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학적 태도
시라는 장르는 감정이나 생각을 명료하게 표현하는 대신에 우회적으로 에둘러 표현합니다. 진의를 은유 속에 감추어 표현합니다. 모호하고 중의적인 표현으로 시인의 의도를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러한 연유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라는 문학적 표현 방식이 의미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상대방이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바를 명료하게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소통의 차원에서 불통에 가까운 문학 장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자신이 느끼고 생각하는 바를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는 시라는 표현 방식은 자신감 없는 태도라고 생각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을 은근히 그리고 에둘러서 표현하는 것이 비겁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나이를 먹어갈수록 시에 관심이 갑니다. 인생이란 것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면서 살 수 없는 것임을 깨달아 가니까요. 모든 생각과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없는 것이니까요. 아니 그래서는 안되는 것이니까요. 인생을 살아 갈수록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드러내는 것 자체가 버거워 지기 마련이니까요. 꼭 솔직하게 감정과 생각을 고백하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니까요. 드러내서는 안되는 감정과 생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니까요. 때로는 분명하고 명료한 표현이 상대방을 자극하거나, 부담스럽게 할 수 있으니까요. 아무리 논리적으로 상식적으로 정확한 말이라고 할지라도, 상대방의 감정을 자극하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합리적이고 상식적이라고 하더라도 솔직함은 무의미한 갈등을 만들어 내기도 하니까요. 나이를 먹어갈 수록, 인생을 깨달아 갈수록, 모호하고 함축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게 됩니다. 다의적인 의미를 담아서 표현하게 됩니다. 아마도 그렇게 바뀌어 가는 것은 인생을 살았다는 흔적일 겁니다.
동시에 시는 기본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가 담긴 행위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누군가에게 전달하고 싶은 본능의 표출입니다. 그렇습니다. 시는 숨기고 싶으면서도 은근히 드러내고 싶은, 아무도 몰랐으면 하면서도 누군가가 알아주길 바라는 인간의 양가적인 태도에 적합한 표현 방식인 겁니다. 아무도 몰랐으면 하면서도 누군가 알아주길 바라는 우리의 삶의 모습 자체가 ‘시’인 것이죠. 한 마디로 시는 인생의 본질을 드러내는 표현 방식인 겁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 자체가 시를 써내려 가는 겁니다. 시를 직접 써내려 가지 않아도, 모호하고 양가적인 태도로 살아가는 것 자체만으로 우리 모두는 시인인 것입니다.
시는 기본적으로 아주 수줍은 텍스트입니다. 그 너머에 의미를 감추고 있습니다. 수줍은 모습을 한 채 들키고 싶어하는거죠. 따라서 시를 향유하기 위해서는 더 자세히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더 많이 곱씹어 보아야 합니다.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만 그 의미가 드러납니다. 시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드러나는 모습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요. 오랜 시간을 들여서 꼼꼼히 살펴 보아야만 시의 진정한 의미와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다고요. 애정을 가지고 인내심과 끈기를 가지고 접근하는 이만 온전히 즐기고 누릴 수 있는 텍스트라고 말이죠. 시와 꼭 닮은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드러나는 모습이 전부가 아닙니다. 오랜 시간을 들여서 꼼꼼히 살펴 보아야만 그 사람의 인생의 진정한 의미와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애정을 가지고 인내심과 끈기를 가지고 접근하는 이만 타인을 온전히 누리고 즐길 수 있는 것입니다.
시학적 영성
마10:30을 읽어 봅시다.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당신이란 존재를 아주 깊이 꼼꼼하게, 오랜 시간 들여서 자세하게 바라보시는 하나님을 묘사하는 표현입니다. 당신의 머리카락을 하나하나 다 세어 보실 만큼 우리를 곱씹고 묵상하시는 하나님을 묘사하는 표현입니다. 한 번 쓱 훑어본 것으로만 판단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묘사하는 표현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들여다 보는 방식은 시를 음미하는 방식과 많이 닮아 있습니다. 요8:10-11을 다시 읽어 봅시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이 율법에 의해서 돌에 맞아 죽기 직전에 그녀 앞에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돌로 치려는 자들에게 한 마디를 던지고, 그녀를 구원하십니다. “죄 없는 자 그녀를 돌로 쳐라” 그리고 그녀에게 말씀 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그녀의 범죄에 대해서 즉각적으로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심판을 마지막 날까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이 세상에 오실 때까지 판단을 보류하십니다. 당장 내 눈 앞에 드러나는 행위로 판단하는 대신에, 마지막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끈기 있게 모든 것을 다 지켜보신 후에 종합적으로 판단하시겠다는 거죠. 인간의 단면이 아니라, 전체를 바라보시는 겁니다. 그러한 이유로 오랜 시간을 투자해서, 인내심을 가지고 우리의 모든 행동을 마지막까지 유심히 지켜 보시는 분이라는 겁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함축적으로 요약한 표현이 있습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죠. 드러나는 겉모습이 아니라 더욱 깊은 방식으로 오랜 시간을 들여서 의미를 자세하게 성찰하고 묵상하는 시를 대하는 태도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하시는 모습은 꼭 닮았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대하는 방식을 모방하는 행위를 “시학적 영성”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시학적 영성과 가장 날카롭게 대조되는 시선이 있습니다. 바로 “정죄함” 입니다. 정죄란 무엇입니까? 하나 또는 몇몇의 행위로 상대방을 판단하는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정죄함은 우리 눈에 보이는 상대방의 모습으로만 상대방을 판단하는 성급함 입니다. 그러나 상대방의 인격과 삶이란 다중적이고 모호함 속에 감춰져 있습니다. 상대방의 본 모습은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이죠. 감춰진 상대방의 본연의 모습을 세심하고 꼼꼼하게 묵상하는 신중함과 반대되는 태도입니다. 따라서 정죄함은 오랜 시간을 들여서 상대방을 지켜보지 않는 가벼움 입니다.
