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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주차. <구원론강설> 십자가의 능력과 성화의 삶

최더함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21. 3. 19.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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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주차. <구원론강설> 십자가의 능력과 성화의 삶 2020. 9.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6:6~7)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 도다“(롬 7:17~19)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문제의 핵심

 

살면서 문제가 생길 때마다 그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가를 생각합니다. 여기서 핵심이란 단어는 crux인데 이 말은 다른 한편으로는 ‘십자가’라는 뜻이 됩니다. 그렇다면 왜 ‘십자가’라는 뜻을 가진 ‘크럭스’라는 단어가 ‘핵심’ 혹은 ‘중대한 시점’이라는 말과 연관성을 가집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진정으로 모든 것의 중심이요 핵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인류 역사도 예수님을 기준으로 기원전과 기원후로 나누어집니다.

 

만일 십자가가 없다면 역사의 의미를 밝히는 것이나 역사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달리신 십자가는 사망의 늪에 빠진 인류에게 생명의 길, 화목의 길, 완전한 공의의 길을 열어준 유일무이한 구원의 사건이자 영원히 살 수 있는 영생으로의 기회를 제공하신 축복의 사건이었습니다. 이 위대한 선물을 인류에게 선사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는 그 참혹한 십자가의 형벌의 고통을 몸소 겪으시고 죽으시어 모든 사망의 권세를 모조리 꺾어버리신 것입니다. 영어권에서 사람들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느낄 때 종종 사용하는 표현이 있는데 그것은 ‘익스크루시에팅’(excruciating)이라 합니다. 이것 역시 라틴어에서 유래한 말로 원래 ‘십자가로부터’(out of the cross)라는 뜻입니다. 고통의 원천도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류 역사에 있어서 십자가 사건보다 더 중요하고 획기적이고 급진적이며 완전히 다른 차원의 사건은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십자가 사건은 인류 사회에 결정적인 영향력과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런 십자가 사건도 벌써 2천 년이라는 세월 속에서 빛이 바래지고 현대인들에게 십자가는 교회 첨탑에 세워진 광고물이거나 사람들의 장식품으로 전락했습니다. 지금도 십자가를 통한 영적인 약식은 풍성하게 제공되고 있지만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육적인 양식에 매달린 채 점점 영적인 굶주림에 휩싸여 고사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현대인들의 이러한 영적 결핍증에 대해 누구보다 깊은 문제 의식을 가지고 질타와 해결방안을 제시한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단연 영국의 에이든 윌슨 토저(1897~1963) 목사일 것입니다. 오늘은 그의 대표적 저술 중 하나인 ‘철저한 십자가’의 내용을 여러분에게 소개하므로서 거룩한 삶의 핵심이 무엇인가를 논하고자 합니다.

 

2. 두 방면의 사역

 

그는 먼저 십자가의 혁명적 능력을 논합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로마제국이 시행한 십자가 처형을 이야기합니다. 로마제국은 타협이나 양보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오직 승리를 향한 진군 뿐이었습니다. 수많은 국가와 민족이 로마제국의 말발굽 아래 무릎을 꿇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마저 희생양으로 삼았습니다. 다른 죄수들과 같이 그리스도도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나사렛 출신의 불쌍한 한 청년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것에 허탈해 했습니다. 그러나 예상을 뒤엎고 - 물론 주님은 수차례 자신이 다시 살아날 것을 예고하셨지만 -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으로 드디어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입니다. 새로운 차원의 세계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사건은 그 이전과 이후를 가르는 역사의 분기점이 된 것입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남을 통해 사망의 시대가 마감되고 영생의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보다 인류사회에 더 좋은 희소식은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복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주님은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이 복음을 온 세상에 실어나를 것을 부탁하셨습니다. 사도들은 각자에게 주어진 지역으로 나아가 주님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들이 전한 것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바로 ‘십자가’입니다. 넓은 세상 그 어느 곳을 가든지 간에 그들은 십자가를 지고 갔고 그들이 선포하는 현장에서는 동일한 혁명적인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이 혁명적 능력은 크게 두 방면의 사역으로 나아갑니다.

 

하나는 ‘복음 전도’ 라는 외적 사역입니다.

