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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주차 <구원론 강설> 구원에 이르는 지혜

최더함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21. 3. 19.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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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주차 <구원론 강설> 구원에 이르는 지혜 2020. 8. 31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5)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벧후 1:5~7)

 

성화의 결정체

 

믿음을 선물로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제 남은 삶을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성령님은 그리스도인을 거룩해지도록 도우십니다. 이것이 성화의 축복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화의 열매 중 가장 빛나고 아름다운 것은 무엇일까를 생각해 봅니다. 성경은 여러 가지로 우리에게 아름다운 성령의 역사와 열매들을 소개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서는 9가지 열매들을 소개하고, 오늘 소개한 본문을 통해 베드로 사도는 성령님이 주시는 여러 은사들을 단게별로 정리하여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이를 잠깐 살펴본다면

~ 모든 성화의 출발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이 거룩해 지는 법은 없습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타종교와 구분되는 지점입니다.

~ 그러나 덕을 갖추지 못한 믿음은 자칫 독선적인 것으로 비추어질 수 있습니다. 덕은 너그러움입니다. 믿음은 좁아터진 죄인의 마음의 그릇을 넓히어 새로운 그릇을 만들어 주십니다. 그것이 덕그릇입니다.

~ 이 덕그릇에 담길 것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입니다. 성숙한 신앙은 지식에서 출발합니다.

~ 지식이 절제를 낳습니다. 무지하면 무엇을 절제해야 할지를 모릅니다. 무엇을 선택해야 할 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지식이 중요합니다.

~ 그러나 절제를 위해선 많은 인고의 노력과 오래 참음이 필요합니다.

~ 이런 인내가 경건을 이루고 경건함에서 우애와 사랑이 솟습니다.

이런 점에서 베드로 사도는 거룩함 신자의 믿음의 삶의 핵심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성화의 핵심적 가치는 다른 것에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 소개한 딤후 3:15의 말씀 안에 담겨 있습니다. 이를 한 마디로 정리하면 ‘구원에 이른 지혜’가 됩니다. 제아무리 신자가 거룩하다 해도 그가 가진 모든 것들이 구원과 관련이 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무용지물입니다. 다시 말해, 모든 신자의 믿음의 행위는 구원에 대한 바른 이해와 관점을 가질 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 가령, 한 사람이 도를 닦고, 천하의 이치를 꿰뚫고(그런 일은 절대로 없지만), 참으로 선하고 거룩하다 찬사를 받으며, 뭇 사람의 존경을 받고 산다 해도 그가 가진 모든 지식과 지혜가 자신의 구원에 대한 것이 아니라면 그의 참선과 수도와 거룩과 모진 인고의 수련행위들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한 평생을 쓸데 없는 일에 시간 낭비하고 힘 낭비하고 에너지 낭비한 끝에 겨우 가는 곳이 구원받지 못한 결과를 낳는 것이라면 참으로 허망하고 비참한 인생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가장 귀한 성화의 열매는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가지는 것이라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지혜가 믿는 신자에게 그리 복잡한 문제가 아닐지 모르지만 인류 역사에 있어서 간단한 구원의 길을 찾지 못해 일생을 허비한 사례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받은 구원의 은혜가 얼마나 귀하고 값진 것인가를 새삼 느끼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2. 잠자리 한 마리

 

사무실에 잠자리 한 마리가 들어왔습니다. 사무실에는 일곱 개의 창문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잠자리는 밖으로 나가는 문을 찾지 못해 계속 방 안을 해매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잠자리는 곁눈과 홑눈을 합하여 약 일만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창밖으로 나가기 위해선 단 한 개의 눈만 있으면 될 일인데 그 한 개의 눈이 없어 방안에서 맴돌고 있는 것입니다.

 

만 개의 지식이 있어도 결정적인 한 가지 지식이 없으면 무너집니다. 좋은 차가 있으면 뭐합니까. 키가 없으면 무용지물입니다. 금고 안에 보물이 가득하다 해도 열쇠가 없으면 그 보물은 내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과학문명 기술은 놀랍도록 발전했습니다. 우주관광객을 모집하는 광고가 나오는 시대입니다. 얼마 후엔 화성에 집을 짓고 분양 광고가 나올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전히 가장 중요한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우주만물의 기원은 무엇인가? 인간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 구원은 어떻게 받는 것인가? 죄는 어떻게 사함을 받는가? 등의 질문에는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3. 잘못된 길을 안내하는 자들

 

그런데 이런 근원에 관한 질문을 아예 무시하거나 봉쇄하는 자들이 역사 상 부지기수로 많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의 문제는 자신들의 의견이야 그렇다 쳐도 수많은 사람들이 미혹되어 잘못된 길을 걷도록 미혹한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부류는 무신론자들입니다.

