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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신비주의운동에 대한 설교학적 진단과 대응방안

신비주의

by 김경호 진실 2021. 12. 8.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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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진 / 실천신학대학원

Ⅰ. 들어가는 글: 문제제기

     
▲ 이승진 교수

한반도에 기독교의 복음이 전래된 이후, 일제 치하와 6.25 사변, 그리고 7, 80년대 이후의 성장기를 거쳐 온 한국교회는 지난 역사 속에서 신비주의 운동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운 적이 없었다. 기독교 안에서 신비주의를 다양한 관점에서 정의할 수 있겠으나, 본고에서는 ‘비범한 성찰이나 신비한 체험 속에서 절대자(하나님)와의 연합이나 합일을 추구하는 사상’으로 신비주의를 정의하고자 한다. 꼭 황홀경의 체험은 아닐지라도 비범한 성찰이나 각성의 체험, 고도의 정신적인 수양이나 훈련, 몰아적인 방언, 은사, 기적적인 치유, 그리고 이를 통한 하나님과의 합일을 마치 기독교 진리의 핵심인 것처럼 부각시키는 신비주의 운동은, 2천 년대 들어서 한국교회 안에서 다양한 형태로 지속되면서 여러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 다음 몇 가지 사례는 최근 한국교회 안에서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는 현대 신비주의 운동의 일면을 보여준다.

① 2007년 7월에 알파코리아 이사장 류영모 목사는 불신자에 대한 전도훈련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알파코스의 집회 현장에서 아말감으로 제작된 틀니나 치아가 금니로 바뀌는 이적 현상에 대한 한국교회 안팎의 비판을 의식하여 1) 알파코스가 마치 금니 이적 사역으로 비춰진 것을 반성하면서, 앞으로 알파코스에서는 아말감을 금니로 바꾸는 사역을 가르치거나 시행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였다. 아말감으로 제작된 치아의 금니로의 변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은 무로부터 천지를 창조하셨고 산을 들어 옮기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그 정도의) 아말감을 금으로 못 바꾸실 이유가 없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하지만 필자가 이 점을 한국교회를 어지럽히는 잘못된 신비주의 운동의 하나로 비판적으로 언급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한국교회가 선포하는 복음의 수준이,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고 타락한 세상을 변화시키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신비와 능력을 제대로 선포하지 못하고 겨우 ‘아말감을 금니로 바꾸는’ 정도의 기복적이고 주술적인 이적의 수준으로 전락하는 것에 대해서 선뜻 동의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② 2008년은 기독교 출판 분야에서 가장 널리 주목을 받으면서 베스트셀러에 진입한 책 중의 하나가, 김우현 감독이 방언의 은사에 관하여 저술한 『하늘의 언어』이다. 이 책의 영향으로 2008년 하반기 이후 기독교 출판계 뿐만 아니라 한국교계에는 ‘방언 체험 열풍’이 유행처럼 번져 나갔다. 2) 저자의 본래 의도와 다를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이 방언이나 신비한 체험에 대하여 지나친 관심을 보이는 일이 나타나자, 방언 은사 중심의 신앙생활에 대한 비판을 담은 옥성호의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라는 책이 출간되었다. 3) 이 책에서 저자는 ‘은사 중지론’의 입장에서 최근 한국교회 안에서 열병처럼 확산되고 있는 방언이나 신유 체험 현상을 비판하였다. 두 가지 상반된 입장을 담은 책이 계속 출판되는 상황에서 목회 현장에서는 (무언가 색다른 신앙생활을 추구하는) 신비주의에 대한 교인들의 관심은 계속 증폭되고 있으며, 신비로운 체험이나 은사에 대한 교인들의 뜨거운 열기 앞에서 일부 목회자마저 목회 사역의 구심점과 지향점 설정에 대한 혼란감이 가중되고 있다.

③ 또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손기철 장로의 『왕의 기도』 4) 역시 무기력한 타성에 젖은 기독교 신앙의 변화와 돌파구를 모색하려는 일반 기독교 신자들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왕의 기도』 1장은 저자가 2007년 여름에 중국 한인교회에서 말씀치유 집회를 시작하기에 앞서 모기떼를 쫒아내는 기도의 효과를 소개하는 내용으로 시작된다. 당시 저자는 집회에 참석 중인 회중을 방해하는 모기떼를 염두에 두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회중을 방해하는 모기떼들은 모두 사라질지어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회중들에게서 모기가 싫어하는 물질이 분비될지어다!”라고 선포했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 날 확인해 보니 집회에 참석했던 300명 중에 딱 한명을 제외하고 모두가 모기에 물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그 분의 능력을 진심으로 구하는 신자라면 누구든지 정신적 및 육체적 질병과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신유의 은사를 체험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저자는 ‘Heavenly Touch Ministry’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다양한 내적치유 세미나와 치유 사역을 진행하고 있으며, 5) 그가 월요일 저녁마다 인도하는 집회장은 전국에서 모여든 신도들과 병자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라고 한다.

④ 방언이나 은사와 같은 체험 중심의 신비주의와 다소 구별되는 것처럼 보이는 ‘관상기도’를 통한 신비주의 운동 역시 21세기에 접어든 한국교회 안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앞의 세 가지 사례에서 나타나는 방언이나 은사 중심의 신비주의는 역동적인 체험 지향적인 신비주의 운동이라면, 관상기도 운동은 다소 정적이며 각성을 통한 하나님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신비주의라고 할 수 있다. 지구촌교회 원로목사 이동원은 그동안 관상기도 세미나를 통해서 한국교회에 관상기도 운동을 소개, 보급해 오다가, 2009년 1월 한국성경신학회의 “불건전한 신앙운동에 대한 성경신학적 검토”를 주제로 한 세미나와 2010년 6월 한국장로교총연합회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의 관상기도에 대한 세미나 그리고 2011년 4월 예장합신 총회의 관상기도에 대한 비평적인 세미나 내용을 고려하여 본인은 앞으로 더 이상 관상 기도 세미나를 진행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목회리더십연구소 홈페이지에서 밝혔다.

또 2011년 7월에 예장 합동측(총회장 김삼봉 목사) 총회신학부는 “바른영성에 대한 개혁주의 신학적 조망”을 주제로 ‘한국 개혁주의 신학대회’를 개최하여 최근 한국교회에 널리 퍼지고 있는 ‘관상기도’를 강하게 비판하였고, 은사집회운동으로 주목받고 있는 손기철 장로(온누리교회)에 대해서도 주의를 당부하기도 하였다. 6) 관상기도에 대한 이동원 목사의 반대 입장 표명이나 여러 비평적인 세미나가 계속 이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기독교 단체와 기관을 통해서 관상기도 보급운동은 계속되고 있는 실정이다. 본고에서 필자는 앞에서 소개한 네 가지 사례의 저변에 깔린 신비주의(神秘主義, mysticism) 운동에 대하여 설교학적인 평가와 대응 방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언뜻 보기에 앞의 네 가지 사례는 신비주의 운동과 전혀 무관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신비주의를 “비범한 성찰이나 신비한 체험 속에서 절대자(하나님)와의 연합이나 합일을 추구하는 사상”으로 포괄적으로 정의할 때, 방언을 강조하는 현상이나 치유 은사 집회의 기저 속에서, 우리는 구원의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성경 말씀에 대한 순종이라는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일상적인 신앙생활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좀 더 신비로운 체험이나 사건 속에서 절대자 하나님과의 극적인 합일을 추구하려는 동기를 엿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최근 한국교회 안에 널리 확산되고 있는 관상기도가 단순히 고요한 침묵 기도의 차원에서 진행되는 것뿐이라고 항변하는 사람들이 있을는지 모르지만,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관계없이, Ray Yungen이나 Roger Oakland의 비판과 같이 현재 북미권의 교회 안팎에서 확산되고 있는 관상기도는 ‘실용주의적인 신비주의’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실정이다. 7)

이런 이유로 현대 기독교와 교회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신비주의 운동의 특징과 그 한계에 대해서 살펴보는 것은 매우 시의적절하다. 본고에서 필자는 ‘비범한 성찰이나 신비한 체험 속에서 절대자(하나님)와의 연합이나 합일을 추구’하는 신비주의 운동이 교회 역사 속에서 어떻게 기독교 안으로 흡수되었는지를 먼저 살펴볼 것이다. 이 단계에서는 주로 플라톤의 신비주의적인 합일사상과 유대교의 하나님과의 합일사상이, 초대 교회 알렉산드리아 학파에 속한 교부들과 사막 교부들의 고행, 그리고 수도원 운동을 거치면서 기독교 신비주의로 탈색된 과정을 간략하게 살펴볼 것이다.

