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 예배: 청교도로부터 배우기 (1)
조엘 비키
(Joel R. Beeke)
(미국 PRTS 총장, 조직신학 및 설교학 교수)
번역: 김재한
신앙을 떠나고 있는 아이들의 숫자는 오늘날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큰 문제다. 그들은 많은 복음의 특권들을 가지고 자라나지만, 결코 그리스도를 스스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그들은 교회에 정기적으로 출석하지만, 결코 그리스도의 몸의 살아있는 지체가 되지는 않는다. 그들은 세례를 받을 때 세상으로부터 멀어지지만, 이 세상에 대한 사랑은 결코 그들의 마음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그들은 부모의 신앙을 저버리고 자기 갈 길로 간다. 이것은 크나큰 비극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 자기반성을 요구한다. 왜 그렇게 많은 우리 젊은이들이 자라서 기독교를 버리게 되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복잡하고 다면적이다. 심지어 완벽한 자녀 양육도 우리 자녀들의 구원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하나님은 그분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심에 있어서 자유로우시다. 그러나 그분은 신자의 자녀가 구원받는 것을 기뻐하시고, 또 그렇게 되도록 수단들을 활용하신다. 이러한 위대한 수단들 중 하나가 바로 가정 예배이다.
내가 볼 때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위기의 주된 원인은 가정 예배를 충분히 강조하기 않기 때문이다. 많은 교회와 가정에서 가정 예배는 그저 하나의 선택사항일 뿐이다. 종종 그것은 식사 전에 하는 간략한 식사 기도처럼 피상적인 관습일 뿐이다. 심지어 그것을 가치 있게 여겨야 할 가정에서조차 정기적으로 무시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결과 많은 아이들이 기독교 예배를 매일 경험하는 실재로 여기지 못하고 자라난다.
나의 부모님이 결혼 50주년을 맞이했을 때, 우리 다섯 자녀들은 부모님께 우리가 얼마나 부모님으로 인해 감사했는지를 표현하기로 했다. 우리는 이에 대해 서로 의논한 적도 없었는데, 놀랍게도 우리 모두 어머니가 해 오신 기도에 대해 감사했다. 그리고 우리 모두 아버지가 주일 저녁마다 가정 예배를 이끄신 것에 대해서 감사했다. 내 동생은 이렇게 말했다. “아빠, 내가 가진 가장 오래된 기억은 아빠가 천로역정을 가지고 어떻게 성령님이 신자를 인도하시는지를 가르쳐주시면서 눈물을 폭포수처럼 흘린 거에요. 세 살 때 하나님은 가정 예배에서 아빠를 사용하셔서 나에게 하나님이 정말로 계신다는 사실을 확신시켜 주셨어요. 나중에 내가 아주 많이 방황했을 때도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사실만큼은 의심해 본 적이 없어요.”
우리는 우리 자녀들에게 부흥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을까? 하나님은 종종 가정 예배의 회복을 사용하셔서 교회의 부흥으로 인도하신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 자녀들의 마음을 변화시키기 위해 가정 예배를 즐겨 사용하신다. 1677년 매사추세츠 주 돌체스터의 청교도 회중 교회 회원들은 “가정 예배를 시작하고 이를 유지하는 일을 성실하게 돌봄으로써, 그리고 가정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의무들 - 아이들을 교육하고 훈계하는 일, 아이들과 가족 구성원들이 주의 길을 지키도록 하는 일 - 을 신실하게 이행하겠다고 굳게 결심하고 가정에서 행동함으로써, 교회를 개혁할 것을” 약속하는 언약 문서에 서명했다.
그 청교도들은 가정 예배를 위해 싸운 투사들이었는데, 교회사에서 극소수만이 그들처럼 했다. 이 중요한 실천에 대해서 오늘날 우리가 그들에게서 배울 것이 정말로 많이 있다. 그들은 가정이 바로 서야 교회가 바로 서고, 또 나라가 바로 선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가정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을 매우 강조했다. 이 글에서 나는 청교도 가정 예배가 어떤 전제들을 가지고 있었고, 또 어떻게 실천되었으며, 그리고 어떤 목표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검토하려고 한다.
청교도 가정 예배의 전제들
먼저, 청교도 가정 예배의 전제들이다. 그들의 실천은 여러 신념들에 의해 지지가 되고 있다. 만약 우리가 가정 예배에 있어서 그들의 실천을 따르려면, 우리는 먼저 이 근본적인 진리들에 합의해야 한다.
(1) 가정에 대한 관점
중세 로마 가톨릭주의와는 반대로 청교도들은 결혼과 가정을 높이 평가했다. 그들은 결혼으로 이루는 연합과 그 연합의 결과로서의 주어지는 아이들을 하나님이 주시는 선한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종교 개혁 시대에는 결혼과 가정에 대해 써진 글이 거의 없다. 그러나 청교도들은 가정에 대한 성경적 관점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데 많은 잉크를 쏟아 부었다. 매우 긴 수십 편의 논문이 써졌고, 그보다 많은 설교가 이 주제에 대해 행해졌다. 이는 가정 예배의 중요성에 대한 엄청난 강조를 보여준다.
