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7. 한국교회 연합예배가 끝났다. 그동안 이 모임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었다. 예배냐, 집회냐, 혹은 주일성수냐, 아니냐, 혹은 종교 행위냐, 정치 행위냐, 등에 대해서 찬반양론이 뜨거웠었다. 하지만 모임의 성격이나 그것이 성경적이냐, 교리에 맞느냐는 논제로는 주로 의견이 다양하게 분출되었지만, 정작 중요한 아젠다 그 자체에 대한 집중적 논의는 예상보다 미미했다고 보인다.
나는 개인적으로 포괄적 차별금지법이라는 아젠다가 종교적인 이슈라고만 보는 좁은 의견에 대해 ‘그건 아니라’는 소견을 표하고 싶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아직 제정된 건 아니지만 줄기차게 제정하려는 움직임들이 계속 있고, 그에 대항해서 기독교계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그런데 기독교계 안에서도 어떤 사람들은 이 저항운동을 기독교를 수호하기 위한 종교적인 움직임일 뿐이라고 폄하하는 것 같다. 그리고 또는 이 포괄적 차별금지법 반대자들은 정치적으로 어느 한쪽 편에 서는 사람들이라고 매도하는 분들도 많은 것을 본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한쪽 편에 선 사람들이기에 다른 쪽 편에 선 사람들이 볼 때는 정치적으로 반대인 사람들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그러나 실상은 차별금지법 반대의 논리는 정치적 정파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여당을 지지하던 야당을 지지하든 간에 알고 보면 차별금지법은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반대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아직 제정이 안 되어 실체가 없으나, 외국의 사례들을 비추어서 생각해볼 때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상식의 문제요, 논리의 문제요, 양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미리부터 치열하게 반대하는 주장의 핵심은 ‘성적 지향’이라는 표현에 있다. 정확하게 말해서 남자와 여자 외의 다른 성을 인정하느냐의 문제요, 이 논거가 발전되면 도달하는 곳은 결국 동성결혼 합법화라고 볼 수 있다. 외국의 입법 과정들을 살펴볼 때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순서로 전개될 공산이 크다.
1. 법 제정 자체가 말이 되는가?
내가 가장 기본적인 상식의 문제라고 보는 이유는, 과연 ‘차별’을 ‘금지’하는 ‘법’을 제정하는 것이 말이 되는가, 하는 점이다. 차별이나 혐오라는 개념은 생각, 언어, 감정, 태도, 윤리에 관련된 개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마음속에 들어있는 개념이다. 그런데 차별을 금지한다고 하면 결국 사람의 감정이나 태도나 언어를 법적으로 문제로 삼겠다는 건데, 이것이 과연 법률로 규제할 수 있는 영역인가? 그렇게 되면 상당 부분 자의적인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 헌법에 “누구든지 성별, 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받지 아니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4년 전에 발의되었다가 폐기된 차별금지법 초안에 따르면 “직접 차별뿐만 아니라 간접 차별, 성별 등을 이유로 특정 개인 및 집단에 대하여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주는 행위 및 차별의 표시, 조장 광고 행위를 차별로 금지함”이라고 명문화되어 있다.
누가 누군가를 차별하고 혐오했다는 것을 무엇으로 근거 삼아서 판정할 것인가? 누군가를 ‘간접적으로’ 차별했다는 말을 어떤 식으로 카테고리 지을 것인가? 누가 누군가에게 ‘정신적 고통’을 주었다는 걸 무엇으로 증명할 것인가? 피해자라고 여기는 사람의 주장과 증인 한두 명의 동조만으로 어떤 사람은 죄인이 되고 말 수도 있는 것인가? 말과 글과 행동에 대해서, 그 배후에 숨겨진 동기와 전후 사정과 뉘앙스를 사람이 무슨 재주로 판단할 수 있는가? 그것을 판단하는 사람의 감정과 정치 성향과 사상이 개입될 여지를 무한정 열어주게 될 것이다. 개인이, 더 정확하게는 판사나 경찰이나 교사나 의사 등이 주관적인 개인 의견으로 사람을 유죄로도, 무죄로도 몰고 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감정이나 태도나 언어, 더 나아가서 얼굴 표정이나 말의 뉘앙스, 이런 것으로 유무죄를 판단하려는 시도는 결국 법이라는 선한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하게 될 공산이 되고, 그런 법 제정으로 인해 오히려 선량한 사람들이 피해를 보는 정반대인 결과를 초래할 확률이 높다. 인간의 감정이나 태도나 언어 같은 부분은 윤리와 종교, 교육의 영역으로 넘겨야지, 법률로 세세하게 규정짓는 것은 피하는 것이 더 지혜롭다.
