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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강해 (4)

김명도박사 강의

by 김경호 진실 2010. 7. 30.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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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라디아서 강해 (4)
                                                                                                             튤립 신학 연구원
                                                                                                                     김명도 교수
                                                                                                     www.tulipministries.com
                                                                                                             rvkim@yahoo.com

오늘은 갈라디아 서 강해 4번째 시간으로 갈라디아서 제3장을 공부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갈라디아 2장을 통해서 다른 복음은 없다는 것을 공부했고 또 바울이 동역자인 베드로를 꾸짖는 내용을 통해서 교리적으로 잘못된 것은 가르쳐서 바로 잡아 주어야 한다는 것과,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 에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공부했습니다.

오늘은 그 다음 3장을 같이 연구합시다.
3장은 3:1-14 과 3:15-29절 이렇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3:1-14에서는 “믿음과 행위” 에 관해서 설명하고 있고 15-29에서는 “율법” 에 관하여 설명합니다.

I. 3:1-14 내용을 보도록 합시다.
  구원을 논함에 있어서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해서 그 공로로 하나님의 사랑을 얻어 구원을 얻는 줄로 착각합니다. 흔히 기도할 때 보면,  “나는 아무것도 해 놓은 것이 없으니 내가 어떻게 구원을 얻겠습니까?” 라고 하는 분들을 많이 봅니다. 어떤 이들은 목사님에게 “우리 남편이 지금 병으로 위독하니 속히 세례를 주십시오. 그래야 그 분이 천국에 갈 것이 아닙니까?”  라고 애원하는 분도 만나 봅니다.  어떤 분은 “내가 이만큼 자선 사업을 많이 했으니 하나님도 기뻐하실 것이고 구원은 문제 없다” 라고 하는 분도 있습니다. 모두 내가 어떤 일을 해서 그 공로로 구원을 얻는 줄로 착각하는 말들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일을 해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어떤 일을 하거나, 어떤 공로를 세우거나, 자선사업을 많이 해서 그 대가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자선 사업이나 남을 돕는 일은 소용없다는 말인가? 이렇게 질문할 분도 있을 것입니다. 인간은 짐승과 달리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타락한 인간도 어느 정도 선을 행할 줄 압니다. 타락했으나 하나님의 형상을 지음을 받은 흔적은 남아 있습니다.  단지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말은 하나님의 “외모” 를 닮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외모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인간의 육안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보았다면 그는 불에 타 죽었을 것입니다.  출애급기에서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 대화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극히 일부를 본 것이며 하나님을 온전히 보았다면 그는 불에 타 죽었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십니다.  오늘의 문제는 하나님을 거룩한 분으로 알지 않고 이 세상에서 내가 성공하는데 도움을 주는 “마술사” 같은 분으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해 주지 않으면 교회에 나오지 않겠습니다” 라는 기도나 “제가 하나님의 일을 도와드리겠으니 무엇을 해 달라” 고 기도하는 것 등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입니다. 하나님은 만휼히 여김을 받지 않는 분이며 하나님은 모든 것을 자기 주권대로 역사하는 분입니다. 그리스도의 종으로 복음을 전하는 바울이 기도해도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라고 하시면서 바울의 기도를 들어주지 아니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면 무엇이든 모두 하나님이 들어 준다”는 가르침은 잘 못된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을 때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정한 때에 이루어 주십니다.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서 친히 간구하신다고 로마인서 8:26에 말씀합니다. 또한 요한복음 15:7 에는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나의 말이 너희 안에 있으면 무엇이든 구하라” 라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내가 기도한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다” 고 가르치는 어느 한국 대형교회 목사의 말은 허구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필자가 어린 소년시절 북한의 총살장에서 기도한 것이 먼 훗날  30년 후에 미국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기도는 당장 이루어지는 것도 있고 먼 훗날 이루어지는 것도 있고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간혹 우리는 정욕으로 쓰려고 잘 못 구할 때가 있습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100 프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 진다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노력은 조금도 가산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구원과 선행은 어떤 관계에 있느냐고 궁금해 하실  것입니다.  사람이 선행을 해서 그 공로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구원의 결과로 선행이 자동으로 생겨나는 것입니다.  선행은 중생의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라는 진리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노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구원이란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로,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라고 말하는 것이며 (히 12:2), 바울은 “우리 속에 착한 이을 시작한 이가 주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 하노라”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빌 1:6).