결론적으로 타인을 정죄하는 것은 당신이 얼마나 가볍고 성급한 존재인지, 상대방의 일부를 가지고 상대를 판단하는 편협한 존재인지, 상대를 진중하게 묵상할 줄 모르는 인내심 없는 존재인지 드러낼 뿐입니다. 당신이 거룩 하기 때문에, 경건 하기 때문에 남들이 보이지 않는 타인의 죄인 된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하나님과 같이 긴 호흡으로 타인을 바라 볼 인내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만, 지금 당장 포착된 행위로만 타인을 판단하는 당신의 성급함 때문입니다. 그 사람의 전체의 모습을 보려고 하지 않는 단편적인 판단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타인의 본 모습까지 헤아려 보려 하지 않는 당신의 편협함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과 가장 닮지 않은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과 철저하게 다른 방식으로 타인을 바라보고 있음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죠. 성급한 당신의 판단, 편합한 당신의 기준에 취해서 말이죠.
시학적 관계
여태까지 저희는 시를 대하는 태도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대하시는 태도를 발견할 수 있다고 묵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하시기에 우리가 타인을 대할 때 취해야 하는 태도 역시 시를 대하는 태도와 동일해야 한다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도출 됩니다. 바꿔 말해서, 시를 대할 때처럼 오랜 시간을 두고 타인을 자세히 살펴보고 묵상하는 것, 성급하게 판단 내리는 대신에 그 사람의 말과 행동에 담긴 진의가 헤아려 보는 것, 상대방의 진면목이 드러날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이 하나님을 닮아가는 성도의 모습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반면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모호하고 이해되지 않는 상대방의 모습을 쉽게 넘겨 버리거나 속단하는데 익숙합니다. 그래서 상대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아가서 우리는 서로의 말과 행동을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대로, 특히 그것들을 부정적으로 향유하는데 너무 익숙합니다. 드러나 보이는 부분이 아니라 상대방의 선한 중심을 파악할 수 있을 때까지, 꼼꼼하게 그리고 반복적으로 상대에 대해서 깊이 묵상하는 인간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잘못 전달된 말과 행동들 뒤에 숨겨진 선한 본의를 읽어내는 이가 없습니다. 교회에서 마저 말이죠. 그래서 교회에서 사람에게 상처 받은 사람은 늘어가는데, 상대방의 진심에 감동 받은 사람은 발견하기 어려운 겁니다.
이처럼 바싹 다가가 자세히 바라보지 않고 늘 멀리서 바라보는 겉핡기식 교제가, 서로 오랜 시간을 보내도 서로에 대해서 무지한 채 살아가게 합니다. 이러한 무지는 상대방의 진의를 왜곡하게 합니다. 그래서 갈라지는 관계는 늘어갑니다. 반면에 형제 사랑은 희귀 현상이 되어버린 거죠. 한 사람의 중심까지 들어가는 깊이 있는 교제를 해본 적 없는 겁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누군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겁니다. 그러한 탓에 작은 오해가 인간 사이를 너무 쉽게 갈라 놓고 맙니다. 서로에 대한 무지로 인하여 본의 아니게 서로 상처를 주고 받는 겁니다. 드러나는 모습만 보고 판단하는 성급한 인간 관계 방식이 미움과 증오, 원망의 싹이 됩니다. 그 사람의 진의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 하지 않으니, 당신이 느끼는 부정적인 감정만 충만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오랜 기간을 보고 지내도 서로 정들지 않은 인간 관계만 남은 거죠. 이름만 형제 자매인 관계, 껍데기뿐인 관계로 가득한 겁니다. 비단 우리가 교회에서만 그런 식으로 살겠습니까?