이어서 신비주의 운동의 부정적인 영향과 아울러 개혁주의 전통 속에서 정착된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하나님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신비주의’의 차이점에 대해서 살펴볼 것이다. 개혁주의 전통 속에서 정리된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황홀경 속에서 하나님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신비주의’의 공통분모와 차이점을 살펴봄으로써, 기독교 안에서 왜곡된 신비주의의 정체를 파악함과 동시에, 성경적인 근거가 있는 기독교의 신비를 목회 현장과 신앙생활 현장에서고취시킬 수 있는 실제적인 방안을 모색할 전거를 마련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는 왜곡된 신비주의를 지양하고 바람직한 기독교 신비의 결정체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설교의 방안에 대해서 살펴볼 것이다. 이를 통해서 한국교회의 설교가 신비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건에서 성취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올바로 선포함으로 이 땅에서 교회의 영광을 드높일 수 있는 설교학적인 기반과 실천적인 대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Ⅱ. 펴는 글

1. 초대 헬라 기독교 신비주의의 배경

서방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신비주의가 기독교와 접목된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초대 헬라 기독교 안에서 신비주의가 자랄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한 유대교의 신비주의와 그리스 철학의 신비주의 사상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시카고 대학의 Bernard McGinn은 『서방 기독교 신비주의의 역사: 신비주의의 토대-그 기원부터 5세기까지』(The Foundations of Mysticism: Origins to the Fifth Century)에서 서방 기독교 신비주의의 기원을 유대교와 그리스 철학, 특히 플라톤의 관상적인 이상(contemplative ideal)으로부터 추적해 내고 있다. 8) 그에 따르면, 초대 기독교 역사 속에 스며들어 온 유대교 사상과 그리스 종교철학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서방 신비주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9)

1) 유대교의 묵시적인 신비주의
먼저 초대 기독교에 영향을 끼친 유대교의 신비주의와 관련하여 주목할 사상 중의 하나가 유대교의 묵시사상이다. 유대교의 묵시사상은 포로기 이후 제 2성전 시대에 형성된 묵시문학, 또는 묵시록에 담긴 기본 사상을 말한다. 묵시(apocalypse)란 말은 ‘베일을 벗겨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다’는 의미가 담긴 희랍어 ‘아포칼립시스’(ἀποκάλυψις 계시)에서 유래하였다. 10) 대부분의 구약신학자에 의하면 묵시 사상의 기본 모형은 ① 우주적인 선과 악의 대결 구도를 전제하는 이원론 ② 초월적인 하나님이 현실 역사에 개입하셔서 우주적인 대격변의 전투를 통해서 사탄의 세력을 완전히 박멸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내세주의적인 종말론을 중요한 근간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기본적인 구조에 덧붙여서 신화적인 동물의 상징이나 환상, 예언된 대 재앙, 천사론(귀신론), 메시아사상, 정해진 마지막 날에 대한 도식이나 숫자풀이, 별의 세력의 지상 역사에 대한 영향력이 덧붙여진다. 11)

바벨론의 침공으로 인한 유다의 멸망과 포로생활, 그리고 포로 귀환 이후 유대교 안에서 형성된 이원론적이고 내세주의적인 묵시사상이, 신비주의 운동으로 발전되는 계기는 묵시문학에서 찾아볼 수 있다. 유대교가 등장하기 이전에 초기 유대인들은 ‘어디에서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성전’이라는 표준적인 대답을 갖고 있었다. 모세오경 안에서는 이동하는 회막(출 25-30; 35-40)이 하나님의 현현과 만날 수 있는 장소로 간주되었고, 제1성전 시대 이후에는 예루살렘 성전이 표준적인 대답으로 받아들여졌다. 물론 예루살렘 성전이 건축된 이후에도 예루살렘 성전이 하나님의 현현을 온전히 보장할 수 없다는 한계의식은 분명히 살아있었다. 12) 하지만 지상에서 하나님의 현현에 반응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로서의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공감대는 포로기 이전의 유대인들에게는 하나의 거역할 수 없는 규범과도 같았다(사 6:1-4).

그러나 주전 587년 유다 왕국과 예루살렘의 멸망, 그리고 바벨론 포로귀환 이후의 현실세계에서 성취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실망감은, 지상에서의 하나님의 임재와 현현에 대한 새로운 돌파구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유대교의 종말론과 묵시사상은 점차로 내세 지향적이고 영지주의적인 종말론으로 발전되어갔다.13) 구약학자 Paul. D. Hanson에 의하면 구약의 종말론은 주전 8세기 선지자의 예언 속에서도 발견될 뿐만 아니라 유대교의 초기 종말론 역시 예언자적인 종말론의 전통을 충분히 따르고 있지만, 주전 2세기 이후의 유대교 종말론에서 발견되는 이원론적이고 내세지향적인 종말론은, 구약의 예언자적인 종말론과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 한다. 구약성경이 증언하는 예언자적인 종말론(prophetic eschatology)과 후기 유대교에서 발전된 묵시적인 종말론(apocalyptic eschatology)의 중요한 공통분모는, 하나님을 구원 역사의 주인으로 인정한다는 점과 아울러 인간 역사의 모든 현실은 선악 간에 하나님이 정하신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는 종말론적인 특징을 인정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양자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예언자적인 종말론은 종말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함에 있어서 현실 역사에 대한 인간의 역할을 통합시킨다. 그러나 묵시적인 종말론은 현실 세계의 열악한 상황 때문에 종말의 시점을 향한 하나님의 행동은 이 세상의 역사 현실 및 인간의 참여와는 점차 유리된 차원에서 진행된다는 것이다. 14) 말하자면 유대교의 묵시적인 종말론은 이 세대와 오는 세대 간의, 또는 선한 세력과 악한 세력 간의 이원론적이고 질적인 불연속성을 강조한다. 이원론적이고 묵시적인 종말론을 담고 있는 묵시 문학은, “담화체의 구조를 가진 계시 문학의 한 장르로서, 그 안에서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존재가 인간에게 천상의 계시를 전달해 준다. 그리고 그 계시의 내용은 종말론적인 구원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시간적이고, 초자연적인 세상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공간적인 초월적 실재를 묘사한다.” 15)

구약성경 안에서 발견되는 묵시문학의 대표적인 예는 다니엘서 7-12장이며, 유대교의 대표적인 묵시문학으로는 에녹 1서 14-15장, 에스라 4서 11-12장, 외바하 53-74장, 아브라함의 언약서, 등등이 있다. 창세기 5장 24절에 따르면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나님이 그를 하늘로 데려가셨다고 한다. 하지만 기원전 3세기의 환상을 기록한 에녹 1서 14장에서 에녹은 하늘로 올라가서 그곳에서 신적인 현현을 경험한다. 16) 기원전 2세기에 작성된 『레위의 유언』(Testament of Levi)에서도 레위는 꿈의 환상 속에서 삼층천으로 올라가서 ‘천사들이 하늘 문을 열어 보좌에 앉으신 지존자를 보는’ 경험을 한다. 17) McGinn에 의하면, 이러한 승천의 모티프는 그리스 철학과 우주적인 성찰, 그리고 유대교의 묵시사상을 통해서 서방 기독교 속으로 흡수되었다고 한다.

