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의 결혼생활과 종교개혁의 ‘솔라’
우병훈 교수
(고신대 신학과)
종교개혁의 다섯 가지 ‘솔라’(오직)와 결혼
종교개혁은 교회의 개혁이었지만, 가정과 사회의 모습을 크게 바꾸는 데 기여했다. 종교개혁자들의 결혼과 가정의 모습을 오늘날 우리들의 삶에 직접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500년 이상의 시간적 격차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결혼과 가정에 대해 남긴 글들은 시간을 초월해서 많은 가르침을 준다. 그들은 가정에 대해서 “솔라 스크립투라”(오직 성경), “솔라 피데”(오직 믿음), “솔라 그라티아”(오직 은혜), “솔루스 크리스투스”(오직 그리스도), “솔리 데오 글로리아”(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의 원리에 따라서 가정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루터의 결혼생활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오직 성경’과 결혼
첫째로, 종교개혁자들은 결혼에 대해서도 “솔라 스크립투라” 즉 오직 성경의 원리에 따라서 생각하였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오랫동안 “성직자”들이 결혼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런데 종교개혁기부터 개신교회의 목사들은 결혼을 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수녀들도 마찬가지였다. 개신교에서 가르치는 진리의 내용에 동의했던 수녀들은 자신의 서원을 깨뜨리고 수녀원을 나왔고 그들 중에 결혼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림: 루터의 결혼>
당시에 성직자들의 결혼은 오직 성경의 원리를 실천하기 위한 믿음의 결단이었다. 중세에는 여성, 결혼, 성(性)이 그 자체로 저급하고 열등하고 심지어 악한 것으로 생각되곤 했다. 성이 부정적으로 여겨지는 상황에서 여성과 결혼 역시 부정적으로 생각되었던 것이다.1) 그래서 성직자들은 결혼해서는 안 되었다. 하지만 그런 잘못된 관습은 오히려 성직자들의 성적 타락을 부추기곤 했다.
이러한 중세적 배경에서 종교개혁자들은 결혼을 개혁했다. 히브리서 13장 4절에서는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라고 가르친다. 결혼은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귀하게 여겨야 할 것이다. 칼빈은 이 구절을 주석하면서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결혼은 기독교적 온전함과는 거리가 멀다는 착각을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칼빈은 사탄이 결혼에 대해 악한 씨앗을 뿌려놓았는데, 그것은 결혼은 세속적이며 저속하다는 잘못된 생각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칼빈에 따르면, 결혼이란 하나님께서 거룩하다고 인정하신 남녀의 유일한 성적 결합의 자리이며, 온갖 음행과 간음을 막는 가장 좋은 길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모든 사람’에게 결혼은 ‘귀한 것’이라고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오직 믿음’과 결혼
둘째로, 종교개혁자들은 결혼에 대해서 “솔라 피데” 즉, 오직 믿음의 원리를 생각했다.
중세의 로마 가톨릭은 신자의 삶을 공로주의적 원리에 따라 보는 경향이 강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선행을 많이 쌓으면 그에 근거하여 구원이 확정된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당시에는 꼭 성직자가 아니라 할지라도 독신 서약을 하는 이들이 많았다. 당시에 독신 서약은 그 자체로 큰 선행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교개혁자들은 구원에 대한 관점을 근원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들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근거하여 의롭게 된다는 성경적 가르침을 회복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호의를 얻기 위해서 선행을 행할 수 있다는 생각을 배제했다.
이제 독신 서약은 더 이상 기독교적 미덕이 아니었다. 오히려 결혼이란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제도이자 아름다운 선물이었다.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의 결혼을 직접 주선(?)하셨으며, 그들의 결혼에 복을 주셨다. 결혼은 성적 부도덕에 대한 처방이고 자녀 생산의 수단이 될 뿐 아니라, 무엇보다 신앙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방편 중에 하나였다.2) 결혼하여 부모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소명” 가운데 아주 근본적인 부분이었다. 이처럼 종교개혁자들에게 가족생활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중요한 자리가 되었다.3)
‘오직 은혜’와 결혼
셋째로, 종교개혁자들은 결혼생활을 “솔라 그라티아” 즉, 오직 은혜의 원리로 바라보길 원했다.
