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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역사와 신학(라은성교수)

라은성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21. 4. 23.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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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역사와 신학- 라은성 교수

제2부

근대 개신교의 신학적 흐름

종교 개혁의 신학은 그 신학을 보수하기 위한 정통시대로 이어지고 정통신학이 경직되자 경건주의와 합리주위가 각기 정통에 반기를 들었다. 합리주의는 자유주의로 발전 계승되어 개신교는 문화적 인 모습으로 근세를 마감한다. 우리가 정통시대라고 부를 때 그것은 그 시대에 자유주의 사상이 없었다는 말이 아니라 다만 정통 사상이 지배적이었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자유주의 시대라고 부르는 것은 그 사상이 지배적인 시대라는 의미이다.

 

개신교란 무엇인가?

개신교란 특별히 내면성의 태도이고, 사상의 움직임이며, 의식의 분출이며, 하나님의 관계에 대하여 인간이 묻는 불안한 질문에의 대답이다. 개신교란 기독교의 품안에서 복음에 충실하기를 바라는 사상과 삶의 태도인 것이다.

 

1. 개신교의 기초: 성경

개신교의 기초 자체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라고 생각할 때, 그 것

은 옳다. 그리고 성경이야말로 개신교가 인간이 무엇이며 그 본성, 운명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엇인지를 숙고하면서, 실천적으로는 그의 도덕 생활과 사회 생활을 지적으로는 그의 생각을 이끌어 가기 위해 참조하는 교회의 가정의 개인의 책이다.

 

2. 개신교의 대원리들

1)신앙에 대한 성경의 권위

개신교는 종교적 삶의 영역에서 오직 인간들의 전통에 불과한 모든 것에 반대한다. 개신교는 계시의 불변성에 대한 확언을 통해 인간 견해들의 변이성과 투쟁한다.

 

2) 하나님의 은사로서의 구원

인간의 깊은 내면의 삶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인간은 언제나 이 은사를 주시는 이에게 채무 상태에 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의무관계이다. 여기서 “종교적” 질서뿐만 아니라 도덕적 질서의 진리에 직면한다. 그것은 곧 자기 자신을 넘어서야 하는 인간의 의무는 오직 하나님이 하실 수 있기 때문에만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3) 신앙에 의해서 파악되는 구원의 무상성

개신교에 있어서 신 아이란 신념의 진술과 관련돼 지적 태도가 아니다. 물론 그런 신념들을 통해서 신앙이 표현될 수도 있고 또 그 신념들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상이한 형식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신앙이 아니다, 신앙이간 내면성의 사실이요 의식의 태도이다. 다른 말로 말해서 신앙이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신뢰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인간의 동의이다.

 

4)성경의 내적 조명의 실제

개신교의 4대 원리는 인격 형성에 매우 비옥한 기초가 된다. 내면성, 권위, 자유, 겸손 등 4대 원리의 연대성은 결코 잊혀져서는 안 된다. 진정 개신교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가지려면 말이다.

 

3. 고백적 정통 시대

1555년의 아우구스부르크 종교 평화 회의에서부터 스위스 일치 신조가 선포되는1657년까지를 우리는 고백적 정통 시대라고 규정지을 수 있겠다. 비록 종교 개혁시대와 바로 이어져 있는 시대이지만 종교 개혁 사상과 깊은 차이를 나타냄도 또한 사실이다. 종교 개혁이 존 질적으로 창조적인 (그러나 종교 개혁이 결코 혁신하려 들지 않고 다만 성경으로 돌아가려 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고려할 때, 개량적인이란 표현도 좋다) 운동이었다면 정통시대는 그 교리적 보수주의로 특징지어진다. 이와 같은 보수적 태도는 종교개혁자들의 후계자들을 기다렸던 그 막중한 임무와 과업을 생각할 때,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

 

1 루터파 정통

온전히 루터의 충실한 해석자가 되기를 바라면서도 멜란히톤은 점차 조금씩 이 비텐베르크의 스승의 가르침에서 멀어진다

 

1) 1537-1556년 사이의 루터파 교리적 논쟁

a) 십계명의 역할 문제

회개에의 호소와 십계명의 실천을 선결되어야 할 단계로 삼고 가르친 멜란히통에 반대하여, 아그리콜라는 참된 회개란 지키기 불가능한 십계명으로부터 생기는 것이 아니라 다만 복음 설교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에 발견에서 싹튼다는 것이다.

 

b) 아디아포라 (Abiaphora)문제

루터가 죽은 뒤, 라이프치히 은 작센 지방의 개신교도들에게 예배의식 문제와 교회 구조 문제 등을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것으로 여기고는 다소간 카톨릭에 가까운 예배 의식과 교회조직을 강요하였다. 멜란히톤은 이러한 입장을 채택하였고 이런 이유에서 플라시우스는 복음의 원수들이 활동하는 박해의 시기에 성경이 명하지도 않은 아무래도 좋은 의식들을 다시 확립함으로써 그들에게 양보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에졌다.

 

C) 의의 전가 개념

오시아더는 종교 개혁이 그토록 힘을 다하여 거부하였던“선천적 의”라는 개념을 다시 개신교 신학에 끌어들였다. 이에 대해 멜란히톤파와 순 루터파가 모두 이를 공박하고 나섰다. 특히 멜란히톤은 영혼에 그리스도께서 내주 하심이 칭의의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D) 선행 논쟁

이 논쟁의 주모자인 마이 오는 1552년 주장하기를 비록 사람이 선행 없이 의롭게 되지만, 선행은 구원에 필수적이라고 했다. 이에 루터의 충실한 동역자중 하나였던 암스도르프와 프라시우스등이 이런 선행의 개념에서 펠라기우스주의와 교황주의 제출 몰을 보고 마이 오를 공박하였다.

 

E) 신인 협동 논쟁

어떤 이들은 구원에 동의하고 또 어떤 이들은 동의하지 않게 하는 그 무엇인가가 우리 안에 있다. 고 라이프치히 고소인 페핑거는 말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플라시우스는 가장 맹렬하게 반박하였다. 그는 주장하기를 인간이 회심할 때 돌이나 나무막대기처럼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해 앙탈거린다고 했다. 루터의 가르침에 충실하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담의 타락 이후 원죄가 인간의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 본질 자체라고 여기면서 루터로부터 멀어진 것이다.

 

2)일치 신조와 정통의 등극

 

 

 

 

 

2) 알미니우스 논쟁과 도르트 회의

한때 베즈 밑에서 공부했던 알미니우스는 타락전 예정설을 주장하는 자들에게 반대하면서 타락 후 예정설을 주장한 바 있었다. 알미니우스는 자신의 연구를 통해 정통을 변호하도록 핵임을 부여한 자들의 기대를 저 버리고 오히려 이중 예정론 교리에 의혹을 품었다. 그는 멜란히톤처럼 모든 사람들에게 제공된 하나님의 은혜는 의지의 자유로운 결정에 의해 수납된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알미니우스가 죽고 난 후 화란 개신교는 그야말로 종교와 정치가 혼합된 분열의 와중에 빠지고 말았다.

