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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문답 설교(2)

고재수선교사

by 김경호 진실 2009. 11. 23.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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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문답 설교(2)


이 소논문은 우리가 잘 아는 고재수 교수님(prof. dr. N.H. Gootjes)이 교리문답 설교(CATECHISM PREACHING)Ⅰ,Ⅱ라는 제목으로  1993년 9월 ICRC 모임에서 제출하시고 발표하신 논문입니다(이 글은 ICRC 1993년 회록, pp.136-163에 기록되어져 있는 글입니다. 지난 호에서 교리문답 설교Ⅱ가 1997년도에 발표되었다고 했는데, 1993년 ICRC회록을 보니 Ⅰ,Ⅱ가 2회로 나누어져서 발표된 것이었습니다. 저(손정원)의 미숙한 번역으로 우리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올립니다.

 

제 Ⅰ부에서 저는 교리문답 설교를 시행하는 관례에 대한 몇 가지 역사적 배경을 제시했습니다. 이렇게 역사적 배경을 제시한 목적은 교리문답 설교가 고립된 어떤 한 교단 혹은 어떤 나라의 관례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또한 종종 교리문답 설교는 매우 제한적인 시기동안 개신교(The Reformed)교회의 작은 범위내에 한정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역사는 우리에게 이 특별한 형태의 설교가 개신교의 역사보다 훨씬 더 오래 되었음을 말해 줍니다. 또한 이 교리문답 설교는 개신교 교회내에 꽤 폭넓게 퍼져 있습니다. 교리문답 설교는 별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적인 것 이상을 말해야 합니다. 역사는 그 자체로 결코 실제를 정당화시킬 수 없습니다. 저는 교리문답 설교가 성경이라는 심판대 앞에서 과연 옳다고 할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한 더 중대한 문제를 제 Ⅱ부에서 토론하려고 합니다. 여러 가지 이론이 교리문답 설교를 반대하기 위해서 제시되었습니다. 저는 세가지 중요한 반대를 다루고, 끝에 가서 더 일반적인 고찰을 할 것입니다.


인간이 만든 본문으로부터 설교을 하는 것


교리문답 설교를 하는 것에 대한 가장 심한 반대는 교리문답이 인간이 만든 문서라는 사실에 기인한 것입니다. 교리문답을 본문으로 해서 설교하는 것은 인간이 만든 것을 본문으로 삼아서 설교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까? 교리문답으로부터 한 단락을 본문으로 취해서 설교하는 것은 모순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 모두는 좋은 설교가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본문으로 삼아서 설교하는 것이라는데 동의합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솔직하고 악의없이 이 반대를 명확히 말했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교리문답의 기능은 궁극적으로 설교를 위한 자료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교리문답 설교는 설교를 바르게 하도록 보호해 주고 신자들이 성경을 읽을 때 해석을 바르게 하도록 보호해 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신조와 교리의 주요 기능이다. 그러므로 교리문답을 매 해마다 계속 설교하는 것은 확실히 잘못된 것이다. 그 대신에 여러분 앞에 항상 열려져 있는 성경을 가지고 성경 그자체로부터 직접적으로 말씀을 취해서 설교해야 한다. 그리고 신자들도 성경에 대한 인간의 이해로 만들어진 신조나 교리문답보다 차라리 성경자체의 본문을 설교하는 것에 더 마음을 기울일 것이다.[42]


이 비판은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해야 한다"는 확신에 근거한 것입니다. 이 확신으로 인해 로이드 존스가 교리문답 설교를 부정하게 된 것입니다. 곧 "이런 교리문답 설교는 인간이 성경 말씀을 이해한 것을 설교본문으로 취해서 하는 설교이므로 설교라고 할 수 없고  성경 말씀에서 취한 본문을 선포해야 설교라고 할 수 있다"는 확신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교리문답 설교를 옹호하는 자들도 반대자들과 정확하게 동일한 출발점에서 출발하는데 교리문답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설교에 대한 네덜란드 표준 본문을 쓴 T. 훅스트라 박사는 성경에서 계시된 하나님 말씀의 해석와 적용으로서 설교를 정의합니다.[43] 그러나 훅스트라는 교리문답 설교가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설교에 대한 자기 책에서 교리문답 설교 부분을 다루는데, 거기서 말합니다.


교리문답 설교에서 주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오셔서 교중들을 위하여 은혜 언약의 신비를 밝히신다. 그러므로 교리문답 설교는 말씀의 집행이다.[44]


교리문답 설교의 옹호자들은 이 교리문답 설교에서도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된다는 것을 지지합니다.

