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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주차. <구원론강설> 구원의 확신을 가져라

최더함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21. 5. 11.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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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주차. <구원론강설> 구원의 확신을 가져라 2020. 9. 20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내가 그들의 죄를 없이 할 때에 그들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롬 11:26~27)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벧후 1:3~4)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밷후 1:10~11)

 

구원의 방편,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은 구원을 위한 은혜의 방편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제시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의 우일한 길이자 해결책입니다. 그런데 구원이라는 뚜껑을 열어보니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부만 구원을 얻습니다. 그 일부가 누구인가를 알아보니 영원 전에 하나님이 비밀한 뜻과 계획을 가지고 택하여 두신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이 자녀들은 시대마다 태어나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회심과 중생을 거쳐 믿음을 선물로 받아 의롭다고 칭하여 지고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어 거룩한 삶으로 성화되고 있고, 구원을 잃어버리자 않도록 보존되고 견인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을 받고 구원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을 일러 우리는 ’그리스도인‘ 혹은 ’성도‘라고 부릅니다. 아마 지상에서 이보다 더 위대하고 독특한 이름은 없을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바로 이 이름을 가슴에 달고 이 땅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위대한 이름을 가진 사람들로 알려져 있으면서 간혹 사는 모양을 보거나 믿음의 정도를 볼 때에 왠지 구원에 대한 확신은 커녕 정말 저 사람이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인가 할 정도록 의구심을 자아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구원에 대해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그리하여 전혀 거룩한 성도로서의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갈까요? 오늘은 그 이유에 대해 알아보기를 원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고 만약 자신이 이런 경우에 해당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거든 즉시로 회개하고 주님에게로 완전히 돌아서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간청드립니다.

 

2. 나약한 그리스도인들

 

알다시피 토저 목사님은 교회와 세상 두 영역에 적당히 자리를 잡고 사는 사람을 ’양다리족‘ 혹은 ’가련한 잡종‘이라 하면서 호된 질책을 쏟았습니다. 이런 부류의 특징을 구원의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이라 진단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구원과 동시에 영적으로 새로 태어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일러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이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새로 태어난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앞으로 더 중요한 것은 ‘영적으로 성장’하는 일입니다.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면 그 사람의 인생이 거룩한 인생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성장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요소가 있다면 ‘내가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입니다. 이 확신이 마음 속에 견고하게 자리를 잡아야만 안정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영적으로 매일 성장하고 성화의 길에 들어서는 것입니다. 이런 성도를 하나님이 끝까지 책임을 지시고 견인하시어 천국에 입성토록 도우십니다.

 

그런데 확신이 없는 나약한 그리스도인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을지를 확신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신앙생활을 하니 매사가 불안하고 두려운 것입니다. 그런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상태는 우리를 사탄과 세상과 육신의 공격에 매우 취약하게 만듭니다. 이런 인생은 계속해서 사탄의 노예가 되어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이 직접 목숨 값을 치루시고 우리를 사탄과 죄의 노예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런데 계속 세상을 등지지 못하고 세상과 더불어 사는 것은 마치 노예에서 해방을 시켜 주었는데도 그것을 확신하지 못하고 자신은 노예로 계속 살겠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의외로 우리 주변에 이런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이런 분들의 특징은 자신의 인생이 늘 한결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기복이 심하고 굴곡이 많습니다. 불안정하고 흔들리는 터 위에 있는 것처럼 마음이 요동칩니다. 이번 주에는 너무나 기분이 좋은 듯 하다가 갑자기 다음 주엔 우울해져서 말도 걸지 못할만큼 무거운 분위기를 딥니다. 그럴 때면 옆의 사람이 가까이 다가가기도 힘듭니다. 그래서 신뢰할 수 없는 사람으로 낙인받고 삽니다. 교회 안에서도 다른 성도들의 신뢰를 받지 못합니다. ‘저 사람은 언제든지 교회를 떠날 수 있는 사람이야’라고 다른 성도들이 속으로 생각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알고보면 참 다양한 사람들이 섞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R.C 스프라울 목사님은 <Growing in Holiness>에서 세상에는 네 부류의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약간의 순서를 바꾸고 여기에 제 의견을 첨가해 소개합니다.

 

➊ 첫 번째 부류는 은혜의 상태 안에 있고,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 이들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구원에 대해 확실히 알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충분히 일상생활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와 사랑의 교제를 나누고 있음을 경험하고 삽니다.