유대교의 내세지향적인 묵시사상과 유대교의 신비주의 운동의 또 다른 연결고리로는, 제2성전 시대 말기에 형성된 유대교의 정경 주석 문화에서 발견된다. McGinn에 의하면 당시 유대교의 주석 문화에서 발견되는 두 가지 독특한 특징은, 유대교의 경전은 신자들의 경건과 실천을 위하여 규범적이고 초월적인 권위를 갖는다는 인식과 아울러, 이 경전 속에는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심오한 의미와 차원이 있다는 신념이었다. 18)

한편 이 시기에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그리스인 역시, 그리스 전통에서 규범적인 지위를 갖고 있던 신화적이고 시적인 문헌들을 문자적으로 읽지 않고 그 문자 배후에 담긴 심오한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의미를 찾으려고 했다. 그리스 철학자들이 호머(Homeros)의 『일리아드』(Illiad)와 『오딧세이』(Odyssey)와 같은 서사시나 헤시오드(Hesiodos)의 작품을 해석할 때 활용했던 풍유적이고 신비주의적인 해석은, 필로나 그 이후 오리겐의 풍유적이고 신비주의적인 해석을 통해서 초기 기독교 속으로 스며들어 왔다. 19)

이상으로 바벨론 포로 귀환 이후의 유대교 안에서 형성된 이원론적이고 묵시적인 종말론, 초월적이고 신비로운 영역에 대한 환상 체험을 담은 묵기 문학의 등장, 그리고 문자 이면에 담긴 고차원적이고 신비로운 의미를 깨닫기 위한 알레고리 해석을 유대교 신비주의 운동의 중요한 특징으로 살펴보았다. 이러한 유대교의 묵시적인 신비주의는 이후에 등장한 초기 기독교에도 일정부분 영향을 끼쳤다.

2) 그리스 철학과 플라톤의 관상적인 이상
기독교의 신비주의 운동의 역사적인 기원을 추적할 때 유대교의 이원론적이고 묵시적인 신비주의나 알레고리 주석적인 신비주의와 아울러 빼놓을 수 없는 배경이,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의 관상적인 이상을 추구하는 신비주의이다. McGinn이나 Andre Jean Festugiere 그리고 Albercht Ritschl과 같은 신학자들에 의하면, “플라톤 및 플라톤 전통이 기독교 신비주의 역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음은 부인할 수 없다.” 20)라고 한다. 제한된 지면에 플라톤 철학과 기독교 신비주의의 연관성을 자세히 파헤칠 수 없지만, 관상적인 이상(contemplative ideal)을 추구했던 플라톤의 신비주의가 초기 헬라 기독교 속으로 스며들어온 과정을 자세히 추적한 McGinn이나 Ray C. Petry의 연구는 플라톤 철학의 관상적인 이상과 기독교 신비주의의 연결고리를 이해하는데 좋은 안내가 된다.

플라톤에 의하면, 인간이 행복에 이르는 길은 미의 현현(플라톤의 세계에서는 젊은 청년의 아름다움)을 통한 영혼의 각성에서 시작된다. 참된 인간의 주체인 영혼은, 만물을 아름답게 만드는 절대 선을 영구적으로 소유하지 못하여 끊임없이 절대 선을 추구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신적인 이성은, 눈에 보이는 유한한 현상 세계에서 유배 생활을 하다가 이데아를 암시하는 미의 현현을 통해서 각성을 받는다. 그 과정에서 현자는 도덕적이고 지성적인 노력을 통한 사랑과 앎의 점진적인 정화의 단계를 밟아야 한다. 정화는 미(美)나 선(善), 또는 일자(一者), 또는 절대자로 다양하게 묘사되는 형상들 중 형상의 궁극적 실재의 갑작스런 현현을 위한 준비과정이다. 영혼은 사랑과 지식의 상승적인 정화의 단계를 거쳐서 절대자와 직관적으로 접촉하게 되며, 그렇게 두 영역이 하나로 통합되는 결정적인 방법이 바로 영혼의 지성이 이데아를 탐구하는 관상(또는 관조, θεωρία contemplatio)이라는 것이다. 21)

플라톤에 의하면 관상은 사랑과 지식의 상승적인 정화(katharsis)의 열매이며, 영혼 안에 있는 신적인 요소인 이성(nous)이 고귀한 원천에 동화될 때 이데아의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데아는 관상의 대상이며, 영혼의 개척자인 지성(nous)은 이데아를 추구하는 관상이 진행되는 기관이다. 참된 영혼은 오직 지성 안에서의 관상을 통해서만 이데아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철학에서 관상을 통하여 이데아에 도달하려는 관상적인 이상주의가 신비주의적인 색채를 띠는 이유는, 플라톤 철학의 궁극적인 목표가 바로 영혼의 신화(神化, 또는 신성화, 神聖化, deification)이기 때문이다.22) 즉 철학자는 이성(nous)을 통한 정화와 관상을 통해서 궁극적으로는 인간 영혼의 본성 안에 잠자고 있던 신성과 동화됨으로써 불멸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관상을 통한 영혼의 신화를 추구하는 플라톤의 신비주의는 기독교의 핵심 교리와 분명히 구분된다. McGinn에 의하면 “플라톤의 영성은 기독교의 영성과 달리 일종의 자기 성취의 구원으로서 이 구원론에 따르면 철학자는 순전히 자기 힘으로 목표에 도달한다.”23) 또한 “플라톤의 관상은 영혼이 가지고 있는 본성적인 신성을 활성화시키는 결정적인 방법으로서, 그리스도인이 자기-포기와는 아주 다른 탁월한 자아-실현이다.” 24)

이렇게 플라톤의 관상을 통한 영혼의 신성화가 기독교의 근본교리와 분명한 차별성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헬라 철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교부들(필로, 클레멘트, 오리겐)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추구라는 보편적인 진리 안에서 그리스 철학에 기반한 신비주의 사상을 기독교 안으로 끌어들이고 말았다. 25)

그리고 McGinn에 의하면,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은 교부들에 의하여 “현인이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고 영혼 안에서 덕을 고양시키기 위하여 사용하는 금욕이나 정화의 과정은 플라톤에게서 시작된 그리스의 관상적 전통의 또 다른 모습으로서 후기 기독교 영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26) 라고 한다.