  오늘 기독교계 지도자들이 “세계 평화” 와 “상호이해” 를 증진한다는 미명으로 전 세계의 종교들 간에 서로 이해하며 여러 가지 다른 종교들을 하나로 만들려는 생각은 성경의 가르침과 아주 어긋나며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는 죄악입니다. 성경은 고린도후서 6:15-16 에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오“ 라고 교훈합니다. 이런 연고로 ”세계 종교 통일“ 을 부르짖는 WCC 라는 단체가 기독교의 이름으로 나오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지 않기 때문에 참 성도는 이런 기관들을 지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일반 성도가 이런 ”반 기독교적“ 종교단체의 성격을 알리 없고, 또 심지어 목사들도 별로 아는 이들이 적어서 쉽게 속아 넘어가는 것입니다.  교리를 분명히 아는 성도라면 절대로 속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리 공부가 절대로 필요한 것입니다.  교리공부가 필요없다고 가르친다면 그 교회를 떠나 바른 교회를 찾으십시오. 믿는 도리를 모르고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를 대적하는 자는 “적그리스도” 이고 “적 그리스도” 는 구원이 없습니다. 또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를 돕는 자도 같은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성별되어야 합니다. 사이비 신자 처럼 살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악은 모양이라고 버려야 합니다 (살전 5:22). 교회에 출석하는 것도 성경대로 가르치지 않는 교회는 출석해서는 안 됩니다. 영혼이 손상을 입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대부분의 교회가 성경을 떠나서 사람이 만든 교리를 따르고 세속주의, 신비주의, 종교다원주의를 따르는데 이런 교회는 하나님을 저버린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에 출석해서 이로울 것이 하나도 없으며 오히려 죄를 더할 뿐입니다. 계시록 18:4 에는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라고 주님이 사도 요한을 통하여 엄히 경고하십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3장을 쓰면서 갈라디아 지방 교인들을 향하여  1절과 3절에 “어리석도다” 라고 말합니다. 왜 저들을 어리석다고 했을까요?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가 그의 백성의 죄를 모두 용서해 주었고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무슨 율법을 지키거나 공로를 세워서가 아니고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왜 다시 종의 멍에를 메어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는 줄 착각하며 그런 잘못된 가르침을 주는 사람들을 따라 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오늘 우리들의 교회에서 성경의 진리 말고 다른 교훈을 가르치는 데서도 나타납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외면하고  다른 교훈을 도입하여 가르치는 거짓 목사를 따라가면 바로 갈라디아 지방의 교인들의 잘못을 답습하는 결과가 됩니다. 성경은 기록될 당시 사람들에게만 유효한 문서가 아닙니다. 성경은 죄에 빠져 죽게 된 모든 인생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복된 소식 즉 구원의 복음인 것입니다.  우리는 갈라디아서를 연구하면서 갈라디아서는 “나와는 관계없는 옛날 이야기” 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성경은 우리를 책
망하고 우리를 교훈하여 우리를 의로 교육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기 위한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딤후 3:16-17).

  또한 바울은 본문에서 다른 이유를 접고 왜 <십자가의 달린 그리스도> 를 강조했을까요?  예수님은 많은 사람의 질병도 고치시고, 이적과 기사도 행하시고 많은 것을 가르쳤는데 그 모든 것은 접어 두고 왜 하필이면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말했을까요?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이 점에 착안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많은 교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별로 언급하지 않고, 세상에서 성공하는 비결,  부귀영화를 누리고 무병장수하는 것이 복음의 본질처럼 설교합니다.