~ 우리는 앉으나 서나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세상에 전파해야 합니다. 세상은 악하고 타락하여 복음을 듣는 것을 극히 싫어합니다. 악마는 세상에서 복음이 사라지도록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강구합니다. 이 방해 공작을 위해 제일 전면에 내세워 사용하는 도구가 바로 세상 언론들입니다. 언론들은 십자가의 능력이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단지 세상에 일어나는 표면적인 사건에 관심을 두고 옳으니 그르니 하며 매일 일어나는 다툼과 논쟁과 싸움과 전쟁 이야기로 도배를 합니다. 그러나 이들이 한 목소리를 내는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를 공격하고 목사를 공격하고 기독교를 혐오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서로 다른 정치적 입장으로 매일 으르렁 거리는 그들이 오직 기독교를 공격하는 일에는 하나가 됩니다.

~ 한 신문에 바다 위를 걸은 예수님에 대한 희화적인 대화편이 실렸습니다. 한 여성 기자가 묻고 종교전문기자라고 하는 이가 대답하는 형식이었습니다. 질문 자체도 유치하지만 그 대답하는 수준 또한 신학적으로 매우 경계하는 자유주의 신학적 입장으로 보였습니다. 즉,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천국이 따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곳에서는 사람과 동물들이 어울리고 무제한적으로 동작과 이동이 가능한 세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천국으로부터 이 땅에 오신 메시아임을 증빙하기 위해선 물 위를 걸어야 했으며 그렇게 주장해야만 했다는 것입니다. 은근히 성경에 기록된 여러 기적과 이적들이 설정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치밀하게 각색한 이야기들임을 제시하려는 것입니다.

~ 그들은 예수님을 ‘신의 아들’ 혹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호칭하면서도 예수를 오로지 사람의 차원에서만 이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완전한 사람이면서 완전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그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차원에 계셨지만 우리와 같은 차원의 사람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자연적인 차원에서만 서서 모든 현상을 이해하기에 초자연적인 차원에서의 일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니 이해하려 들지도 않습니다.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미리 머리에 못을 박아 두었기에 도무지 그들의 이성적인 능력에서는 이해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든 것이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처럼 주장합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우주 만물과 인간의 기원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일까요? 인간은 누구이며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 줄 왜 모르는 것일까요?

~ 이런 세상을 향해 복음을 전도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이 있다면 억지로 사람에게 어떤 일을 억지로 시키는 일일 것입니다. 억지로 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복음은 억지로라도 사람에게 전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때 사람의 반응이 어떤 것이겠습니까? 결코 즐거운 경험들이 아닙니다. 악한 본성이 나타내는 모든 것들을 감내해야 합니다. 수많은 저주와 비난과 욕지거리와 핍박과 조롱과 비아냥을 들어야 합니다. 이런 치욕을 무슨 수로 견딥니까? 사람이 가진 자연적인 능력으로는 도무지 감당키 어려운 일들입니다. 오직 십자가의 능력이 임할 때 모진 능욕과 고난을 참고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 전도가 바로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다른 하나는 ‘성화’라는 내적 사역입니다.

~ 십자가의 능력은 한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킵니다. 이 변화가 성화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그 어떤 것으로도 스스로 변화하지 않습니다. 공부를 하고 수련하고 도를 닦으면 어느 정도 변화는 있을 수 있으나 근본적인 변화, 즉 죄인에게서 의인으로의 변화, 타락한 본성에서 거룩한 본성으로의 변화는 인간 스스로 획득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영역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능력이 임하자 사람이 변하는 것입니다. 그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게 됩니다.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사탄의 소속에서 하나님의 양자로 신분이 변하게 됩니다. 사망선고를 받은 죄인에서 영생을 얻은 의인으로 변화합니다.

~ 강도가 십자가상에서 변화하였습니다. 살인자가 십자가의 능력을 덧입자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당당하게 사형장에서 죽음을 맞이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며 당당하게 자신의 죽음을 맞이하는 일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자린고비로 소문난 한 졸부가 갑자기 예수를 믿고 변화되어 이웃에게 자신의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다고 발표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아침마다 학교를 가면서 눈에 보이는 교회당에 발길질을 하고 쓰레기를 투척하고 온갖 욕설을 하던 한 아이가 커서 십자가의 복음을 듣고 회심하여 목사가 되었습니다. 목사를 두들겨펴던 청년이 하루아침에 돌변하고 주님의 사역자가 되었습니다.

