에서 사도들은 봉사와 구제하는 것으로 섬기던 일을 일곱 일꾼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고 한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사도들과 같은 사역을 수행하는 목사들이 최우선으로 하는 일은 기도와 함께 말씀 사역에 힘쓰는 경건한 신학자가 되는 것이다.

 

반면에 교회에서 봉사하는 일과 구제하는 일은 집사(deacon)’직분이 수행할 마땅한 본분이다.

 

그러므로 집사의 직분이란 그야말로 교회의 일꾼으로서 섬기고 봉사하는 것이 고유의 기능인 직분으로서, 결코 장로가 되기 위해 거쳐야 하는 직분이 아니다.

 

또한 교회에서 치리하는 일은 주로 장로(presbytery)’직분이 수행할 마땅한 본분이다.

 

따라서 장로의 직분이란 교회의 행정 및 운영과 관련한 제반(諸般)을 수행하는 중요한 직분이지만, 결코 권력을 휘두르는 직분은 아니다.

 

한편 교회에서 가르치는 일은 가르치는 장로로서의 목사(pastor or minister)’직분이 수행할 마땅한 본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목사의 직분이란 교회가 섬기고 봉사하는 일들과 행정 및 운영과 관련한 제반 뿐 아니라, 무엇보다 성경의 교사로서 가르쳐 지키게 하는 일을 수행하는 아주 중요한 직분이지만, 결코 전횡(專橫)을 일삼을 수 없는 직분이다.

 

마태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1세기 기독교의 사도들에게 예수께서는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명하셨는데 이러한 기능을 사도 이후의 교회의 장로들이 그대로 계승했으니, 가르치는 일은 주로 교회의 가르치는 장로인 목사, 지키도록 하는 일은 주로 교회의 치리하는 장로인 장로(혹은 치리장로)’가 전담하여 수행했다.

 

그리고 그러한 교회운용의 원리 가운데서 장로주의의 독특하고 성경적인 정체(政體)가 계속해서 계승됐던 것인데, 바로 이런 의미와 역사 가운데서 교회에는 항상 장로(치리장로)’만이 아니라 장로들(치리장로와 목사)’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장로교회의 정체는 결코 세속의 삼권분립(三權分立)과 같이 권력의 남용을 막기 위해 서로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장로교회의 정체는 각각의 고유한 직능(職能) 가운데서 세워지는 것이며, 각각으로 독립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말씀(성경의 진리)’ 가운데서 서로 유기적으로 결속하는 가운데서 세워지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장로교회의 직분들은 어느 한 직분만이 아니라 모든 직분들이 항존(恒存)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항존직(恒存職)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직분들을 하나로 결속하고 연합시킬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교회의 회원인 회중을 교회의 머리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도록 할 수 있는 것은 이미 언급한 말씀에 있으며, 말씀의 직분으로서의 목사를 장로교회에서 가장 존중하는 이유도 바로 그러한 말씀의 권위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로교회의 모든 직분은 말씀에서 출발하는 것이며, 바로 그러한 기반에서 집사는 말씀에 합당한 봉사와 구제에 힘을 기울이고, 치리장로 또한 말씀에 합당한 원리와 교훈 가운데서 치리(治理)하며, 무엇보다 목사야말로 오직 말씀의 진리를 공부하고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는 것이 장로교회의 일반적인 운용원리다.

 

그러나 현실에서 대부분의 장로교회들은 이러한 기초적인 원리조차 잘 모르고서 직분을 맡는 경우가 비일비재(非一非再)하며, 그러므로 장로가 되기 위해 집사직분을 맡으며, 장로임직은 집사직분을 거쳐 맡게 된 것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승진(昇進)과 같이 여길 뿐 아니라, 개척교회의 담임목사는 창업주요, 위임목사는 월급사장 쯤으로 여기는 통탄할 현실이 바로 100년이 조금 넘은 한국의 장로교회들의 모습이다.

 

한마디로 한국의 개신교, 그 가운데서 장로교회들조차도 사실은 경영권을 둘러싼 쟁탈과 암투가 난무하는 기업체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어쩌면 한국의 개신교, 그 가운데서도 장로교회들의 분탕질은 어쩌면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일지 모른다.

 

몇몇 대형교회들이 벌이는 무질서와 혼란들이 점점 중형교회들과 심지어는 소형교회들에서까지 심심찮게 벌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모든 혼란을 바로잡는 일은 어느 한 부분, 이를테면 어느 한 목사나 직분과 관련해서만 이뤄져서는 안 되며, 오히려 교회가 서고 무너지는 유일한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한 복음의 본질과 그가 가르치신 바를 모두 담고 있는 성경이 어떻게 교회의 모든 부분들과 요소들 가운데 본질로서 자리를 잡는 것인지에 대한 깊은 숙고(熟考)와 개선 가운데서 이뤄져야 마땅하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목사들은 자원하여 기도하는 일과 말씀을 연구하는 사역에 힘쓰며, 장로들은 어떻게 말씀의 원리와 바탕 가운데서 교회를 운영하고 치리할 것인지 배우고 힘써야 마땅한 것이다.

그러니 결국, 교회는 성전(Temple)의 모습이 아니라 회당(συναγωγή)이요 학교(schola)의 모습인 것이다.




http://cafe.daum.net/largoviva/WoXQ/14


728x90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