  옛날 뉴욕 신학교에서 강의할 때 강의가 끝난 밤 11시에  어떤 학생이 상담을 요청해 와서 그의 말을 듣고 놀란 사실이 있습니다. “교수님, 우리 교회에서는 지옥과 천당 이야기는 들어불 수 없고 십자가 라는 단어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이 교회를 계속해서 나가야 합니까?“ 라는 말을 듣고 당장 다른 교회에 출석하라고 권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복음의 핵심이건만 예수님의 십자가를 전하지 않는 교회는 거짓 교회이니주님이 피 흘려 사신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아닙니다. 그런 교회에 나가서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미국에는 이런 교회가 부지기수입니다.  기독교의 핵심 교리는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인데 인생 성공법 만 강의하는 교회는 모두 정리되어야 할 대상들입니다. 주님 다시 오시는 그 재림의 날에 무서운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복음이란 우리에게 인생살이에 필요한 지혜를 충고해 주는 “생할 지침서” 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영혼을 파멸에서 구하는 “구원의 멧세지”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영생을 얻은 성도라면 구원의 멧세지를 따라 조물주 하나님에게 순종하며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 하는 것 뿐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거짓된 가르침을 따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어리석도다” 란 말을 두 번 씩이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아픈 마음을 읽어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다른 교훈을 따라가면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이 충족하지 못하다는 말이 됩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상에서 우리의 구속을 완성하셨습니다. 아무 것도 더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아르미니안 주의자들이 말 하는 것처럼 “구원의 길” 만 열어 놓은 것이 아니라
구원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 개혁 가들은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그리스도” 라고 외친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아브라함의 사적을 말하고 있는데 왜 바울이 아브라함의 사적을 말합니까?
아브라함과 믿음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우리는 믿음을 말할 때 곧 잘 “아브라함의 믿음”을 말하며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말합니다. 갈라디아 3장에는 10절과 13절에 “저주” 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율법아래 있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는 말입니다. “율법의 저주” 라는 말을 이해해야 합니다.  율법은 그것을 지켜서 구원 얻도록 주신 것이 아닙니다. 지난 시간에도 공부했지만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을 자가 아주 없다고 갈라디아 2:16에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게 됩니다.  사람은 율법이 없이는 자기가 얼마나 추악한 죄인인지 모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잘 났다고 생각하는 complex에 빠져 살아갑니다. 본인의 결점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율법에 비추어 볼 때, 율법이라는 거울 앞에 설 때에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엄청난 죄인인 것을 알게 됩니다.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야고보 2:10 에 보면 율법을 모두 지키다가 한 가지만 지키지 못하면 모든 율법을 지키지 못한 결과가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기에 바울의 말은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속량해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왜 다시 율법의 멍에를 메려 하느냐고 갈라디아 지방 교인들에게 힐문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주변을 보면, 놀랍게도 많은 성도들이 율법과 은혜의 관계를 잘 모릅니다. 갈라디아서를 공부하면서 믿음과 행위의 문제, 그리고 율법과 은혜의 문제를 바로 알도록 하십시다.

  본문 갈라디아 3:13에 보면, “나무에 달린 자 마다 저주를 받은 자”라고 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구약 신명기 21:23에서 인용한 말입니다. 예수님은 나무 (즉, 십자가) 위에서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받을 저주를 주님이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받을 저주를 예수님이 대신 받아 주신 것입니다.   내가 받을 저주를 대신 받아 주심으로 나는 내가 받아야할 저주에서 벗어 난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여기에 그리스도의 은계가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마리아를 숭상하지요만 마리아가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진 적이 없습니다. 그를 통해서 하나님에게 기도한다고 하지만 우리가 기도할 대상은 오직 중보자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에게 나아갑니다. 다른 이름으로 하나님에게 나아갈 수 없습니다. 디모데 2:5에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는 인간 예수뿐” 이라고 가르쳐 줍니다. 예수만이 우리를 위하여 “중보
기도“ 를 하십니다. 우리가 남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중보기도“ 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중보기도” 하시는 분은 그리스도 한 분 뿐입니다.

  또한 <머리를 비우고 mantra (주문 呪文), 가령 예를 들어서 ”오 주여“ 나 ”오 주룰 사랑합니다“ 나 ”나를 사하소서“ 등 간단한 몇 마디를 수십 번 반복하면 하나님의 임재 함을 경험한다> 는 소위 관상기도 (觀想祈禱, Contemplative Spirituality) 라는 것도 거짓입니다.  성경은 어디에도 "주문을 반복해서 주님에게 가까이 간다" 는 말이 없고 "머리를 비워서 주님을 경험한다" 는 말이 없습니다. 오히려 말씀에 충만하고 말씀을 목상할 때 주님을 더 알게되고 신앙이 성숙합니다.

   관상기도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시편 46:10말씀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됨을 알지어다) 란 말씀을 증거구절로 삼는데 이는 말씀을  왜곡하여 이 성경구절이 마치 머리를 비우고 관상기도로 하나님에게 나아가라 는 말씀처럼 오해 합니다. 이 성경말씀은 관상기도를 말하지 않습니다.  종교개혁 이후 성경 해석의 원칙은 “성경을 성경으로” 풀이 합니다.  래틴 말로 Scriptura Scripturae Interpres (Scripture is the Interpreter of Scripture) 라고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성경구절의 앞 뒤 문맥을 보아야 합니다.

  문제의 시편 46:7절부터 읽어봅시다.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와서 여호와의 행적을 볼지어다.  땅을 황무케 하셨도다, 저가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례를 불사르시는도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라“ (시 46:7-11) 이 성경구절이 관상기도를 가르치는가요? 이 구절에서 ”머리를 비우고 가만히 앉아서 하나님을 만나라“ 고 가르칩니까?  