~ 예수쟁이들을 극혐하며 체포하기를 즐겨하던 사울도 십자가의 능력에 의해 거꾸러지고 완전히 새로운 인간으로 개조되었습니다. 기독교를 박해하던 사람이었던 그가 이제는 십자가의 복음을 온몸과 마음으로 전파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스스로 거룩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가진 모든 육신의 정욕을 멀리하고 위해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았습니다. 수많은 고난과 핍박과 고통 속에서도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복음전파의 사명을 잊지 않고 십자가를 바라보며 달렸습니다. 그는 정말로 철저한 십자가의 능력을 덧입은 대표적인 그리스도인 중 한 사람으로 우리 앞에 불멸의 존재로 우뚝 서 있습니다. 그런 바울 사도의 삶을 바라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바울 사도처럼 십자가의 능력을 온 몸에 지니고 새롭게 변화된 사람으로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이러한 변화가 느껴지지 않을 것입니다. 한 사람이 예수를 믿든 믿지 않든 같은 사람으로 보이지만 하나님과 그리스도인들 눈에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이게 됩니다. 하나님은 겉을 보시고 판단하시지 않으시고 사람의 마음의 중심을 바라보십니다. 그리스도인은 겉으로는 변화가 없어 보여도 이미 안에서 혁명적인 벼화가 시작된 사람입니다. 안에 거하던 모든 죄의 뿌리들이 점점 약해지면서 그 영향력과 힘이 성령의 내주에 의해 약해지고 있습니다. 죄성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나쁜 습관들과 기질들과 성격들과 취향들이 거룩한 것으로 바뀌어집니다. 이 내적인 거룩으로의 변화가 성화의 핵심입니다.

 

정리하면, 십자가의 능력은 외적으로는 전도의 능력이고 내적으로는 성화의 능력입니다. 이 두 가지 능력을 겸비할 때 온전한 그리스도인이라 할 것입니다. 물론 복음전도에는 다양한 수단과 방법과 기술들과 특징들이 포함됩니다. 사람마다 생김새와 성격과 특질이 다르듯이 복음을 전하는 사역도 매우 다양합니다. 대상이 다르고 지역이 다르고 시기가 다르고 방식이 다릅니다. 또 내적으로도 성화의 사역도 개인차가 있습니다. 성화가 느린 사람도 있고 빠른 사람도 있습니다. 매우 변화가 어려운 부분을 가진 사람도 있고 쉽게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카탈스러운 기질의 소유자가 있고 순한 기질을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인격적인 성숙을 추구하는 사람과 달리 믿음의 행함에 관심을 두고 거룩한 사명을 완수하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너무나 다양하기에 한 마디로 이 두 사역을 정의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제아무리 열심을 다 한다 해도 십자가의 능력이 없으면 무용지물입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자기 십자가가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나서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나“(마 16:24)

 

십자가가 곧 복음이요, 새 생명이요, 구원의 일한 길이요, 십자가가 곧 기독교입니다. 십자가 없는 기독교는 참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렇다 하여 교회가 외적 표시로 십자가탑을 세운다 하여 반드시 그것이 십자가의 능력을 지닌 것이라고 해서도 안 됩니다. 불행히도 오늘날 많은 교회가 십자가 탑은 세웠지만 십자가의 능력을 상실한 교회가 많습니다.

 

토저 목사는 이런 대목에서 “내가 믿는 기독교는 오늘날 복음주의자들이 믿는 기독교와 완전히 다른 것이다. 나는 참된 기독교를 양보할 생각이 조금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토저 목사의 눈에는 복음주의자들이 이끌어 가는 교회는 세상적 방법으로 교회를 이끌어가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복음주의자들은 얄팍한 벙법으로 성도들에게 십자가의 엄격함을 완화시키려 합니다. 이들은 연예오락에 열광하는 젖먹이 성도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심지어 성소에서조차 재미있게 즐기려는 교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십자가의 본질을 손질하여 십자가를 하나의 장식품으로 전락시켰습니다.

3. 십자가의 삶은 어떤 삶인가요?

 

우리는 십자가에 대해 결단해야 합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둘 중 하나입니다. 하나는 회피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십자가 위에서 죽은 것입니다. 만일 십자가를 회피하는 어리석은 선택을 한다면 우리는 우리 조상의 신앙을 포기하고 기독교를 부정하는 꼴이 될 것입니다. 그럴 경우 우리 입에서 나오는 구원이라는 단어는 공허한 메아리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참된 십자가에서 떠난다면 그 능력이 우리에게서 사라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에게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그저 자연적인 상태에서 지내다 소멸해 갈 것입니다. 초자연적인 변화를 경험하지 않는다면 당신에게 십자가는 그저 모형일 뿐입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신은 예수님의 길을 따를 것입니다. 당신은 십자가의 고난을 견딜 것이고 오히려 십자가의 너머에 있는 축복의 소망을 바라보며 즐거워할 것입니다. 십자가로 인해 당하는 모든 부끄러움을 피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어쩌면 지금까지 쌓아온 명성과 재력과 지위 등 세상에서 누리던 것들을 십자가로 인해 다 잃어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십자가를 들고 있으면 당신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당신을 떠날지도 모릅니다.

