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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론강설> 3주. 흙의 영광

최더함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20. 1. 23.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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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론강설> 3. 흙의 영광 2020. 1. 1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이름이 되었더라.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3:19~20a)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고전 6:15. 19~20)







인류 최고의 연구 대상




영국의 시인 중 알렉산더 포프(A. Pope, 1688~1744)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의 풍자시 <우인열전>과 철학시 <인간론>은 대표적인 영국 문학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에서 세상이 잊혀짐으로 인해 세상은 잊혀진다는 그의 명언이 재 거론되어 회자되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가 살아생전에 인류 최고의 연구 대상은 바로 사람이라고 해 주목을 받았습니다. 물론 그의 이런 생각이 성경적이라거나 특출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 사람의 시인이자 철학가가 자기 시대를 살면서 인간에 대해 이 정도까지 진지한 고찰을 했다는 그 자체를 의미 있는 일이라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포프가 아니라도 우리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신비로움에 대해 여전히 궁금해 합니다. 대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무엇 때문에 인간이 존재하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인간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인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크고 위대한 일은 무엇인가? 등등의 근원적이고 철학적인 고찰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찾은 대답은 단 하나입니다.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변을 구하고자 한다면 성경 안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적 계시를 떠나서는 인간의 차원에서 이 질문들에 답을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목사는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그 답을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것은 오직 단편적일 뿐이어서 항상 일그러뜨러진 그림만 그릴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동의한다면 모든 자연주의자들, 그가 철학자이든 과학자이든 인문학자이든 문학자이든 예술가이든 상관없이 인간에 대한 그들의 지식은 파편적이고 모순적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동물학자들은 사람은 본질상 동물이라 말합니다. 부분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지만 사람은 동물이 아닙니다. 칼 막스(K. Marx, 1818~1883) 같은 이는 사람의 본질은 그가 하는 노동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노동을 중심으로 노동을 생산하는 계층을 생산계급으로 부르고 노동을 통해 이익을 누리는 계층을 소위 부르조아라고 하는 착취계급이라 불러 결국 계급투쟁의 단초를 제공하였습니다. 또 실존주의자들은 사람의 독특성은 그가 가진 의지의 능력에 달려 있다고 말합니다. 오늘날 많은 과학 숭배주의자들은 사람은 그저 가장 정교한 컴퓨터라고 말합니다. ‘라인홀드 니버라는 신학자는 이 문제를 두고 매우 귀찮고 골치 아픈 문제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정말 인간의 문제가 그렇게 골치 아픈 문제입니까? 정말 사람이 무엇이며, 어떤 존재인지 알 길이 없습니까? 아닙니다. 매우 간단합니다. 성경을 읽으시면 해결됩니다. 성경에 그 답이 있습니다. 성경을 다 읽지 않아도 창세기 3장까지만 읽어도 알 수 있습니다. 그중에 오늘 소개한 본문들은 우리가 누구인가에 대한 가장 확실한 지식과 정보를 제공해 줍니다.





2. 2:7



먼저 이 구절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셨는데 무엇으로 지었느냐 하면 흙으로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을 흙의 영광이라고 붙였습니다. 사실 이 말은 보이스 목사님의 창세기 강해 책에 나옵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설교를 보이스 책의 내용을 중심으로 여러분에게 소개하면서 필요한 최소한의 신학적 입장을 덧붙일까 합니다. 둘째, 하나님이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 생령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논하고자 합니다.




첫째, 사람은 흙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우선 흙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이 구절은 간단한 진술이지만 매우 심오한 진술입니다. 만물의 영장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이 겨우 한 줌 흙이라는 재료로 만들어졌다는 이 진술은 어쩌면 가장 당혹스러운 진술일 것입니다. 가장 고귀한 존재가 가장 천하고 가치 없는 물질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여러분이 만약 매우 귀한 보물을 소지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보물이 가장 값이 나가지 않는 돌멩이 같은 재료라면 과연 그 보물이 보물로서 가치가 있다고 인정받겠습니까? 결코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인간을 흙으로 지었을까요? 이를 알려면 성경에 등장하는 흙의 이미지에 대해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1) 흙은 가장 낮거나 천한 태생과 같은 하찮은 가치의 상징입니다.


