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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눅 20:1-18)

경건

by 김경호 진실 2021. 11. 8.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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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주신 직분과 권위, 하나님 영광 위해 사용합시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내게 말하라.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눅 20:3~4)


김석호 목사(전주서문교회)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자 심히 불편해하고 반감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알고자 하여 가까이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성전에서 백성에게 무언가를 가르칠 수 있는 ‘자격과 권위’를 가진 사람들이 자신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백성의 인기를 업고 마음대로 가르치고 있으니, 자신들이 가진 권위가 심각하게 도전받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나아와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가?’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위를 주었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여기서 권위(엑수시아)는 단지 ‘권세’ 또는 ‘능력’만을 말하는 ‘두나미스’가 아닙니다. 권세와 능력이 나오는 ‘지위’ 곧 자격을 포함하는 말로 ‘주권’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바람직합니다.

제사장들은 약 1500년 전에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을 따라 아론의 반차에 의해 내려온 유대교의 종교적 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율법인 토라와 장로의 전통인 미슈나를 가르치는 바리새인들은 약 300년 전부터 세상의 헬라·로마의 문화와 영향력으로부터 유대교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성결과 거룩’으로 분리되어 살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그때까지 내려온 신앙적 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장로들은 모세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뒤에 각 지파의 지도자와 백성을 재판하기 위해 세워진 십부장, 오십부장, 백부장, 천부장의 제도를 따라 약 1500년 동안 내려온 사회적 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주권으로 인해 제사도 지내고 가르치고 재판하는 그런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방 땅 갈릴리 나사렛에서 굴러온 자가, 백성 앞에서 가르치고 있으니 그들로서는 황당하였고 자신들의 권위에 도전하는 심각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 있는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들은 다 주님으로부터 왔고 다 주님을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와 전통과 사회 안에서 주신 모든 주권들은 타락한 이 땅에 죄가 편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주님도 이들의 주권을 부정하거나 비난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심지어 세상의 권력인 로마의 주권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 그리고 장로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주권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직분의 이유가 무엇인지를 잊어버렸습니다.

직분은 직분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구현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수단이요 그릇인 ‘권위’는 목적이요 내용인 ‘하나님의 뜻’을 항상 담고 있어야 그 권위가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주권은 세상에서나 교회에서나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담지하고 있어야 ‘권위와 권세’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교회에서나 사회에서 무슨 직분과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까? 그 직분을 통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일을 행하시길 바랍니다. 여기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장로들처럼 ‘나는 목사요 장로요 권사요 집사인데, 넌 뭐야!’라고 말할게 아니라, 주어진 직분에 따라 합당한 주의 일을 행하시기 바랍니다. 직분은 무슨 명예나 계급이 아닙니다. 직분에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직분을 통해서 주어진 하나님의 뜻을 행할 때에 그 능력이 나타납니다. 

