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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주차 <구원론 강설> 견인하시는 하나님

최더함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21. 4. 28.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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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주차 <구원론 강설> 견인하시는 하나님 2020. 9. 13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 6:39~40)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 10:28~29)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요 17:12)

 

견인 교리의 중요성

 

알다시피 도르트 회의(1619)에서 작성된 칼빈주의 구원론은 TULIP으로 명명되는 5대 교리로 압축됩니다. 그중 견인 교리는 제일 마지막 다섯 번째로 나타납니다. 견인 교리의 요점은 한 번 구원 받은 성도의 구원은 영원히 보장된다는 것입니다. 이 주장의 근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영원 불변하시고 완전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사람으로 선택한 사람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다른 사람으로 대체하지도 않고, 끝까지 붙드시고 구원하신다고 성경을 통해 계시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도의 견인 교리를 다른 말로 ’영원한 보장‘(everlasting security) 혹은 ’완전한 안전‘(a perfect security)이라고도 부릅니다.

 

실상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 성도의 견인교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매우 중요합니다. 이 교리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따라 구원에 대한 확신의 여부가 결정되고, 나아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자세와 태도가 달라지며 더욱이 인생의 주체가 하나님이냐 인간이냐를 가름하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도 견인 교리에 대한 수용 여부에 달렸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교리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이 존재합니다. 견인 교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 교리 는 신자들로 하여금 구원에 대한 지나친 방종으로 유도한다고 비판합니다. 즉, “나는 이제 구원을 받았으니 더 이상 구원을 위해 애쓸 필요가 없으므로 마음껏 자유를 누리며 살아도 된다”는 안이하고 방만한 삶을 부추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대자들은 성경에서 견인교리를 반대하는 듯한 구절들을 근거로 자신들의 주장을 굽히지 않습니다. 이들이 내세우는 대표적인 사례 두 가지를 소개합니다.

 

1) 예수님은 스스로 믿는다고 하는 자들도 그 사랑이 식어 떠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24:11~13)

 

~ 이 말씀에 따르면 구원을 얻는 자는 이미 결정된 것이 아니라 인간 편에서 끝까지 견뎌야 하는 조건을 충족해야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런 뜻일까요? 말세에는 불법이 성하고 사랑이 식어지는 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증거되지 않는 시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신자는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 때문에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신자로서 마땅히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우리는 스스로 그런 사랑을 증거할 능력이 없습니다. 오직 성령 하나님께서 택하시어 구원을 받은 성도로 하여금 그런 사랑을 하도록 힘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도우시기에 사랑해야 하고 사랑할 수 있개 되는 것입니다. 말세에 제아무리 사랑이 식어지고 성도에 대한 핍박이 가중된다 해도 사랑의 능력을 잃지 않도록 성도 스스로 경계심을 가지고 있으라는 교훈인 것입니다.

 

2) 사도 바울은 딤후 2:16~18에서 후메네오와 빌레도 두 사람의 배교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그들은 경건하지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그들의 말은 악성 종양에 퍼져나감과 같은데 그중에 후메네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진리에 관하여는 그들이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함으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니라”(딤후 2:16~18)

 

~ 이에 따르면 두 사람처럼 처음에는 잘 믿었다가 점점 불경건한 일에 참여하게 되고 그릇된 진리를 가지게 되며 이로 인해 사람들의 믿음이 무너질 수 있다는 것으로 들립니다. 과연 그럴까요? 이에 대한 답변은 사도 요한의 언급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는 적그리스도와 선지자들에 대해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으니”(요일 2:19, 3:9~10)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끝까지 구원의 반열에 속하지 못하고 도중에 이탈함은 처음부터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2. 성도의 보존

 

하나님은 자신의 사람으로 선택한 사람을 절대로 포기하시지 않습니다. 버리지도 않습니다. 다른 사람으로 대체하지도 않습니다. 끝까지 붙드시고 구원하십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확정적인 말씀이 이 사실을 확실하게 보장합니다.

 

1) 예수 그리스도

~ 주님은 “내게 주신 자는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으리라”(요 6:39~40)고 하셨습니다.

~ 주님은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8)고 말슴하셨습니다.

~ 주님은 겟세마네동산의 기도를 통해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12)고 하나님께 고했습니다.

 

2) 사도 요한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 6:39~40)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 10:28~29)

 

3) 사도 바울

~ 사도 바울도 성도의 견인교리를 확실하게 믿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견인의 구절은 롬 8:35~39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

 

~ 이외에도 바울 사도의 구원에 대한 확신과 진술이 허다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 4:30)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딤후 4:18)

 

4) 다른 사도들도 동일하게 진술합니다.