2. 초기 헬라 기독교 안의 신비주의 사상

플라톤의 관상을 통한 영혼의 신성화를 추구하는 신비주의는 그 이후 필로(Philo)의 관상적인 경건과 알레고리 해석을 통해서 초기 기독교 안으로 흡수되었다. 그리고 이후에도 플로티누스(Plotinus, 204-269)와 그의 제자 포르피리(Porphyry, 232-304)나 위-디오니시우스(Pseudo-Dionysius)의『원인론』(Book of Causes)과 같은 후기신플라톤주의,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와 오리겐을 통해서 초기 기독교 속에 깊이 뿌리내리게 되었다. 27)

McGinn에 의하면,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대인이었던 필로(Philo, B.C30-A.D50)는 서방 역사에서 성경이 말씀하는 유일신 신앙과 헬라 철학이 제시하는 관상적인 이상을 결합한 최초의 인물이다. 28) Philo가 헬라의 관상적인 이상을 기독교 신앙에 접목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의 계시가 담긴 구약성경이나 이데아를 추구하는 헬라 플라톤 철학이 모두 동일한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플라톤이나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아서 인간이 하나님을 완전히 알거나 묘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보았다. Philo는 다만 인식 불가능한 하나님의 실존은 유비를 통해서 알려질 수 있는데, 이는 하나님은 지성적인 우주의 로고스라는 큰 아들과 감각 세계라는 작은 아들을 통해서 계시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29)

Philo는 이렇게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서의 성경의 로고스를 헬라 철학에서 증재자로서의 지혜 관점과 관상적인 경건을 끌어들여 알레고리로 해석하였다. 이 유대인 철학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창세기의 타락 기사는 신화가 아니라 문자를 초월하여 표면 아래에 놓여 있는 것의 인도를 받는 알레고리적인 해석에 의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McGinn에 의하면 창세기의 타락 기사에 대한 필로의 알레고리 해석은, 에덴동산의 이야기를 모든 영혼 안에서의 내적갈등과 타락을 다룬 영원한 메시지로 간주한 최초의 해석이라고 한다. 30)

플라톤의 신비주의 전통은 그 이후 신플라톤주의자를 통해서 계속 발전을 거듭하면서 초기 헬라 기독교 속으로 스며들었고, Philo의 알레고리 해석 역시 알렉산드리아 학파에 속한 클레멘트나 오리겐을 통해서 기독교 신비주의로새롭게 탈바꿈되었다. McGinn에 의하면 클레멘트는 나중에 정통 신비주의의 중심 개념인 절대자를 바라봄, 영혼의 신성화, 절대자와의 연합과 같은 신비주의적인 개념을 자신의 저술에서 자세하게 다룬 최초의 기독교 저술가라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레바스티는 클레멘트를 가리켜서 ‘기독교 신비주의의 창시자’라고 평가하는 것은 그리 과장된 평가는 아닐 것이다. 클레멘트에 의하면 지식에는 많은 차원이 있다. 그 지식은 성경에 대한 영적인 해석을 통해서 얻어지기도 하는데, 클레멘트는 이 지식을 가리켜서 ‘신의 영감을 받은 사람이며 진리의 벗’이라고 칭송하는 플라톤의 철학을 사용하여 설명한다. 그에게 있어서 지식은 신학적인 증명과 신비적인 관상이 필연적으로 결합된 것이었다. 또한 그는 현세에서 하나님을 보는 것을 일종의 점진적인 과정으로 이해하였다. 완전에 도달하는 이 과정은 특히 두 가지 방법으로 규정되는데, 그것은 영혼이 무정념(apatheia)의 상태로 나아가는 것과 영혼의 신화(神化)라는 선물을 통한 것이다. 31)

3. 중세 기독교 신비주의

기독교가 국교로 공인된 이후 4세기에 이르러 서방 기독교 안에서 신비주의 운동은 수도원 운동을 통해서 새로운 도약의 전기를 맞이한다. 수도원 운동이 신비주의 운동에 새로운 도약의 전기를 제공해 줄 수밖에 없었던 원인은, 기독교가 국교로 공인된 이후 교회의 세속화로 말미암아 고차원적인 신앙생활의 규범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전에 기독교는 모진 핍박과 박해받는 종교였고 당시 교회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 앞에서 자기 생명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는 자기 확신과 헌신으로 무장된 성도들의 공동체였다. 하지만 기독교가 국교로 공인되고 생명의 위협이나 기독교적인 자기 부인이나 희생과 관계없이 세속적인 동기로 말미암은 기독교인들이 양산되면서 교회의 세속화가 뒤따랐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중적이고 평범한 수준의 기독교에 만족하지 않고 좀 더 고차원적인 성결을 추구하는 신자들이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었다. 이러한 필요 속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수도원 운동이었다. 일상적이고 평범한 삶을 거부하고 자신을 성별하고 절제하고 단련하는 수도원주의는 곧 금욕주의로 연결되었고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서가 아니라 특별한 장소에서 특별한 수련을 통해서 도달할 수 있는 지고지순의 영적인 세계에 대한 동경과 그 세계에 도달하여 영혼의 신성화를 획득할 수 있는 방법으로 신비주의적인 수련 훈련이 발전하게 되었다. 32)

Yungen도 『신비주의와 손잡은 기독교』에서 4세기 이후에 수도원주의가 등장하는 과정에서 좀 더 고차원적인 고행 수단을 모색했던 이집트의 사막 교부들에 의하여 이교적인 명상 수련 방법이 수도원 운동 속으로 스며들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33) 중세 후기 신비주의 사상의 발전 과정을 고찰한 류금주에 의하면, 중세 신비주의 운동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관상이나 영적인 수련을 통한 ‘상승적인 구원’을 지향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중세 신비주의자들이 추구하는 최고의 구원의 정점에 도달하는 과정은 하나님이 인간을 향해 손을 내미는 하향의 성격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찾아 손 뻗는 상향의 성격이라는 것이다. 상승적 구원을 지향하는 신비주의는 구원의 소재가 인간 내에 존재한다고 믿는다.

예를 들어 신비주의자 에크하르트는 ‘인간의 영혼에 내재하는 신적인 불꽃’에 주목하며 기독교 계시의 삼위일체를 초월하는 또 다른 신성이 따로 존재한다고 본다. 에크하르트에게서 나타나는 이러한 신비주의 사상은, 영혼 안에 있는 신적인 기원에 관한 관점이나 제일 원인에로의 참된 전환을 추구하는 플라톤주의와 신플라톤주의의 기맥에 접촉하고 있다고 한다. 34)

중세 기독교 신비주의 운동에서 찾아볼 수 있는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은, 관상에 도달하는 길을 단계적인 절차로 설명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정서적인 신비주의자(affective mystics) 베르나르는 사랑에는 네 단계가 있다고 말한다. 첫째 다소 낮은 단계의 사랑은 자신을 위하여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며, 둘째는 하나님이 주신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셋째 단계는 그 사랑의 대상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단계이고, 마지막 넷째 단계는 자신을 사랑하는 것까지도 오직 하나님만을 위해서 사랑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 생-빅토로의 위그는 타락한 영혼의 신성화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하여 사고(cognition)와 묵상(meditation), 그리고 관상(contemplation)이라는 세 단계를 제시하였으며, 보나벤투라 역시 엑시타시와 완성에 도달하는 세 가지 단계로서 정화(purification)와 조명(illumination), 그리고 완성(perfection)을 제시한다.

플로티누스의 신플라톤주의는 어거스틴을 넘어 500년경 시리아의 수도사로 활약했던 위(僞)-디오니시우스(Pseudo Dionysius)에게도 전수된다. 그는『천상의 계층구조』(The Celestial Hierarchy), 『교회의 계층 구조』(TheEcclesiastical Hierarchy), 『신의 명칭들』(The Divine Names), 『신비신학』(The Mystical Theology)과 같은 중세 신비주의 운동의 결정판들을 저술하였고, 그의 저서들은 후대의 신비주의자들에게 일종의 사도적인 권위에 준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신플라톤주의에 근거한 위디오니시우스의 사상은 『신비신학』에서 잘 표현되고 있다. 여기에서 저자는 한편으로 불가지하고 언표 불가능한 신의 초월성과 아울러 다른 한편으로 신과의 신비적인 합일을 향한 영혼의 상승을 다루고 있다. 그가 이 저서에서 ‘신비로운’(Mystical)이란 용어를 사용한 이후, 이 개념은 기독교 신비주의의 발전을 위한 중요한 개념으로 정착되었다. 그는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관상을 통한 신비주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친애하는 디모데여, 부지런히 신비적 관상(mystical contemplation)을 실행하여 감각들과 지성의 작용들, 그리고 감각적이고 예지적인 모든 것들, 존재와 비존재의 세계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떠나 무지의 방식으로 (인간적으로)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모든 존재와 모든 지식을 초월해 계신 그 분과의 연합을 향해 일어서라.” 35)라고 권면하고 있다.