알미니우스 추종자들은 세상 창조 이전에 하나님께서 성령의 은혜로 그의 아들을 믿으며 끝까지 이 믿음을 계속할 자들을 구원하시는 한편, 물 신앙으로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자들을 정죄하는 그들을 죄 가운데 내버려두시기로 작정하셨음을 인정했다. 양자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알미니우스파가 은총을 저항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기를 거부한 점과, 예지예정을 주장한 점,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선택된 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되 구원은 신자에게만 적용된다고 말한 데 있었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들 편에서 이 항의에 맞서 반동 항의를 전개했고 이내 화란 개혁파 전 교회가 이 싸움에 말려들었다.

도르트 회의의 결정들은 일련의 법규로 명문화되어 항의서의 5개 조항에 신랄한 어조로 응답했다. 예정을 정의하되 모든 신인 협동, 곧 구원 사역에 인간이 참여하는 모든 요소를 배제하였다. 이처럼 교회사 속에서 도르트 회의의 결정사항은 개혁파 정통의 승리로 장식되었다.

 

3) ‘소뮈르’학파에서 ‘스위스 일치신조’ 까지

스위스 일치신조는 26개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성경의 문자적 영감과 구약 히브리 텍스트의 절대적 완전성을 변호하고 있다. 또한 타락후 예정론과 오직 택한 자들만의 구속의 제한, 그리고 아담의 죄가 모든 후손들에게 즉각적으로 전가된다는 즉각적 전가를 표명한다.

 

4) 프랑수아 튀레니티

프랑수아 튀레니티는 제네바, 덴 하그, 파리, 소뮈르, 몽토방 등지에서 공부했고, 1648년 제네바의 이탈리아 교회 목사가 되었으며, 그 후 제네바 아카데미의 교수와 동 대학의 학장까지 되었다.

튀레트니는 첫 번째 논제에서 신학 정의를 시도한다. 그에게 있어서 신학은 이론과 실제가 혼합된 학문이다. 신학적 탐구에 있어 이성의 역할에 대해서도 튀레티니는 강조하기를 소시니우스파는 이성의 과도한 사용으로 범죄 했고, 재세례파, 루터파, 로마 카톨릭은 이성의 미급한 사용으로 범죄 했다는 것이다.

그는 여기서 이성이 신학의 규범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을 배타적으로 축출하고 있다. 그는 설사 어떤 과용이 저질러진다 해도 그에게서도 실제 있는 일이다. 그것 때문에 신학적 작업을 포기해서는 안 됨을 인정한다.

전반적으로 논박 신학 강요를 살펴보건대, 튀레티니는 매우 부드러운 정신을 보이고 있으며 지나치게 문제가 되는 구분들은 모험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 준다.

 

 

 

경건주위

 

 

 

합리주의에서 자유주의로

고백적 정통이 대룩을 지배하던 무렵, 데카르트는 그의 방법론 서설을 출간했다. 방법적 의심을 모든 지식의 원리로 삼고, 그는 일반적 기독교 역사에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그로부터 있는 그대로의 기독교 신앙이 선험적으로 참되게 여겨지던 시대는 끝이 났다. 그때까지 신학적 탐구의 기초였던 기독교 진리는 단순히 탐구의 대상이 되었다.

종교적 영역에서 이 시대는 영국에서 첫 열매를 거두었다. 로크는 기독교 합리성이라는 책에서 계몽된 기독교의 모습을 그렸고 그리하여 영국 이신론자들의 아버지가 되었다.

 

1. 합리주의

16, 17세기 신학자들은 어떤 신앙 고백이 기독교 신앙에 가장 좋은 응답을 주었느냐를 파악하는 일로 서로 싸웠다면, 18세기 곧 계몽 시대 사람들은 무엇보다 먼저 자연 종교와 계시 종교와의 관계를 질문하였다. 그들이 스스로 던진 질문은 신앙이 어디에 있는 가였다.

 

1)영국 이신론자들

처베리의 남작 허버트 는 영국 이신론의 선구자로 여겨질 수 있다 허버트는 단언하기를 진리란 자신의 나라의 어떤 종교 단체에도 속해 있지 않고 그들을 초월해 있다고 했다. 허버트의 이런 관점들은 모크의 탐구를 거쳐17세기말 존 톨랜드에게로 이어졌다. 그는 하나님과 계시는 인간 이해의 한계를 초월하지 않는 다는 것과 기독교 신비들은 성직자의 흉계의 열매임과 동시에 이 교적 개념의 잔재라고 단언했다.

캠브리지 대학의 학생이었던 토머스 울스톤은 성경의 기적들을 파괴적 비평에 굴복시켰다. 또한 성직자 에자 신학 교수인 매튜 틴데일은 이성 있는 모든 피조물들에게 공통적인 하나의 자연적, 또는 합리적인 법, 곧 완전하고 영원한 부동의 법이 존재한다고 애써 주장했다.

영국 이신론자들에 따르면 계시 안의 가치 있는 모든 것은 이미 자연적이고 합리적인 종교를 통해서 인간성에 부여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들은 기독교가 창조만큼이나 낡았아고 주장할 수 있었다. 이렇게 그들은 계시 안에 지각할 수 없는 모든 것은 미신으로 거부하게 되었다.

이에 영국 이신론자들은 대적들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경향의 대표자는 조셉 버틀러였다. 그는 브리스톨과 더헴의 주교를 지냈고 종교의 유추를 쌓는 데 그는 이 책에서 이신론자들과의 논지에 의해 혼돈에 빠진 자들에게 쓰면서, 자연의 현상들과 계시 종교의 진리 사이에 일치와 조화가 있음을 증명하려 했다.

 

2. 자유주의

19세기는 자유주의 시대였다. 물론 그렇게 만은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19세기 초에 ‘영적 각성 운동’이있었기 때문이다. 각성운동은 신앙에 독서 적인 영향을 끼쳤던 합리주의에 반대했었다.

각성운동과 나란히 자유주의 세기에 또 다른 연합적이고 합리주의가 고백적 문제에 귀를 기울이지 않자, 19세기에 자기 교회의 고유한 전통의 가치를 재발견한 신학자들이 많이 나타났다. 이렇게 해서 독일에서는 신루터주의, 영국에서는 옥스퍼드 운동, 그리고 뒤이어 화란을 중심으로 신칼빈주의 운동이 탄생하게 된다.