 

“너희는 말세에 나타나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벧전 1:5)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언을 받으리라”(벧전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않으리라”(벧후 1:10)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히 10:14)

 

5) 구약의 선지자들도 구원의 확실성을 예견하였습니다.

 

“그는 목자같이 양떼를 먹이시며 어린 야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사 40:11)... 여기서 ’온순히 인도하신다‘의 히브리어는 ’나할‘인데 이것은 ’지킨다‘는 뜻입니다.

“내가 잠시 너를 버렷으나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사 54:7)

“옛적에 여호와게서 나에게 나타나사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하였노라”(렘 31:3)

이렇게 성도의 견인 교리는 구원의 확신에 대한 교리입니다. 우리는 앞의 진술들에서 충분히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에 의해 보전되고 구원이 보장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뿐 아니라 유명한 개혁주의 신학은 한결같이 이를 지지합니다.

 

1) 먼저 칼빈의 기독교강요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선택하신 각 사람에게 구원을 베푸실 뿐 아니라 그 구원이 미결된 상태에 있거나 의심스로운 상황에 있지 않도록 확실하게 구원을 보장해 주신다(롬 9:7~8, 갈 3:16)... 하나님 아버지는 선액하신 자들을 부르셨고 그들 모두를 절대로 끊어지지 않는 선으로 하나님과 연합되게 하셨다”(3권 21-7).

 

2)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1647)의 진술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사랑하는 자 안에서 받아들이고 그의 성령으로써 효력있게 부르고 성화시킨 자들은 은혜의 상태에서 전적으로 또는 최종적으로 타락할 수 없다. 도리어 그들은 끝날까지 그 상태에서 확실히 견디며 영원히 구원을 받을 것이다”(17장 1절)

 

3) 안토니 후크마의 진술입니다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선민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을 절대로 잃어버릴 수 없다. 이것은 구원의 약속을 인간의 노력과 의지에 두지 않고 구원의 원천이 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그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선택받은 사람은 하나님이 끝까지 책임을 지신다”(Saved by Grace, 234p.)

 

4) R.T 캔달이란 사람은 더욱 명확하게 하나의 구호로 만들어 우리에게 소개합니다.

“once saved, always saved”(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

 

3. 견인이란?

 

위에 진술된 견인교리를 다시 정리해 드립니다.

 

첫째, 견인교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에 그 근거를 둡니다.

~ 이의 근거로 롬 8:35~39를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서 끊어낼 자가 없습니다. 적진의 포화 속에서 한 여인이 몸을 웅크린 채 죽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녀의품 안에는 놀랍게도 아기가 새록새록 잠들어 있었습니다. 자기 아이를 살리려는 인간의 사랑도 이와 같을진대 하나님의 사랑은 어찌 말로 다 표현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자기 자녀를 독수리 눈동자같이 우리의 일거수일투족, 심지어 생각 하나하나까지 감찰하시고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우리 아버지 되십니다.

 

둘째, 견인 교리는 영생에 관한 진리입니다.

~ 구원받은 백성은 앞으로 영생을 선물로 받아 영원히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가지는 생명권에 근거합니다. 우주만물의 모든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그것을 구역 성경은 ’루아흐‘(숨)로 표현했고 신약 성경은 ’프뉴마‘(영_로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코에 숨을 불어넣으시니 우리가 호흡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 간단하고 명료한 이치를 믿지 못하고 엉뚱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아예 믿지 않을 것을 스스로 다짐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구름이 하늘을 가린다 해도 태양이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의 생명권은 영원히 하나님의 것이므로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셋째, 견인교리는 하나님이 인치시고 지키시는 것을 뜻합니다.

~ ’인쳤다‘는 것은 소유권을 표시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밝혔듯이 “무당의 자식이요, 간음자와 음녀의 자식들이요, 패역의 자식, 거짓의 후손(사 57:3~4)이었던 우리를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레 26:12, 출 29:45, 겔37:27, 렘 31:1)고 하셨으며 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라”(사 43:21)고 하셨으며, 사도 바울은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근거로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고 하였습니다(고후 6:18). 그러므로 한 부모 아래 자식으로 태어난 것은 천륜으로서 절대로 불변하는 신분이 된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영원 전에 하나님의 자녀로 인침을 받은 존재들입니다.

 

넷째, 견인 교리는 완전한 사면에 의한 완전한 입학을 증명합니다.