2.자기 의견 표현의 자유가 부정되지 않는가?
감정이나 태도, 언어를 법의 테두리로 규정할 때 나타나는 가장 큰 문제점은 민주주의의 기본 토대 자체를 위협하게 된다는 점이다. 민주주의가 존재할 수 있는 기본권 중의 기본권은 ‘언론집회 결사의 자유’이다. 쉽게 말해서 자기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이 공산주의와 차별화되는 자유민주주의의 존립 근거이다. 누구든지 자기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지 못한다면 그 사회는 조지 오웰의 [1984]나 [동물농장] 같은 사회로 전락할 뿐이다.
차별이나 혐오가 윤리적으로 나쁘다는 건 기본 상식이다. 그러나 예를 들어 은연중에 한국에 와 있는 아시아계 사람들에 대해서 말이나 표정으로 차별이나 혐오를 절대로 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우리 국민 중에 얼마나 될까? 그것은 다른 나라도 다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그런 차별과 혐오까지 다 법으로 제지하려 든다면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을 법으로 처벌하게 될 것인가? 과연 어느 선까지 차별해야 그것이 차별인가? 그런 법을 제정한다면 차별이 다 없어지고 서로를 포용하는 사회로 변화될 것인가? 오히려 그 반대의 역효과가 생길 확률이 더 높을 것이다. 서로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말 한마디, 행동 하나 할 때마다 서로 눈치 보게 되고 서로 정죄하고 고발하면서 표현의 자유는 지하로 숨어 들어갈 것이며, 결국 그렇게 진전되면 공동체 자체가 붕괴할 수 있는 위험에 처할 것이다. 헌법이 규정하는 기본권을 무너뜨릴 수 있는 하위 법은 결코 제정되어선 안 된다. 그것은 국민이 숨 쉬는 공기를 차단하는 것과 같은 결과를 낳을 것이다.
3. 논리적으로 타당한 근거를 갖고 있는가?
이번에 한국교회가 대규모 집회로 모이게 된 원인제공은 대법원이 했다. 성전환 수술도 하지 않은 동성 커플의 건강보험 자격을 승인한 것이다. 이것은 삼척동자도 납득할 수 없는 판결이다. 법률적인 근거 조항도 전혀 없는 가운데서 판사들의 자의적 판단으로 동성 커플의 법적 지위를 인정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법적 근거가 안 만들어진 상태에서의 판결이기에 그 판결 자체가 논리적으로 정당하게 성립될 수 없다.
성전환 수술을 안 한 사람이 다른 성을 가졌다고 주장할 때, 그 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어린아이들도 이해 불가능한 논리적 오류이다. 해가 서쪽에서 뜬다고 우기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의학적으로 남자와 여자는 분명한 특성들이 있는데, 그런 의학적 근거 없이 자기의 생각이나 감정만으로 남자와 여자의 신분을 획득할 수 있다면, 그런 세상은 한마디로 점차 대혼란 가운데서 멸망할 수밖에 없다.
그런 논리로 따진다면 앞으로 어떤 사람이 자기 스스로가 대법원 판사라고 주장한다고 할 때, 대법원 판사는 그 사람에 대해 무슨 논리로 아니라고 변론할 수 있을 것인가? 누구나 자기 스스로 내가 대통령이다, 내가 의사다, 내가 회장님이다, 내가 노벨상 수상자라고 주장할 때 그 주장을 아니라고 입증할 만한 근거는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과학적, 의학적 근거가 없는 성별 정정이나 성별 획득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말장난이며, 그런 세상으로 흘러가는 것을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두고 볼 수는 없다.
4. 양심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가?