근본적으로, 설교에 대한 동일한 정의를 사용하는 이 신학자들이 실제적으로 교리문답 설교에 대한 성경적인 정의에 관하여서는 다른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쉽게 설교에 대한 정의에 근거하여서 이 전체 문제를 결정할 없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더 깊이 파고들어가서 물어야 합니다. 곧 신조 혹은 고백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그 신조 혹은 고백은 성경과 어떤 연관성이 있습니까? 하는 질문을 제시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신조 중의 하나인 사도신경을 살펴봄으로 이 문제에 답해 봅시다. 이 신경은 모두 성경으로부터 취해진 것이 아닙니다. 이 신경을 더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주어진 구약 혹은 신약 성경구절들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 사실은 이 사도신경을 비성경적인 것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이 신경의 내용은 성경으로부터 취해진 것입니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 주어진 계시들이 조직적인 방식으로 함께 가져와져서 모아진 것입니다. 사도신경의 구조는 마 28장 19절의 세례 명령에 근거한 삼위일체론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의 내용이 삼위일체 하나님과 사역으로서 요약되어져 있습니다. 사도신경은 성경적 진리의 조직적인 요약인 성경의 교리를 제시합니다.

 

이 동일한 내용이 종교개혁 시기의 더 폭넓은 고백들에서 나중에 말해질 것입니다. 일례를 들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정의하는 것은 16세기 종교개혁시대의 투쟁에 있어서 중요한 것입니다. 많은 개혁주의 고백들이 그 고백의 여러 가지 내용들을 성경적 계시로 조직하고 요약했습니다. 예를 들면, 그런 요약 형식은 성경에서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고백들은 그 공식문에 연관된 성경구절들을 집어넣고, 그 항목에 덧붙인 성경본문으로 그 교리들을 증명합니다.

 

우리가 이 교리문답 설교와 연관하여서 대답해야 할 문제는 이 교리의 특징이 무엇인가하는 것이고, 이 요약이 교리문답속에 주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 교리의 공식문이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은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교리 그 자체가 무엇입니까? 이 교리가 성경에서 나타난 것입니까? 아니면 이 교리가 사람이 만든 것입니까?

 

개혁주의 신학자인 찰스 하지는 교리를 인간의 문서로 봅니다. 성경은 분리된 사실들을 포함하고 있고, 이 사실들은 되는데로 함께 결합될 수 없고 그 사실들 사이에 연관성이 그 사실에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그 연관성들을 만듭니다. 하지만 하지에 따르면 이것은 교리가 분리된 성경보다 더 수준이 낮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실제적으로, 이 교리는 성경보다 더 수준이 높습니다.


많은 수준높은 종류의 지식이 단순히 분리된 사실들의 축적물에 의한 것보다 이렇게 획득되어진다. . . . 우리는 우리가 적어도 몇가지 선한 방법으로 서로의 입장을 포함하는 그 가운데에 진리를 분리시키는 계시안에서 이해하지 않는한, 말씀 안에서 하나님이 계시하신 것을 알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한 문제를 해결한 것, 곧 성경이 이 주제에 대해 가르치는 모든 사실들을 조화로운 배열로 맞추어 만든 것은 수세기 동안 교회가 연구하고 논의한 댓가이다.[45]


유사한 견해가 아브라함 카이퍼가 신학을 다음과 같이 묘사할 때에 그에게서 발견됩니다.


신학은 관찰을 목적으로서 계시된 하나님의 지식을 가지는 과학이고 이해하는 것을 제시하는 것이다.[46]


카이퍼는 항상 흥미로운 평행구들을 찾아서 빛나는 금이 되기 위해서 녹아진 광석과 계시된 하나님의 지식을 비교했고, 먹기 전에 빵으로 바꿔야 하는 곡식과 비교했습니다.[47]

 

하지와 카이퍼 둘다 신조에 관해서라기 보다는 차라리 신학에 관해서 말합니다. 하지만, 이들의 견해는 신조에 대한 것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성경 교리를 요약한 교리문답이 "더 높은 종류의 지식"일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 지식은 성경 계시를 넘어섭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오직 있는 그대로의 사실들만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두 신학자들에게 동의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점에서 입니다.[48] 성경은 단지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을 계시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아직 먹을 수 있게 빵으로 만들어야하는 곡식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성경 그 자체가 사실의 의미들에 대한 식견을 제공합니다. 성경의 진리들 사이에 관계는 그 동일한 성경안에서 지적됩니다. 하지가 말하는 이른바 더 높은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안에 있습니다. 또한 카이퍼가 말하는 성경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떡입니다.

