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목사 사용 설명서’라는 제목의 글이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충북 영동에 있는 한 시골교회에서 목회하던 김선주 목사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입니다. (지금은 대전에 있는 ‘길위의교회’를 담임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는 주일예배 시간에 교인들에게 전단지를 한 장씩 나눠주며 전화기 옆에 붙여놓으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럴 때는 전화하세요’하는 제목이 붙은 전단지였습니다. 본래 의도한 제목은 ‘목사 사용 설명서’이었지만, 본래 의도대로 제목을 붙이면 교인들이 거부감을 느낄 것 같아 순화시킨 것이라고 합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1. 보일러가 고장 나면 전화합니다.
2. 텔레비전이 안 나오면 전화합니다.
3. 냉장고, 전기가 고장 나면 전화합니다.
4. 휴대폰이나 집전화가 안 되면 전화합니다.
5. 무거운 것을 들거나 힘쓸 일이 있으면 전화합니다.
6. 농번기에 일손을 못 구할 때 전화합니다.
7. 마음이 슬프거나 괴로울 때 도움을 요청합니다.
8. 몸이 아프면 이것저것 생각 말고 바로 전화합니다.
9. 갑자기 병원에 갈 일이 생겼을 때 전화합니다.
10. 경로당에서 고스톱 칠 때 짝 안 맞으면 전화합니다.
그는 교인들에게 전단지를 나눠준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몇 명 안 되는 노인들이 전부인 시골교회에서 목회를 하다 보니 내 진심을 가로막는 일들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것은 목회자에 대한 교인들의 지나친 분리의식이었다. 목사는 기도만 하고 말씀만 연구하며 교인들의 현실적인 삶의 문제에서 분리된 영역에 존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오래된 신앙 관념들이 목회자를 삶의 현장으로 들어가 사람을 섬기는 일을 방해한다.” 그리고 그는 이런 말로 글을 마무리합니다. “내가 교인들에게 자유를 주듯이 그들도 나에게 자유를 주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당신들의 삶의 현장으로 나를 깊이 초대해 주었으면 좋겠다. 목사는 불상처럼 모셔두는 게 아니라 필요에 따라 써먹어야 하는 존재라는 걸 말하고 싶었다.”
결국 그가 주일예배 시간에 교인들에게 ‘이럴 때는 전화하세요’라는 제목이 붙은 전단지를 나눠준 이유는, 교인들이 삶의 현장으로 자신을 초대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다시 말을 하면, 그가 시골교회 목사로서 자신의 ‘쓰임’과 ‘필요’를 찾는 과정에서 나온 결과물이라고 하겠습니다.
돌아보면, 시골교회는 보통 마지못해 가는 곳입니다. 젊은이들은 떠나고 노인들만 남아 있습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양적인 부흥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시골교회의 현실입니다. 그런 곳에서 희망을 찾기란 힘이 듭니다. 수고한 만큼 열매가 있으면 고됨도 견딜 텐데, 농촌목회라는 것이 그런 게 아닙니다. 젊은이들이 떠난 자리, 그곳에 남은 노인들을 대상으로 목회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목사의 주된 일은 연로하신 어르신들을 천국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교회당은 날로 비어 갑니다. 다 보내고 나면... 목사의 역할은 끝납니다. 그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내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적절한 것인가... 회의하게 됩니다. 그래서 되도록 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가더라도 군 생활하듯이 몇 년 보내고 오겠다는 심산으로 갑니다. 또 어떤 이는 유배 가는 심정으로 갑니다.
그런 속에서 그는 목회를 하며, 아니 목회를 감당하며 나름으로 농촌 목회의 필요와 이유를 찾은 것입니다. 나는 왜 이곳에 있는가, 존재 의미를 찾지 못할 때에 어르신들과 함께 지내면서 그 이유와 필요를 찾아낸 것입니다. 다른 것은 못하더라도... 보일러 고장 나면 고쳐주고... 고스톱 광 팔 사람 필요할 때에 그 자리를 채워주고... 그렇게 그는 그곳에 머물러 있는 자신의 의미를 찾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문득 ‘목사 사용 설명서’라는 글을 떠올리며 제 자신을 돌아봅니다. 2012년 가을 어느 날, 서울에서 떠밀리듯 부산으로 내려왔습니다. 내려올 때에 참 많이 고민하고 갈등했습니다. 가서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여러 교회에서 장애인부서를 만들어 장애인들을 섬기고 있는데, 복지가 향상되어 사회가 그것을 잘 감당하고 있는데, 장애인선교단체의 존재의미는 무엇인가... 그 필요는 무엇인가... 그 필요가 다한 것은 아닌가... 굳이 이 시대에 장애인선교단체가 있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을 두고 고민했습니다.
그런 고민을 안고 떠밀리듯 내려와 장애인들을 만나고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면서 찾아낸 것이 있습니다. 바로 장애인 곁에서 그들과 먹고 노는 것... 그 속에서 삶을 나누는 것... 삶으로 복음을 녹여 내는 것... 작고 미미하지만... 잘 보이지 않지만... 그래서 많은 사람 외면하지만... 그것이 참 중요하다는 사실을 장애인들을 만나고 그들이 살아가는 현실을 보며 느끼고 깨닫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주어진 일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어떤 때에는 힘에 부치기도 하고, 회의가 일어나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자리에서 힘을 다해 일을 감당하려고 합니다. 그것으로 인하여 장애인 안에 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들을 계속 만나며 관계의 끈을 놓지 않고 그들과 함께 하나님나라를 이뤄가고 싶습니다. 함께함. 그 의미를 되새기면서 말입니다. 제 걸음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기만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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