 

특히 요즘처럼 교회가 코로나의 진원지로 지목받는 시절에는 더욱 사람들의 기피와 비난 앞에 서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드디어 입을 열어 교회를 몰아내자고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유독 교회에만 가혹한 잣대를 들이댑니다. 한 기업이나 유명한 회사에서 부패한 음식을 만들었다고 음식 자체를 없애자고 하지 않습니다. 한 직군에서 사기꾼이 나타났다 하여 그 직군 전부를 없애자고 하지 않습니다. 변호사가 거짓말하면 변호사를 없애야 합니끼? 의사가 잘못 수했다 하여 의사 자체를 없애야 합니까? 그런데 교회는 모조리 없애자고 합니다. 마치 폭염이 지속되니 태양을 없애자는 것과 같습니다. 제가 지금 무엇을 말씀드립니까? 십자가를 지고 산다는 것이 바로 이런 말도 안 되는 모함과 억울함을 견디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자, 그래도 당신은 십자가를 지기로 결심하셨습니까?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세상에 나서기로 하셨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이제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토저 목사가 제시하는 십자가의 삶을 소개합니다.

 

첫째, 홀로 걷는 삶입니다.

~ 역사상 위대한 사람들은 대부분 홀로 걸었습니다. 대부분 외로웠습니다. 고독은 성도가 성도로 살아가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일종의 대가입니다.

~ 인류 역사가 막 시작하려던 때에 이상한 어둠의 시기가 닥쳤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어둠의 일에 동참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경건한 사람 에녹은 사람들을 떠나 오직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보존하기 위해 세상으로부터 그를 데려가셨습니다. 이 간단한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에녹이 동시대의 시람들과 같은 길을 걷지 않았다는 것만은 알 수 있습니다.

~ 노아는 또 어떠합니까? 그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악하였습니다(창 6:5). 오직 노아만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6:8). 아마 수많은 사람이 방주를 만든다고 몰두하는 그를 비웃었을 것입니다.

~ 아브라함도 보겠습니다. 물론 그에게는 아내와 조카와 종들과 목자들이 함께 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를 깊이 읽은 사람이라면 그가 사람들 사이에서 거하면서도 외로운 별 같은 사람으로 홀로 거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한,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엔 단 한 마디도 하시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오직 그와 단둘이 있을 때 하나님은 무려 여덟 번이나 찾아오시어 아브라함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 희생 제사의 밤,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는 그 밤중의 시간에도 오직 아브라함만 그 장소에 있었습니다. 그 안에서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습니다.

~ 모세도 400년이라는 세월을 미디안 광야에서 홀로 지냈습니다. 수많은 선지자들과 주의 사역자들은 이렇게 고독이라는 세계를 운명처럼 만나 동행했습니다. 시편 기자는 자신의 홀로 됨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내가 나의 형제에게는 객이 되고 나의 어머니의 자녀에게는 낯선 사람이 되었나이다”(시 69:8)

 

~ 그러나 누구보다 고독의 삶을 사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이 십자가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실 때 그 누구도 주님의 고독함을 덜어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분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홀로 기도하셨고 홀로 십자가에 달리시어 죽으셨습니다. 윌리엄 태펀이라는 분의 시 구절을 소개합니다.

 

“한밤중 감람산의 산마루에/며칠 동안 별은 흐렸다/한밤중 겟세마네 동산에서/고난의 주님이 홀로 기도하신다/한밤중 아무도 없는 데서/구주께서 홀로 두려움과 싸우신다/그분이 사랑하시는 제자들조차 그분의 슬픔과 눈물을 생각하지 못하는구나”

 

