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의 명함(딤전 1:15)
조병수 교수<합신>
나는 아직 한번도 내 이름 석자를 박은 명함이라는 것을 가져본 적이 없
다. 별로 소개할 내용이 없는 명함을 가진다는 것이 괜스레 멋쩍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끔 사람들이 명함을 요구할 때면 뭐라 변명할 수 없어 대
충 쓴웃음으로 때우고 만다. 게다가 나에게 상대방이 자기의 명함을 건네주기
라도 하면 미안함은 더욱 가중된다. 명함을 받을 때마다 드는 생각은 이런 사
람이기에 명함을 가지고 다니는구나 하는 것이다. 만일에… 정말로 만일에
누군가가 당신의 손에 쥐어준 명함을 펴보니 그의 이름과 함께 사기, 파손,
절도, 폭행, 살인미수 이와 같은 온갖 악행을 저지른 전과 10범의 사실이 빨
간색 글씨로 그 작은 공간을 뒤덮고 있다면, 당신은 그 사람을 어떻게 평가하
겠는가.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내밀고 있는 것은 빨간색 글씨에 굵은 밑줄까지 근
것 같은 명함이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폭행자였으나” (딤전
1:13). 불가피하게
자신의 불량한 과거를 드러내야 하는 상황이라서 완곡하
게 한 단어로 슬쩍 얼버무리고 지나가기만 했어도 우리는 그를 솔직하고 진실
한 사람이라고 부를 것이다. 하지만 구태여 여러 말을 보태고 보태 자신의 부
끄러운 옛 삶을 바닥까지 들춰낸다면 그것은 이미 솔직함이고 뭐고 다 떠나
서 미련함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이제는 말이 끝났으리라 싶었더니
그것도 모자라 또 한 마디 최악의 단어를 덧붙인다면 세상에 이렇게 어리석
은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명함에 “죄인 중에 내가 괴수
니라” (딤전 1:15)는 말을 첨가함으로써 스스로 그런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
다. 이것은 빨간색 글씨 아래 굵은 밑줄을 긋고 그 주위에 초록색 형광 펜을
휘두른 격이 아닌가.
그것도 사도 바울이 자신의 명함을 내준 대상이 아들처럼 사랑하여 (딤전
1:2) 사역을 맡긴 (딤전 1:3) 나이 어린 제자라는 것을 생각할 때 (딤전
4:12) 우리는 저절로 아연해지고 만다. 아비가 아들에게 영광스럽던 과거를
과시하고, 선생이 제자에게 찬란하던 지난날을 드러내며, 선배가 후배에게 용
맹스럽던 옛일을 자랑하는 것이 우리의
길이다. 아들에게는 수치스러운 과거
를 감추려는 것이 아비이며, 제자에게는 부끄러운 지난날을 숨기려는 것이 선
생이며, 후배에게는 비겁하던 옛일을 덮어두려는 것이 선배이다. 그런데 어찌
하여 사도 바울은 이렇게 미련하고 어리석게도 자신의 초라하다 못해 비참한
과거를 디모데에게, 아니 만방에 오고 오는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 털어놓
는 것인가.
성경은 우리 앞에 온갖 죄인들의 이야기를 쏟아놓는다. 보석이 빛나고 백과
가 맺히는 태초의 낙원을 맡기신 하나님의 신뢰를 저버린 아담, 죽음의 홍수
후에 생명처럼 얻은 포도로 담근 술에 취해 자식들 면전에서 벌거벗는 실수
를 저지른 노아, 제 한 목숨 살겠다고 두 번씩이나 똑같은 짓을 하며 아내까
지 공녀로 팔아 넘긴 거짓말의 대명사 아브라함, 형제의 장자권과 축복권을
빼앗기 위해 뻔뻔스럽게 팥죽과 양털로 마음을 칠하고 피부를 도배한 사기꾼
야곱, 얼마나 심한 욕정에 사로잡혔으면 며느리인줄도 모르고 도장과 허리띠
와 지팡이까지 약조물로 주며 쾌락을 즐겼던 유다, 남의 아리따운 아내를 빼
앗고 그 충성스런 남편까지 전쟁터에 몰아넣어 죽이는 무서운 간계
를 꾸민 다
윗,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내놓겠다던 호언장담도 일순간에 내던진
베드로… 이것이 모든 시간을 차지하고 모든 공간을 넘나드는 종교가 자신
의 경전으로 자랑하는 책이 담고 있는 내용들이다. 이것이 기독교의 명함이
다. 왜 기독교는 구역질나는 인물들을 만방에 오고 오는 모든 시대의 사람들
에게 털어놓는 것인가.
그것은 사도 바울이나 성경의 인물들이나 세상의 누구보다도 못한 사람들이
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는 것을 말하려는 오직 한 가지
의 이유 때문이다. 이것이 기독교의 진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죄인이었던 것
을 숨기지도 않지만,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살게 된 것을 감추지도 않는다.
우습게도 그들보다는 조금 낫다는 생각이 드니 이제 나도 명함을 하나 만들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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