위-디오니시우스의 주요한 공적 중 하나는 영혼의 상승을 ‘정화(purification), 조명(illumination), 합일(unification)’의 세 단계 과정으로 공식화한 것이다. 먼저 정화의 단계는 죄로 얼룩진 영혼이 유한한 본성으로부터 벗어나서 정결케 하는 것이며, 둘째 조명의 단계는 관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빛이 영혼을 비추면서 초월적인 하나님을 바라보는 단계이다. 그리고 마지막 합일의 단계는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신성화의 체험을 말한다. 위-디오니시우스가 제시한 영혼의 신성화와 합일에 이르는 삼중의 길(triple way) 혹은 세 단계의 길(threefold path)은 이후 서방 가톨릭 신비주의의 표준으로 받아들여 졌고, 13세기부터는 영적인 순례 여정을 나타내는 중요한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로욜라의 이냐시오(Ignatius of Loyola, 1491-1556)는 영성 훈련의 첫 번째 주에 정화의 길을 대입하고 두 번째 주와 세 번째 주에는 조명의 길을 대입했다.

아빌라의 Teresa가 『영혼의 성』(Castillo Interior)에서 하나님과의 합일에 도달하는 과정을 영혼의 내면세계에 동심원의 구조로 배열된 일곱 개의 궁방 속으로 진입해가는 과정으로 소개하고 있다. 일곱 개의 궁방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첫 번째 궁방에 정화의 단계, 가운데 궁방에 조명의 단계, 마지막 궁방에는 합일 단계를 대입하였다. 또한 Teresa의 영향을 받은 십자가의 요한(John of the Cross)도 그의 대표적인 영성 저술 『영혼의 어두운밤』(Dark Night of the Soul)에서 영혼이 부르는 노래를 풀이하는 가운데 각 단계의 진보를 표현했고 36), 『갈멜산 길』(Ascent of Mount Carmel)에서는 산을 오르는 단계로 영혼의 진보의 단계를 비유했다. 37) 스페인 출신의 영성가 Loyola 역시 일정한 훈련 기간 동안의 영적 진보를 단계적으로 설명했다. 38)

4. 아빌라의 Teresa의 관상을 통한 하나님과의 연합

중세 신비주의 운동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또 다른 인물로서 아빌라의 Teresa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방식에 의하면 아빌라의 Teresa와 ‘십자가의 성 요한’이라는 두 명의 대표적인 관상 신비주의자를 통해서 관상기도(contemplative prayer)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39) 아빌라의 Teresa의 『영혼의 성』은 그녀 자신의 영적인 훈련 과정을 인간의 영혼 내면세계에 존재하는 겹겹의 동심원 구조의 중앙에 위치한 일곱 번째 궁방 안에서 마지막으로 ‘하나님과의 영적인 결혼’의 단계에 도달하는 과정으로 비유하여 소개하고 있다. 아빌라의 Teresa에 의하면 이 마지막 단계는 오직 소수의 구도자들만 인내의 긴 영적인 여정을 통과하여 영적 여정의 마지막 클라이막스의 단계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 40)

유해룡은 아빌라의 Teresa가 『영혼의 성』에서 소개하는 영적 합일의 일곱 단계를 자아인식의 단계로부터 시작하여, 자아의 전환기, 자아의 어두운 밤, 그리고 마지막으로 통합된 자아의 단계로 소개한다. 41) 먼저 하나님과의 합일에 도달하는 영적인 여정의 첫째 단계는 ‘자아에 대한 지식’을 획득하는 단계이며, 첫 번째 내면의 성문을 통과하는데 있어서 가장 유용한 방법은 기도와 생각이라고 한다. Teresa에게 있어서 자아인식은 특정한 어떤 단계에서 완성되어야 할 단절된 단계만은 아니다. 영적순례 여정 내내 자아인식은 결코 사라질 수 없는 핵심적인 요소이다. 『영혼의 성』에서의 진정한 영적진보의 출발은 전반부 자아인식을 끝내고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가는 제4궁방에서부터이다.

제4궁방은 제1-3궁방까지의 능동적 영적여정으로부터 제5-7궁방까지의 수동적 영적여정으로 넘어가는 길목이라고 할 수 있는 전환기적 단계이다. Teresa는 여기서부터 초자연적 사실들이 시작된다고 한다. 그 동안 자신의 영적여정에 발목을 잡고 적지 않게 괴롭히고 장애물이 되어왔던 바깥에 있는 사물들이 힘을 잃어버리고 목자의 휘파람 소리를 따라 성안으로 이끌려 들어가는 경험을 한다고 한다. 내면으로 초대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이전보다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단계라는 것이다. 이후에 영혼의 순례자는 영혼의 어두운 밤을 경험하는 단계를 거친다. 아빌라의 Teresa가 『영혼의 성』에서 그 어두운 밤은 제 4궁방에서 시작되어 제6궁방에서 절정에 이른다. 감각이나 지성으로는 아무것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캄캄한 밤을 맞이하게 된다. 그래서 순례자는 적지 않은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다. Teresa는 그러한 상태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확실히 하나님께서는 악마로 하여금 그 사람을 시험하도록 그리하여 심지어는 그 사람이 당신께 버림을 받았다는 생각이 들도록 시험하게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 인간을 내부로부터 들이치는 일들이란 어찌나 사무치고 못 견딜 것인지, 저 지옥에서 당하는 고통과 비슷하다고 밖에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폭풍우 속에서는 위로라고는 하나도 없으니 말입니다.42)

그러나 영혼의 순례자는 마지막 일곱째 방에 도달하여 하나님과의 영적인 합일의 경지에 도달한다고 한다. Teresa는 이 마지막 단계에서 이루어지는 신자의 인성과 하나님의 신성 사이의 연합의 친밀성을 여러 가지 비유를 통해 설명한다. “여기에서는 마치 하늘로부터 내리는 비가 강이나 샘으로 떨어지는 것과 같다. 거기에는 단지 물만이 있을 뿐이며 하늘로부터 떨어진 물과 강에 속한 물을 나누거나 분리하는 것을 불가능해 진다. 이 연합은 마치 두 양초의 끝이 결합된 것과 같아서 거기에서 나오는 빛은 하나가 되며, 심지와 초와 빛은 모두 하나가 된다.” 43) 이런 마지막 신비한 하나님과의 연합에 이르게 되면, 하나님의 영혼과 신자의 영혼이 합일을 이루어 신자는 무아지경의 경지에 이른다. “아무튼 하나님께서 영혼을 당신께 합치신다고 나는 믿습니다. … 일단 하나님이 영혼을 당신과 합쳐주시면 모든 능력이 마비되기 때문에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한다.” 44)