루터는 이전에 수녀였던 카타리나 폰 보라(Katharina von Bora)와 결혼한다. 당시에 그는 41세였고, 카타리나는 26세였다.4) 결혼식은 1525년 6월 13일에 치러졌다. 루터의 결혼식은 간소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루터의 결혼에 대해 오해했다.
로마 가톨릭측 사람들은 루터가 육적인 사랑에 굴복했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결혼하고 싶어서 이상한 교리를 전파하여 교회를 분열시켰다는 누명까지 씌우기도 했다. 루터의 가까운 친구들까지도 오해했는데, 당시는 독일에 큰 상처를 남겼던 농민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은 시점이었기 때문이다.5) 자신보다 16살이나 어린 카타리나와의 결혼에 대해, 종교개혁의 붕괴라고 보는 이들도 있을 정도였다. 루터의 가장 가까운 동료 멜란히톤도 상처를 받았지만 결혼식이 이뤄진 다음에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러나 루터 자신은 이 결혼을 감사히 생각했고, 결혼생활을 즐거워했다.6) 루터는 자신의 혼인을 혼돈의 시대 한가운데서 벌어진 확신 있는 믿음의 행위로 이해했다.7)
루터는 솔직한 사람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카타리나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카타리나와의 결혼이 너무나 큰 하나님의 선물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녀는 루터의 평생에 위대한 조력자이자 동반자이자 친구가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비텐베르크에 있는 카타리나의 동상: 그녀가 끼고 있는 결혼반지를 만지면 행복한 결혼생활을 한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사람들이 많이 만진 탓에 그 부분이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다>
루터의 결혼 생활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였다. 루터의 집에는 아내와 6명의 아이들 뿐 아니라 카타리나의 친척 한명도 같이 살았다. 1529년 이후부터는 루터의 누이들의 아이들 6명도 함께 지냈다. 일종의 입양을 한 셈이다. 루터는 종종 자기 학생들을 불러서 같이 지냈다. 수많은 종교개혁자들이 루터를 찾아와서 도움을 요청했다. 루터는 학생들과 피난민들에게 돈을 받지 않았다. 카타리나는 그들을 다 대접해야 했다. 한 끼 식사에 25명 이상이 식사하는 것은 보통이었다.8)
루터의 가정은 경제적으로 매우 힘들 수밖에 없었다. 참다 못한 카타리나가 하숙하는 학생들에게 돈을 받자고 하자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사랑하는 카타리나여! 만일 우리에게 돈이 더 이상 없다면, 그대가 은잔을 팔아야 할 것입니다. 결국 무언가 얻으려면 무언가 먼저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 무엇인가를 채워주실 것이며 그렇게 우리를 돌보실 것입니다.”9) 그들의 삶이 점점 더 어려워져서 결혼 2년 만에 상당한 빚을 지게 되었다.10) 루터는 가계부를 작성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가계부 때문에 항상 슬픔에 빠지기 때문이다.11)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굶기지 않으셨다. 때에 맞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셨다. 루터는 가정생활 속에서 매일 “오직 은혜”의 원리를 체험했다.
‘오직 그리스도’와 결혼
넷째로, 종교개혁자들은 결혼과 가정에 대해서 “솔루스 크리스투스” 즉, 오직 그리스도의 원리를 적용하고자 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운데 모시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이것은 가정에 주신 신약 성경적 가르침의 핵심이다. 교회가 그리스도께 하듯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고,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자신을 주셨듯이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엡 5:24-25). 자녀들은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며, 부모들은 주의 교훈과 훈계로 자녀들을 양육해야 한다(엡 6:1, 4). 종들은 그리스도께 하듯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고, 상전들은 하늘 상전이신 주님을 기억하면서 종들에게 선을 행해야 한다(엡 6:5, 9).