동성애자들이 퀴어 축제니 하면서 공적인 세상에 등장한 것은 불과 몇 년 되지 않았다. 그 이전까지, 그리고 지금도 절대다수의 동성애자들은 지하에 숨어 있다. 동성애를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그 원인이 사회의 차별과 혐오 때문이라고 주장하겠지만, 더 근본적인 원인은 그들 스스로가 가지는 수치심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동성애에 대해서 윤리적으로 정당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그 사회에 많아도 2~3%를 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양심에 비추어볼 때 동성애가 용인될 수 없다는 것은 상식의 범주에 들어갈 것이다. 인류 보편의 양심에 어긋나는 행위를 법으로 보호하겠다는 것은 결국 인간 양심의 가치를 짓밟겠다는 말이나 다를 바 없고, 그렇게 해서 얻어지는 성취는 과연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일각에서는 동성애자를 소수자라고 칭하면서 소수의 소외되고 박해받는 이웃들을 사랑으로 보듬는 것이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필요한 이유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앞서도 언급했다시피 그 점은 법이 해야 할 영역이 아니라 양심의 영역이요, 윤리·도덕의 영역이다. 양심에 호소하고 윤리의 확산으로 포용해야 한다. 동성애자들도 이웃이니만큼 그들을 왕따시키거나 박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상식적이다. 다만 그 모습이 인간 양심적 가치로 볼 때 온당하지 않기에 그들을 치료하는 도움을 체계적으로 베푸는 것이 국가나 단체가 할 일일 것이다.
5. 소수의 인권을 위해서 다수의 인권이 저해되지 않는가?
동성애 옹호자들은 동성애자를 소수자라고 카테고리 지워주면서 그들의 성 결정권을 법으로 보호해주어야 한다고 호소한다. 그들을 소수자라고 지칭하는 것 자체가 고도의 여론 호도 전략이긴 하지만, 단어 자체는 틀리지 않는다. 동성애자들의 수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물론 극소수에 불과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그들을 인간적으로 무시하거나 편파적으로 홀대해선 안 된다.
하지만 그들의 인권을 위하는 것이 절대다수의 인권을 저해하는 쪽으로 흐른다면, 그것은 과연 옳을까? 예를 들어서, 그런 상상은 현재 시점에서 과장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만약 성 결정권을 개인의 주장대로 용납하는 법이 제정된다고 가정한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절대다수가 입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성전환 수술을 하지 않은 남자가 여자 화장실에 들어간다면, 여자들이 입는 정신적 피해는 어떻게 보상할 것인가? 남자가 여자 스포츠 종목에 출전해서 상을 받는다면, 여자 선수들이 느끼는 심리적 박탈감은 누가 치료해줄 것인가?
소수의 인권도 보호해야 하는 것은 상식이지만 그 소수 보호가 절대다수의 피해를 조장한다면, 그런 입법은 애초에 고려해선 안 될 것이다. 그것은 입법으로서가 아니라 제도적인 지원들과 사회 공동체에 대한 시민 교육 등을 통해서 차근차근 이루어가야 할 윤리적 과제가 되어야 한다.
이외에도 동성애 합법화 시도가 가지는 논리적 오류와 비윤리성은 매우 많지만, 워낙 분량이 많아질 것이기에 이 정도로 글을 줄이고자 한다. 혹시나 이 글을 읽는 분 중에서, 이선 기본적인 논거들 외에, 동성애 합법화 시도가 어떻게 해서 인류 사회에 흘러 들어왔는지, 왜 서구 사회가 이런 엉터리 논리를 그렇게 쉽게 받아들이게 되었는지, 동성애 합법화의 사상적 기원과 과정이 어떠한지에 대해 좀 더 심도 있게 탐구하고 싶은 분들은 일단 [신좌파의 성혁명과 성 정치화](부흥과 개혁사)를 읽어보길 권한다. 철학사 개념의 책이라 읽기가 무척 어렵긴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 어렴풋이나마 동성애 합법화 시도가 얼마나 철학적으로나 신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 깊은 뿌리와 강력한 추동력을 가졌는지, 그 시도가 얼마나 체계적으로 이루어져 왔는지에 대한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왜 그렇게 모든 것을 다 바쳐서라도 동성애 합법화 시도를 저항하는 것이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양심의 도리인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박관수 목사(구영교회담임, 저술가)
출처 : 코람데오닷컴(http://www.kscoramdeo.com)
다양성의 이름으로 선을 넘다_강희민 목사 (1) | 2024.10.31 |
---|---|
로잔 서울선언에 담긴 동성애 반대 (2) | 2024.09.26 |
충격적인 동성 피부양자 인정 (0) | 2024.07.30 |
“너희가 창조질서를 믿느냐?”_이은상 목사 (0) | 2023.11.28 |
차별금지법, 교단적 서명운동으로 막아야 한다 (0) | 2023.05.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