이런 설명을 통해 Teresa는 영적 여정의 마지막 단계에서 신자는 하나님과의 몰아적인 존재론적인 합일을 경험한다고 한다. 이상으로 유대교의 신비주의와 그리스 헬라 철학자들의 관상을 통한 영적인 합일을 추구하는 신비주의가 알렉산드리아의 교부들을 통해서 초기 기독교 속으로 스며들었고 또 4세기 이후 이집트 사막 교부들을 통해서 수도원 운동으로 발전된 과정과 그 이후 중세 신비주의자들의 중요한 사상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아빌라의 Teresa의 상승적인 구원관이나 하나님과 영혼의 단계적인 합일 사상에 기반한 중세 신비주의는 그 이후 서방 기독교 신비주의의 근간을 형성하고 있으며, 이들의 기본적인 사상은 그 이후 로렌스 형제(Brother Lawrence, 본명은 Nicholas Herman, 1611-1691), 조지 폭스(George Fox, 1624-1691), 마담 기용(Madame Guyon, 1648-1717), 윌리엄 로오(William Law, 1686-1761), 이블린 언더힐(Evelyn Underhill, 1875-1941),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8)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Yungen에 의하면 가톨릭 사제 Thomas Merton은 중세 신비주의 운동과 관상 기도를 오늘날 새롭게 대중화시킨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한다. 그리고 헨리 나우웬(Henri Jozef Machiel Nouwen, 1932-1996)이나 스콧 펙(Morgan Scott Peck, 1936-2005), 토마스 키팅(Thomas Keating)과 바실 페닝턴(Basil Pennington, 1931-2005), 틸든 에드워즈(Tilden Edward)와 제럴드 메이
(Gerald May, 1940-2005), 매튜 폭스(Matthew Fox), 브레넌 매닝(Brennan Manning), 리차드 포스터(Richard J. Foster)의 레노바레(Renovare) 운동을 통해서 기독교 안에서 계속 확산되고 있다고 한다. 45)

5. 영혼의 신성화인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인가?

그렇다면 비범한 성찰이나 신비한 체험 속에서 절대자(하나님)와의 합일을 추구하는 신비주의를 개혁주의 신학은 과연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신비주의 사상과 개혁주의 근본 교리 사이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차이점도 크게 자리하고 있다. 신비주의 운동이 기독교 안에 뿌리내릴 수 있었던 원인은, 양자 모두 초월적인 신성과의 신비로운 연합을 추구한다는 점과 이 과정에서 신자의 역할을 요청한다는 점, 그리고 종교적 정서의 긍정적인 가치를 인정한다는 점 때문이다. 하지만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차이점은, 신인합일의 성격과 영적합일에 도달하는 인간의 역할, 영적합일의 과정에서 그리스도의 위치, 그리고 신인합일의 위치가 구원의 서정에서 시작점인가 아니면 종결점인가의 견해 차이에서 발견된다.

① 먼저 신인합일의 대상과 관련하여 신비주의는 하나님과의 합일을 강조하지만 개혁주의 신학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강조한다. 물론 칼빈도 기독교강요와 그의 주석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용어와 더불어 ‘하나님과의 연합’이라는 용어도 함께 사용한다.46) 그러나 칼빈은 중세 신비주의자들이 신자 스스로의 수행과 관상을 통해서 도달하는 ‘하나님과의 연합’(Unio cum Deo)과 차별화하기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전가된 의에 기초하여 중보자와의 연합을 의미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 cum Christo)이란 용어를 더 많이 사용했다. 47)

칼빈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강조하면서 특별히 경계했던 신인합일 사상은, 신자의 인성과 그리스도(혹은 하나님)의 신성과의 존재론적인 혼합을 주장했던 루터파 신학자 Andrea Osiander였다. 칼빈은 Osiander의 신인합일 사상을 비판하면서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하나이시며, 우리가 그와 하나인 것은 증명할 필요가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본질과 우리의 본질이 혼합된다고 하는 것에는 반대한다.” 48) 라고 하면서 존재론적인 혼합으로서의 신인합일을 엄격히 배격하였다. 김은수의 지적과 같이 칼빈이 신자와 그리스도와의 신비적인 연합을 말하면서도 Osiander의 존재론적인 혼합을 배격할 때, 그의 기독론에서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의 위격적인 연합(unio hypostatica, hypostatic union)을 설명하면서 사용한 칼케돈 원칙(Chalcedonian axiom)-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은 반드시 서로 구별되어야 하지만 혼합되지도 않고 또한 나누어지지 않는다-이 적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49)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위격적인 연합이 서로 존재론적으로 혼합되지 않은 신비한 연합인 것처럼, 그리스도와 신자의 연합 역시 분명 실제 일어나는 연합이지만 양자가 서로 혼합되지 않고 반드시 구분되어야 하는 신비한 연합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신비주의 신인합일은 존재론적인 혼합을 배격하는 개혁주의 신인합일과 달리 신자의 인성과 하나님의 신성 간의 존재론적이고 몰아적인 혼합을 인정하기 때문에, 신비주의 신인합일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지 인간의 영혼이 신화(神化), 또는 신성화(神聖化, deification)의 단계까지 상승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다는 비판의 여지를 남길 뿐만 아니라, 합일을 추구하는 대상으로서의 하나님 이해가 다소 범신론적인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는 비판의 여지를 남긴다.

② 신인합일의 성격과 관련해서도 신비주의와 개혁주의는 뚜렷한 차이점을 보인다. 신비주의의 신인합일은 다소 타락한 신자의 영혼이 숫한 수련과 정화, 그리고 관상의 단계를 거쳐서 수행의 마지막 단계에서 몰아적이고 존재론적인 혼합과 같은 합일에 도달한다. 하지만 개혁주의의 신인합일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와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구원의 서정의 첫 단계에서 그리스도의 의가 성령의 역사로 신자 각자에게 전가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참여하는 구원사적인 합일(salvational historical unification)이다. 이런 의미에서 칼빈이 신자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설명할 때 빠뜨리지 않고 강조하는 것이 바로 성령의 사역이다. 칼빈에 의하면 “우리는 성령의 작용에 의하여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유익을 누린다.… 요약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 신에게 효과적으로 연결시키는 띠(vinculum)는 성령(the Holy Spirit)이다.” 50)

성령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덕을 신자들에게 개인적이며 주관적으로 적용시키는 것이고, 신자를 위한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덕들의 결정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건을 통해 성취되었다. 그래서 신자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그 연합의 구체적인 대상과 내용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자의 영적인 유익을 위하여 구원의 역사 속에서 성취하시고 마련하신 구원의 은덕들이고, 신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건을 통해서 완성된 구원의 은덕들을 고스란히 자신의 것으로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볼 때 개혁주의 신인합일은 구원사적인 합일(salvational historical unification)로 이해할 수 있다. 51)

③ 구원사적인 신인합일은 신인합일에서의 그리스도의 위치와 역할과 관련하여 양자 간의 분명한 차이점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앞에서 확인한 바와 같이 신비주의의 신인합일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신자들이 자신의 경건 훈련과 관상을 통해서 신인합일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먼저 합일을 이룬 모범적인 교사로서의 본을 보여주는 위치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개혁주의 신인합일에서 신자는 구원의 역사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시고 성취하신 십자가상의 대속 사역과 부활의 영광과 고스란히 연합하는 구원사적인 합일이다. 그러므로 신자가 만일에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서 정점에 도달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역사와의 연합을 이룰 때 그 과정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제외되거나 간과 되어버린다면, 개혁주의 신인합일은 그만 그 목표점과 추진력을 몽땅 잃어버리고 만다.