고백주의는 심지어 에쿠메니즘 시대에도 하늬 유산을 보존한다는 확신 속에서 그들의 교회를 강화하고 있는 것이다.

 

1) 슐라이어 마허

자유주의는 칸트에게서 나온 관념론 철할 의 영향으로 기독교의 고유 종교적 가치들을 재발견한 것이다. 이런 재발견의 선두 주자는 슐라이어 마허로서 그는 모든 19세기를 지배했고 그 그림자는 현대 개신교 신학에 여전히 투영도고 있으며 그 점에서 사람들은 그가 어떤 학파도 세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사에 한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슐라이어 마허의 독창성은 종교를 사색과 윤리의 영역에서 감정 또는 직관의 영원으로 옮겨 놓은 데 있었다. 그는 종교 감정을 절대 의존 감정으로 정의하면서 기독교 교리들을 재해석하였다. 그에게 있어 구속이란 이 절대 의존 감정을 회복하는 데 있다고 여겼다. 이 회복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역인 바, 그리스도는 자신 안에서 유한과 보편, 일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화해시켰다는 점에서 모든 중보의 중심으로 나타났다고 보았다.

 

2)슈트라우스에서 하르낙 까지

슐라이어 머허 이후 여러 신학자들이 그 뒤를 따라갔는 데 이들은 감정 위에 하나님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세우려 한 점에서 그와 결별한다. 신적인 기독교 이념과 그 이념의 간간적 내지는 자연적 구현 사이를 구별하면서 그들은 성경을 그 객관적 가치를 무시하지 않은 채, 역사 비평에 굴복시킬 수 있다고 여겼고 또한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를 동시에 포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에 따르면 복음서들은 예수 안에서 메시야를 만난 것으로 믿고 예수를 자기들의 갈망에 합당하게 변형시킨 유대적 상상의 열매가 되는 것이다

슈트라우스의 개념들은 기독교에 맹렬한 논쟁을 야기했다. 슈크라우스의 실패는 그이 스승인 바우르에 의해 새롭게 접근되는 데 이 사람이야말로 역사 비평학파의 아버지로 여겨진다. 그는 초기 기독교를 헤겔의 변증법을 도구 삼아 설명했다. 곧 유대 기독교 내지는 베드로적 경향과 이방 기독교 내지는 바울의 경향을 정과 반으로 삼고 2세기의 보편 교회를 설명한 것이다.

슈르라우스와 바우르의 사상이 식어 갈 무렵 리츌이 등장했다. 그는 도덕적 경험을 신인 사이의 만남의 장소로 삼았다. 종교의 목적은 고등한 지식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이상을 주고 하나님과 화해된 기독교인에게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시동시키기에 합당한 윤리적 행동을 세상에 갖도록 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그에게 있어 하나님 나라는 기독교인의 사랑 가운데서 도덕적으로 인간성을 조직하려 하는 한 구현된 것이다.

리츌의 제자 가운데서 하르낙이 가장 큰 인물이었다. 그는 기독교의 본질에서 하르낙은 기독교에 대해 정의 내리기를 시간의 한 복판에 있는 영생, 이 유일한 관점에 온통 집중하는 하나의 단순하고 숭고한 것이라 했다. 그는 하나님의 부성과 인간 영혼의 무한한 가치를 복음의 핵으로 말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그의 아버지로 알고 인간들을 하나님께로 이끌 수 있는 이로 설명한다. 요컨대 그는 기독교를 모든 도덕 문화의 유일한 기초로 여겼다.

 

19세기의 개혁자들

 

종교 개혁 이후 약 300년 동안 여러 집단들이 나름대로 종교적 열망에 대해 만족하면서 살아왔다. 루더파, 개혁파, 영국교회, 감리교, 침례교...하지만 1840년대에 들어서면서 각 나라에서 (스칸디나비아 제국들, 영국, 화란등)거의 동시에 위기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또한 이러한 외침과 더불어 각처에서 새로운 집단 운동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여 식어버린 활력을 자기 멤버들에게 불어넣어 주면서 경건활동에 만족을 추구했다.

 

1) 키에르게고르

키에르케고르가 살았던 시대는 1813-1855년 이였다. 그러나 그는 차라리 20세기에 속한 인물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 시대 사람들에게 이해되기보다는 다음 세기 사람들에게 더 많이 연구되고 토론되었기 때문이다. 키에르케고르가 당면했던 문제는 마치 루터에게 덴마크 교회 앞에 외로이 고독 자로 대처해야 했던 키에루케고르.는 그의 제도화된 기독교와 결별했던 인물이었다.

 

이 고독자의 노정은 하나님과의 거리감에서 친밀감으로 불안에서 은총으로 비극에서 평화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나의 모든 내적 존재는 변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내속에 갇혀 있지 않다. 인 봉된 것이 부서졌다. 나는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1848년 이전부터 이미 키에르케고르는 그의 진지함에 대한 고심이 그를 고심이 그를 새로운 길로 글이고 가고 있다. 정확히 말해서 그로 하여금 푯대 없는 길을 걷게 하였다. 이 유별난 삶의 패턴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의 과업이란 너무도 새로운 어떤 것이어서 기독교 1800년 동안 나의 행동 방법에 대해 조언을 물을 자기 아무도 없을 정도이다. 지금까지 유별났던 자들이 행동한 모든 것은 기독교의 확장을 위해서 한 것이지만 내 과업은 이런 확장을 중지시키는 것이다” 이처럼 키에르케고르에게 있어서 기독교적 대중과 기독교 개인과는 비록 외적으로는 결합되어 있으나 실제로 서로 적대 관계이다.

 

2) 아브라함 카이퍼

화란에서 개혁 교회는  이론상 토르트회의 (1618-1619)에서 작성된 교회 법에 의해 통치되었다. 그러나 교회는 실제적으로 세속 당국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부의 변화에 따라 교회의 형편도 좌우되었다. 교회는 프랑스 대혁명에 의해 일시적으로 자유로워지나 이내 월리엄 1세가 다시 교회를 수중에 넣고 정부의 권위 하에 두엇다(1815). 그러므로 1795-1825년 기간 에 화란 교회는 그 시대의 ‘자유주의’의 모습을 갖는 다. 교회는 비록 1795년까지 누렸던 특권의 많은 부분을 상실하나 어쨌든 1815년 이후 다시 전통 교회의 이름을 되찾았다. 하지만 이 때는 이미 교회의 전체적 신앙 고백이 상실되었고, 정치적, 사회적 자유주의가 허용되었다. 기성 교회가 무감각해지고 무기력해지자 교회에 대항하여 부흥 사들의 항의가 빗발치며 교회 분리의 지가 하늘을 찔렸다.