~ 아브라함이 소돔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할 때에 그는 자신을 가리켜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니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18:27~28)고 말했습니다. 한나는 아들을 달라는 간청을 들으신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신다“(삼상 2:8)고 노래했습니다.


2) 흙은 적으로부터 완전한 패배를 상징합니다.

~ 여호아하스 왕 시절에 아람 왕이 쳐들어 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절했는데 성경은 이것을 두고 타작마당의 티끌 같이 되게 하였다“(왕하 13:7)고 표현하였습니다.


3) 흙은 슬픔의 표현이었습니다.

~ 욥은 비참한 처지 속에서 인간의 하찮음을 깨닫고 슬퍼하며 무려 스무 번 이상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한다고 고백했습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42:5~6)

4) 흙은 좌절의 상징입니다.

~ 범죄 이후 하나님은 사탄에 대해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 것이라 저주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문자 그대로 흙을 먹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뱀의 입안에 있는 흙은 패배와 굴욕의 상징입니다. 그것은 아담과 하와를 미혹하여 죄를 범하도록 유도한 사탄의 악행에 대한 철저한 응징이며 사탄의 영원한 패배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눈앞에서 버젓이 악행을 행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영원토록 흙을 먹어야 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65:25)

~ 이로 인해 사탄은 하나님 앞에 영원한 좌절감을 가지고 희망 없는 세월을 보내야 합니다. 사람의 인생에도 가장 슬프고 절망적인 것은 희망이 사라졌을 때일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고문은 없습니다. 무엇보다 사탄이 한입 가득 가장 쓴 흙을 맛본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때였을 것입니다. 사탄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았을 때까지만 해도 그가 승리했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지 사흘 만에 사망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주님의 완전한 승리이면서 동시에 사탄의 결정적인 패배입니다.


(이 광경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준 신문의 만평이 2차 세계대전 당시 런던의 <STAR>지에 게재되었습니다. 당시 독일의 롬멜 전차사단은 승승장구했습니다. 드디어 이집트까지 집어삼키려 했는데 그때 러시아군대가 전쟁에 참여하자 독일은 북부지역의 방위가 급해졌습니다. 이때를 틈타 영국의 몽고메리 휘하 전차부대가 일순간에 이집트에 진출하여 독일군대를 물리쳤습니다. 이 장면을 두고 신문의 만평은 히틀러가 해골 더미 위에 발끝으로 서서 ‘VICTORY’라는 모양의 구름을 손가락으로 잡으려고 공중에 팔을 뻗치고 있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그 만평의 표제는 그것은 항상 아슬아슬하게 잡히지 않는다였습니다.)

~ 사탄의 신세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의 승리는 손에 잡힐 듯이 다가왔지만 결코 그는 승리의 옷자락을 손에 붙잡지 못했습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어긴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유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길이 아니면 계속해서 어긋나고 부딪치고 곤란한 환경이 발생합니다. 결국 고통의 길입니다. 이럴 때 빨리 깨닫는 것이 복입니다. 빨리 깨달아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요 유일한 살 수 있는 길입니다


 



5) 흙은 죽음의 상징입니다.

~ 아담은 범죄 이후 하나님으로부터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3:19)이라는 선고를 받았습니다. 이것은 죽음의 선고입니다. 욥도 자신의 죽음을 두고 흙에 누울 것”(7:21)이라 고백했습니다. 시편 기자는 흙을 두고 죽음의 진토라고 표현했습니다.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22:15)