 

사도신경과 연관하여 몇 가지 예들을 제시하겠습니다.

-마 28:19이하에서는 세례와 삼위일체를 연결시키고 그리스도의 명령을 지켜야 하는 책임을 말합니다.

-엡 1:3-14에서는 우리의 구원안에 포함된 삼위일체 하나님의 많은 사역들을 설명합니다.

-창 17:1에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단지 사실이 아니라 아브라함(그리고 모든 신자들)의 생활에서 대단히 중요한 것이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이 행해야 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생명을 보호하실 수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창1장에서는 하나님의 창조물에 관해서와  어떻게 하나님이 창조물 가운데서 인간의 위치를 결정하셨는지를 말합니다(26절).

 

또한 성경 교리에 관한 예들을 제시하겠습니다.

-딤후 3:16에서는 교훈과 책망 등을 위하여 구약의 중요성과 성경의 영감을 연결시킵니다.

-벧후 1:20이하에서는 성경의 신적 기원이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시 19:7에서는 여호와의 율법이 완전하는 사실을 언급할 뿐만아니라 이 완전한 율법이 영혼을 소생케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구절들을 계속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성경구절들은 성경이 어쨋든 여러 조각들을 함께 모아둔 느슨한 사상들의 수집이 아니라는 것을 지금 분명하게 해 줍니다. 제가 이렇게 교리를 연결시킨 것은 성경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교회는 신조를 작성함에 있어서 오직 두가지 일을 행할 뿐입니다. 1. 신조를 작성할때에 성경 전체에 분포되어져 있는 계시를 한 곳으로 모으는 것입니다. 그리고 2. 신조를 작성할 때에 흔히 신조 그 자체의 말로 이 신조의 진리들을 표현하곤 합니다. 그러나 신조를 작성하는 것은 교리를 짜맞추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성경에 나타난 교리를 읽는 것입니다. 신조와 고백은 성경 그 자체에 나타난 교리를 한 곳으로 모아서 조직하는 것입니다. 교리는 계시의 이해보다 더 높은 수준의 것도 아니고(하지) 성경안에 있는 있는 그대로의 형식으로 주어진 것을 다듬어 만든 것도 아니고(카이퍼) 하나님이 계시하신 여러 가지 계시의 구조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이에 대한 결정은 교리문답 설교가 원리적으로 가능한지 아니지를 결정하게 합니다. 만일 교리문답이 성경에 있는 조직되지 않은 요소를 인간이 조직화한 것이라면, 교리문답을 설교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교리문답은 성경에 나타난데로의 교리를 조직적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리문답을 설교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교리문답이 말하는 것은 물론 전혀 오류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진리는 여전히 신학에 대한 것이 아니라 성경에 대한 것들입니다. 따라서 교리문답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교리문답 설교는 사도 바울이 전체 하나님의 경륜(역주: 한글개역에서는 counsel이 '뜻'이라고 번역되어 있음)이라고 부른 것을 정당하게 다루는 선한 방법입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작별인사를 할 때, 그는 "자기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경륜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다"고 말합니다. 이 경륜 혹은 계획[49]은 바울을 동일한 이 고별 연설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24절)과 왕국의 설교(25절)라고 부른 것과 관계될 수 있습니다. 이 단어가 경륜 혹은 계획이라고 불려질 때, 이 단어는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사역이 즉흥적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신적인 뜻에 따른 것이라 점을 증거합니다. 문맥에서 바울은 특별히 "전체(Whole)"라는 단어를 강조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전(whole) 경륜을 설교했습니다. 바울은 설교에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어떤 부분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청중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저주당하고 심판당할때에도 부끄러하지 않았음에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복음을 축소시켜서 청중들에게 설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이 표현은 내가 내 견해를 말할때 정확하게 설교를 위한 규칙으로 사용했습니다. 죄인을 위한 하나님의 전체 구원 계획의 한 부분도 설교에서 무시되어 질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전체 계획의 일부를 설교에서 무시하기가 쉽습니다. 목사가 자신이 다룰 수 있고 어떤 관심이 있는 본문을 선택할 때, 그는 쉽게 본문의 선택에 있어서 한쪽으로 기울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교리적 구조를 농축한 교리문답은 성경 내용의 개관을 포함합니다. 그래서 교리문답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계시의 중심적인 내용을 붙드는데 도움이 되는 것처럼, 또한 목사에게 도움이 됩니다. 그 이유는 교리문답이 목사의 설교가 한쪽으로만 치우치는 것을 막아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계속되는 본문 설교가 교리문답 설교를 신선하게 유지시키는데 도움이 되는 것처럼, 계속 순환되는 교리문답 설교는 본문 설교를 유지시키는데 유익합니다.