당신의 편협한 기준에 들어 맞는 이가 세상에 얼마나 있겠습니까? 당신이 인내심 없이 성급하게 내리는 판단 앞에서 그 누구도 자신의 아름다운 본 모습을 보여줄 충분한 시간을 허락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오랜 시간이 지나야만 드러나는 상대방의 숨겨진 아름다움과 진면목을 향유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당신 눈에 좋은 사람이 보이지 않는 겁니다. 당신 주변에 좋은 사람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정죄함에 담겨 있는 성급함, 편협함, 인내심 부족이 우리가 상대방의 부족하고 죄인 된 모습에만 집중하게 했던 겁니다. 그러한 탓에 처음엔 좋았던 관계도 어느 시점에 이르면, 소위 콩깍지가 벗겨지면 또는 결정적인 계기로 그 사람의 연약한 면을 발견하게 되면 인간 관계에 허무함과 염증을 느끼는 겁니다. 그래서 아무도 사랑하지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 관계가 허무하게 느껴지는 겁니다. 외로움만 쌓여 가는 겁니다. 그러나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살기 때문에 고독한 것이라고 애써 스스로를 기만하는 애처로운 자기 위로만 남은 겁니다. 인복이 없다는 자기 연민에 빠진 모순적인 모습만 남은 겁니다. 사실은 당신의 그 가벼움과 성급함, 단편적인 판단들로 형제 자매들에게 상처를 주기에, 아무도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모습을 한 탓에, 아무도 당신 곁에 머물지 않는 것인데 말이죠.
그 사람을 깊이 이해하는 노력을 수반하는 시학적 영성, 누군가의 진면목을 꿰뚫는 시학적 영성의 부족이 허무한 인간 관계만 무성하게 남겨 놓은 겁니다. 그래서 불행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는 사람은 늘어가는데 고독은 더욱 깊어지는 거죠. 이 시간에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오랜 시간을 기다리며 한 사람을 바라본 적 있었는지 말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내면 깊숙한 곳까지 헤아릴 만큼 누군가에 대해서 섬세하게 집중한 적 있었는지 말입니다. 머리카락을 다 세어보는 하나님의 모습, 마지막까지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고 지켜 봐주는 하나님의 모습이 우리에게 있었는지 말입니다. 타인의 모습이 아니라 자기를 들여다 보아야 할 때라는 겁니다.
인간이란 시와 같습니다. 오래 보아야 아름답습니다. 자세히 지켜봐야 사랑스럽습니다. 그 사람의 모든 속사정을 알고 나면 이해 못할 것이 없습니다. 정든다는 것의 의미는 오래 보고 자세히 지켜보다 보니까 그 사람의 진면목 깨닫게 된 겁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때때로 미워지더라도 떼어놓을 수 없다는 거죠. 미운 모습도, 거슬리는 말들도 사실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 정도의 시간이 흐른 겁니다. 그런 모습에 숨겨진 진의를 알 정도의 섬세한 관찰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속사정까지 알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사라져 버린 겁니다. 그제서야 소중한 사람이 하나 더 생기는 겁니다. 좋은 사람이 내 인생에 한 명 더 늘어가는 겁니다. 그제서야 사람으로 행복해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이나마 알게 되는 겁니다. 그제서야 당신이 마주한 세상의 풍경도 변하는 겁니다. 지긋지긋한 인간들로 가득했던 당신의 세상에서, 아름다운 사람들로 가득한 세상으로 말입니다. 고통만 주던 인간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사랑스러운 이들로 가득한 세상으로 말이죠. 하나님을 꼭 닮은 시학적 영성은 단지 타인을 향한 용납과 사랑에 머물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을 위한 기쁨과 평강의 비결인 것입니다.
