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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20세기 이야기 : 가공의 시대

라은성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21. 4. 20.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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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20세기 이야기 : 가공의 시대

  16세기부터 시작된 우리의 이야기는 마침내 20세기에 이르렀다. 20세기는 교파적 특성이 점점 사라지고 초교파 운동이 일어난 세기다. 선교의 영향이 있기도 했지만 사회적으로 글로벌 시대가 되면서 고립되지 않기 위해 이러한 운동이 일어났다. 하나 된 세상을 만들고 싶어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라 평가할 수 있다.  20세기의 특징으로 은사 운동을 꼽을 수 있다. 은사 운동은 한국 교회에서도 널리 유행하고 있는데 신비적 체험을 통해 임재를 확신하고 복잡하고 힘든 세상을 잠시라도 잊고자 하는 운동이다. 그리고 20세기는 신학적으로는 자유주의와 복음주의의 세기다. 계몽운동에 근거한 철학적 신념이 기독교를 타격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리에 이성이 자리 잡은 것에서 인간이 세상을 창조하고 다스리는 쪽으로 변해 가고 있다.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나온 것이 하나는 자유주의고 다른 하나는 복음주의다. 자유주의는 변화하는 20세기 문화를 많은 부분 수용하겠다는 입장이고, 복음주의는 덜 수용하겠다는 입장이다.  ...    

 

 

2. 사도적 운동

  부흥 운동은 은사 운동으로 쉽게 옮겨 간다. 은사 운동으로 향하는 이유는 부흥 운동이 성결 운동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성결 운동은 거룩한 삶이나 완전한 삶을 꿈꾸는 것인데 지상에서 이런 삶을 꾸게 하는 것은 매우 매력적이었다. 은사 운동은 성령의 강력한 임재를 체험하고자 열망하고, 그 성령의 임재를 은사로 체험하고자 하는 것이다. 또 은사를 체험하고 행하는 것을 통해 성령의 임재를 확신하고 그 확신 속에서 무엇이든 이뤄질 수 있다는 생각을 갖기에 이른다. 거룩한 삶을 살겠다는 것 자체가 그릇된 것은 아니지만 은사를 받아야 성령의 임재를 확신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은사 받는 데 중점을 둔다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 은사 운동은 곧 오순절 운동으로 돌아가서 해법을 찾으려 한다. 그래서 은사 운동은 사도적 신앙에 관심을 갖게 된다. 사도적 신앙(Apostolic Movenient) 1세기 그리스도께서 승천한 후 초대 교회 성도들이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고 그 증거로 은사를 받았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은사 운동, 오순절 운동, 사도적 신앙, 성령의 임재, 성결 운동은 모두 같은 범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오순절 운동과 퍼함

 은사 운동은 성결 운동과 부흥 운동에 그 기초를 둔다. 이런 운동은 이미 2세기 이단 몬타누스주의에서 일어나 역사에서 이따금 나타나다가 매스컴을 통해 널리 알려지면서 미국, 유럽, 아시아에 두루 퍼져 나갔다. 세 가지 특징을 갖는데 '성령 세례‘, 방언’(기독교에서 말하는 '방언은 보통 '천상의 언어'를 가리킨다. 그리고 사도 바울도 방언을 할 줄 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치유.

 

 

1) 애주사 스트리트

 19세기 3차 대각성 운동, 즉 성결 운동을 주도한 인물은 무디와 그의 후계자 토레이였다. 이들은 성령 세례도 강조했다. 실례로, 1873년 무디는 선더랜드에서 집회를 인도하고 있었는데 YMCA 방에 들어서자마자 그곳에서 불처럼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고, 젊은이들이 방언과 예언을 행하고 있었다고 한다. 오순절주의의 특징인 방언은 19세기에도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었다. 본격적인 오순절 운동은 1900년 가을에 미국 캔자스 주의 토피카에 있는 베델 바이블 칼리지(Bedel Bible College)에서 일어났고, 그 학교의 학장이 감리교 복음 전도자였던 찰스 퍼함(Charles F. Parhain, 1875-1929)이었다. 그리고 또 한 명의 대표적 인물이 월리엄 시모어(William J. Seyniour, 1870-1922)였다.