두가지 실제적인 반대

 

교리문답 설교가 오직 성경만이 설교되어야 한다는 이유로 거부되어질 수 있는가? 하는 중요한 질문이 답변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또 다른 반대가 교리 문답 설교를 대항하여서 생겨났습니다. 이 단락에서 저는 교리문답 설교가 실제적인 동기에 있어서 적절한가를 진술하는 두 가지 반대를 토론하고자 합니다.

 

교리문답 설교가 때때로 당연히 비현실적이라고 생각되곤 합니다. 교리가 설교되어지나 그 교리들은 실제 생활로부터 분리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교리문답 설교는 청중들의 생활에 적용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50]

 

청중들이 생활 속에서 하나님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는 그런 방식으로 설교해야 한다는 것이 흔히 설교자에게 대한 가장 큰 도전 중의 하나입니다. 설교는 사람들의 생활 속에 직접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설교는 청중들이 스스로 메시지의 중요성을 깨달아 그 메시지와 자신이 연관된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청중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것은 설교의 일반적인 국면입니다. 설교가 청중들에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요구는 교리문답 설교에 제한 된 것이 아니라 모든 설교에 대한 요구입니다. 목사가 특별한 본문을 설교할때도 그는 동일한 요구에 직면하게 됩니다. 설교자는 가끔 청중들에게 설교의 적실성을 보여준데 실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실패가 사람들의 생활에 본문을 적용시키는 것이 일반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날마다의 생활을 위하여 교리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그런 방식으로 교리문답을 설교하는 것이 과연 불가능합니까?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을 아는 모든 사람들은 "아니오"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교리가 바로 여기서 설명되어지는 그 방법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에서 적용은 교리의 설명에서 주어집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유명한 첫째 문답인 "사나 죽으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가 무엇입니까? 이제 나는 나의 것이 아니라 나의 몸과 영혼이 사나 죽으나 나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 ."에 강조를 둡니다. 이 첫 문답은 아주 개인적이고 적용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 첫 질문에 대한 답은 "내가 나의 것으로 남아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나는 사나 죽으나 항상 혼자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당신의 피로 사셨습니다. 그는 나를 보호하십니다."는 것입니다.

 

이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이 다음으로 "내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토론 합니다. 우리는 매마른 내용을 받지 않았습니다. "첫째로, 먼저 나는 나의 죄와 비참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두 번째로, 내가 어떻게 나의 모든 죄와 비참으로부터 구원받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셋째로, 내가 어떻게 그런 구원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할지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라고 답합니다. 이것은 교리가 해석되어지는 방식을 결정합니다. 계속되는 모든 대답에서 교리문답은 어떻게 내가 개인적으로 포함되는지를 토론합니다.

 