~ 무신론자들은 그들의 사고 영역에 ‘신’이라는 존재를 아예 부정합니다. 그들은 ‘신’이란 인간의 종교성이 낳은 산물이라 정의합니다. 리처드 도킨슨 같은 자는 마치 자신이 무신론자들의 왕이라도 되는 듯이 세상을 향해 ‘신은 없다. 그러니 자기 인생을 즐기라’고 공공연하게 소리칩니다.

~ 며칠 전에 한 젊은 과학자이자 서울대 교수라는 이가 ‘개신교의 유통기한이 언제일까’라는 신문 칼럼을 통해 정부당국의 방역조치에 대항하는 개신교회를 싸잡아 비난하면서 기독교 신앙 자체가 하나의 광신적 믿음의 결과인 것처럼 호도하였습니다. 그 젊은 과학자는 나아가 과학을 무시하고 창조론을 여전히 주장하고 차별금지법을 반대하고 지금도 빨갱이 운운하는 기독교회들은 사라져야 하는 것처럼 주장했습니다.

~ 이제 한국사회에서 기독교회를 폄하하고 공격하고 비난하는 일은 다반사가 되었습니다. 이런 무신론자들의 공격은 더욱 치밀하게 집합되어 교회를 이 땅에서 치우고자 시도할 것입니다. 그들은 국가와 민족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교회는 필요없으며 이제 그 생명력이 얼마 남아 있지 않다고 호언장담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경고하지만 유통기한이 채 이르기도 전에 사라질 것들은 교회가 아니라 그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전히 자연적인 차원,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 육적인 일들에 관한 지식만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기에 초자연적인 일들, 하늘에 속한 일들, 영적인 일들을 모릅니다. 그들에겐 육신의 생명(비오스)만 중요하지 영적인 생명(조에)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모릅니다. 그들은 제아무리 인간들이 땅에서 탑을 건설하고 사다리를 만들어도 하늘에 닿을 수 없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오직 하나님이 하늘에서 사다리를 내려주셔야만 연결된다는 것을 모릅니다. 하늘과 땅을 연결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을 부정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겐 이런 믿음의 일들, 영적인 일들을 보고 느끼고 깨닫는 은혜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가로막는 두 번째 부류가 있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무엇이든 모호하게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 유대인 출신의 체코의 작가 프란츠 카프카(1883~1924) 같은 이는 “우리에겐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길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방황일 따름입니다”고 말했습니다. 한 마디로 기독교가 말하는 길이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교묘하게 핵심 주제를 비껴가며 말 재주를 부리는 것입니다.

~ 독일 출신의 법학자이자 작가인 하이네(1797~1856)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버리고 그리스 신화에 매료되어 한평생 살았습니다. 특히 비너스는 그에게 우상이었습니다. 그가 죽기 전에 비너스에게 자신을 구해 달라고 간청하자 비너스는 “너는 나에게 매달리지만 나는 너를 구할 수 있는 힘도 없을뿐더러 무엇보다 나는 팔이 없어서 너를 안아줄 수도 없어”라고 했다고 합니다. 결국 하이네는 죽기 전에 “인간이 못하는 것, 잡신들이 못하는 것, 팔을 뻗어 우리를 끌어안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밖에 없으시다”고 고백했다 합니다.

 

진리에서 멀어지는 세 번째 부류가 있습니다. 이들은 엉뚱한 곳에서 진리를 찾으려 한 사람들입니다.

~ 대표적으로 한 사람을 소개하려 합니다. 19세기를 대표하는 철학자인 니체(1844~1900)라는 사람입니다. 그의 집안은 뿌리깊은 기독교 집안입니다. 특히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목사님들이었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영원’에 대해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는 3가지 질문을 세우고 답을 찾고자 했습니다. “인간은 무엇 때문에 사는가?” “인간은 무엇에 의해 살고 있는가?” “인간은 어디로 가는가?”. 여기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엉뚱하게도 이에 대한 답을 하나님에게서 찾지 않고 인간 내부에서 찾으려 했습니다. 그가 찾은 것을 그는 ‘짜라투스트라’라고 명명했습니다. 1885년에 발표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진리에 관한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짜라투스트라라는 ‘초인’이 내놓은 답을 제시한 것입니다. 그는 먼저 짜라투스트라에게 7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그대는 아직 살아있는가? 왜? 무엇 때문에? 무엇에 의해? 어디로? 어디에? 어째서?. 니체는 인간 안에 초인이 거주한다고 믿었습니다. 그 초인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신’은 죽었지만 ‘초인’은 살아있다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초인으로부터 아무런 대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 안에는 초인은 커녕 거인도 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4. 결어: 성화의 인생

 

두 부류의 어리석은 인생이 있습니다.

