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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기독교가 회복할 것에 대하여….

장대선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9. 8. 11.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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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기독교가 회복할 것에 대하여….

장대선 목사

 

종교(宗敎)란 과연 무엇인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세계의 여러 종교와 또는 인간생활에 나타난 여러 가지 종교형태를 연구함으로써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있다.…그리고 세계 여러 나라에서 볼 수 있는 종교생활의 모든 형태들을 알기 위해서는 충분히 광범한 정의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따를만한 방법이 못된다. 그것은 세계의 현재의 종교생활을 통찰할 수는 있지만, 종교의 참 성격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결정짓지는 못한다.”

 

위의 짧은 문구는 루이스 벌콥이 그의 「조직신학」에서 종교학의 태도와 종교 자체의 성격에 대하여 구분하여 정의한 것인데, 벌콥의 그러한 언급은 기독교를 향하여 불신자들과 타 종교인들이 하는 말들 즉, “왜 다른 종교들은 상대성을 인정하고 다양한 종교의 방편들을 인정하는데 유독 기독교는 자신들만이 참된 진리를 알고 있다고 하면서 다른 종교의 주장들을 진리가 아니라고 하는가?”라는 물음들에 대해 가장 기본적인 판단의 근거를 제시하는 대답이라 할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그런 다원적이고 상대적인 접근으로는 종교의 본질을 결코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원성(多元成)’과 ‘상대성(相對性)’이라는 말 자체에서 파악할 수 있는 바, 관점에 따라서 상대적이고 다양한 것은 결코 절대적일 수 없는 것이고 절대적일 수 없다는 말은 그것이 완전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며, 그것이 완전하지 않다는 것은 그것이 절대적인 참이 아니므로 ‘진리’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런 상대적인 것은 과학이론의 가설(假說)만큼이나 잠정적인 하나의 이론과 지식체계일 뿐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위와 같은 물음을 기독교 내에서 심심찮게 듣게 되는 것이 오늘날의 엄연한 현실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는 내용이라면 교파와 신학을 불문하고 다 포용하고 아울러야만 그 가운데서 참다운 것이 산출될 수 있는 것이다.”라는 주장이 점점 더 큰 맥락(脈絡)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 - 본인이 생각하기에 이러한 입장은 무엇보다 신학교들 내에서 가장 현실화(現實化)되어 있다 - 이다. 참다운 진리란 광범위한 자료들 자체라는 말은 아닐 것이고, 그렇다면 그 말은 한 종교 안에서 다양한 주장들이 갖는 일장일단(一長一短)을 파악하여 그 결론을 찾겠다는 말일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주장들에 대하여서도 그 주장의 잘된 점과 잘못된 점을 파악하여서 잘된 점을 수용(收用)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관점(觀點)이 아주 합리적인 듯 보이지만, 사실은 그것이 아주 비현실적이라는 것을 알아야만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다양한 견해(見解)들에서 선별(選別)되는 결과가 합리적인 결과를 나을 수는 있어도 그것은 다시금 상대적인 것이 되어서, 그것은 또 다른 합리적인 사람에 의해 선별될 수 있는 다양한 견해 가운데 하나일 뿐으로 한정(限定)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태도와 입장이 현실 가운데 존립(存立)할 수 있기 위해서는 당연히 자신의 입장을 절대적으로 말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하나의 가설로서만 자신의 입지를 잡을 수 있을 것이고, 그러한 가설은 종교보다는 차라리 현대과학에 더 어울리는 인문학적인 ‘교양’으로서만 자리할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도 그러한 맥락들이 신학교들(장로교단의 신학교들에서도)에서 진지하고 긍정적으로 다루어지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 되었다면 개교회에서는 신앙 자체가 일종의 매너(Manner)와도 같이 되어버린 현실이니, 교회 내에서의 여러 가지 일상들이 그저 기독교적인 하나의 매너일 뿐이지 굳건하고 의지적인 신앙지식(교리)에 근거하는 삶의 방식은 아닌 것이 점차로 명백하게 현실화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 시대의 물결은 분명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뜨거운 감정 하나로 열정적인 찬양과 대통합(大通合)의 결속을 향하여 가고 있다. 오직 믿음으로, 우리의 행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진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말하는 자나, 불완전한 믿음만이 아니라 행함을 포함(包含)하고 있는 더욱 완전한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른다고 생각하는 자나, 믿음의 지식이 아니라 오히려 실질(實質)적인 행함을 통해서만 신앙을 만들 수 있고 그 신앙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주장해 오던 자나 다 한 가지 뜨거움, 한 열정만 있으면 되는 대통합의 물결 말이다. 그러한 시대에 교리나 교파(敎派)적인 입장이 진리인가 아닌가는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뜨거운 함성만 지를 수 있는 자들이라면 모두가 다 하나를 이룰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시대의 대세(大勢)는 성경의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마저도 ‘자유케 하는 것이 진리다!’로 바꾸어 버릴 판이다. 외형적인 연합과 일치를 추구하는 현대사조는 진리의 불변성을 버리거나 조금씩 자꾸자꾸 수정(修正)하지 않는 한은 결코 가시(可視)화 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한 종교는 오직 유일한 종교일 것이고, 역사 가운데 유일한 종교는 오직 참된 기독교라는 사실을 이 시대는 분명하게 깨달아야만 한다. 이 시대에 들어야 할 수 많은 구원의 지식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그리고 오직 유일하게 참된 진리의 복음만이 구원의 지식으로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중세시대의 종교개혁이란 바로 참된 기독교로의 회복이며, 그러한 종교개혁의 진정한 회복은 역사나 제도이기 이전에 바로 ‘기독교 교리’의 참된 회복이었다는 사실을 오늘의 기독교는 기억하여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처럼 회복된 교리의 표준으로서 여전히 자리하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교리문답을 교회들은 견고(堅固)히 세워가야 - 그것은 장로장립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며, 절차상만 필요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 한다.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뜨거운 열정으로 족한 것이 아니라,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신앙고백의 회복을 통해서 비로소 진정한 일치(一致)를 이룰 수 있음을 현대의 기독교는 여전히 기억하여야만 하는 것이다. 먼저 장로교단의 모든 신학교들에서, 그리고 모든 장로교회들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같은 참된 신앙고백이 확고한 표지(表紙)로서 자리할 때, 그리고 그러한 진리의 고백이 표지로서만이 아니라 공공연히 외쳐질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이 시대가 그렇게 추구하는 일치와 화합도 가능한 것이다. 그러한 변화야말로 현대 종교개혁의 근거요 시작이며 여전한 본질임을 생각하고, 이 시대의 공허한 요구들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대답할 지식있는 신앙으로의 회복이 있기를 소망하며, 그 모든 일들을 이루어 주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긍휼을 사모하며 구하도록 하자. 그 모든 일들을 어찌 사람의 능으로 이룰 수 있겠는가, 아무리 수고하여도, 아무리 힘을 다하여도, 그러한 일들의 이룸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이 희망이요, 그것이 소망인 것이다. 일을 이룸이 우리의 능(能)에 있지 아니하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여전한 소망이며 희망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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