~ 자, 이제 고독을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생겼습니까? 주의 길을 걷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세상적인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길이 고통입니다. 모든 즐거움은 세상 안에 있습니다. 모든 소소한 행복과 기쁨은 세상 안에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은 오직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영혼의 동산으로 찾아오신 하나님과 함께 걸으며 대화를 나누는 것을 더 큰 기쁨과 즐거움으로 삼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깊은 기도가 있는 것입니다. 깊이 잠수하면 그 깊은 바다 밑에서 하나님이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은 깊이 있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세상은 깊이를 추구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십자가의 능력을 가진 사람만이 이 깊이를 찾아 하나님이 계신 곳을 찾아 가는 것입니다. 그 만남의 순간, 그 희열과 감격의 경험들은 세상의 그 어떤 것들을 다 합하고 합해도 견줄 수 없는 것들입니다. 이것을 경험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둘째, 완전한 헌신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근본이시며 교회의 반석이시며 모든 그리스도인의 머리이십니다. 모든 구속을 받은 신자들은 이 그리스도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토저 목사는 “하나님의 교회 전체는 그분의 아들의 두 어깨 위에 서 있다”고 외치며 자신은 “그리스도 한 분 만으로 충분하다”고 자신만만해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완전하게 따라야 하고 그분을 따르는 것만이 온전케 되는 길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➊ 첫째로 그것은 감상이나 상상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지적인 동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존 오웬은 어렴풋이 그리스도를 알고 있던 당시 풋내기 신자들을 향해 “당신들은 상상 속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 그렇다면 당신들은 상상 속의 구원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고 일갈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상태, 이런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젖먹이 수준의 그리스도인들로 인해 교회의 질서가 어지럽혀지고 이런 사람들이 교회 지도자로 행세하므로 인해 교회가 십자가의 능력을 상실하고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기피대상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➋ 둘째로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굳센 의지를 수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시적 충동이나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을 추종하여 쉽게 결정하고 쉬운 길을 모색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어둠과 슬픔의 골짜기를 관통해야 하는 마음 자세를 가다듬어야 합니다. 천국으로 가는 길은 결코 용이하지 않습니다. 아스팔트길이 아니라 길도 나지 않은 험한 바윗산으로 걸어야 할 지도 모릅니다. 한 마디로 십자가의 길은 고난을 피할 수 없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의지가 중요합니다. 의지가 약하면 아무 일도 이룰 수 없습니다. 의지는 오래 참고 견디는 능력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➌ 세 번째로 토저 목사는 ‘수용적 종속’을 말합니다. 수용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바로선개혁교회의 신학적 근본과 목회적 방침과 교회공동체의 소명을 개인적으로 수용하지 않으면 끝까지 함께 동행하지 못할 것입니다.

 

셋째, 전부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 살려고 하면 먼저 죽어야 합니다. 오늘 소개한 갈 2:20의 말씀을 보세요. 나는 십자가에 못 박힌 자입니다. 그것은 육체적으로 죽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지금 저와 여러분은 육체 안에서는 죽었고 믿음 안에서는 살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체의 일을 바라고 추구하고 소망할 권리도 없고 능력도 없고 이룰 수도 없는 것이니 육체의 일에서 미련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골 3:1에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고 증언하였습니다.

~ 자,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이 고백에 동의하시면 아멘으로 화답해 주세요.

 

“주님. 나의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오니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립니다. 나를 받아 주옵소서. 아멘”

 

4. 결어

 

결론적으로 우리에게 반드시 십자가가 필요합니다. 십자가의 능력이 없는 기독교, 십자가의 체험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나라에 필요없습니다. 나아가 우리는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실토해야 합니다. 비록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거듭남의 체험을 통해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 안에는 여전히 죄가 거주합니다. 오늘 소개한 사도 바울의 진술과 고백을 경청해 보세요. 십자가를 지는 것은 당장 고통이지만 그 뒤에 따르는 완전한 기쁨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하심을 얻었음이라“(6:6~7)

 

마지막으로, 십자가에서 주님의 피 흘리심을 생각하면 그것이 얼마나 크신 하나님의 큰사랑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곧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이라 말했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6).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은 자가 혹 있거니와(7),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8)(롬 5:6~8)

 

사도 요한은 우리를 살리려고 자기의 독생자를 우리에게 보내셨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요일 4:9)

 

세상에 이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누가 나를 살리려고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희생한다는 말입니까? 오직 우리 하나님만이 그런 사랑을 우리에게 펼쳐 보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화의 핵심은 ‘사랑’ 사랑이 없는 신앙은 헛소리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에게 속한 자가 아닙니다(요일 4:7). 그러므로 만약 당신이 십자가의 능력을 입었다면 모든 일을 주님의 사랑으로 바라보고 이해하고 포용하는 사랑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바로선교회 가족 여러분, 남은 생애를 오직 사랑하는 일에 열심을 내며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들을 맺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출처] 36주차. <구원론강설> 십자가의 능력과 성화의 삶 2020. 9. 6 (바로선개혁교회) | 작성자 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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