 

  찰스 퍼함은 사우스웨스턴 칼리지를 졸업했지만 감독제도 교회에서 수임 받지 않고 순회 성결 운동가로 활동하고자 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질병에서 치유된 후 병을 낫게 하는 사역에 힘쓰게 되었다. 그는1898년 캔자스 주의 토피카에 베델 치유 안식처(Bethel Heailng Home)를 설립하고 사도적 신앙“(Apostolic Faith)이라는 잡지도 출판했다. 그리고 1900년에는 그곳에 베델 바이블 칼리지를 설립했다. 그는 모든 재산을 팔아 연구와 기도를 위해 썼고 등록금을 받지도 않았다. 당시 약40명의학생이 등록했고 유일한 교과서는 성경이었으며, 교사는 성령이었다.

 

  1900 12 31일 베델에서 철야 예배가 있었는데, 다음 날 저녁, 그러니까 1901 1 1일 그들 중 애그너스 오즈먼(Agnes Oznian, 1870-1937)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는데 누구든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였다고 한다.  1903-1904년 겨울집회를 통해 천 명의 청중 가운데 8백 명 가량이 회심했다. 이제 이 운동은 텍사스, 캔자스 그리고 오클라호마 주로 뻗어 나갔다.

 

  1906년 퍼함은 휴스턴에 성경 학교를 설립했는데 등록한 학생 중한 명이 아프리카계 월리엄 시모어였다. 퍼함은 그와 함께 휴스턴에 있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했고 시모어를 보내 텍사스 전역의 흑인 공동체에 복음을 전파하도록 했다. 같은 해 퍼함은 시모어를 로스앤젤레스로 보내기도 했다.

 

  월리엄 시모어는 1906년 애주사 스트리트 부흥Azusa Street Hevival의 주역이다.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의 애주사 스트리트 312번지에서 있었던 모임을 가리켜 애주사 스트리트 부흥이라 하는데, 이 부흥은 오순절주의를 확대시키는 계기가 된다. 이 모임의 지도자였던 시모어는 나무 상자로 만든 강단 뒤편에 앉곤 했다. 외눈을 가진 지도자는 가끔 강단 안으로 머리를 넣고 기도하면서 회중들로부터 자신을 숨기곤 했다. 그는 예언, 방언 및 통변 등을 하며 예배를 드리는 동안 확실한 말씀으로 권했다. 선호했던 찬송은 보혈 밑에’(Under the Blood) 이 기쁜 소식을’(he Comforter is Come)이었다. 그는 이따금 하늘의 찬양대를 흉내 내는 것처럼 방언으로 찬송을 부르면서 새로운 자들에게 경외감을 주곤 했다. 이 집회는 1906년부터 1909년까지, 3년 동안 아무 문제없이 지속되었다. 모순절파는 오순절 운동이 여전히 현재도 일어나고 있다고 믿었다. 이 운동은 미국을 강타했고 오순절파 교회들은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성결 계통의 교회들은 이 운동을 적극적으로 반대했지만 하나님의 성회(Assemblies of God)는 아칸소주의 핫스프링스에서 1914년 총회를 개최했다. 오순절 운동은 두 주축으로 나뉘는데,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Church of God in Chruch)와 오순절계 성결교회)(Pentecostal Holiness Church). '오순절 운동의 중심이 퍼함에서 시모어로 옮겨 가자 퍼함은 분개했다. 그는 다양한 류머티즘 열병으로 고생하다가 건강이 악화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치유 받았다고 설교했지만 건강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1927년 심장 발작을 겪은 퍼함은 1929 1 29일 캔자스주의 백스터스피링에서 임종을 맞았다.

    

 

2) 케직 운동

  일종의 오순절 운동으로 알려진 더 높은 삶의 운동(higher life movement)은 영국에서 일어났다. 이 이름은1858년에 출간된 더 높은 기독교인의 삶(The Higher Christian Life)이란 책 제목에서 나왔다. 이 책은 그리스도의 칭의 이후 성화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이 책에 매료를 느낀 사람들은 이 책이 성경적인 내용이라고 확신을 갖기보다는 일상적인 삶에서 일어난 일들에 더 관심을 가졌다. 이 책의 저자인 월리엄 보드만(William Boardinan, 1810-1886)은 미국과 영국에 널리 알려지면서 더 높은 삶의 교훈의 대변자가 되었다. 1874년 브로드랜즈와 옥스퍼드에서, 1875년 브라이턴 및 케직에서 대중 집회가 개최되었다. 케직 집회로 인해 이 운동은 널리 인식되었고, 이를 가리켜 승리적 기독교인의 삶’(victorious movement)이라고도 한다. 그 주축은 프레더릭 마이어(Frederick B. Meyer, 1847-1929), 앤드루 머리(Andrew Murray, 1828-1917), 루벤 토레이 등이었다.