④ 신비주의의 신인합일과 개혁주의의 신인합일의 또 다른 중요한 차이점은 합일의 과정에서 인간의 역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과의 연합이나 신자의 구원의 궁극적인 목표의 달성을 위한 인간의 역할과 관련하여 신비주의 운동은 고행이나 초월적인 관상과 같은 특별한 수련을 요구하지만 개혁주의 근본 교리에서는 ‘오직 은혜’(Sola Gratia)만을 강조한다. 예를 들어 앞에서 확인한 바와 같이 아빌라의 Teresa의 신일합일사상은 마지막 영적인 합일에 도달하기 위하여 신자의 특별한 노력과 선행이 요구되기 때문에 소구의 택함을 받은 사람만이 도달할 수 있음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인합일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는 누구든지 신인합일에 이를 수 있음을 강조한다.

⑤ 두 가지 신인합일의 또 다른 차이점으로는 신인합일이 구원의 과정에서 출발점에 위치하느냐 아니면 경건 훈련의 마지막 단계에 위치하느냐 하는 차이가 있다. 앞에서 확인한 바와 같이 아빌라의 Teresa가 제시하는 하나님과의 연합은 구원의 여정의 마지막 클라이막스 단계이다. 그러나 칼빈은 택함을 받은 신자들 모두가 성령의 조명을 받아 믿음을 소유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그리스도와 연합한다고 주장한다. 52)

요약하자면 신비주의의 신인합일과 개혁주의 신인합일은 하나님과의 연합의 시점이나 성격, 연합의 대상, 신인합일의 과정에서 인간의 역할, 그리스도의 위치,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기여하는 공헌의 정도에 대하여 상당한 차이점을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현대 신비주의 운동에 대한 바람직한 설교의 대응 방안은 무엇인가?

Ⅲ. 나가는 글: 기독교 설교의 대응 방안

앞의 글에서는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신비주의가 뿌리를 내리고 발전해 온 과정과 신비주의 운동의 핵심적인 사상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신인합일을 추구하는 신비주의가 개혁주의의 신인합일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신비주의의 신인합일은 개혁주의 신인합일과 분명한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Ray Yungen이나 Roger Oakland에 의하면, 21세기 북미권의 개신교 안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기독교 복음의 본질을 변질시킬 뿐만 아니라, 교회 성장의 돌파구를 찾는 목회자들과 무언가 색다른 경건의 모양을 추구하는 현대 신자의 입맛에 맞추어서 실용주의적인 신비주의에 근거한 관상 기도 훈련이나 명상을 통해서 기독교 교회를 결국 범신론적인 혼합주의의 늪 속으로 끌어당기고 있다고 한다. 53)

그렇다면 현대 신비주의 운동에 대한 기독교 설교의 바람직한 대응 방안은 무엇인가?

1. 구원사적인 관점의 성경해석을 회복하자!
앞의 글에서는 그리스 철학자들이 호머의 『일리아드』와 『오딧세이』와 같은 서사시나 헤시오드(Hesiodos)의 작품을 해석할 때 활용했던 풍유적이고 신비주의적인 해석이 필로나 그 이후 오리겐의 풍유적이고 신비주의적인 해석을 통해서 초기 기독교 속으로 스며들어 왔음을 살펴보았다. 54) 당시 그리스철학자들은 이 세상의 사람처럼 서로 싸우고 질투하는 신의 삶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는 호머의 『일리아드』와 『오딧세이』와 같은 서사시나 헤시오드(Hesiodos)의 작품을 해석하여 그 의미를 규범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할 때, 사람처럼 서로 싸우고 질투하는 신의 모습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워서 문자 배후에 좀 더 깊은 의미를 상정하면서 알레고리 해석 방법을 발전시켰다. 그런데 이렇게 문자를 넘어서서 심오하고 깊은 의미를 추구하는 알레고리 해석이 알렉산드리아의 교부들을 통해서 그대로 기독교로 흡수되었고, 이러한 알레고리 해석은 중세시대에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올바로 선포되지 못하는 혼탁한 기류를 형성하는 해석학적인 환경으로 작용하였다.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 많은 이단사상이 암약할 뿐만 아니라 기성 교인을 쉽게 공략할 수 있는 원인은 이미 한국교회 안에 알레고리 성경 해석 독법이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바람직한 방법의 하나로 정착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미 비합리적인 알레고리 설교나 이원론적이고 기복적인 신비주의가 가미된 설교를 통해서 한국교회의 영적인 울타리가 제거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런 해석 전략을 동원하여 성경 본문에서 전에 들어보지 못한 신기한 의미를 끌어내면 오히려 신령한 설교자로 존경하는 분위기까지 형성된 상황이다. 그러다 보니 이단의 알레고리 설교나 허황된 성경 해석에도 한국교회 신자들이 쉽게 설득 당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신천지 이단의 교주 이만희는 성경에 대한 역사적, 문학적 및 신학적인 해석을 거부하고 알레고리 해석이나 허황된 비유적인 해석을 주장한다.

성경의 비밀은 비유의 참뜻을 알지 못할 때, 우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영적 소경이요 귀머거리가 되어, 어두운 구덩이에 빠질 수 밖에 없다(사 29:9-13). …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육적인 것을 빙자하여 비유를 베푼 영적인 것인데 사람들이 문자에 매여 육적으로 해석하여 행동한다면 하나님의 뜻에 맞을 리가 없다. 55)

왜곡된 알레고리 해석이나 비유적인 해석은 성경의 문자 배후에 심오한 의미를 끌어낼 수 있는 사람만이 성경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왜곡된 성경관을 조장한다. 그래서 요한복음 4장 16절에서 예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남편을 불러 오라고 하신 것은 문자 그대로의 남편을 데려오라는 뜻이 아니라 네가 지금 섬기고 있는 종교를 지명해 보라는 요청이었다고 해석한다. 이어서 여인이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고 대답한 것은 그동안 따랐던 여러 종교(남편)를 정리해버렸기 때문에 지금 당장은 마땅한 종교를 갖고 있지 않은 상태를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4장 18절의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는 말씀에서 남편 다섯은 2천년 교회 역사 속에서 신자들을 속박했던 거짓된 교회들(예를 들어, 초대교회, 중세교회, 근대교회, 한국교회, 통일교회 등등 아무것이나)을 의미하고, 또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라는 말씀은 현재 출석중인 기성교회도 진정한 종교(남편)가 아니라는 뜻으로 해석하면서 신천지만이 참 남편과 같은 교회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이단들은 성경의 어느 구절은 비유로 풀다가 또 어느 구절은 문자적으로 풀기도 한다. 예를 들어 계시록 7장 4절의 144,000명의 숫자는 문자적으로 풀면서 지금도 신천지 교인이 14만 4천명이 모두 찰 때까지 계속 기성교회를 미혹하는 일을 멈추지 않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이단과 신비주의자의 황당무계(荒唐無稽)한 성경 해석이 기성교회를 출석하는 교인에게도 설득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식의 해석이 기존의 신자에게 먹히는 결정적인 이유는, 경전의 의미는 문자에 갇히지 않고 그 배후로 깊이 파고 들어갈 때 얻어질 수 있다는 초월적인 인식론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국인의 정서 속에 자리하고 있는 초월적인 인식론과 관련하여 선불교의 중요한 교리 중의 하나인 불립문자(不立文字)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불립문자 사상은 육조 혜능(六祖慧能, 638-713)에 의하여 세워졌다고 한다. 나무꾼 출신의 혜능은 깨달음을 얻어 큰 선사가 된 이후에도 글을 읽을 줄 몰라서, 여승 무진장(無盡藏)이 열반경(涅槃經)을 여러 해 읽어봤으나 아직이해를 못하겠으니 가르침을 주십사고 청하자, ‘나는 글을 모르오. 그대가 경문을 소리 내어 읽으면 내가 혹시 그중의 진리를 알 수도 있겠지요.’라고 답했다고 한다. 무진장이 ‘글도 모르면서 어찌 그중의 진리를 안단 말이오?’하고 되묻자 혜능은, ‘진리란 문자와 무관한 것. 마치 하늘의 달과 같지요. 반면 문자란 흡사 그대와 내 손가락이나 다름없소. 손가락은 달의 소재를 가리킬 수 있어도 달 자체는 아니오. 달을 보고자 함에 반드시 손가락을 거칠 필요는 없지 않소?’라고 답하였다고 한다. 손가락은 달을 가리키듯이 문자는 진리를 가리키기 때문에 문자에 머무를 필요가 없이 곧장 문자 배후의 진리로 나아가야 한다는 혜능의 불립문자 사상은 이런 일을 계기로 정립되었고, 그 이후 한국인의 의식 속에서까지 보이는 문자에 쉽게 만족하지 않고 그 배후의 심오하고 초월적인 세계를 추구하는 초월적인 인식론을 강화시켰다.