직분에만 관심을 둔 제사장, 바리새인, 장로들은 사실 주님이 가르치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는 도무지 관심이 없습니다. 자신의 직분과 권위에 따라 얻어지는 부와 명예와 권세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들의 눈과 귀가 엉뚱한 데에 가 있으니 예수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심을 도무지 알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고 묻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세례 요한은 종교적 신앙적 사회적으로 아무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아니한, 그저 광야에서 석청을 먹으며 백성들에게 물로 세례를 주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외치는 자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의 눈에 세례 요한은 아무런 권위를 가지지 아니한 자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디로부터인지 알지 못하노라’고 답변합니다.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고, 부와 명예와 권력이 나오는 ‘권위’에만 관심이 가진 그들에게는 나름대로 최선의 답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기에 역사와 전통, 사회를 통해 권위를 주셔서 그것을 제도와 질서를 통해 내려오게도 하십니다. 하지만 때로는 필요한 자를 통해 단번에 직접적으로도 얼마든지 권위를 주시고 일하실 수도 있습니다. 항상 하나님을 향하여 있지 못한 자들은 그저 역사와 전통과 사회적 제도 안에 있는 것만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 온 세례요한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더구나 모든 만물과 통치와 권세와 주권의 근원되시고 주권의 실체이신 예수님을 보고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최선의 답은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라는 것이었습니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이 땅의 모든 권위가 다 하늘로부터 왔음을 가르치실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신 이유는, 그들이 설명해도 깨닫지 못할 뿐만 아니라 구원과는 상관없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그저 끝까지 모든 주권을 가지신 주님을 부정하고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 결국은 속량을 성취하게 하는 ‘악의 도구’로 남게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벗어난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로 죄와 악의 도구가 되지 말고 의의 도구가 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주님처럼 눈에 보이는 ‘권위’만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직접적인 설명을 해주기보다는 자신들의 권위가 어디서 왔는지, 주의 뜻을 따라 일하는 자들의 권위가 어디서 왔는지 물어 스스로 돌아보게 하는 지혜도 갖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제사장과 바리새인, 장로들에게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9~18절까지 ‘포도원의 농부’ 비유로 교훈하십니다. 한 사람(하나님을 말함)이 포도원을 만들었는데, 농부에게(제사장, 바리새인, 장로를 의미함) 세(권위)를 주고 타국으로 떠났습니다. 하나님이 이들에게 권위를 주어 하나님의 나라, 곧 이스라엘 나라인 포도원을 잘 가꾸도록 하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오래 있다가 때가 되어 포도원 소출 중에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그 농부들에게 종을 보냈습니다. 즉 주신 권위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일하여 그 열매 중에 얼마는 자신에게 돌리고 또 얼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소출을 하나도 주인에게 보내지 않고 오히려 주인이 보낸 종을 때리고 능욕하여 도로 보내었습니다. 즉 주어진 권위를 통해 하나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고 그 권위로 자신의 배만 부르게 하였고, 또 이를 지적하기 위해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을 능욕하고 돌로 쳐 죽이기까지 하였다는 뜻입니다. 주인이 세 번째 종까지 보냈는데도 그들이 그렇게 하자,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면 저들이 존대할 것이라고 여겨 보냈는데, 오히려 농부들이 서로 의논하여 저가 상속자니 저를 죽여서 모든 포도원의 유산을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자고 하여 죽였습니다. 이것은 자신들이 가진 이스라엘 민족을 다스리는 권위를 영원히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려고 모든 주권의 근원자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이 십자가에 죽일 것임을 암시합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그들에게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으시며, 결국 하나님이 이 세를 준 농부들, 곧 권위를 준 제사장들, 바리새인들, 장로들을 진멸하고(아폴루미:회복이 아닌 멸망의 징계) 그 포도원을 곧 하나님의 나라를 다른 사람인 이방인에게 주고 다스리는 권위도 이방인 중에 누구에게 줄 것을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땅에 부여된 하나님의 은혜와 권위는 사람들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하여 없어지거나 사라지지 않습니다. 반드시 누군가에게 가게 되어 있습니다. 첫 열매였던 이스라엘이 백성에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거부되자 이는 곧 이방인에게로 흐르는 축복의 믿음이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받지 아니하면 이는 다른 사람에게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직분과 권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그것을 거부하면 이는 반드시 누군가에게로 가서 그 직분과 권위를 받아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하게하고, 이로 하늘의 상급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다른 사람이 어렵고 힘들다고 하지 않는 것을 자신이 하는 것으로 인해 기뻐하고 자랑합니다. 그게 바로 바울이었습니다. 바울의 자랑과 가쁨은 자신에게 주어진 이방인의 사도라는 ‘권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권위를 통해 다른 사도들보다 더 고생하고 고난을 받아 주의 일을 하는 것에 있었습니다.

주님은 마지막으로 모든 권위가 자신에게 오게 된 경위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그러면 기록된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냐”(눅 20:17, 개정) 주님은 시편 118편 22절을 인용하면서, 제사장과 바리새인과 장로들에게 주신 주권이 그들의 부와 명예와 권세의 수단으로 전락하여 결과적으로 버려졌기에, 이제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다시 하나님의 나라의 집에 주춧돌이 되는 주권으로 회복하게 될 것임을 선언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모든 주권을 가지신 주님이 교회에서 우리에게 직분을 통해 권위를 다시 주셨습니다. 그 권위를 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 장로들처럼 거부하거나 이기적 유익을 위해 쓰지 아니하고 오직 주의 뜻을 구현하는데,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데 사용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축복합니다.

 

김석호 목사(전주서문교회)

 


출처 : 기독신문(http://www.kid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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