 

➋ 두 번째 부류는 은혜의 상태에 있지도 않고 아예 무시하는 불신자들입니다.

~ 이들은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 밖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특이한 것은 그 사실을 자기들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없다고 스스로 말하기도 합니다. 어떤 이는 자신은 하도 죄가 많아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고 단언하면서도 껄껄 웃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웃을 일인지 모를 일입니다. 그는 아마 지옥의 불길의 참혹함에 대해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따위 지옥같은 이야기를 믿으라는 것을 매우 무시하고 큰소리칩니다.

➌ 세 번째 부류는 이들은 구원을 받지 못했음에도 자신이 구원을 받았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입니다.

~ 이것은 주로 이단적인 교리를 신봉하거나 혹은 성경말씀을 자기식대로 해석하거나 전혀 다르게 해석하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미안하지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성경에 계시되고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의 본래의 뜻과 의미를 왜곡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개혁신학은 이미 이런 부분에 대해 충분히 연구하고 검증된 해석의 방법과 원칙과 원리들을 마련해 두었습니다. 왜 개혁신학이 중요한가 하면 바로 성경해석을 바르게 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➍ 마지막으로 네 번째 부류는 오늘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부류입니다. 즉, 은혜의 상태 아래 있지만 그 사실을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 이런 사람들은 우리를 안타깝게 만듭니다. 이미 자신이 구원을 받았음에도 그것을 알지 못하거나 확신하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마치 오리새끼가 닭 어미 품을 빌려 태어나고 자란다 해도 오리는 오리고 닭은 닭입니다.

 

3. 구원을 확신하지 못하는 이유들

 

이제 오늘 우리가 중점적으로 살펴볼 것은 네 번재 부류의 사람들은 왜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지 못하고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다섯 가지로 정리해보겠습니다.

 

첫째, 확신이 없는 가장 첫 번째 이유는 당연히 회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놀랍게도 회심하기 전의 인간은 의인이 아닙니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0)고 분명히 선언합니다. 한 발 더 나아가서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으며(3:11), “다 치우였고 선을 행하는 자도 없다”(3;12)고 밝힙니다. 그래서 죄인은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아니 찾을 능력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회심하기 전에는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제 마음대로 삽니다.

~ 그런데 죄인은 늘 도망자처럼 삽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숨기에 바쁩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죄를 지은 후 하나님을 피해 숨은 것처럼(창 3:8) 죄인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도망치려고 애를 씁니다. 따라서 누군가 그에게 접근하여 “하나님을 찾으라”고 하면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왜 놀랄까요? 자기도 모르지만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본능적으로 죄인은 자신이 구원받지 못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아무리 부정한다 해도 구원을 받지 못한 자기 인생의 비참함이 무엇인가를 숨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영생의 도리, 즉 구원의 진리에 대해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구원의 도리를 멀리하는 것입니다.

~ 예수님이 어려운 진리를 가르치자 제자들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요 6:63절을 보니, “그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에 매료되어 따라다니면 무언가 얻는 것이 있을 거라 생각하며 추종했던 일부 제자들이 예수님이 점점 이상한 말을 하고 자신들이 기대하는대로 움직이지 않자 분노와 함게 발길을 돌린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향해 “너희도 가려느냐?”(요 6:67)고 물으셨습니다.

~ 이때 열두 제자들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그 누구도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 ‘좋아합니다’ ‘훌륭합니다’ ‘구원의 가르침을 확실히 이해하고 내가 받은 구원을 확신합니다’고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베드로는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의중을 간파하고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 6:68)라고 대답했습니다.

~ 여기서 우리가 간파해야 할 것은 베드로처럼 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지 않으면 누구도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확신이 없으면 누구도 신앙의 발전이 없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확신이 있었기에 다른 추종자들처럼 예수님을 떠나지 않고 가장 가까이 붙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이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런 지식이 없이는 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을 리 만무합니다.

 

셋째, 영적 침체로 인해 확신이 소멸되기 때문입니다.

~ 구약 시대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의 영적 변질을 반복적으로 언급하고 기록했습니다. 이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단어가 주로 예레미야서에 나타나는데 그것은 히브리어로 ‘메슈바’이고, 우리말로는 ‘패역함’입니다. NIV 등 현대성경은 ‘반역’(rebellion)이라 변역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유다에 대해 “이는 그들의 허물이 많고 반역함이 심함이니이다”(렘 5:6)고 지적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신을 근심케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사 63:10)고 하고 말하면서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사 1:4)고 당대의 백성들을 고발했습니다.