 

카이퍼의 교회는 초기부터 보수주의를 강조했다. 반혁명과 정당과의 정치적 연합은 화란의 사회생활 및 정치 생활에 괄목할 만한 영향을 주었다. 사람들은 이점에서 과연 카이퍼가 칼빈. 또는 엄격한 칼빈주의에 충실했던 가라고 물을 수 있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카이퍼가 일반 은총을 강조하면서 교회 개념에 새로운 효력을 부여하여 교회가 국가에 관려뇌어 있다는 생각을 더 이상하지 않게 했다는 사실이다. 요켄대 그는 칼빈주의를 그 시대에 적용할 줄 알았다.

 

 

근대 개신교 사회

개신교의 종교 개혁은 하나의 혁명적 모험이었다. 16세기에 ‘revolution’이란 말은 처음으로 코페르티쿠스에 의해 천체‘운행’이란 의미로 사용된 과학적 용어였다. 18세기에 가서야 이 용어는 우리가 인식하는 대로의 용어가 도내다. 따라서 종교 개혁자들은 ‘혁명’이란 말을 사용치 않았고, 사회적 정치적 혁명의 기도로 여겨질 수 있는 농민 반란에 대해 비난했다. 하지만 그 시대에 이 용어가 없었다고 해서 종교 개혁을 혁명이 아니었나?

전통적으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종교 개혁을 일종의 부르주아 혁명으로 보았다. 근거로는 교회에 대한 개인과 이성의 해방. 교회 권력의 파괴, 사회에서의 새로운 삶의 방식 등이다. 한편 트뢸치는 종교 개혁의 보수적 측면을 강조했다. 그는 개인의 해방과 심령주의적 형태의 기독교는 18세기 계몽 시대에 시작된다고 여겼다

바르트주의자들이나 신 루터 연구가들은 루터의 혁명가적 행동을 기절한다.

 

지그문트 노이만에 따르면 혁명이란 ‘정치조직, 사회구조, 경제 소유권 조정, 사회 질서의 우세한 신화의 철저하고 근본적인 변화로서. 발전의 연속성에 주요제동을 거는 것’이다로버트 킹돈은 이 혁명 이론을 근거로 개신교 종교개혁을 혁명으로 본다. 종교 개혁 당시의 유럽 사회에서 참된 혁명이 되기 위해서는 왕의 권력이나 부르주아의 권력을 겨냥해서는 안 되고 다른 지배 계층을 겨냥해야 했는바, 개신교 종교 개혁이 겨냥한 것은 로마 카톨릭 성직자의 계층이다. 종교 개혁 이전의 대부분의 유렵에서는 카톨릭 성직자의 계층이다. 종교 개혁 이전의 대분의 유럽에서는 카톨릭 성직자가 정치 조직과 사회 구조에서 중요한 요소가 되었고 많은 재산을 통제했으며, 우세한 사회적 신화의 관리인이었다. 성직자에 대한 도전은 유럽 사회에 혁명적 변화를 요구하는 급진적 도전이다. 이런 점에서 개신교 종교 개혁은 반 성직자 혁명이다.

그렇다면 이 혁명의 내용은 무엇인가? 먼저 영성과 신학에 있어서의 혁명이다. 흔히 종교 개혁의 영성과 신학은 코페르리코스적 신화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루터에게와 칼빈에게도 해당된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제정 의하고 인간의 철저한 자기 상실을 말하며, 말씀을 통해 무상으로 주어지는 용서와 그리스도안에서 부여되는 의, 그리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을 말하는 바, 이것은 당대의 영성과 신학을 뒤엎은 것이었다. 중세의 영성을 대변하는 선지 술래, 면죄부 매매, 미사의 기금, 수도자의 길 등이 의문사되었거, 대신 신자는 본질적인 것으로 돌아갔다. 또한 스콜라 신학의 철학적 거동에 반대하여 보다 관계 적이고 보다 실존적이며, 보다 성경 적으로 돌아갔다.

 

청교도 사회

 

근대 개신교 사회는 앵글로 색슨 계통의 사회 속에서 꽃을 피웠다. 퓨리턴들은 근대 사회 개화를 위한 전위 부대였다. 이들은 영국 혁명 속에서, 그리고 신대륙에 새로운 사회 건설의 현장에서 역사의 새로운 장을 펼친 것이다.

 

1 영국 혁명

근대 4대 혁명의 시초는 영국에서 발생했다. 종교 개혁을 사회 혁명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에, 청교도 혁명이라고 불린 영국 혁명은 근대 민주주의 사회로 가는 데 있어 미국 및 프랑스 혁명과 더불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최초의 혁명이다.

 

2. 미국에서의 개신교

아메리카 개신교 교회의 신화적 창설은 1620년 메이픞파워호를 탄 조상들과 더불어 이뤄진다. 그들에게 있어 아메리카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타락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선택하신 피난처인 ‘새 예루살렘’이었다. 청교도들은 회중 교회 모델 위에 그들의 공동체를 조직했다. 교회는 종교. 정치. 사회 생활의 중심으로 여겨졌다.

 

3. 청교도 주의

1)용어 설명

사전학선 ‘푸리탄’이란 말은 도덕적 신자를 뜻한다. 이들은 사회에서 문화적으로 이뤄놓은 청교도주의는 역사상 한때 사회적 역동성을 보여주는 정신 태도였다.

역사가 너털에 따르면 퓨리턴들은 카톨릭이건, 개신교이건, 카트르파이건 퀘이커파이건, 수도사이건, 어디든지 있을 수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순수와 비순 수의 구분, 단순성, 교회나 국가에 대한 자유로 나타난다.

 

2) 전통적 청교도 주의

벡스터는 이렇게 말한다. ‘종교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모든 사람은 그가 고백된 원리들에 일치하여 살되, 독립 파나 침례파, 기타다 가증스런 호칭이 될 수 있는 다른 부파들에 어울리지 않는 한 , 퓨리턴으로 여겨질 수 있었다.’

 

3)비판

종교적 현상이었던 청교도주의는 단지 종교마능로 국한시킬 수 없는 다른 것으로 바뀌었다. 왜냐하면 그들 이전과 이후의 다른 이들과 마탄기지로 퓨리턴들도 사회. 경제, 섹스의 모든 양상에서 존재를 성화기키려는 엄청난 과업을 스스로에게 부여했기 때문이다.

사회학자들은 거침없이 확대된 정의를  취한다. 막스베버는 이 용어를 ‘17세기 민중 언어에 있었던 ’의미로 사용한다.