이상에서 성경에서 흙이 뜻하는 바를 살펴보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흙의 이미지가 점점 점증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흙의 쓴맛에서 슬픔과 불행과 저주가 담겨 있습니다. 이 저주는 영원토록 이어진다는 점에서 절망과 좌절로 이어집니다. 사탄은 이 절망과 좌절을 극복하고 하나님을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키는데 그는 결국 패배하고 영원한 죽음을 선고받습니다. 사탄에게 선고된 죽음과 심판은 슬픔에서 출발하여 영원한 고통과 좌절로 발전되었습니다. 우리 인생에도 이 법칙이 그대로 적용됩니다. 실수하고 범죄 하지 않는 인간은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절대로 자신의 실수를 반복하거나 같은 죄를 반복해서 번하거나 더 큰 죄를 범하는 일에 가담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잘못과 판단 착오와 실수와 허물과 죄악을 깨달았을 때 즉시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고백하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흙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둘째, 흙의 존재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 구절은 가장 하찮은 존재를 가장 존귀한 존재로 승화시킨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한 줌 흙으로 만든 작품을 다이아몬드보다 더 값비싸고 귀한 작품으로 만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의도를 간파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창조를 통해 인간의 태생이 무엇인가를 기억하게 함으로써 교만의 자리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대표적인 청교도 성경 주석가인 메튜 헨리는 이것을 두고 하나님이 금이나 진주나 다이아몬드가 아닌 흙으로 사람을 지으신 것은 사람의 비천한 태생을 강조하신 것이라 해석했습니다. 만물의 영장으로서 만물의 지배권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존재이지만 그 본질은 흙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하나님의 의도가 숨은 것입니다.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지독하게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일하고 절약하여 드디어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에게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아들이 결혼할 짝을 데리고 와서 부모에게 선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부모는 며느리가 가난한 집안 출신이라 하면서 반대를 했습니다. 그때 아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엄마도 가난한 집안 출신이고 학교도 다니지 못한 무학이면서 반대만 하니 나는 이 집을 떠나겠다고 했다 합니다. 훗날 아들 며느리가 손주를 낳고 잘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간 부모는 아들 내외에게 자신들의 잘못을 크게 후회하고 뉘우쳤다고 합니다.




인간은 지난 과거를 잘 잊어버립니다. 특히 자수성가한 사람일수록 과거의 자신을 잊어버리고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을 오히려 더 핍박한다고 합니다. 자수성가한 사장님일수록 직원들의 임금을 더 짜게 줍니다(캡틴 신드롬). 자신이 직원으로 있을 땐 임금을 짜게 주는 사장을 그렇게 욕하고 비난했으면서 정작 자신은 그때를 잊어버리고 갑질을 하는 것입니다. 어느새 아들을 다 키워서 장가보내고 자신이 시어머니가 되자 자신의 며느리 시절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며느리를 더 핍박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얼마나 인간이 모순덩어리입니까? 이것을 두고 요즘 말로 내로남불이라 합니다. 지위에 따라, 입장에 따라 원칙이 바뀌고 말이 달라지는 것이 타락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우리 속담에 과부 심정 과부가 안다고 했는데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을 긍휼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나는 그렇게 억울하게 당했으나 너만은 행복하게 지내야 한다는 섬김과 헌신과 배려를 하는 아름다운 사람을 보는 것이 소원입니다. 개구리 올챙이 시절 잊으면 아니 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을 흙의 영광으로 한 것은 이런 하나님의 의도를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흙으로 지음을 받은 하찮은 존재가 만물의 영장이 되었습니까? 그 비결이 오늘 본문에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생기란 히브리어로 루아흐’(ראה)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숨을 뜻하고 구약 성경에서 ’(spirit)으로 사용된 단어입니다. 특히 루아흐라는 단어는 숨을 내쉬지 않고는 발음하기 어려운 단어입니다. 루아흐는 숨을 내쉬는 소리입니다. 우리가 이 단어의 뜻을 이해하면 창세기 12절 끝부분에 있는 하나님의 영(루아흐)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느니라는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숨을 내쉬자 물결이 일어나고 파도가 일어났다는 것을 상상해 보세요. 하나님이 숨을 내쉬자 바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흙에 불과한 인간에게 하나님이 숨을 불어넣으시자 인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드디어 인간이 생령’(네페쉬 하야, living being)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단어는 동물들에게도 사용됩니다. 그러나 사람이 동물과 다른 것은 동물들은 영원토록 자신에게 주어진 루아흐의 근원이 누구인지를 모르지만 인간은 이 생명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알도록 하나님이 인간에게 모든 능력과 기능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능력과 기능들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루아흐는 모든 움직임의 근거이며 모든 생명의 근원입니다. 이 우주 만물이 단 하나의 오차도 없이 질서정연하게 자리를 잡고 움직이고 기동하는 것은 하나님의 루아흐가 작동했기 때문입니다. 루아흐는 하나님의 엔진입니다. 이 엔진은 영원토록 멈추지 않습니다. 태양의 불꽃도 하나님의 루아흐에 의해 점화되고 영원히 타고 타도 소멸하지 않습니다. 이 비밀을 알게 된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있을 것입니다.




