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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 밟아야 할 믿음의 땅

장대선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9. 8. 11. 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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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 밟아야 할 믿음의 땅

 

장대선 목사 (방현교회)

 

 

 

  공중파 방송국의 뉴스에서부터 포털 사이트와 각종 언론 사이트에서 요 며칠 사이의 종교면 특종은 단연 땅 밟기 사건일 것입니다. 마치 교무실에 끌려온 문제 학생들과 같이, 그리고 그 학생들의 보호자와도 같이 그 단체의 대표자까지 죄다 무릎을 꿇고 앉아서 장삼을 입은 승려 앞에서 사죄하는 모습을 보면서, 선뜻 무어라고 말할 수 없는 답답한 마음이 들었던 것은 비단 저만이 아닐 테지요.

 

 

특별히 이를 보도하는 기독교 언론들에서는 하나같이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인지, 이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등의 입장을 밝히느라 바쁜 일과들을 보내고 계신 것 같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일이 기독교의 편협함을 보여주는 사례 가운데 일부일 뿐이라고 하시고, 또 어떤 분들은 이를 계기로 타종교에 대하여 이해하려는 자세를 가져야만 한다고도 하시고, 어떤 분들은 입이 무거운 가톨릭교회에서 배워야 할 점을 찾아내어 알리고자 하시는 것 같습니다만, 조금 아쉬운 것은 본의 아니게 자신이 속한 교파의 문제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강 건너 불구경 하듯 쉽게 비난조로 글을 올리는 분도 계신 것 같아서 답답함을 더합니다.

 

 

 

 

  사실 어떤 분의 말씀대로 이런 일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요. 특별히 선교단체 같은 곳에서 단기선교를 나가거나 전도여행을 떠나기 전에 하는 훈련 프로그램 가운데 빠지지 않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땅 밟기 훈련이 아닌가 생각 됩니다. 하나님 앞에 더욱 헌신된 자로 훈련을 받는 자라면 당연히 하나님의 군사로서 강하고 담대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면서 시행되는 그러한 프로그램에 대하여 대부분의 젊은 헌신자들은 적극적으로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훈련 프로그램이나 선교전략들은 대부분 북미 대륙에서 수입된 것들로써, 그 지역의 신학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프로그램들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최첨단의 유행(신앙 안에서 과연 유행이 성립할 수 있는 것인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지만)을 전파하고 있는 북미대륙의 신학이라는 것이 이제는 그들 스스로도 비판할 만큼 공허한 껍데기들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좀 심하게 표현하자면 유럽을 장악해버린 자유주의 신학이 북미대륙에서 가장 화려하게 꽃을 피웠는데, 이제 해 볼 만큼 다 해보고서야 점차 잃어버린 옛 신앙에 대한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북미의 상황이지요.

 

 

‘교회(church)’라는 단어 보다는 ‘공동체(community)’라는 단어를 더 선호하여 사용하는 내로라하는 북미의 개신교회들에서 전략적으로 만들어내는 각종 교육과 선교 프로그램들이 실시간으로 수입되고 있는 한국도 최근의 북미대륙의 추세와 같이 잃어버린 복음적 신앙의 온전한 내용들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기를 바라지만, 아직도 통관(通觀)을 기다리는 프로그램들이 많이 남아 있는지 현제로서는 변화의 기미가 미미하기만 합니다.

 

 

 

 

  서두가 길어져 잔소리가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만, 이처럼 최신의 것들을 선호하는 마당에 정작 우리들에게 익히 알려져 있는 상당수의 기독교 프로그램들은 구약시대의 것들이거나, 그것을 응용한 것이라는 점은 참 아이러니 한 상황입니다.

 

 

땅 밟기라는 것도 그렇고, 월삭 기도회, 맥추절을 기념하는 것이나 성막을 실제 크기로 재현하는 것 등 구약시대의 유대인들에게나 해당되던 것들이 아직도 개신교 내에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단적인 단체나 사이비 단체일수록 이처럼 구약적인 카테고리 안에서 갖가지 행사나 행동들을 강조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러한 것들 대부분이 이미 기독교 역사 가운데서 해 보았던 것들이거나 실험적으로 시도되었다가 도태된 것들인데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최신의 것이요 알려지지 않은 본질인 냥 확산되고 있습니다.