 

4) 정의

가장 좋은 정의는 사무엘 파커에 의해 제시되었다. 그는 네 종류의 퓨리턴을 구별할 것을 제안했다. ‘교회 조직에 관계하는 퓨리턴, 종교에 관계하는 퓨리턴, 국가 조직에 관계하는 퓨리턴, 도덕에 관계하는 퓨리턴이다’

 

5) 청교도 주의와 칼빈주의

신학적 으로 청교도주의의 ‘이 실험적 기독교, 이 군육질적 윤리’는 삶을 가치 있게 하기 위한 필요성에 상응하나 인간을 고양시킨다는 점에서 칼빈의 가르침에 반대된다 이런 점에서 칼빈주의의 용어를 써지면 청교도주의는 칼빈의 사상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16세기말에 대치된 세 속회된 칼빈주의이다.

 

6) 청교도주의와 자본주의

개신교도, 특히 퓨리턴들이 자본주의의 창조에 공헌한 것은 그들의 혁신, 곧 그들의 혁명적 확립을 통해서이다.

베버는 자본주의 정신의 변모를 잘 표현하고 있다. 금욕주의는 현세를 개조하여 그 내부에서 그 내주에서 전력을 발휘하려 했으나 그 결과는 오히려 현세의 외물이 일찍이 역사상으로 그 유례가 없이 강력한 필경은 인간이 피하지 못할 위력을 인간에게 발휘하게 되었다. 오늘날 상기한 바와 같은 금욕정신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어쨌든 승리를 거둔 자본주의는 기계적 위에 서게 된 이래로 그 같은 정신적 지주는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게 된 것이다. 금욕주의의 행복한 상속자 계몽주의의 장밋빛 정신조차도 오늘날에는 완전히 사장한 듯 직업 의무의 사상은 지난날의 종교적 신앙 내용의 망령이 되어 우리들의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혁명과 개신교

1 미국 혁명과 개신교 윤리

1) 존 아담스

미국 혁명이란 말로 우리는 무엇을 의미하나? 미국 전쟁을 말하는 가? 혁명은 백성의 정신과 마음에 있었다. 종교 감정에 있어서 의무와 책임에 있어서의 변화. 원리. 감정, 그리고 백성의 애정 안에 있는 이런 급진적 변화야 말로 진정한 미국 혁명이다.

2)교회의 인물들은 퓨리턴에 의해 미국 대륙에 도입된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칼빈주의 전통을 되풀이했다.

 

3)한편 정치적 인물들도 종교인들과 유사한 생각들을 갖고 있었다.

 

4)시민의 자유를 위한 투쟁은 종교적 자유를 위한 투쟁을 동반했다.

 

5)버지니아 권리장건,독립선언서, 미국헌법에 대해서 미국 헌법은 개인 이익을 위해 공동선을 희생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국가도덕이 없이 공화 wdj부는 존속할 수 없다. 미국의 헌법은 본질적으로 백성의 지지를 간질하기 위해 공화 정부를 창조할 필요성과 명가들의 신뢰를 보존하기 위해 민중 선동을 대비하려는 경향 사이의 타협이다

 

미국은 프랑스 식민 제국의 몰락과 더불어 시작한다 (1759)1763년 파리 조약 이후 점차 영국과 의 유대 관계가 해이해진다. 가정 큰문제은 식민지의 자율 문제였다. 문제 해결을 본국의 답을 얻어오는 데 6주가 걸렷다 특별히 경제 문제가 결정적이었다.

자자들은 성경, 계몽사상 영국의 관습법, 고전 문헌등에서 영감을 받았다. 반란들은 사회를 뒤집어 엎는 것은 괴하지 않았고 오히려 사회를 확고히 하려했다. 그들의 목적은 자유의 유산을 보넌하고 프로테스탄트 미국의 명백한 운명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2 프랑스 혁명과 개신교

 

1)사회 형편

1789년의 프랑스 사회는 종교가 몸에 배어 있었다. 일상 생활이 예전 달력에 의해 규칙적으로 순환되었고 신앙의 일치는 낭트칙령 폐지이래 의무적이었다.

왕권은 종교적인 정당화에 의거했다. 이 정당성은 랭스 대성당에 대관식을 통해 표현되었다. 하나님의 지상 대리인인 완은 정치- 종교적 권력을 소유했다. 카톨릭의 수호는 그의 근본적 의무 가운데 일부였다.

카톨릭 교회는 병합하는 제도로 특징이어질 수 있다. 태아적 상대로 박에는 존재할 수 없었던 다른 재도들은 이 교회에 직접 복종하지 않을 경우 그 영향권안에서 다양하게 위치했다, 호적 사회 의료 복지 교육은 성직자의 수중에 있거나 그들의 의해 밀착 통제되었다.

 

2) 개신교의 형편

낭트 칙령 폐지 에 영향을 받지 않았던 알자스의 루터파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적다 혁명 전야에 프랑스 칼빈파의 수가 얼마인지는 가름하기 힘드나 1802년의 공식 통게에 따르면 478,312명의 개신교도가 있었음을 알수 있다.

루이 16세의 통치하에 대략 40-60만 정도 추산할 수 있다 . 칼빈파는 특히 남부 지방에 많이 있었다. 이들 공동체의 분포도는 프랑스에서 중앙 산악지배의 납부를 지나 로셀알 있는 곧 도피네에서 푸아 루까지 의 불연속의 초생달 형태를 그린다. 이 초생달 내지는 바원의 경제 박에의 개혁파 교회는 노르망디, 피카르디, 캉레시스등지에 명명 핵심체들만이 있을 뿐이었다.

사회적으로 칼빈파는 적어도 80%가 농촌에 있었다. 다른 부류의 개신 교인은 공직자를 제외한 모든 사회 계층에서 발견된다. 낭트 칙령을 폐지하는 풍텐블로 칙령이래 개신 교인들은 프랑스에서 법적 존재 기반을 갖지 못했다. 게다가 예배의 자유와 개혁교리를 믿는 개인 신앙의 자유가 박탈되었고 그즐의 자녀들은 카톨릭으로 교육받아야 했다.

18세기에는 관용의 발전과 더불어 근사적 열심히도 사라져 갔다. 정치적으로 개신교도들은 왕의 충실한 신하들로 나타났고 다른 프랑스인 들과 마찬가지로 권리의 평등을 위한 동일한 개혁들을 기다렸다. 이렇게 기다리던 개혁은 1787년의 관용칙령을 거쳐 1789년 혁명으로 나아가 8월의 선언으로 이어졌다.

 

3) 인권 선언과 종교의 자유

1789년 8월 22-23일의 긴투론에서 개혁파 목사 샌트 에티텐은 이렇게 외쳤다.

“ 여러분 내가 요구하는 것은 단순히 관용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유입니다. 관용 나는 이 말이 추방되기를 요구하며, 오직 동정이나 받는 시민들처럼, 용서받는 죄인들처럼 우리에게 제시되는 이 부당한 말은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 프랑스 개신교도들을 위해서 나라의 비 카톨릭 교도들을 위해 나는 여러분에게 여러분이 여러분을 위해 요구하는 것 곧 자유와 권리의 평등을 요구합니다.”