한 가지 예로 삼위일체 교리를 제시합니다. 우리 하나님이 세 위격이 실제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이 사실이 우리 생활에서 중요합니까? 교리문답은 사도신경과 연관하여서 삼위일체에 대해 말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계시에 근거하여 삼위일체의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오직 한 분이 존재하시는데 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세 분을 말합니까? 왜냐하면 성경이 우리들에게 구별되는 세 위격이 한분이시고 참되며 영원하신 하나님으로 계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미 이 문답이전에 이 교리문답에서는 우리를 위한 세 인격의 중요성을 보여주었습니다. 곧 그것은 성부와 우리의 창조, 성자와 우리의 구속, 성령과 우리의 성화입니다(제 8주일). 하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우리 생활에 영향을 미칩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의 실제적인 특징 때문에 직접적으로 청중들을 위한 적절한 방식으로 교리를 설교하는 것은 쉽습니다. 많은 초보 목사들은 본문 설교에서 보다 교리문답 설교에서 적용이 더 쉽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웨스트 민스터 소교리 문답이 다르다는 사실은 인정되어야만 합니다. 이 소교리문답은 교리를 설교하기에 부적절하다고 반대하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이 소교리문답은 저와 여러분에 대해 말함으로 교리를 가까이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이 교리문답의 목적은 교리에 대한 아주 분명한 해설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가장 유명한 첫 번째 문답을 생각해 봅시다.[51] 그 첫 문답은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히 즐기는 것이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적용이 거리 먼 것이 아닙니다. 만일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즐기는 것이라고 한다면, 나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께 가까이 가서 사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또한 여기서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 2문답은 특별하게 우리에게 선포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법을 주셔서 자기를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즐기도록 지시하셨습니까? 구신약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그분을 영화롭게 하고 즐기는 것을 가르쳐 주는 유일한 법입니다." 이것을 고려한다면 청중들에게 선포할 설교가 쉽게 이 교리에 근거하여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다른 실례를 들면, 제 6문답에서 삼위일체에 대한 것을 보시면, "하나님의 위격에는 얼마나 많은 위격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위격에는 삼위가 계시되는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말하며 이 삼위는 한 하나님으로 본체에 있어서 하나이시며 권능과 영광에 있어서 동등하십니다."라고 하고 이 문답은 정직하게 말하면 더 적용하기 어렵습니다. 이 교리문답은 이 교리가 왜 중요한지 모든 지적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 교리문답에 대한 전제는 이 고백된 진리들이 실제 신자의 생활에서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더욱 더 모든 진리들이 실제 생활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이 교리들의 중요성에 있어서도 성도들에게 기억되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이미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에 대한 더 오래된 설명은 이 고백된 진리들의 실제적 적실성을 보여줍니다.[52]

따라서 교리문답 설교가 당연히 적용이 없는 설교라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 실제적인 반대는 교리문답 설교가 반복된다는 것에 대한 반대입니다. 나중에 완성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일년 52주일을 통하여 설교될 목적을 표현하는 52주일로 나누어졌습니다. 칼빈의 교리문답은 55주일로 나뉘어졌습니다. 만약 이 교리문답이 제네바에서 일년 이상의 기간동안 행해진 것이 아니면 그것은 교리문답을 설교하는 것이 13달에 걸쳐서 이루진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교회들은 교리문답 설교가 다소 더 자유롭게 유지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대다수의 성도들 가운데서 교리문답 설교가 일년 혹은 반년의 주기로 전체적으로 설교되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반복이 성도들을 무감각하게 만들지 않을까요? 대부분의 청중들은 이미 교리문답 설교를 몇번이고 되풀이 해서 들었습니다.   

 

이 반대에 대한 첫 번째 대답은 규칙적으로 교리문답 설교를 반복하는 것이 성도들에게 불이익을 주는 보다는 차라리 유익을 준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반복해서 되풀이 되는 교리를 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교회의 성도들은 교리를 전체적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도 동의하게 됩니다. 교리문답은 하나님의 교리와 역사속에서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요약을 다룹니다. 곧 교리문답은 창조, 구속의 약속,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 성화, 만물의 회복에 대해 말합니다. 이런 주제들은 반복되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주제들이 기독교인이 가져야 할 신앙의 중심적인 교의이기 때문입니다.[53]

 

일정한 반복없이 사라지려는 것을 굳게 붙들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험입니다. 여러분들은 미국에 50주가 있다는 것을 학교에서 배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이 지식이 계속 새롭게 제시되지 않는다면, 시간이 지나면 어렴풋해질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L.A에 친구가 있는 어떤 사람이 자기 친구에게 소포를 전달해 달라고 뉴욕으로 가는 사람에게 부탁한다는 것은 상상 할 수 없는 경우이고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또한 인도네시아에 무엇인가를 전달해 달라고 인도로 가는 어떤 사람에게 부탁하는 것은 더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만약 지리학 수업에서 알게 된 지식이 새롭게 제시되지 않는다면 이 지리적인 사실들이 흐릿해질 것입니다.

 

이런 일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는 일어나지 않아야 할텐데 일어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사역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들을 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살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믿음의 내용들이 반복해서 제시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3장 1절에서 이 사실을 말합니다.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바울은 전에도 이 진리를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성도들이 얼마나 쉽게 그 진리를 잊어버리고 날마다 일어나는 많은 일들속에서 잊어버리게 되는지를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 사실을 제시하고 성도들이 이전에 말했던 진리로 되돌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다시 씁니다.(또한 빌3:18을 보라.)

 

많은 경우에 이 동일한 방법으로 성경의 근본적인 내용들이 우리가 그 내용들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반복되어집니다. 교리문답 설교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사역에 대한 근본적인 지식을 늘 새롭게 유지하기 위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안에 "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데로 믿음에 굳게 서서" 살아야 합니다. 골로새서 2장 7절.