이러한 불립문자 사상과 같은 초월적인 인식론은, ‘형언불가능성’을 그 중요한 특징으로 하는 이교적인 신비주의와 결합하여 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들을 때에도 성경 본문의 분명한 의미를 무시하고 비합리적인 추론을 자극하면서 단순히 보이고 이해되는 문자에 쉽게 만족하지 않고 그 배후의 좀 더 심오한 세계를 자의적으로 추구하도록 부추길 수 있다는 점이다. 신비주의 연구가 William James에 의하면 신비주의의 첫 번째 특징은 ‘형언 불능성(Ineffability)’이다. 56) 신비로운 정신 상태에 빠져든 주체는 즉각적으로 그러한 신비적 정신 상태를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그 경험의 내용에 대한 타당한 보고 역시 언어나 말로는 온전히 이루어질 수 없다고 한다. 즉, 신비적 정신 상태는 직접적으로 경험되어야만 한다는 특징을 지닌다. 그러다보니 몰아적인 신비주의 운동에서는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깨달음보다는 즉흥적이고 몰아적이며 감정적인 각성을 더 중요시할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비이성적이고 즉흥적인 신비주의가 문자 이면의 숨은 진리를 추구하는 알레고리 해석과 결합될 때, 설교 현장을 더욱 황폐화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현재 한국교회 안에서 암약하는 이단 운동이나 신비주의 운동에 대항할 수 있는 바람직한 기독교 설교 운동은 바람직한 성경해석의 회복 운동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고, 그러한 올바른 성경해석의 회복을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건에서 최고조에 달한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는 방향으로의 성경 해석 작업이 설교 현장에서 꾸준히 강조되어야 한다.

2. 성화의 지표로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자기부정과 헌신을 설교하자!
70-80년대의 숫적인 부흥을 경험한 한국교회는 그 와중에 질적인 하락을 동반하고 말았다. 21세기 들어서도 한국교회의 침체가 별반 개선되지 않은 상황에서 일부 목회자들과 신자들은 좀 더 차별화된 경건의 지표로 신비주의 운동이나 은사 운동, 방언, 치유 사역, 또는 고상해 보이는 관상 기도 운동을 통해서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고 있다. 이러한 신비주의 운동이 침체하는 한국교회에 새로운 전기를 제공할 수 있다면 다행스러운 일이겠지만,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대중화되고 세속화된 기독교의 도덕적인 가치가 하락하는 상황에서, 좀 더 고차원적인 신인합일을 추구하는 신비주의 운동은 그리스도의 전적인 은혜를 강조하기 보다는 경건의 훈련이나 수행, 관상, 또는 차별화된 은사를 발휘하는 엘리트주의(elitism) 신앙을 부추길 우려가 있다.

앞서 우리는 A.D 313년에 기독교가 국교로 공인된 이후 교회의 세속화가 뒤따르자 그에 대한 반동으로 등장한 수도원 운동이 수도원의 고행과 수덕을 통한 신인합일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이집트 사막의 교부들과 알렉산드리아의 교부들을 통해서 이교적인 신비주의 운동까지 허용했던 사례를 살펴보았다. 이와 유사한 현상이 도덕적 쇠락 현상을 경험하고 있는 한국교회에서 재발하지 않도록 하려면, 설교자는 신자들에게 성화의 지표를 분명하게 선포해야 한다. 신자들이 자신의 신앙의 성숙의 정도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지표는 구원파가 주장하듯이 자신의 영적인 탄생일을 분명하게 기억하는 것도 아니고, 또 베뢰아에서 주장하듯이 귀신의 역사로 말미암은 질병을 강력한 축귀 기도로 퇴치하면서 질병의 치유를 경험하는 것도 아니고,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도 아니고 신비로운 이적을 경험하는 것도 아니고 깊은 내면세계에서 몰아적이고 신비로운 영적 합일을 경험하는 것도 아니다.

예수를 믿어 구원받은 신자가 그 이후의 신앙생활 속에서 꾸준히 성화의 과정을 밟아가고 있음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지표는 자신의 내면과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더욱 철저하게 주장함과 동시에 더욱 철저하게 자신을 부인하는 것(self-denial)이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예수를 믿은 신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갈 2:20).

자신의 내면과 모든 삶의 영역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더욱 철저하게 주장함과 동시에 자신의 세속적인 욕망과 아집을 더욱 철저하게 부인하고 낮아지면서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헌신하고 봉사하며 이웃을 섬기는 것이야말로 신자가 이 땅에서 추구해야 할 신인합일의 중요한 지표이다.

3. 기독교의 신비를 이 땅에 구현하는 헌신을 설교하자!
마지막으로 기독교 설교자들은 현대 신비주의 운동이 교회 안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개혁주의 신인합일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성경적인 방법은 신자들과 교회의 현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도록 헌신하는 것’뿐임을 가르쳐야 한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기독교 설교자들이 바람직한 개혁주의 신인합일의 방법을 신자에게 올바로 제시하지 못할 때, 왜곡된 이교적 신비주의와 세속적인 신인합일 사상이 교회 안으로 파고들어 올 수 있다. 여러 학자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 “한국인의 심층 기저에는 신적인 존재를 직접적으로 체험하여 현실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욕망이 자리하고 있다.” 57)

이러한 한국인의 심성은 기독교의 신비주의 전통과 만나면서 열광적인 회심과 중생 체험을 가능하게 하였고 한국 기독교가 좀 더 역동적인 종교로 발전할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신비주의적인 심성이 비지성적이고 이기적인 욕망과 잘못 결합되면 맹목적인 열광주의에 빠지거나 기복적이며 미신적인 풍조에 빠질 수 있다.

그러므로 설교자들은 종교적인 세속주의나 기복사상을 부추기는 설교도 배격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이교적인 신비주의나 열광주의를 경계함과 동시에, 이 세상 현실과 저 세상의 신비에 대한 신자들의 관심과 호기심을 올바로 충족시켜 줄 수 있도록 성경적인 신비주의로서의 하나님 나라 종말론과 아울러 하나님의 나라가 신자들의 자기 부인과 헌신을 통해서 이 땅에 구현되는 기독교 현실주의를 올바로 설교해야 한다. 바람직한 개혁주의 신인합일의 지표는 구원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성령의 능력 안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새로운 사명을 깨닫고 하나님의 나라가 자신이 속한 가정과 직장과 사회에서 구현될 수 있도록 기도하고 헌신하는 것이다. 이러한 헌신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건에서 최고조에 달한 하나님의 나라는 구체적으로 오늘 이 시간 신자가 속한 가정과 교회와 사회를 통해서 구현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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