인권 선언 제 10항은 종교의 자유의 권리를 선포했고 이 조항은 혁명과 프랑스 카톨릭 교회 사이에 최초의 단절을 야기했다. 이 교회는 전체적으로 권리 선언을 반대했다.

 

4)혁명에의 가담

일부 개신교들은 급진화으이 길로 들어섰다. 적극적 정치 활동에 가담한 위그노들은 주요 정당의 대표자들 가운데 기어 있었다. 개신교 대표들은 1971-1972년 10월의 입법 의회에 15명이 있었고 1972-1975년의 국민회의에는 30석을 차지했으며 여러 지방의회의 의원 활동을 했다.

그러나 1793년부터 혁명속도의 가속화는 상황을 바꾸기 시작했다. 1973년 9월에서 1794년 7월 사이에 일부 혁명 파가 ‘비기독교와’의 정치를 실행함으로써 공포의 시대를맞이 했다.

 

공포의 시기가 지나가자  개신교 활동은 재개되었다. 1795년부터 개혁파예배가 다시 드려졌을 데 1798년에는 마르세이유, 캉 등을 제외하고 거의 전지역에서 재개되었다.

1795년에서 1799년까지 종교 생활을 예배의 자유와 평등의 분위기 속에 서 흘러갔다. 어쨌든 오늘날까지 대부분의 프랑스 개신교도들은 스스로를 혁명 사역의 수호자들 가운데 분류시킨다.

 

정교 분리혁명

 

정교 분리 사상은 개신교의 근본 사상이 아니다. 개신교의 사상은 정교분리가 아니라 정교 구분이다. 더욱이 종교 개혁의 초기에 교회는 국가와 마찬가지로 우선 서로의 현합을 추구했다. 그러면서 점차 사람들 은 정교 분리를 생각 했다.

교회가 국가와 연합하고자 하는 것은 오직 교회가 교리나 행정 및 권징에 있어서 확실한 안정 조건을 바랄 때 분이다. 하지만 과연 교회에 안정이 그 생명의 표지인가? 그렇지 않다. 실제로 초기 각성 운동이 나타낫을 때 다소간 국가 권력에 굴복했던 기존 교회들과는 달리 ‘자유’공동체들이 창설괴었던 것이다. 이 공동체들은 국가 교회들이 연정이 모자라고 경건이 메말랐으며 빛을 발하는 데 허약하다고 비난했다. 이런 사실은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정작 새로웠던 것은 교회 자체를 위해 정교 분리를 요구한 정신 상태에 있었다.

 

1. 영국

1829년부터 영국 교회는 1673년의 시험령을 폐지하고 비국교도들에게 국교도들과 동일한 시민권 또는 종교적 권리를 인정했다.

 

2. 스위스

스위스 역시 국가 보호에서부터 분리되는 움직임에 낯설지 않다.

 

3. 프랑스

프랑스에서도 동일한 움직임이 태동했는 데 주도적 인물은 모노와 아제노르 등 가스파랭이었다. 이들은 정통 신앙 고백의 필요성을 국가 교회에 설득시키려 했으나 실페하자  자유 복음 교회를 창립했다. 정통신학의득세에도 불구하고 자유파는 이 연합 교횡에서 계속 활동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교 분리법이 받아들여진 것은 만족할 만한 것이었다.

 

4. 중- 동부 유럽

1) 오스트리아. 헝가리

오스트리아는 독일 문화권과 로마와의 종교적 연합이라고 하는 전통의 접합점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매우 동요하는 가운데 있었고 정부는 이 두흐름을 종합하려 했다.

헝가리도 상황은 비슷했다. 공산주의와 파시스트의 경향 사이의 투쟁에 지배되었던 정치 상황은 국가로 하여금 그 권위를 보이도록 강요하였다. 헝가리의 오늘날 개신교의 상황은 표현의 자유에 별로 호의롭지 못하고 교회로 하여금 매우 은밀한 가운데 살도록 허용하는 정도이다.

 

2) 폴란드,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

롤란드 개신교는 매우 어렵고 복잡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 20만의 루터파와 1만의 개혁파가 국가적으로 존재해 왔다. 헝가리 체제하에 있던 루마니아는 개신교가 비교적 어떤 특혜를 누렸다.

그러나 1차 대전 이후 태어난 새 정부는 태도가 바뀌었다.

체코의 개신교 상황은 어떤가? 1920년 법은 양심과 예배의 자유를 보장했다. 150만의 카콜릭 교도들은 이것을 계기로 로마 교회와 분리했고 그들중 대부분  체코 국가 카톨릭 교회를 구성했다. 종교 개혁의 교회들은 그 들의 자유를 보장 받았다,

 

5. 러시아

성경이 러시아어로 번역된 것은 1870년대이다. 놀라운 것은 정교회와 로마 카톨릭 교회가 성경 번역에 협력했다는 사실이다. 2차 세계 대전말까지 러시아에 있어 교회적 개신교는  주로 루터파였다. 그러나 대전 후 상황은 칼빈주의를 따르는 쪽으로 중심이동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교회는 복구 작업을 위해 애썻다. 대부분의 목사들은 나라를 떠나야 했었고, 어떤 목사들은 나치에 의해 추방되었다. 또한 교회 건물들은 파괴되었다. 에스토이나 지방 에서는 교히는 체제와 심각한 난관에부딪혔다.

양차 세계 대젼 사이에는 12교구와 7명의 목사뿐이었고 1941년에는 2교구뿐이었다. 루터파나 개혁파는 러시아에서 곧 사라졌다. 그러나 개신교의 정신은 죽지 않았다. 이들은 분파의 현상으로 여기저 흩어졌다. 메노나이트와 침례파의 존재 양식으로 말이다.

 

결론

우리는 지금까지 정치에 대한 종교의 자세, 국가에 대한 교회의 태도를 개신교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리고 우리는 그 속에서 온갖 다양한 때로는 모슨적인 현상을 파악했다. 우로는 국가에 의존적인 루터파에서부터 우로는 탈 구가적인 분파들까지 보아왔다.