한편으로 이 단어는 라틴어로 스피리투스’(spiritus)로 파생되면서 열망하고, 협력하고, 땀을 흘리는 모습으로 발전했습니다. , 사람이 무엇을 열망할 때 숨을 크게 내쉽니다. 축구 시합을 할 때 같은 편끼리 머리를 맞대고 숨을 들이쉬고 내쉽니다. 선수들은 이때 마음속으로 협력과 단결을 생각하며 승리를 꿈꿉니다. 기절을 한 사람에게 숨을 불어넣으면 그 사람에게 숨이 돌아옵니다. 우리가 숨을 거둘 때 마지막으로 숨을 크게 내뱉습니다. 그러므로 루아흐은 곧 생명이요 활력이요 열망이요 협력이요 희망의 징조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에 해당하는 단어는 프뉴마’(πνευμα)입니다. 이 단어 역시 숨을 쉰다생동감이 있다살아 있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바울 사도는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8:6)고 했습니다. 이때 영은 프뉴마입니다. 이 죽었던 인간의 영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다시 소생하게 된 것입니다.




3. 결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인간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특혜를 받고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죄를 범하여 영원토록 죄 가운데서 태어나도록 되었습니다. 이 죄를 원죄’(original sin)라 부릅니다. 그 누구도 이 원죄를 피해 태어날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영원한 사망선고를 받고 불행한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아담은 평생토록 땅의 엉겅퀴와 씨름하며 저주받은 땅이 내는 소산물을 자력으로 일구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 상태를 땀을 흘리며 살아야 한다는 말로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이 저주받은 인간에게 희망은 없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이 대책 없는 상황을 끝내기까지는 적어도 희망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이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시어 우리가 치러야 할 죗값을 죽음으로 치루시고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아무런 자유가 없던 죄의 노예를 죽음 값으로 사시고 그 노예에게 완전한 자유를 선사하신 것입니다.





오늘은 두 가지 교훈만 기억합시다




첫째, 인간은 흙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맙시다. 이 사실을 통해 우리의 원래 처지가 어떠한 것인가를 늘 생각하며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는 바람 앞의 등잔불같이 연약하고 위기에 처한 존재였습니다. 전에 우리가 어떤 처지였는가를 기억합시다. 전에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들이었습니다(2:1). 그때에 우리는 죄 가운데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 권세 잡은 자를 추종했으며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2:2~3). 그런데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어 우리는 가장 영광스러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최고의 권세까지 부여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땅을 다스리라”(1:28)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아담은 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만물을 다스리기 위해 그들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이름이 주어진 것은 누군가 나를 부르기 위함입니다. 부르면 대답하기 위함입니다. 아무도 자기 이름을 자신한테 부르며 달려가지 않습니다. 이것보다 더 큰 권세는 없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권세를 부여받았습니다.




둘째, 오늘 말씀을 통해 진짜 무엇이 악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신분과 처지와 위치와 지위를 망각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권리를 남용하거나 태만하여 자신의 책무를 다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모든 좋은 은혜와 권세와 능력을 다 부여받았음에도 인간은 불행히도 자신의 권세를 남용했습니다. 요즘 말로 직권남용죄를 범했습니다. 이 죄가 얼마나 큰 죄이고 중죄인지 아담에게 내린 벌을 통해 우리는 짐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마어마한 죄인임을 기억하고 살아야 합니다. 나아가 악이란 잘못인 줄 알면서 그것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거짓말을 싫어하십니까? 그것은 진실의 빛을 가리는 어둠이기 때문임과 동시에 인간은 본능적으로 거짓말은 나쁜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짓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입니다. 그것을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고전 6:15. 19~20)



할렐루야, 이 존귀와 영광은 오직 하나님만 받으셔야 합니다. 우리 같이 하찮은 존재를 이렇게 귀하게 대우하시고 영원토록 보장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에 그저 눈물만 흐를 뿐입니다. 이 감사와 기쁨과 순종의 믿음으로 남은 평생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진심으로 소원합니다. 영원토록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며 살아가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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