~ 하나는 진리와 영원에 대해 관심이 아예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오직 현재의 삶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이런 자들을 일러 현세주의자 혹은 세속주의자라 부릅니다. 현대인들 대부분이 이 부류에 속합니다. 이들은 오로지 땅의 가치에 함몰된 자들입니다. 이들은 오직 이 땅에서의 삶과 행복에 도취되었습니다. 이들은 영원이라든지 진리라든지 하는 소리는 자신에게 필요하지 않은 말장난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들도 언젠가는 죽음 앞에서 자신의 미래의 삶을 고민하고 걱정하고 불안해 할 것입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 또 하나의 부류는 관심은 있지만 옳지 않은 것에서 답을 구하려고 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참 간단하고 명쾌한 해답지가 이미 우리 손 안에 주어졌음에도 그 답을 신뢰하지 못하고 다른 답을 찾는답시고 엉뚱한 곳에서 인생을 허비하는 자들입니다. 고인이 된 승려 성철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불교계에선 종정을 지낼만큼 비중이 큰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남긴 유언장에서 자신이 어리석은 대중을 미혹한 죄가 너무 크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부처가 곧 사탄이라는 엄청난 실토를 했습니다. 그는 자시이 평생 구하고자 한 것들이 모두 부질없었던 것들임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후회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도착지는 틀림없이 지옥입니다. 오늘 소개한 니체뿐 아니라 수많은 지식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찾지 않고 엉뚱한 길을 찾아 나섰습니다. 물론 그 길에서 돌이켜 다시 주의 길을 찾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세상의 철학가들을 포함한 지식인들, 사색가들, 문학가들, 예술가들, 도사들, 신비로운 주술가들, 예언가들, 몽매자들은 자신의 길을 걷다 모두 지옥으로 걸어갔습니다.

 

인간은 자신을 구원할 능력을 초인적 능력이 없습니다.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입니다. 날개는 있으나 날 수 있는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무능력한 존재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인간의 처지를 탄식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려?“(롬 7:24)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주신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이런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진리와 영원과 구원에 대해 궁금하시고 해답을 찾고자 한다면 산으로 가고 사막으로 가고 숲속에서 칩거하며 도를 닦을 것이 아니라 성경의 세계로 들어가면 됩니다. 타락한 인간 안에 초인 같은 그 무엇이 있다는 환상을 깨고 즉시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성경 외에 세상의 어떤 책에서도 인간의 구원의 문제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구원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일입니다. 어떤 훌륭한 철학, 과학, 인문학, 예술도 사람을 살리는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오직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만이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선물하고 죽은 생명을 살리어 영생으로 이끕니다. 그리고 이를 믿으면 ‘하늘의 능력’을 부여받습니다.

 

오늘 결론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남은 삶을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바로 ‘하늘의 능력’을 덧입어야 가능합니다. 우리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이 새로운 능력을 힘입어 우리의 눈과 마음과 능력이 구원에 이르는 지혜에 이르러 눈이 달라지고 마음이 달라지고 가치관이 달라지고 의지가 굳세워지고 새로운 목표가 생기어 새로운 인생, 가장 아름다운 성화의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아름다운 성화의 인생이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가진 사람의 인생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지혜가 없인 거룩하게 살려 해도 살 수 없습니다. 가령, 돼지가 아무리 자신의 우리를 청소하고 청결하게 만든다 해도 돼지는 인간에 이르는 지혜를 얻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구원에 이르는 지혜는 인간이 자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은사로 주시므로 인간이 받아 누립니다. 이 인간은 이전의 상태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피조물(고후 5:16)입니다. 물론 사람의 눈에는 같아 보이지만 하나님 입장에선 완전히 다른 존재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구원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할 사항이 아닙니다.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지혜없는 인생은 비참한 인생일 것입니다. 지혜 없는 인생은 무엇보다 다른 사람을 괴롭게 합니다. 자신이 잘못 듣고 잘못 생각하고 오해하고 잘못 판단하고 선택해 놓고 나중에 일이 수틀리면 모조리 다른 사람에게 뒤집어 씌웁니다. 성경은 지혜없는 자를 거만한 자라고 합니다(잠 13:1). 지혜없는 자는 이웃을 망하게 하고(잠 11:9), 멸시한다고 하였습니다(11:12).

 

그러므로 지혜를 가지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무지하고 고집세고 완악한 모습으로는 거룩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성화는 지혜의 삶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런 삶을 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가장 아름답고, 가장 향기로우며, 가장 거룩한 성화의 인생을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


[출처] 35주차 <구원론 강설> 구원에 이르는 지혜 2020. 8. 31 (바로선개혁교회) | 작성자 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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