카타리나는 루터를 도와 매우 헌신적으로 봉사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루터는 살림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그래서 카타리나가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그녀는 집안의 재정을 다 관리했다. 농장을 일구었고, 농작물을 재배해서 판매했다. 정원의 샘물을 팠고, 꽃나무들을 관리했다. 외양간을 만들고 청소했으며, 계속해서 집을 수리하고 새로운 방들을 만들어야 했다. 그녀는 늘 수많은 집안일과 자녀양육과 관련한 일로 바빴다. 정원과 지하저장소를 책임지던 볼프 제베르거라는 하인이 있었지만, 게을렀다.
<그림: 루터의 아내, 카타리나 폰 보라>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집안에서는 카타리나만 너무 고생한 것처럼 보인다. 가정의 일을 부인과 하인들이 도맡아 하던 중세적 배경을 감안하더라도 그녀가 겪어야 했던 수고의 짐은 너무나 컸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카타리나는 이것을 짐스럽게 여기기보다는 오히려 남편을 돕고 하나님 나라의 일에 동참하는 것으로 여겼다. 사실 남편인 루터도 그녀 이상으로 많은 일들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루터가 집안일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하루는 새벽부터 밤까지 할 일들이 가득 차 있었다. 루터는 매일 성경을 강의했고, 거의 매주 설교를 했다. 다양한 신학 주제에 대해서 책과 논문을 쉼 없이 써내야 했다. 루터 곁에는 늘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뭔가를 배우려는 사람, 어떤 문제에 대해 질문하려는 사람, 삶의 필요를 위해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루터의 집에는 질문들, 논쟁들, 불평들, 요구들이 가득한 편지들이 범람했다. 하루에 40통이나 되는 편지를 쓴 날도 많이 있었다. 루터는 자신의 집에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수북이 쌓인 편지들을 보면서 “교회적이며 정치적인 인생의 무거운 짐이 나를 옥죄고 있습니다”라고 탄식하며 고백하기도 했다.12)
루터와 카타리나는 각자 자신에게 맡겨진 소임에 최선을 다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매우 사랑하고 신뢰했다. 그것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고 서로에게 맡겨진 책임을 감당했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과 결혼
다섯째로, 종교개혁자들은 “솔리 데오 글로리아” 즉,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 있음을 고백하는 결혼과 가정이 되기를 소망했다.
오늘날 사람들은 결혼을 서로에 대한 사랑의 관점에서 보기를 원한다. 그래서 인간적인 사랑이 식어지면 결혼의 의미도 줄어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루터는 결혼을 하나님의 약속과 선물이라는 관점에서 보기를 원했다. 인간적 관점에서 결혼을 보자면 실망하고 말 것이다. 루터는 마치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것 같은 생생한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오 사랑하는 주 하나님, 결혼은 무언가 자연스럽지 않습니다만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결혼은 가장 놀랍고 가장 순전한 삶이며 독신주의보다 훨씬 더 고상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이 옆길로 새게 되면 결혼은 즉각적으로 지옥으로 변합니다.”13)
루터는 가정생활이 쉽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결혼생활의 문제들을 손쉽게 해결할 수 있다고 보지도 않았다. 아내를 “케티”라는 애칭으로 부르던 루터도 가끔은 그녀를 “케테”(Kette)라고 부르기도 했다. 케테는 독일어로 ‘쇠고랑’이라는 뜻이다. 카타리나는 때때로 남편 루터의 삶에 제한을 가했다. 루터의 절친한 친구 슈팔라틴의 결혼식에도 남편의 신변을 걱정한 카타리나가 너무 만류하는 바람에 못 가고 말았다.14) 루터는 강의를 좀 쉬고 식사를 하라고 다그치는 아내와 말다툼을 하고서는 식사를 거르기도 했다. 그는 “내 일생은 인내다. 나는 교황, 이단자들, 내 아이들, 그리고 케티를 모두 참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15)
하지만 루터는 단지 인간적인 사랑의 관점에서 결혼을 판단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오래 참고 인내하는 사랑으로 아내를 사랑하고자 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해야 하는데, 아내는 가장 가까운 이웃이라고 말했다. 아내에 대한 사랑도 그리스도께서 주신 위대한 이웃 사랑의 계명 속에서 보았고, 그리스도께 순종함 가운데 아내도 사랑했던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에 대한 복종으로 아내를 사랑하자 정말 아내가 사랑스러워졌다. 루터는 매일 저녁 친구들과 제자들과 손님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 어느 때부터 그때의 대화를 사람들이 받아 적기 시작했다. 그래서 남겨놓은 책이 『탁상담화』이다. 『탁상담화』의 한 부분에서 루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나는 정말이지 너무나 행복한 결혼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나는 솔로몬이 묘사하는 완전히 경건한 아내를 얻었습니다(잠언 31:11). ‘그런 자의 남편의 마음은 그를 믿나니...’ 카타리나는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습니다.”16) 이런 고백은 만일 루터가 인간적인 관점에서 아내를 ‘케테’라고 부르며 살았다면 결코 도달하지 못했을 고백이다.