 

  이 운동의 특징은 죄성 있는 그릇된 열정에서 구원받아야 하고, 율법을 어긴 자발적 범죄(voluntary transgressions)를 멈춰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인은 유혹과 도덕적 연약함의 모든 형태에 대해 무한한 승리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3) 은사운동과 베넷

 앞에서 언급한 오순절 운동을 가리켜 제 1물결이라 부르고, 여기서 다루는 은사 운동 또는 카리스마 운동(Charismatic Movement)을 제 2물결이라 부른다. 오순절 운동의 시기가 20세기 초라면, 은사 운동은 프로테스탄트와 로마가톨릭에서 196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미국 감독제 교회의 우파는 이 새로운 운동의 충격을 제일 먼저 접하게 되었다. 그때는 i960년 부활절이었고 그 주인공은 바로 사제 데니스 베넷(Dennis Bennett, 1917-1991)을 비롯한 존과 조안 베이커 부부다. 베넷이 1960 4 3일 고난 주간에 설교를 했을 때 대중이 오순절성령 강림과 같이 방언을 했다고 한다. 이 일로 인해 말썽이 일어나자 그와 함께하던 부교역자들과 회계가사임을 하면서 베넷은 일자리를 잃을 정도였고 주위 사람들로부터 괴팍한 자로 낙인이 찍혔다. 그런데 점점 은사 체험을 하는 사람들의 수가 증가하면서 교회 참석자 수는 배로 늘었다 1973년 베넷은 오전 아홉 시“(nine O'CIock In Ihe Morning)라는 책을 썼는데 이 책으로 인해 세계 각처로 알려지게 되었다.

   

 

신은사 운동과 와그너

  오순절 운동, 은사 운동 및 신은사 운동을 가리켜 1물결, 2물결 그리고 3물결이라 부른 사람이 피터 와그너(Charles Peter Wagner, 1930-2016). 이 운동들의 시기는 각각 20세기 초, 20세기 중반 그리고 20세기 후반으로 구분할 수도 있다.

 

  와그너는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풀러신학대학원 교회성장학 교수였다. 3의 물결이란 용어는 1988년에 출판된 그의 책 성령의 제 3의 물결”(The Third Wave of the Holy Spirit)에서 유래되었다. 이 물결은 빈야드 운동을 시작한 존 윔버(John Wimber, 1934- ) 1981년에 그 학교에서 했던 수업에서 시작되었다.

 

  신은사 운동은 은사 운동의 일종이지만 특별히 표적(초자연적 능력에 의해 외부로 나타난 현상)과 기사(기이하고 경이로운 일 또는 장래 일에 대한 징조나 암시), 복음 선포에 강조점을 둔다는 점에서 은사 운동과 구분된다. 교회 성장의 원리로 성령의 초자연적 사역을 적용시키다 보니 교파를 초월하여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신사도운동

지금까지는 사도적 운동을 이야기했다면, 신사도 운동은 선지자와 사도의 직분을 회복시키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사도 종교개혁(New Apostolic Reformation)이라 불린다. 이 운동은 G12, 즉 열두 명의 제자화 운동에서 비롯되었다. 누구든 그리스도의 열두 명의 제자에 속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열두 명의 원리 정치(government of 12)라는 말에서 G12라는 용어가 나왔다. 목회자는 세포, 즉 셀cell 지도자가 되기 위해 열두 명을 훈련시킨다. 이렇게 해서 이뤄진 셀 지도자는 열두 명을 훈련시키는 데 책임을 진다.

 

 신사도 운동은 다섯 가지 직분(에베소서 4:11), 즉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및 교사를 강조한다. 이들 모두가 교회를 세우는 데 요구되는 직분이었던 것처럼 교회 성장에도 이 직분들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현시대에 이 직분들을 회복시켜야 한다는 것이 신사도 운동의 핵심 사상이다. 이런 지도자들은 사도들처럼 영적 체험, 즉 은사나 표적에 정통해야 한다. 그래야 그 직분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자유주의

 자유주의(liberal Christianity, theology)는 계몽운동의 영향을 받은 철학적 신앙을 바탕으로 한 사상이라 말할 수 있다. 이성이 최종적 권위를 갖는 신앙이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과학과 현대 문화를 기독교에 적용시키고 화해시킨다. 그들은 과학은 누구든 용납할 수 있는 것이고 성경은 그렇지 않다는 결론을 내린다. 몇 가지 특징을 갖는데 성경의 영감설, 동정녀 탄생, 예수님의 부활을 부인한다. 또 지옥은 실제적이지 않다고 보며, 예수는 도덕 선생이지 하나님이 아니며, 현대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이웃사랑이라고 주장한다.