~ 이스라엘은 언약 백성이면서 여호와의 교훈을 듣기를 거부하고(사 30:9), 여호와의 영광과 무가치한 우상들로 바꾸었으며(렘 2;11), 종교적인 행음에 몰두했습니다(호 4:10~11). 백성들은 집단적으로 여호와께 등을 돌리고 하나님께 ‘메슈바’했습니다. 그 결과 자신들이 언약백성임을 자각하지 못하고 깊은 침체의 상태에 빠져버렸습니다. 그 귀하고 귀한 택한 백성이라는 자부심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습니다. 이스라엘에 깊은 영적 어둠이 내려앉았습니다. 그들에겐 더 이상 구원의 빛이 보이질 않았습니다. 얼마나 그들의 삶이 피폐해겠습니까? 만약 당신에게도 이런 영적 어둠이 내려앉았다면 당신의 인생은 참으로 고난과 고통으로 점철될 것입니다.

 

넷째,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진정한 감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 구원의 전 과정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에 칭의가 선언되고 그 순간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시켜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로부터 새롭게 태어난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은 전혀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만약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영접했다고 하면서 이전과 전혀 삶이 변하지 않았다면 그는 진짜로 거듭난 것이 아닐 것입니다.

~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의 죄인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해서 모든 것이 일시에 변하거나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르틴 루터가 표현한 대로 우리는 여전히 ‘의인인 동시에 죄인’입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가요? 언뜻 생각하면 모순처럼 들립니다. 이를 이해하고 믿기 위해선 먼저 기독교는 하나님 은혜의 종교라는 것을 유념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공로나 행위를 보시고 판단하시어 우리를 구원시켜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원 받을 자격을 갖출 때까지 기다렸다가 우리를 구원시키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거룩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우리를 의롭게 여긴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롬 5:8)고 증언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도록 모든 조치를 사전에 다 행하시고 우리를 그곳으로 이끌어주신 것입니다.

~ 이것은 실로 놀라운 은혜의 백미입니다. 누가 이런 은혜를 베풀 수 있습니까? 죄인은 모름지기 단 하나의 의로운 점을 가지고 있지 못한 추악한 존재입니다. 이런 추악한 존재는 단 한 시라도 하나닙의 나라에 자리를 차지할 수 없으며 차지해서도 안됩니다. 그런데 이 추악한 죄인 중 몇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 천국으로 자리를 옮기도록 한 것이고, 그 대상이 바로 ‘나’라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우리를 감동시키는 은혜는 없을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평생 구원에 대한 확신과 함께 감사의 마음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다섯째, 습관적인 죄로 인해 확신에 금이 가기 때문입니다.

~ 우리의 육신은 여전히 나약합니다. 육신의 일은 죄악된 일입니다. 육신의 일은 욕망으로 가득찬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육신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다”(롬 7:18)고 고백했습니다. “마음으로는 선을 원한다 해도 지체속에 있는 죄의 법이 나를 사로잡는다”(7:20~23)고 하고,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긴다”(7:25)고 고백했습니다. 다시 말해, “육신이 곧 죄”(8:3)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신의 생각은 사망”(8:6)이요, “하나님과 원수”(8:7)이며,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고”(8:8),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8:9)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실상 우리의 신앙생활을 저해하는 가장 중요한 적은 우리 육신입니다. 이 육신에 관련된 모든 것으로 인해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지 못합니다. 육신은 계속해서 우리를 현재의 삶에 집착하도록 유혹합니다. 지금 당장 편안하면 좋습니다. 지금 당장 벼락 부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지금 당장 무시무시한 능력을 가지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잘남과 위력과 능력을 뽐내고 싶어 하고 군림하고 싶어하고 명령하며 통치하기를 바랍니다.

~ 육신의 일에 오래동안 종사한 사람의 습관이 하루아침에 변하여 거룩한 삶으로 돌아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노력은 물론이고 간절하게 성령님의 도움을 구하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기도의 목적입니다. 기도는 열심히 사는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불설실한 사람의 기도는 힘이 없고 하나님이 듣지 않습니다. 열심히 살며, 열심히 거룩을 향해 소망하고 절제하고 노력하는 사람의 기도는 하나님의 응답이 큽니다. 그리고 열심히 사는 사람만이 진실된 기도를 드립니다. 일주일 동안 실컷 육신의 일에 몰두하고 육신을 즐긴 사람이 갑자기 주 앞에 나와 “저의 기도를 들어달라”고 한다면 그것은 넌센스입니다.