카타리나도 역시 루터를 깊이 사랑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 카타리나는 한 편지에서 이렇게 적었다. “나의 사랑하는 남편처럼 그토록 자상한 사람을 잃었을 때에 그 누군들 슬프고 가슴이 아프지 않겠어요? ... 저는 지금 먹지도 마시지도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잠도 잘 수 없습니다. 제가 만일 어떤 나라나 제국을 소유했는데 그것을 상실할 때의 고통이, 나의 사랑하는 주 하나님께서 그처럼 사랑스럽고 자상한 남편을 저로부터, 아니 저로부터만이 아니라 온 세상으로부터 데려가신 고통만큼 그렇게 클 것 같지는 않습니다.”17)
<그림: 자녀들과 함께 루트(lute)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는 루터>
『탁상담화』의 한 부분에서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나의 카타리나를 사랑합니다. 나는 나 자신보다 그녀를 더 사랑합니다. 이는 그녀와 아이들이 죽어야 한다면 오히려 내가 죽는 편이 더 낫다는 것을 의미합니다.”18)
루터는 1531년의 한 설교에서 결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매우 아름답게 묘사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배우자에게 아로 새겨져 있다. 남편이 자기 아내를 지구상에 유일한 여인으로 바라볼 때, 그리고 아내가 자기 남편을 지구상에 유일한 남자로 바라볼 때, 어떤 왕도, 어떤 여왕도, 심지어 태양 자체도 당신의 남편 또는 아내보다 더 밝게 반짝이지 아니하며 당신의 눈을 더 밝게 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바로 거기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대면하게 된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당신의 아내나 남편을 약속하시며, 실제로 당신에게 당신의 배우자를 제공하신다. “이 남자가 당신의 것이 될 것입니다. 이 여인이 당신의 것이 될 것입니다. 나는 형언할 수 없이 즐겁습니다. 지상과 천상의 피조물들이 기쁨으로 벅차 뛰어 오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귀한 보석은 없다. 이를 통해서 당신은 당신의 배우자를 하나님의 은사(선물)로 인식하게 되며, 당신이 그렇게 하는 한 당신은 전혀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19)
이처럼 루터는 결혼 역시도 하나님 중심적 관점에서 보기를 원했다. 결혼이란 단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사랑의 결합 이상이다. 결혼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은사이며, 약속이다. 우리는 남편이나 아내를 볼 때에 결혼 서약 시에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생각해야 한다. 배우자에게 아로새겨진 말씀을 기억할 때에 결혼의 근본적 토대를 기억하게 된다. 결혼이란 이처럼 “말씀하시는 하나님”과의 만남 가운데 영위될 때에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유지된다.
믿음, 소망, 사랑의 가정
평소에도 늘 ‘믿음’을 강조했던 루터는 결혼생활에서도 믿음을 강조했다. 무엇이든지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은 죄가 되지만, 믿음으로 하는 것은 거룩한 일이 된다. 루터는 기저귀를 씻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서 하나님도 미소를 지으신다고 말한다. 참된 믿음 안에서 그 일을 할 때에 그 일은 소중하기 때문이다.20)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적 가르침에 관하여(De doctrina christiana)』에서 “지극히 작은 것은 작은 것이지만, 가장 작은 것에 충성하는 것은 큰 것이다.”라고 하였다. 가정의 소소한 일들에 충성하는 사람은 사실상 큰일을 하는 셈이다.