    

 

4. 복음주의

  사도적 운동, 신사도 운동 및 자유주의는 모두 사회운동을 지향한다. 하나님을 중심에 놓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이용하여 인간을 위하는 것이다. 또 이 사상들은 인류애를 중요시한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이에 대해 정통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들은 논쟁하고 분열하여 분파를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분열이 대안만은 아니다. 세상 속에 기독교인이 있는 것이고,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목표이기도하다. 그렇지만 비성경적인 경향의 이상의 사상들과는 다른 성경적 사상을 추구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복음주의(Evangelicalism)인 것이다.

 

  복음주의는 그리스도와 개인 신자 사이의 개인적 관계라는 의미에서 이해된 성경을 향한 경외심과 그분의 신적 인격에 대한 헌신으로 인해 일어나는 사상이다. 다시 말하면,그리스도가 자신의 죄를 위해 처벌받으셨다는 믿음 안에서 깨닫고 개인의 극적인 결과들을 마음과 삶에 허용하는 믿음을 가질 때 일어나는 개인적 회심의 경험을 강조한다. 칼뱅과 경건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복음주의는 청교도주의 또는 개혁신학에 근거한다고 하지만 극단적으로 나가면 근본주의(Fundamentalism)가 되고 만다.

 

  복음주의의 강조점은 기독교를 비기독교인들에게 전하는 임무, 즉 복음화에 있다. 20세기 복음주의의 중요한 인물로 미국의 복음주의자 빌리 그레이엄(Billy William Graham, 1918- )을 들 수 있다. 이와는 조금 다르게 보수파 복음주의도 있는데 정통과 고전 교리에 비중을 두고 성경적 헌신을 우선순위에 둔다. 물론 복음화에도 관심을 갖는다. 보수파 복음주의의 지도자로는 미국의 제임스 패커(James Innell Packer, 1926- ), 영국의 존 스토토(John Robert Walmsley Stott, 1921-2011)와 프레더릭 브루스(frederick Fyvie Bruce, 1910-1990)를 들 수 있다.

   

 

5. 교훈

  20세기는 과학주의 또는 모더니즘이 일었던 19세기의 다음 시기다.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즘(poetmodernism)의 시대라고 하기도 한다. 1차와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19세기의 망령은 점점 사라지고 말았다. 인간이 결코 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그 망령은 여전히 살아남아서 초자연적 힘을 통해 그것을 유지하고자 한다. 그렇다고 과학주의를 포기한 것도 아니다. 새로운 방식의 과학을 통해 여전히 세상을 다스리려고 한다. 그 노력과 기상은 정말 놀랍다.

 

  교회는 20세기에 들어서서 변하는 세상에 직면하기보다 비껴가려는 활동을 추구했다. 그것이 바로 사도적 운동이고 현대의 신사도 운동이다. 이것은 비주류임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주류처럼 되어 버렸다. 비주류인 이유는 뚜렷한 교리가 없기 때문이고 그 정체성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주류는 자유주의와 복음주의다. 전자는 독일 중심이고, 후자는 미국 중심이다. 전자는 자신들이 이미 기독교인임을 전제하여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라면, 후자는 자신들이 기독교인임을 분명하게 하면서 사회문제에 조심스럽게 또는 성경적으로 관심을 가지자는 입장이다. 어느 입장이든지 교회는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해야만 한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면서 인간이었던 것처럼 교회도 하나님 중심인 동시에 인간 중심이어야 한다. 그 한계성이 모호하여 자유주의와 복음주의로 나뉘지만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선 결코 안 된다.

 

  일각에서는 사회운동을 통해 변화를 도모하고자 하는 교회의 움직임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1929-1968)을 들 수 있다. 그는 복음 선포자라기보다 사회운동가로 더 알려졌지만 자신의 삶을 통해 사회에 대한 기독교인의 책임과 의무를 부각시켰다. 그를 통해 배울 수 있는 큰 교훈은 그가 어떤 교회 단체를 이용하여 사회의 부조리를 지적한 것이 아니라 한 시민과 국민으로서 나섰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도 어떤 문제가 있다면 기독교인이 나서야하지만 어떤 교회나 예수님의 이름을 악용하지 말고 순전한 사회인으로 행동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모습일 것이다.

 

- ‘종교개혁 그리고 이후 500’, 라은성, 을유문화사, 2017.10.30. P.214-227

[출처] 20세기 이야기 : 가공의 시대 - 라은성|작성자 바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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