이와 같은 개신교의 모든 궈조적 문제는 역사에 대한 의미를 질문하는 데로 위결한 수 있다. 루터와 키에르케고르의 교회 구조에 대한 기독교적 고뇌는 하나님앞에서의 고뇌로서 극서이 인간 앞에서의 고뇌가 될 때에는 그 의미와 깊이를 상실하게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심각히 생각하고, 오직 하늘나라의 시민권에 기독교인의 의의를 둔다면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의 질문은 약해진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교회적 개신교는 세상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을 수없다. 그는 이 세기에서 살아야 함과 그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이 신앙을 증거햐야 함을 알고 있다 그는 구조들의 가치를 느끼는 것이다.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의 구조들에 일종의 위기가 왔다. 개신교는 이제 그의 구조들을 다시 생각하기를 시작해야 했다. 물론 극서은 항구적으로 변화하는 세상을 염두에 둬면서가 아니라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길이 무엇인지를 탐구하면서이다. 나머지는 팀으로 주어질 것이다. 만일 교회가 하나님께 속한다면 교회가 세상 안에서 하나님의 교회라면 세상 역시 하나님의 창조물이고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그리고 만일 교회가 그의 제도와 구조에 있어서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 인간적인 것을 너무도 많이 두기 시작한다면 비록 교회가 하나님게 속하기를 그치지 않는 다 하더라도 교회는 더 이상 하나님의 영의 사자기 될 수 없게 될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자신의 영이 세상에 주어지기를 바란다면 하나님은 교회 밖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이실 것이다.

 

제4부

현대 개신교의교회와 사회

개신교에 있어서 충성의 문제는 교회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해석학의 문제이다. 목적은 성경 해석이고 기독교 진리를 위한 논쟁은 주석가들과 교사들의 논쟁이 된다. 따라서 개신교에서는 신학자의 권위가 결정적이며, 이것은 곧 이데올로기적 권위이다.

sola scrlptura의 사회적 결과들

개신교의 사회학적 기초는 특히 sola scrlptura였다. 이 종교 개혁이 이데올로기는 정통시대에 가장 정점에 이르렸다가 자유주의의 득세와 더불어서 그 뉘앙스를 달리했다. 물론 해석학이 sola scrlptura라는 이데올로기의 자체 외해를 가져오게 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해석학은 이 개신교 이데올로기의 자체에 근거한다고 볼수 있다 개신교에 있어서 충성의 문제는 교회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해것학의 문제이다. 목적은 성경해석이고 기독교 진리를 위한 논쟁은 주석 가들과 교사들의 존쟁이 된다. 따라서 개신교에는 신학자의 권위가 결정적이며, 이것은 곧 이데올로기적 권위이다.

 

 

1 자유주의

개신교의 자유화는 그 사회적 성공을 가져왔는 가? 이에 대한 대답은 부정적이다. 종교 개혁은 , 제도의 종교적 진리의 장소를 메시지로 옮겨 놓은 면서 종교 진리를 해석학의 문제로 삼았다. 종교 개혁은 교회 제도의 강대화를 통해 교회적 도구의 항구적 비한을 수립했고 관료적 주장을 의문시했다. 개신교 자유주의는 이렇게 탄생했다.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권위로 성경을 주장할 때 개신교가 근본주의라면 성경의 자유검토에 대한 주장과 모든 교회 행정관리에 대한 거부를 통해 개신교는 자유주의가 된다.

독일 개신교의 예를 통해 자유 신학의 진보 과정을 살피고 오늘날 신학의 내적 자유화 현상을 지적해 본다

우선 충분히 다양한 자유 개신교를 한마디로 어떻게 정의할 것인 ? 스위스 로망드 자유 개신교 연맹현장은 좋은 예다. “진리를 염려하고 또 복음적 메시지에의 충성을 염려하기에 우리는 모든 권위적 체제를 거부하면서 다음과 감든 단언한다; 교리에 대한 신앙의 우위 인간의 자유에의 소명 개혁적 비평의 항구적 필요성, 교회 제도들이 상대적 가치. 모두 구별 없이 하나님의 자녀인 사람들 사이에서 활동적인 우애를 구현하려는 바람 이다”

 

1) 독일 자유 개신교

독일 개신교 자유주의는 1863년 9월 30일 ‘독일 새신교 협회’를 창설하여 복음적 자유정신과 우리시대의 문화적 진보에 부합하는 개신교 교회의 갱신을 주장했다.

자유 개신교의 주관심사 가룬데 하나는 교회의 사회적, 문화적 소외화를 거부하여 교회로 하여금 있는 그대로의 민중과 접촉을 유지케 하는 것이었다. 교리들은 벗어버리고 백성들에게 접근할 수 있는 단순한 신앙, 이것이 1896년 하르낙의 (기독교 세계)에 제시한 것이다.

기독교와 현대를 화해시키고, 그 시대에 현존하기를 원하면서, 동시에자유 개신교는 독일 문화 속에 기독교 신앙을 침수시키고 신학으로 하여금 시대 정신을 매우 잘 받아들이게 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문화적 개신교’로 서 여기에 민족주의가 침투하고 ‘전쟁의 신앙’이 자리잡게 된 것이다.

 

구 자우주의의 대표적 인물들 : 슐라이어 마허, 하르낙, 알브레흐트 리칠, 에르스트 트뢸치. 이들이 19세기20세기초의 자유 개신교 신학을 특징 지운 사람들이다. 2차 세계 대전 후에는 이런 신학적 감성이 쇠퇴가 있었으나 그래도 여전히 살아 있고 개신교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많은 신학자들이 자유주의를 은근히 예의 범절로 삼았다.

자유 신학은 신학 작업에 말도 있데 침투했고 신학의 자유화를 야기 했다.

 

2) 세속주의와 다원주의의 도전과 신학의 자유화

a)세속화의 도전과 신학의 자유화

본회퍼가 전 세대의 자유주의 신학자 계열에 서지 않으나 그의 관심사는 자유 신학의 중심 문제와 연결된다. 세속 사회에서의 기독교의 불가피한 재작성 문제다. 사실 세속화 문제는 잔쟁 이후 신학 무대를 지배하게 된다. 세속화의 도전은 신학이 문화적 고립을 깨고 그 시대의 문화와 접촉을 꾀한다는 점에서 신학의 자유화의 기회가 된다.

루돌프 볼트만은 신약의 비신화화 프로그램과 공관복음 전승의 비평 분석을 통해, 자유 신학의 예수 생애 연구를 다시 츃고 기독교 메시지를 현대문화의 용어로 끌어내야 할 필요성을 우선적 신학 과제로 여겼다.

불트만도 세속화의 도전과 관련된 신학자이며, 하이데거 철학의 도움을 힘입어 기독교의 본질을 끄집어내려 했다.

개신교 신학과, 진보 이데올로기에 의해 봍들린 현대 사회와의 만남은 신학의 자유화라는 최초의 형태를 만들게 했다. 이렇게 해서 현대 다원주의 세계에서 서구 기독교 문화의 상대성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진해된 기독교의 내적 세속화는 가종된 것이다. 다른 종교와 다른 문명 앞에 기독교신학은 스스로를 세속화 시키는 것이다.