루터는 부부 사이의 ‘소망’에 근거한 신뢰를 매우 중시했다. 『창세기 강의』에서 루터는 “이 세상에서 부부 사이에 존재하는 마음의 일치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다.”21)라고 말했다. 그는 용서할 줄 아는 사랑은 아주 드문 은사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은 가정에서 서로를 용납하고 용서할 줄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다.22) 그것은 결혼에 두신 하나님의 소망의 말씀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루터는 결혼에 대해서 세속적이고 이교적인 관점을 버리라고 자주 충고한다.23) 그런 관점은 자기중심적이다. 하지만 기독교적인 결혼은 조건 없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24) 그렇기에 남편과 아내 모두 사랑의 영이신 성령을 붙들 때에 참된 결혼의 의미를 누릴 수 있다.25) 이처럼 루터의 결혼관은 믿음, 소망, 사랑에 근거하고 있다.
루터는 사랑의 결합 속에서 6명의 자녀를 낳았다. 한스(1526), 엘리자베트(1527), 막달레나(1529), 마르틴(1531), 파울(1533), 마가레트(1534)가 그들이었다.26) 그리고 루터는 역병으로 고아가 된 6명의 아이들을 입양하기도 했다.27) 루터는 자녀들을 사랑했다. 한번은 장남 한스가 아주 잘 먹고 잘 마시는 것을 두고 아버지로서 자부심을 드러냈다. 그는 “먹고 마시는 인간”(homo vorax ac bibax)이라는 표현을 기쁘게 사용했다.28)
슬픔도 있었다. 둘째인 엘리자베트는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29) 셋째인 막달레나는 오랜 투병 끝에 13살의 나이로 아버지 루터의 품에서 죽고 말았다. 루터는 ‘렌헨’이라는 애칭으로 불린 딸의 임종을 앞두고 이렇게 기도했다. “선하신 하나님, 저는 그녀를 너무나 사랑합니다. 하지만 그녀를 데려가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저는 기꺼이 그녀를 당신께 드리겠나이다.”
<그림: 루터의 딸 막달레나>
이어서 루터는 막달레나에게 말했다.
“내 귀여운 막달레나, 나의 귀여운 딸아, 곧 너는 나를 떠날 거야. 내가 없더라도 너는 행복할 수 있겠지?”
막달레나는 대답했다. “예, 사랑하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요.”
루터는 이어서 말했다. “아, 사랑스런 렌헨, 너는 다시 일어날 거야. 너는 별처럼 빛날 거야. 그래 태양처럼 빛날 거야. 나는 영으로는 행복해. 하지만 이생의 육신 안에서 나는 너무나 슬프구나.”
루터와 그의 아내는 딸의 마지막을 곁에서 지켜 주면서 기도했다.30)
이처럼 루터는 가정에서 겪는 기쁨과 슬픔, 사랑과 미움을 모두 알던 사람이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평가할 때, 루터의 가정이 모든 기독교 가정을 위한 가장 좋은 모범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루터와 카타리나가 처했던 상황은 너무나 독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상황이 어떠하든지 간에 자신에게 주어진 삶 가운데 최선을 다해 살아간 남편과 아내였다. 각자의 사명에 충실하면서도 가정을 지키기 위해 사랑과 신뢰로 주 안에서 굳게 연합하였던 부부였다.
루터는 종교개혁의 다섯 가지 ‘솔라’를 자신의 결혼생활과 가정생활에 적용하며 살았던 사람이다. 그의 가정이 이후에 루터파 목사들과 가족들뿐 아니라 많은 개신교도들에게까지도 좋은 모범이 되었던 것은 바로 그런 점, 곧 가정을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관점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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