~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에 의해 구원을 보장받고 천국으로 이끌려 갑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에 의한 완전한 법적 사면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이렇게 밝힌 바 있습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 나아가 이를 근거로 모든 성도는 천국에 완전히 입학허가를 받은 것입니다. 이 허가에는 조건부가 아닙니다. 임시허가증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만약 누군가 유학을 가서 대학교에 입학을 했는데 일정 기간동안에만 허락된 조건부 입학의 조건이라면, 만약에 학교 관계자가 “너는 여기까지만 공부하고 다시 돌아가야 된다“고 말한다면 그가 안심하고 어찌 공부에 전념할 수가 있겠습니까? 다행히 그리스도인은 천국에 그런 조건을 가지고 입학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천국대학에 완전히 입학했다는 것을 미리 통지를 받은 것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다섯째, 견인 교리는 천국으로 가는 길에 있을 모든 유혹과 위험과 훼방으로부터 지키시고 보호하심을 뜻합니다.

~ 우리는 이제 철저히 성령님에 의해 보호를 받고 삽니다.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성령님이어서 잘 감지하지 못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영적으로 민감해지면 언제나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보혜사이자(요 14:16) 진리의 영이십니다(17절). 그래서 성령님은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고 장래 일을 알리시고(요 16:13),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시며(14절),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고(롬 8:26), 부르심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도우십니다(28절). 그것도 능히 우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십니다(유 1:24).

 

4. 결어: 불행한 사람들

 

성도의 견인 교리는 우리가 받은 구원에 대한 확신과 나아가 천국 입성에 대한 확고한 약속의 보증을 선사합니다. 이러한 견인 교리는 예정과 마찬가지로 우리를 교만과 방탕의 자리로 이끄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더욱 감사와 겸손의 자리로 이끕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스스로 구원받을 자격을 가진 사람이 하나도 없음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다면 지옥행을 피할 수 없었던 어둠의 자식들이었음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격없는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그리고 감사하기에 더욱 겸손해지고자 노력합니다.

 

그런데 간혹 우리 가운데 이러한 감사와 겸손을 역이용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자들을 일러 ’교만한 자‘요 ’방탕한 자‘라 부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자들이 아니라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자들은 고의적으로 구원의 보장을 악의적으로 해석하고 불신하도록 만들며 견인 교리는 마치 신자로 하여금 더욱 부패케하는 악질적인 전염병이라고 헐뜯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의도는 명확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을 의심하는 자들입니다. 자신들의 입으로 아무리 주의 이름을 들먹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하여도 그것들은 모두 위선이요 거짓입니다. 정말로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교만의 산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겸손의 골짜기로 내려와 자신의 구원에 감격하며 이웃을 섬기는 자로 변신합니다. 이것이 견인교리가 주는 커나큰 유익입니다.

 

다음으로 또 안타까운 부류가 있습니다. 이들은 구원의 소식을 듣지 못한 자들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시어 복음을 전파하신 지 벌써 2천 년이 넘었음에도 아직도 복음을 듣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지상에 남아 있습니다. 남태평양의 무인도에서 38년 만에 일본군 병사가 발견되었습니다. 그의 손에는 여전히 소총이 들려 있었다고 합니다. 전쟁이 종료되었음에도 그 소식을 듣지 못한 그는 아지기도 과거에 얽히어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 하나의 그룹은 구원의 소식을 들었음에도 확신이 없어 구원의 유익을 누리지 못하는 부류가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 남북전쟁이 끝난 해인 1863년에 흑인 노예해방법이라는 것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법을 믿지 못하고 여전히 자처해서 노예로 살다가 죽은 흑인들이 부지기수였다고 합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비극은 계속됩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 복음은 여전히 유효하고 유익합니다. 2천 년 전에 하나님은 자신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시어 십가가에 달려 죽게 하시므로 구원의 길을 개척하시었습니다. 우리를 정죄함에서, 하나님의 저주 아래에서 풀려나 자유를 누리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어 우리를 자녀로 입양시키고 모든 좋은 것들을 다 제공하심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의심하고 자유함을 누리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들이 여전히 살고 있습니다. 어째서 이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사는 것일까요? 이 이야기는 다음 주에 계속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가 받은 구원이 확실히 보장된 것임을 배웠습니다. 이 성도의 견인 교리에 감사하면서 남은 인생을 더욱 확고한 신앙과 확고한 사명감으로 불태워야 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이라는 구호를 힘차게 외치며 이번 한 주간에도 승리하시길 소망합니다. 아멘.


[출처] 37주차 <구원론 강설> 견인하시는 하나님 2020. 9. 13 (바로선개혁교회) | 작성자 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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