청교도들은 가정이 ‘작은 교회’여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지역 교회의 회원이 되는 일의 필요성을 부정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가정은 주일에 모이는 보다 큰 몸의 축소판이어야 한다. 리차드 그린햄(Richard Greenham)은 “만약 우리가 우리 가운데에 계속되는 하나님의 교회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가정으로 가져와서 더 풍성하게 키워내야 한다”고 말했다.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는 “오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그들의 가정을 작은 교회와 같이 만들어주시기를” 기도했다. 한 가정에서 아버지는 그에게 돌보라고 맡겨진 양떼들을 목양해야 했다. 존 게리(John Geree)는 <한 늙은 영국 청교도의 특징 Character of an Old English Puritan>이라는 소책자에서 그 청교도 아버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그의 가족을 하나의 교회로 만들려고 애썼다.” 여러분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아버지들이여, 여러분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고무시키는 것이 가정에서 여러분이 해야 하는 가장 우선되는 의무라고 생각하는가? 여러분은 여러분의 아내와 아이들을 목양하려고 하고 있는가? 여러분은 여러분 가정의 모든 식구들이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일보다 못한 일에 만족하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는 가정은 작은 교회라는 청교도들의 비전을 붙잡을 필요가 있다. 아이작 암브로스(Issac Ambrose)에 따르면, 부모들은 “그들의 가정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왕국을 세우고 설립할” 임무가 있다. 이러한 임무에 대한 무지가 널리 퍼져 있기 때문에, 우리 아이들이 교회에서 기독교를 버리는 일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2) 자녀 양육에 대한 관점
청교도들에게 자녀 양육의 주된 목표는 자녀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에베소서 6장 4절은 아버지들이 자녀를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할 것을 말하고 있다. 잠언 22장 6절은 부모들이 자녀들을 마땅히 행할 길, 즉 주의 길을 가르칠 것을 지시한다. 하나님은 믿는 부모들이 자녀들을 그분을 위해 기를 것을 명하신다. 윌리엄 가우지(William Gouge)는 신자들에게 자녀를 가질 것을 권면했는데 그 이유는 그로 인해 “세상이 확장되기를 … 그리고 참으로 세상 안에 있는 교회가 거룩한 씨[믿는 자녀들]로 인해 보존되고 전파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신자들은 이러한 목표를 하나님께서 그들과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과 맺으신 언약 속에서 볼 수 있다(창 17:7; 행 2:39). 우리 자녀들이 거룩하여 주님께로 구별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고전 7:14).
따라서 우리 자녀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하나님은 자녀들을 그분을 위해 기르도록 우리에게 위탁하셨다. 그분은 우리 자녀들에 대해 특별한 요구를 하신다. 그분은 우리 자녀들에게 하나님에 대해 가르치고,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고, 그들이 하나님을 믿도록 할, 그래서 하나님을 그들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도록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고 주장하신다. 이런 일들이 우리에게 달려있는 한, 우리는 자녀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이방인이 되지 않도록 그들을 양육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녀들이 참된 종교[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참되신 하나님을 예배할 것을 요구해야 한다. 코튼 매더(Cotton Mather)는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한다: “모든 것 이전에, 무엇보다도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은 바로 이 기독교를 아는 지식이다. … 다른 것에 대한 지식은 비록 그들이 그렇게 사모할만한 성취를 이루지 못할지라도 영원한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 …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있는 이 경건한 가르침에 대한 지식은 그들에게 수백만 배나 더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그분을 예배하는 씨[믿음의 자녀], 언약 안에서 길러진 씨, 그분을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구원을 위해 그분을 의지하도록 양육된 씨를 찾고 계신다. 그리고 그분은 여전히 부모들이 자녀들을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고, 섬기는 이로 자라나도록 훈련할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신다.
청교도들은 가정 예배가 바로 이런 자녀 양육의 가장 강력한 수단이라고 믿었다. 우리는 우리 가정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더욱 풍성하도록 해서 우리 아이들에게, 매튜 헨리(Matthew Henry)가 그러했듯이,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아들아, 우리는 너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 우리는 너의 영혼을 위해 씨름했다. 우리는 네 앞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본을 보이며 살았다. 너는 우리 안에서 죄 없는 경건은 아니지만 꾸밈없는 신앙을 보았다. 너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가장 먼저 추구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너의 양심이 그리스도가 우리 가정의 중심이심을 증언할 것이다. 우리는 함께 찬양했고, 함께 기도했고, 함께 이야기했다. 만약 네가 이 빛과 이런 특권들에서 돌아선다면, 그리고 너 자신의 길을 가겠노라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오직 이렇게 기도할 뿐이다: 네가 한 이 모든 성경 공부와 기도, 그리고 찬양이 심판의 날에 너를 대적해서 일어나지 않기를, 그리고 너무 늦기 전에 제자리로 돌아오기를.”