 

 

 

 

흔히 구약을 신약의 예표라고 하는데 구약시대의 절기들이나 풍속들 대부분이 그림자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골로새서 2:17절에서 언급하기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고 하여 그리스도를 예표(豫表)하는 것으로서 한시적으로 있었던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처럼 예수께서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셔서 그 예표한 바를 실체(몸)로서 나타내시고 이루셨으니, 이제 구약적인 카테고리 안에서 시행되는 모든 것들이 다 그림자와 같이 허황된 것일 뿐입니다.

 

 

아울러 구약시대에 주로 조건적(이를 행하는 것을 조건으로 그에 상응하게 시행되는 방식)이던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성취된 이후로는 다 선언적인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이후로는 우리들의 어떤 것도 조건적일 수 없고, 공로적일 수는 더더욱 없게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구약시대의 그 어떤 누구도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모든 조건들을 만족시키지 못하였습니다. 아담이 유일한 조건(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는 조건)에 대해 실패한 이후로 그 어떤 후손도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하였지만, 유일하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조건들의 본질을 만족시키신 것이지요. 그러므로 ‘중보’는 오직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신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 그처럼 구약적인 것(눈에 띄는 것)에 집착하는 것일까요?

 

 

한마디로 그것은 구약시대에 시행되던 것들 대부분이 조건적인 것(행함을 근거로 하는)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조건적인만큼 얼마든지 공로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택하심이 아니어도 눈에 보이게 행하는 모든 구약적인 조건들을 수행함으로써 구원에 가까이 갈 수 있는 맥락이기 때문인 것이지요. 이러한 점에서 가톨릭신학(공로사상)과 불교(수행, 공덕)철학이 만나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아담의 후손들(우리들을 포함한 모든 인류)은 끊임없이 무엇인가 행하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할 때에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를 수 있게 된 사실에 만족하며 그 안에 거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행위 안에서 그에 합당한 구원의 조건과 만족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리하여 기도도 골방에 들어가 조용하게 하기 보다는 사람들 앞에서 100일 혹은 1,000일씩 날짜를 정해놓고 하는 것이 더 만족스럽고, 그 100일 혹은 1,000일 또한 무엇인가 특별한 것을 곁들여야 마음이 놓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할 대상에 손을 얹거나, 아니면 그 땅을 밟는 행위 등을 통해 기도의 열심을 극대화하려는 심리가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들이 믿음에 따라 행하는 모든 것들은 조건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만큼, 그것을 조건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상응하는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지요. 이 땅에서 신앙에 열심을 내지 않으면 천국에 가서 개털모자나 쓰게 되고, 이 땅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 천국에 가서 금면류관을 쓰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누가 무어라고 하지 않아도 그 스스로가(사실은 은혜의 역사로) 자연스레 신앙에 합당한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인데, 비록 이 땅에서 어떤 결과를 보지 못한다고 해도 천국에서는 반드시 그 결과를 보게 되는 것이 상급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행위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지만, 구원에 이르는 자는 반드시 그에 합당하게 행동하기 마련인 것이지요.

 

 

그러나 기억할 것은 언제든지 우리 스스로 성화(聖化)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비록 사람의 눈으로는 우리가 열심을 내는 것으로 인해서 성숙해지는 것으로 보이지만 하나님의 선행(先行)하는 은총 가운데서 성령께서 이미 내적으로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서 우리들은 열심을 내어 선행(善行)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무엇을 행하기 전에, 어떻게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지를 신·구약 전체로서의 성경을 근거로 늘 생각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의 일상을 보면 생각하느라고 못하는 것보다는 생각하지 못하고 행하므로 빚어지는 문제가 훨씬 많은 것을 볼 수 있는데, 땅 밟기 사건은 후자에 속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들이 가장 먼저 밟아야 할 땅은 우리 발이 딛고 선 땅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스스로의 의욕과 열심을 더 선호하는 우리 속에 있는 땅, 아무리 밟아도 항상 죄악을 생각하고 행하는 우리 자신의 부패한 본성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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