시적 상상력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시는 모호하고 중의적인 언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탓에 시인의 의도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독자들은 상상을 하게 됩니다. 시인의 의도는 이러한 것이 아닐까라고 말이죠. 그러한 과정 속에서 다양한 해석이 등장하고, 때로는 시인의 본연의 의도보다 더 탁월한 해석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아시는 분입니다. 우리 모든 부분을 다 살피실 수 있는 전지하신 분이죠. 그래서 우리가 그럴 수 밖에 없는, 그렇게 흉측하게 변해버린 과정과 속사정을 속속들이 꿰뚫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족하고 나약한 모습도 거리낌 없이 이해하시고 사랑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그 사람의 속사정, 과거를 다 알 수 없지요. 그래서 하나님처럼 사랑하고 용납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아무리 깊이 묵상하고 자세하게 살펴 봐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용납할 수 없는 모습과 행동을 반복하는 형제, 자매들이 있습니다. 묵상하면 할수록 미워할 이유만 가득해 지는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향하여 시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가시 돋치고 못난 모습을 통해서 그들의 상처와 눈물로 얼룩진 과거를 상상하는 것입니다. 오랜 시간을 들여서 그들이 그렇게 변해 버린 원인을 묵상해 보는 것입니다. 상처와 눈물로 얼룩지기 이전의 아름답고 순수한 모습, 가시 속에 감추어진 아름다운 장미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미움과 원망으로 가득했던 나의 마음 한 구석에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 자리 납니다. 그렇게 싹을 틔운 긍휼이 미움과 증오의 영향력을 조금씩 약화 시키기 시작합니다. 이처럼 긍휼은 시적 상상력에서 시작되는 겁니다. 시적 상상력을 통해서 인간을 불쌍하게 여기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그제서야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존재인 죄인을 사랑하는 하나님을 닮아가는 겁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도저히 가까이 할 수 없는 추악한 죄인들과 더불어 살아가시는 것처럼, 고슴도치 같은 존재들과 어울려 사는 법을 배우는 겁니다. 사랑하지 못할 사람이 없는 사람, 같이 어울리지 못할 사람이 없는 사람으로 거듭나는 겁니다. 시학적 영성을 통해서 비로소 세상에서 건강한 방식으로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죠.
저희는 여태까지 시학적 영성에 대해서 묵상 했습니다. 먼저 시학적 영성은 오랜 시간을 들여서 인내심을 가지고 한 사람을 자세하게 들여다 보는 것, 그렇게 한 사람의 아름다움과 진면목이 드러날 때까지 한 사람을 깊이 묵상하는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이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이라고 반복해서 말씀 드렸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태도를 어디에서 배울 수 있습니까? 바로 성경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한 구절 한 구절 오랜 시간을 들여 자세하게 바라보는 묵상의 습관. 성경 구절을 두고 계속해서 그 의미를 탐색하고 사색하는 습관. 더 나아가서 성경 구절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보고 상상하는 묵상의 습관. 성경의 단편적인 부분을 떼어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전체 맥락에서 한 구절을 해석하는 묵상의 습관. 이러한 묵상의 습관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시학적 영성을 체득해 나가는 겁니다. 어쩌면 우리가 시학적 영성을 체득하지 못했던 이유는 성경을 진지하게 대하는 습관이 부족했기 때문일 겁니다. 뜨겁게 찬양하며 감정적 고조만 추구했던 신앙, 기도 가운데 자기의 소원에만 몰입하는 신앙, 열정적인 봉사와 헌신을 통해서 자기 만족을 추구하는 신앙, 자기의 영적 체험에 갇혀 버린 신앙에 만족해왔기 때문일 겁니다. 그것이 신앙의 전부라고 착각해왔던 탓일 겁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경을 제대로 묵상하고 사색하는 시인의 경건일 겁니다.
결론
시학적 영성이란 그저 오래 지켜보고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상상력을 펼치는 것이 아닙니다.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오래 지켜보고 자세히 살펴보는 겁니다. 긍휼한 마음을 가지고, 이 사람이 그래서 그렇구나 하고 상상력을 발휘하는 겁니다. 그 애정 어린 시선, 관대함을 조금이라도 서로에게 베풀면 안 되겠습니까? 그러면 저같이 부족한 사람도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을 텐데, 모나고 가시 돋친 그 누군가도 조금 더 잘 살아갈 수 있을 텐데. 누군가 당신을 그렇게 바라봐 줬더라면, 당신도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은 모습일 텐데. 서로가 조금 더 애정 어린 시선으로, 긍휼한 마음으로, 조금 더 오래 기다려 주고, 조금 더 지켜봐 주고,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 봐줬더라면, 서로가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은 모습을 하고 있었을 텐데. 어쩌면 서로가 여전히 변하지 않는 것은 내가 시학적 영성으로 그들을 대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서로에게 필요한 것은 위대하고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성급하게 판단하지 않고 조금 더 지켜 봐주는 것, 조금 더 기다려주는 것, 조금 더 자세한 관심을 가져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시학적 영성이고, 그것이 서로에게 베푸는 하나님의 사랑일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를 조금 더 나은 인간으로 만드는 하나님의 능력일 겁니다. 다시 말해서 거듭남의 능력이겠지요. 이 시간에 마음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시학적 영성으로 바라봐 주고 인내하고 기다려 줬어야 했을 사람들 말이죠. 부모나 자녀일 수도 있고, 배우자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당신 주변에 있는 형제나 자매일 수도 있습니다. 코람데오닷컴 독자 여러분! 이 글을 읽는 그 자리에서 잠시 그 사람을 떠올리며 시학적 영성을 발휘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닮아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김삼열 목사
출처 : 코람데오닷컴(http://www.kscoramde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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