~ 특히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이 범하기 쉬운 습관적인 죄들이 많습니다. 음주 문제, 흡연문제, 이성관계와 돈 문제에서부터 아주 사소하게 보이는 일들, 즉 주일날 오락하는 일, 별 생각없이 앉아서 연속극에 푹 빠져 밤늦도록 TV를 시청하는 일, 어떤 계획이나 규모없이, 되는대로 하루하루 무심하게 일상을 보내는 일, 이도저도 아니면 틈만 나면 침대에 누워 잠을 자거나 뒹구는 일들을 생각해 보세요. 이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인이라면 기피해야 할 육신적인 일들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무슨 구원의 확신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확신이 없으니 매일 마음이 달라지고 작심삼일이요 조변석개의 라이프스타일로 허송세월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신뢰마저 얻지 못하고 살 것입니다.

 

 

4. 결어: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

 

어떤 일을 하면서 ‘확신’(assurance)보다 더 큰 에너지는 없습니다. 지옥에서 천국으로 건너가는 다리가 안전하다는 확신이 없는 사람은 두 다리를 떨면서 두려워할 것입니다. 대개 고소공포증이나 비행기 타는 것을 두려워 하는 사람은 비행기가 안전하다는 사실보다 비행기 추락을 먼저 떠올림으로 극심한 불안증세를 가지는 것입니다. 확신이 없다는 것은 긍정적인 요소보다 부정적인 요소를 먼저 생각하거나 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행기가 다른 교통수단에 비해 현저히 사고율이 낮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비행기를 안심하고 타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고 이 받은 구원을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일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약속하심에 따라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잃어버릴 가능성은 전무합니다. 한편으로 이 확신은 우리는 절대로 이전처럼 방탕하거나 타락한 사람을 살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으로 발전합니다. 그러므로 구원에 대한 확신은 우리를 거룩한 백성이 되도록 도와줍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굳센 약속입니다. 오늘 본문 벧후 1:3~4의 말씀이 이를 증명합니다. 이 확신이 있기에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더욱 보람있게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벧후 1:3~4)

 

그러므로 잠시 확신에서 멀어져 있다 해도 두려워 마시길 바랍니다. 특히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형펜에 있다 해도 하나님은 굴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떠나시거나 버리시거나 외면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비록 당신이 잠시 구원에 대한 확신을 잊어버리고 방황하고 유혹을 받아 다른 길에 들어섰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기어이 당신의 손을 붙잠고 당신을 다시 제 자리로 돌려놓으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견인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결코 헛된 기대가 아닙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역사 가운데서 당신의 사랑을 몸소 실천해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신의를 저버렸음에도 그들을 끝까지 버리지 않으시고 사랑을 고백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하게 모든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 했습니다. 모든 이스라엘이란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을 가리킵니다.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내가 그들의 죄를 없이 할 때에 그들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롬 11:26~27)

 

특히 호세아서에는 패역한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이 묘사되었습니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지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11:8)

“내가 저희의 패역을 고치고 즐거이 저희를 사랑하리니”(14: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당신은 구원을 확신하지 못하고 의심하는 가운데 있습니까? 지금 여러 사정으로 곤란함과 고통스러운 일을 맞이하여 마음이 불안하고 외롭고 힘들고 짜증나고 화가 나고 죽고싶은 마음까지 들 정도록 힘들어 하십니까? 아니면, 자신이 생각해 보아도 “나는 너무 죄가 많아서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설 자신이 없어”라며 주눅이 들어 계십니까?

 

그래도 당신이 숨을 쉴 수 있는 여력이 남았거든 지금 즉시 성령님께 간구하세요. 성령님은 당신이 마지막 있는 힘을 다해 성령님을 찾기를 기다리십니다. 성령님은 이런 간구를 외면하지 않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도우십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그러므로 구원을 확신하시길 바랍니다. 구원을 굳게 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의 가르침으로 이 교훈을 되새기면서 말씀을 배조지 합니다. 이 말슴에 따라 이번 주에는 특별히 구원에 대한 확신이 모든 성도님들에게 배가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밷후 1:10~11)

 

아멘.


[출처] 38주차. <구원론강설> 구원의 확신을 가져라 2020. 9. 20 (바로선개혁교회) | 작성자 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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