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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의 우상부터 파괴해야-라은성 박사

라은성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21. 4. 12.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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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의 우상부터 파괴할 수 있어야

초대교회에서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신자들에게 보급되지 않은 상태에서 신앙을 지키기란 여건 어렵지 않았다. 신자들의 신앙 교육은 주로 속사도들의 서신들이나 교부들의 작품들을 통해 이뤄졌지만 대중들은 라틴어나 헬라어를 읽지 못하는 경우 또는 그런 작품들마저 접하지 못하는 경우 진리에 대해 알기 위해 화상들이나 형상들을 사용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그림들은 신앙인들의 교육을 위해 그려진 화상이나 형상들로 여겨도 좋다.

5세기부터 게르만의 대이동이 이뤄지자 다양한 언어를 가진 민족들이 기독교로 개종하기도 했고 6세기에 이르러 무명의 선교사들로 인해 기독교는 여러 민족들에게 전파되었다.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그들 역시 화상이나 형상들을 사용했다.

‘위대한 그레고리’라 불리는 로마교황 그레고리 1세(590~604년)는 마르세유 감독 세레누스에게 보내는 서신, 제9권의 서신 105에서 “회화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교회들에서 사용해도 된다. 글을 읽지 못하는 무식한 사람들이 벽을 바라보므로 최소한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또 제11권 서신 13에서 “글을 읽지 못하지만 이야기에 시선을 돌려 그 의미를 배우게 하려고 또 무식한 자들을 훈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회화들에 대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형상들이 ‘무식한 자들(the uneducated)을 위한 책’이라 말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사용되기 시작한 형상 사용은 동방교회에서 787년 개최된 콘스탄티노플 종교회의에서 화상들이나 형상들을 교회 내에 사용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그 이유는 형상을 숭배해서라기보다 존경한다는 차원이거나 도움이 된다는 측면 때문이었다. 중세에는 모든 교회당마다 형상들을 새겨놓거나 화상을 새겨놓았다. 신앙의 도움이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와 함께 다양한 문화가 교회에 들어오면서 각종 형상들이 교회 내에 유입되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교회마다 발생하는 타락성을 고발하는 개혁자들이 생겨났는데 그 대표적 인물이 8세기 투르에서 목회했던 클라우디우스(약 871년 사망)였다. 그는 말씀 중심보다는 미신에 사로잡혀 있었고, 복음에서 떠난 미신적 행위들을 일삼는 로마교회를 비롯한 교회들의 타락성을 공격했다. 그는 ‘변증서’(Apology)에서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우리가 어떤 자들에 반대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변호하였는데 그들에 의하면 ‘우리가 숭배하는 형상에 신적인 것이 본래부터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형상들을 단지 그분과 같은 것으로 영예롭게 여기고 존경할 뿐이다’고 말한다. 이에 대하여 우리는 성자들의 형상들이 사탄의 예식을 포기한 사람들이 존경하고 있는 것이라고 반박한다. 그렇지만 여전히 그들은 우상들을 포기하지 않고 그것들의 이름을 바꾸어 사용하고 있습니다. … 존경을 받을 자는 죽은 자들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들이다. 살아있는 자들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할 수 있다. … 어리석은 종교와 미신에 젖어있는 자들은 ‘우리 구세주를 기억하기 위해 우리는 그분의 영예로 새겨져 있는 십자가를 영예롭게 여기고 존경하고 그리고 사랑한다’고 말한다. 심지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셨기 때문에 십자가 모양으로 만들어진 나무를 사랑하고자 한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배를 자주 타셔서 주무시기도 하시고, 가르쳤기 때문에 배까지 숭상한다. 하지만 이것은 어리석은 짓이며 강력하게 반대한다.”

중세 로마 가톨릭 타락성은 상상 이상으로 발전해 갔다. 교회라기보다 하나의 정치 집단이었다. 이런 교회를 향한 개혁의 물결은 마침내 16세기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일어났다. 종교개혁 시기에 급진파 개혁자들은 로마 가톨릭 성당에 세워져 있거나 새겨진 형상들의 모습들을 파괴시키거나 지워버리는 일을 전개했다.

그들은 급진파였다. 대표적인 사람들은 독일의 토머스 뮌처나 칼슈타트였다. 이들은 교회당마다 세워져 있는 형상들이나 화상들을 파괴했고 파괴할 수 없다면 벽에 새겨진 형상들을 지우기도 했다. 이에 대해 존경받는 종교개혁자들은 외형적인 형상을 파괴하는 것보다 이기적 탐심 곧 우상숭배가 더 무서운 것임을 강조하면서 내적 우상숭배를 경고했다.

형상파괴운동은 교회 역사 속에서 항상 급진파와 광신자들에 의해 일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8세기에 있었던 ‘성상파괴 논쟁’ 역시 황제들의 권력 장악을 위한 명목으로 종교적 이슈를 악용한 사례이기도 하다. 성상파괴나 성상숭배를 두둔하거나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일들을 자신들의 열정적 신앙이나 명분을 표출하는데 악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작금에 일어난 우상숭배에 대해 반대한 젊은이들이 뉴스의 초점이 되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식하고 찾아가 사죄했다고 한다. 이는 십계명을 지키기 위한 중심에서 비롯되었다고 여겨지고 이를 잘못 가르친 교회 지도자들 때문에 부추김을 받아 행해진 것이라고 본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여전히 ‘땅밟기’나 타종교의 형상들을 경멸하는 정신을 심어주는 자들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상을 반대한다고 한다면 오히려 교회당마다 그려져 있는 예수님의 화상들을 없애는데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시급한 일은 우리들이 저지르고 있는 외형적 우상들을 더 경멸해야 할 것이다. 예수의 길보다 세상의 길을, 겸손보다 명예를, 실패보다 성공을 공공연히 부추기는 모든 가르침과 행동이 우상숭배임을 직시해야 한다. 타인의 눈에 있는 티를 보기 전에 우리 눈에 있는 들보를 먼저 보는 것이 예수님의 교훈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라은성 박사(교회사 아카데미)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04269104&code=2311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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