주제 설교(Preaching a topic)

 

마지막으로 주목할점으로서 저는 목사들이 종종 한 주제를 정하여 설교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는 사실을 지적하려고 합니다. 저는 일부 목사들이 때때로 일종의 사적인 교리문답식의 설교를 한다는 사실에 놀랍니다. 저는 그런 종류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듣지 못했던 한 예를 제시하겠습니다. 어떤 목사가 어떤 순간에 자기 성도들이 세례에 대한 교훈을 더 필요로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 목사는 마28장 19절을 본문으로 선택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목사는 자기 설교에서 세례라는 단어가 나오는 신약의 모든 본문을 설명했습니다. 그 목사는 계속해서 1. 세례 요한의 세례, 2.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제정된 세례, 3. 성령으로의 세례를 다루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분명히 본문 설교의 예가 아닙니다. 마 28:19이 공식적으로 본문이 되고 설교에서도 그 본문만 다루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쉽게 보일 수 있습니다. 이 본문안에서 삼위일체와 세례와 사이에 관계가 중심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연결은 설교에서 사용하지 않습니다. 이 설교는 오직 본문으로부터 "세례"라는 단어만이 사용됩니다. 실제적으로, 이 설교는 교리문답으로부터 "세례"를 설명한 단락에 대해 설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설교는 또한 교리문답 설교는 아닙니다.

 

이런 설교와 교리문답 설교사이에 두 가지 차이점에 주목하십시오. 첫째로 이런 접근은 개념을 가진 단어를 혼란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설교는 세례식에 관한 성경적 가르침이 "세례"라는 단어를 사용한 모든 본문을 수집하여 모은 것이라는 느낌을 줍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는 것이 올바르지 않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세례식, 세례의 선구자, 할례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을 이해하는 것이 고려되어야 합니다. 그 자료가 "세례"라는 단어를 중심으로 모아진 것이므로 이 본문들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렇게 단어를 중심으로 살피는 방법은 우리가 정말로 심사숙고해야 할 본문으로부터 이탈하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 방법은 다른 한편으로 많은 본문들을 포함시킵니다. 성령과 관련된 세례를 언급하는 두 본문은 "세례"라는 단어를 포함하나 세례식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세례라는 단어에 근거한 세례라는 주제 설교는 한편으로는 포괄적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제한적입니다.

 

이런 방식의 설교와 관련된 두 번째 문제는 교회가 수십세기 동안 교리에 대해서 배워왔다는 사실을 무시한다는 점입니다. 교회는 수십세기 동안 세례에 대해 설교하고 가르쳐왔고, 이런 과정 속에서 유혹과 오해가 되는 표현을 피해야 할 것을 배워왔습니다. 교회는 성경에 근거하여서 이단적인 가르침을 폭로하고 의식적으로 거부해 왔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일부 목사들이 이 모든 역사를 무시하고 목사 자신이 마치 일 세기의 마지막에 살고 있는 것처럼 자기 자신에 근거하여서 다시 모든 것을 시작합니다. 이렇게 주제를 설교하는 것은 교회가 수십 세기동안 가르침을 통하여 축적해온 지혜를 사용하는 것보다 이런 설교가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주제를 설교하는 것이 교리문답에 따라 설교하는 것보다 더 낫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엄격한 본문 설교와 교리문답 설교형식은 내 생각으로는 이상적인 결합인 것 같습니다. 본문 설교는 특별한 본문의 특별한 의미를 가르칩니다. 본문 설교는 성경 본문이 다양한 만큼 다양합니다. 본문 설교는 수천년전에 일어난 하나님의 사역의 상세한 부분 혹은 하나님의 율법의 한 부분 부분을 밝힙니다. 본문 설교는 변화무쌍한 다양함으로 주어집니다. 본문 설교는 항상 새롭고 항상 놀랍습니다. 게다가 특별한 필요가 쉽게 특별한 본문 선택에 의해서 선포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큰 주제들을 간과하지 않 아야 하고 성경의 구조를 강조해야 합니다. 이것은 성도들이 부지중에 한쪽으로만 치우치게 되는 것을 막아주고 거짓된 가르침과 우리 자신의 시대의 다양성에 대항하여 저항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성도들의 신앙은 지지대가 필요합니다. 교리문답 설교가 바로 이 지지대를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교리문답 설교는 성도들이 "그들에게 전하여 준 교훈의 본을 순종하게" 해주는 좋은 수단입니다. 롬 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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