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사람 위에 하나씩(행 2:1-4)
조병수 목사(합신 명예교수)
역사상 경제적 “공유”의 가장 완벽한 사건은 사도행전 2:44-45에 묘사되어 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며…” 때때로 우리는 이 진술에 큰 감명을 받으면서 초대교회의 물질 공유를 경탄의 눈초리로 바라보기만 하는 경향을 띤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중대한 사실이 있다. 초대교회에서 경제적 공유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저절로 된 것이 아니다. 초대교회의 물질 공유에는 놀라운 사건이 전제된다. 한 마디로 말해서, 초대교회의 경제적 공유는 오순절 성령님의 강림 사건에서 시작되었다. 2:1-4에는 2:44-45가 뿌리를 내리고 있다. 오순절 성령님 강림 사건이 초대교회의 경제적 공유의 뿌리이다.
오순절 사건에서 중요한 것은 신자들이 다 같이 한곳에 모인 자리에 성령님의 강림하심에 관한 묘사이다.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었고 불같은 혀들이 보였다. 여기에서 특히 눈여겨볼 현상은 불같은 혀들이 갈라져 임하면서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였다는 것이다(3). 유사 용어 “각 사람”과 “하나씩”이 반복적으로 언급된다. 이것은 성령님의 은혜가 각 신자에게 공유된 것을 의미한다. 사도 바울은 이런 현상을 “이 모든 일을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시는 것이니라”(고전 12:11)고 설명한다(참조. 롬 12:3; 고후 10:13). 성령님이 자신의 은혜를 신자들과 공유하셨다. 바로 여기에서 교회의 경제적 공유가 비롯되었다.
경제적 공유의 근간은 영적 공유이다. 성령님이 행하신 신론적 공유가 신자들이 행하는 교회론적 공유를 결과 시킨 것이다. 오순절 성령님 강림 사건으로부터 교회의 경제적 공유가 시작되었다. 누가는 이 사실을 부각하기 위해 특별한 언어적 장치를 설정하였다. 누가는 동일한 단어를 오순절 성령님 강림과 교회의 물질 공유 양쪽에 사용한다. 그것은 “디아메리조”라는 단어이다. 특이하게도 이 단어는 사도행전에서 오직 이 두 곳에만 사용된다. 이 단어가 우리말로는 성령님의 강림과 관련된 불같은 혀에는 “갈라져”라고 번역되었고(3), 교회의 공유와 관련된 물질에는 “나눠주며”로 번역되었다(45).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여 성령님의 은혜 공유와 교회의 물질 공유를 설명하는 데는 둘 사이에 중대한 인과관계가 성립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신자의 물질 공유가 성령님의 은혜 공유 없이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치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강제로 물질 공유를 시도할 것이 아니라 기도로 성령 공유를 갈망하는 것이 우선이다.
물질 공유보다 성령 공유가 우선인 까닭은 무엇인가? 왜 영적 공유가 경제적 공유보다 우선해야 하는가? 그 이유는 각 신자가 성령님의 은혜를 공유하는 것은 삼위일체의 역사적 실현이기 때문이다. 삼위일체는 삼위 하나님의 일체적 공유이다. 삼위일체 안에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것이 공유된다. 신성, 절대성, 영원성, 자존성, 온전하심, 거룩하심, 진실하심, 사랑, 지식, 의지 등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는 방식 그 자체가 공유의 영원한 본질이며 절정이다. 삼위일체는 공유의 유일한 원형이다. 삼위일체는 모든 “공유” 개념과 실현의 신적 기원이며 영적 모범이다. 삼위일체의 상호공유는 기독교의 근간이다. 창조는 하나님의 뜻이 만물에 공유되는 것인데, 특히 인간 창조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공유한다는 의미다. 구속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안에서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하는 것이다. 믿음이란 신앙고백을 통해 성경의 진리를 공유하는 것이며, 전도는 모든 신자가 공유하는 복음을 불신의 세상에 나누어주는 것이다.
그런데 삼위일체의 상호공유를 교회에 역사적으로 풀어주신 사건이 오순절 성령님 강림이다. 오순절 경험에서 교회가 물질 공유를 시작했듯이, 오순절적 경험을 가진 신자가 물질 공유를 시작할 수 있다. 성령님의 공유를 빼놓고 물질의 공유를 주장하면 물질주의가 되고 만다. 영적 공유를 빼놓고 경제적 공유를 주장하면 공산주의가 되고 만다. 은혜의 공유를 빼놓고 재물의 공유를 주장하면 유물론이 되고 만다. 기독교는 공산(共産)주의가 아니라 공영(共靈)주의이며, 물질주의(materialism)가 아니라 신령주의(spiritualism)이다.
성령님이 베푸시는 은혜를 공유함으로써 물질을 공유하는 것은 개인의 사명이자 교회의 사명이다. 공유가 제대로 실현되면 개인도 교회도 사회도 막대한 유익을 얻을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공유를 실천으로 옮길 때, 개인의 삶은 찬란하게 빛나고, 교회는 강력하게 결속되며, 사회는 나날이 밝아질 것이다. 성경의 공유 사상은 오늘날의 신자와 교회와 세상을 향해 이 사실을 선명하게 밝혀준다.
[2024년 8월 29일. 변세권, “공유하는 삶이 아름답다” 출판기념회 설교]
'교회당'이 할 일과 '교회'가 할 일 (3) | 2024.10.24 |
---|---|
생명을 살리는 공동체, 교회 (1) | 2024.10.22 |
믿음, 소망, 사랑의 신앙 본질에서 본 한국교회 구원 신앙의 반성 (1) (3) | 2024.07.26 |
원수를 사랑하라? (0) | 2024.07.02 |
“사랑이 강권하시는도다!”(고후 5:13-15)_박완철 목사 (0) | 2024.06.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