(3)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에 대한 관점
청교도들은 예배의 단순성과 영적인 특징을 믿었다. 그들은 제도화된 교회의 외형주의로부터 멀어지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는 그들이 교회 건물을 보고 교회라고 부르기 보다는 ‘만남의 집(meeting-house)’라고 불렀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하나님은 자신을 어떤 특정한 건물에 매어놓지 않으셨고, 언제나 어디서나 예배 받으실 수 있게 하셨다. 따라서 그분은 매일의 일상이 벌어나는 그리스도인들의 평범한 가정에서도 예배 받으실 수 있으시다. 청교도들이 공적 예배를 높이 평가한 것은 맞지만, 그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주일과 같은 특정한 날의 모임에만 국한시키지 않았다.
청교도들은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어떻게 예배 받기 원하시는지를 알려주셨다고 가르쳤다.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명백하게 명하신 대로만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 이는 종종 규범적 원리라고 일컬어 진다.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는 “참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올바른 방법은 그분 자신에 의해 제정되고, 그분 자신의 계시된 뜻에 의해 제한된다. …” 이 원리는 우선적으로 공적 예배에 적용되었지만, 청교도들의 가정 예배의 기초가 되기도 했다. 각 가정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하나님을 예배해야 했다. 성경은 어떤 것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알려줄 뿐 아니라, 가정 안에서 이루어지는 경건한 이들의 삶의 모든 측면에 스며들어 있었다.
청교도들의 삶의 모든 초점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한 아버지가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그가 가정 예배를 인도하는 밑거름이 된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이러한 가정 예배의 인도는 또한 그의 가족이 공적 예배를 참석할 때 밑거름이 되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풍성한 신앙적 교제를 나누고 있는 아버지들은 가족들을 경건으로 이끌 때도 풍성한 열매를 맺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드리는 가정 예배가 냉랭하고 침체되어 있다면, 이는 종종 우리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지표일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로서 우리는 하나님과 친밀하고 마음을 담은 교제를 하고 있는가? 우리는 매일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있는가? 그분의 말씀은 우리 안에서 풍성히 거하고 있는가? 우리가 우리 가정을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로 신실하게 인도하길 원하다면, 이러한 아름다운 영혼의 상태가 먼저 잘 가꾸어져야 한다.
(4) 가정 예배의 필요성에 대한 믿음
청교도들에게 가정 예배는 선택 사항이 아니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에서 가정 예배에 대한 항목을 찾아보면, 그것은 ‘필수적인 의무’라고 되어 있다. 이와 같이 모든 그리스도인 아버지들은 그의 가족들을 날마다 예배로 인도해야 한다. 그 항목은 또한 장로들에게 자기 양떼들이 이러한 것을 실천하는데 소홀하진 않은지 시험할 것을 명하고 있다. 그리고 소홀함이 발견되면 이를 책망해야 한다. 그러나 만약 그 아버지가 회개하지 않는다면, 더 높은 차원의 교회의 징계가 주어져야 한다.
이러한 설명들은 오늘날 우리에게 충격적으로 들린다. 가정 예배를 소홀히 한 것에 대해 교회가 징계를 내려야 하는가? 청교도들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는 그 정도로 심각한 주제이다. 가정 예배를 소홀히 하는 것은 아버지나 어머니가 자기 가족을 하나님의 길로 이끄는데 실패한 것과 다름이 없다. 우리는 가정 예배에 대한 이런 타협 없는 견해를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
매일 드리는 가정 예배는 청교도 가정에선 의무요 특권이었다. 가족을 예배로 인도하지 못하는 것은 아버지됨의 실패였다. 그들은 어떤 아버지도 가정 예배를 무시할 수 없고, 선한 양심을 지켜야 한다고 믿었다. 윌리엄 왓틀리(William Whately)는 가정 예배를 인도하지 않는 아버지는 “마귀의 집, 사단의 온상, 지옥의 놀이터요 죽음의 왕국을 지키고 있다”고까지 말했다. 하나님의 영광, 우리 가정, 그리고 교회 사랑한다면 가정 예배를 드려야 한다.
어쩌면 여러분은 한 번도 가정 예배를 드려본 적이 없을 수도 있다. 나는 여러분에게 오늘 한 번 시작해보라고 도전하고 싶다. 결코 늦지 않았다. 여러분의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고, 여호수아처럼 여러분과 여러분의 집은 여호와를 예배하겠노라고 결심하라. 더이상 이렇게 가장 필수적인 의무를 소홀히 하지 않을 은혜를 간구하라.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이러한 도전에 응답해야 할 책임이 있다. 사무엘상 2장 30절은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고 말한다. 여러분은 진지하게 여러분의 가족과 영원히 함께 하길 원하는가? 청교도들은 우리에게 가정 예배의 필요성과 긴급성을 이렇게 강조하고 있다.
reformedjr.com/board05_02/10562
루터의 결혼생활과 종교개혁의 ‘솔라’ (0) | 2020.08.19 |
---|---|
가정 예배: 청교도로부터 배우기(2) (0) | 2020.08.04 |
부부의 신앙 갈등 (0) | 2020.07.21 |
도대체 결혼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0) | 2020.06.30 |
무엇이 그리스도인 부부를 흔드는가? (0) | 2020.06.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