 

b)다원주의의 도전과 신학의 자유화

오늘날의 독일 개신교 신학자들이 현대의 문화와 종교의접목과 그 수행의 변이에 관심을 갖고 있음을 보인다. 이제는 문화간의 대화, 종교간의 대화의 시기다. 독일의 학구적 신학은 - 대학의 개신교 신학부의 밀도있는 망을 통해 매우 발전한- 점차 스스로 열등한 문화임을 자각한다. 극서은 지역적인 데서 보다 전세게적이고 연합적이라고 한다.

 

종교간의 대화 맟 제3세계의 종교적 표현들과의 만이 갖는 중요성, 그리고 탈 근대성에 대한 문제들은 근대성의 해고를 의미하지 않는다. 반대로 근대성은 너무도 비틀린 수가 없기 때무넹 신학 과업의 넘어설 수 없는 지평이 되는 듯하다.

1981년 비엔나에서 열린 제4회 유럽 신학 회의는 신학이 계몽을 인정했고 따라서 현재 대다수의 신학자들 가운데서 반계몽을 위한 자리는 없음을 보여줬다.

개신교 신학자들은 근대성의 발전 자체에 민감하여 탈근대성 존쟁에 참여하고 있다.볼프강 벨시는 그의 책 “우리의 탈근대적 근대”에서 사람들이 탈근대라고 부르는 것이 근대성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급진적 다원성의 형태로, 근대성이 활동하는 방식 그 자체라고 지적한다.

 

 

c) 돌아온 트롤취

트롤취는 두가지 것에 민감했다. 곧 역사의 위기와 신학의 위기이다. 그는 역사 방법론을 주석의 영역과 기곡교 그룹 역사 영역에 사용한 것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종교와 문화 사이의 결별이 있고 기독교를 이 둘의 접목속에서 다시 생각해야 했다.

 

3) 자유주의 의 사회적 결과들

종교한 확신으로 행해야 할 것인데 자유 개신교는 어떤 것이 참일 수 도 아닐 수도 있다고 또 부분적으로 아니면 어떤 사람들에게만 참일 수 있다고 믿기를 가르치기 때문에 이런 종교적 표현에서는 열렬한 참여를 전개시키기 어렵다.

자유 개신교는 사회화를 통해서 조금밖에 모집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신념의 확산 체계처럼, 어린아이들을 교육할 의지가 없고, 외부인들은 회심 시킬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2 결별의 신학(1)- 바르트주의

1) 바르트 (1886-1968)

자유주의에 대해서, 그리고 1차 세계 대전이 야기하여 붕괴된 이후, 바르트는 모든 자연 신학과 인간 경험에 종교적 진리를 뿌리 내리는 모든 근거를 거부했다.

바르트는 모든 인간 이데올로기의 신학적 강연을 최대한 멀리하면서, 신앙의 객관성을 주장하려 했다. 곧 그리스도의 희생에 단법에 주어진 신앙, 인간의 종교 경험이나 역사 흐름의 변동에 의존하지 않는 신앙이다. 이것은 결국 시간을 초월한 신학 강연으로 이끌게 했으며 인간 역사와 동시대의 문화적 배경에 그가 관심을 갖지 않게 했다.

 

2) 바르트주의

바르트주의는 1차 세계 대젼에 뒤이어 나치의 등장으로 이어진 혼돈에 신학적 응답을 제공했다. 그리고 바르트주의는 신앙의 객관성을 중장하여 개신교 교회를 주관주의에서 건졌으나, 다른 한편으로 교회를 인식력 있는 소수로 변형시켰다.

바르트주의는 에큐메니칼 운동을 도왔다는 사실이다. 바르트주의에서 교회의 신학을 발견했고 개신교임에도 불구하고 대화의 가능성을 보았다.

또한 의도적 논리와 객관적 논리사이의 이런 구별은 바르트주의의 사회정치적 결과들을 잘 정리하게 한다.

 

개신교 근본주의의 역사적 기원

역사적으로 ‘근본주의’라는 말은 20세기 초에 미국에서 나타났다. 이 용어를 처음 쓴 사람은 보수적 잡지 watchman-examiner의 편집 주간이었던 커티스로스라는 침례교인이었다(1920), 하지만 기독교의 근본의 회복을 위한 운동은 이미 19세기말의 부흥 운동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무디야말로 북미 근본주의 운동의 기수였다. 이 근본주의 운동의 성장은 미국의 몰락과 미래의 두려움이라는감정에 기초한 전천년설의 확신의 상승과 병행한다. 남북 전쟁과 카톨릭의 이민 물결 이후 확신에 대한 위기가 제도적으로 나타났다. 다원주의는 미국 성경주의의 수용성 구소에 대한 위기를 가져왔다. 이처럼 초기 근본주의는 사회 문화적 동요와 무질서 상황에 응답하려는 시도로 나타났으며, 그것은 변화에 맞선 항의요 근본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것이다.

 

 

결론

종교 개혁 이후 개신교의 흐름은 매우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본래 다양성을 가지고 출발한 개신교 사회는 그 신학과 사회학의 양면에서 동일도니 모습을 형성할 수 가 없었다. 비록 하나님에게 영광의 이념이 그나마 개신교 사회의 구심점이 되어 왔지만 이제 그 이념은 해석학에 의해 퇴색되고 만 느낌이다.

19세기 자유주의의 반발로 나온 결별의 신학들이 다시 한번 그 이념의 가치를 세웠지만 개신교의 전반적인 흐름은 WCC를 중심으로 한 연합 운동들이 주도한인상이다. 그리고 이 경향은 기독교의 정체성을 상실할 만큼 머릴 가려졌다. 어쩌면 개신교의 일부는 카톨릭보다도 더 개신교 자체에서 멀어진 것 같다. 종교적 다원주의는 종교적 바리새주의와 더불어 언제나 하나님과 예수 그리수도의 탄식의 대상이었다.

우상과 미신과 율법주의가 판을 칠 때 주님은 늘 언약을 갱싱하곤 했다. 개신교 500년을 향해 가는 이 시점에서 개신교와 하나님과의 언약의 문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이 유대교와 맺은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와 더물어 갱신되었다. 그리스도와 언약을 맺은 기독교는 카톨릭의 이름으로 1500년능 지탱했으나 종교 개혁을 통해 언약 갱신의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동방 정교회의 흐름도 동일한 시각에서 다룰 수 있다. 이젠 개신교의 차례인가? 물론 21세기를 예측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려되는 바 없지 않다. 언약은 갱신되어도 제도는 영원하다. 우리의 역사에 여전히 유대교, 정교회, 카톨릭이 남아 있듯이 개신교는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우리가 풀어가야 할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남아 있느냐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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