  앞 뒤 구절을 보면 만군의 주 하나님은 전제주권으로 천상천하의 대 주재되시는 전능하나님의 권세를 말하면서 이런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은 스스로를 낮추고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말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얼마나 성경을 왜곡하는가를 보십시오.  이에 대해서는 IVP에서 옛날 편집장을 지난 James Sire 박사가 쓴 “Twisting the Scripture” 라는 책을 보십시오.  이단자들은 성경구절을 자기들의 기호에 맞게 왜곡해서 속기 쉬운 교인들을 멸망으로 인도합니다. 속지 마십시오.

  율법을 아주 완전히 지킬 사람은 없습니다. 감리교 창시자 영국의 John Wesley는 그의 책 “Plain Account” (명백한 이야기) 에서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것은 지키라고 주셨을터이니 성경 그대로는 그 율법을 다 지킬 수 없으니 그 율법을 인간이 지킬 수 있을 정도로 낮추어서 지킨다” 고 말하고 있지만 이는 잘 못된 생각입니다. 율법은 원래부터 그것을 지켜 구원 얻도록 주신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으려면 육법을 모두 완전히 지켜야 하는데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분은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못 지키는 율법을 대신 모두 완전하게 지켜 주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 상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는 대속의 죽음으로 우리를 용서 해 주셨는데 주님은 십자가상에서 두 가지
순종, 즉 능동적 순종 (active obedience) 와 수동적 순종 (passive obedience) 로 의(righteousness)를 이루어 그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셨고 우리는 우리의 죄를 예수에게 전가시켜 아무 공로없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이중 전가 double imputation"입니다. ”능독적 순종“ 이란 우리가 지키지 못하는 율법을 우리를 대신하여 그리스도께서 대신 완전하게 지켜 주셨다는 말이고 ”수동적 순종“ 은 죄의 값은 사망인데 주님이 나를 대신하여 죽어 주심을 말합니다.


15-29에서는 율법에 관하여 설명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생각하려면 우선 모세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모세의 율법을 생각하지 않고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모릅니다. 여기에 “율법과 은혜의 관계”가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우리를 적나라하게 옷을 벗겨 줍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알게 해 줍니다. 이렇게 추악한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그리스도가 친히 나무(십자가) 에 달려  율법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속량했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의 높이와, 깊이와, 길이와 넓이를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모세의 율법을 터득하고 나서도 그냥 그 율법대로 살아서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려고 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해서 그 무거운 율법을 모두 대신 지켜주시고 우리 죽을 대신 대속의 죽음으로 우리를 율법에서 속량했는데도 육법에 속박되어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들은 항상 율법의 저주 아래 살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613개로 나누어서 248 개는 “하라”는 명령이고 나머지 365개 항목은 “하지 말라”는 금지명령인데 이것만 그대로 지키면 구원이 임하는 줄로 착각했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이상한 사람의 유전을 만들고 이를 열심히 지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으려고 하면 결국 실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죄인이라고 정죄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갈라디아 3:17과 19절에는 “언약” 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언약” 이라는 말을 살펴봅시다. 그런데 이 “언약” 이라는 말 즉 히브리 어로 'berith"(베이릿트) 나 신약 성경 헬라어의 “diatheke" (디아쎄케) 는 ”언약“이라는 의미 이외에도 “유언” 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기원 5세기의 Jerome(볹명 Eusebius Hieronymus, 345-419) 은 “Vulgate 판 성경” 을 Latin 어로 번역하면서 구약을 "Vetus Testamentum" 로 번역하고, 신약을 "Novum Testamentum" 이라고 했으며 이를 본 따서 영어 성경에서는 신약을 "New Testament" 구약을 "Old Testament" 로 명명했는데 “testament” 라는 말을 Latin 어에서 그대로 빌려 온 것입니다.  Testament 는 Latin 의 “testamentum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 말은 “언약” 이란 의미보다 사람이 죽기 전에 죽을 후를 대비하야 써놓은 “유언(遺言)” 이란 말로 널리 쓰이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법률용어로 “유언”을 “testamentum" 이라고 합니다.  흔히 "will"이라고 하지만 법률 용어로는 ”testamentum 이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신약 히브리서 9:15-17을 보면, “유언” 의 성질에 대해서 설명해 줍니다.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효력을 발생한다” 라고 가르칩니다.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세운 언약, 즉 “옛 언약” 은 영원한 것이 못되었습니다. 실패했습니다. 이유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세운 언약에서 하나님은 그 언약에 성실했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그 언약을 파기했기 때문 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새로운 언약을 맺겠다고 렘 31:31 절 이하에 말씀 했습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후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출 24:7-8) 라고 언약을 세웠지만 백성은 곧 말씀을 청종치 않고 이방신을 섬기고 산당에
올라가서 다른 신을 섬기며 그 언약을 파기했습니다.

  그래서 렘 31장 31절 이하에서 하나님은 새로운 언약을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였고 그 언약이 메시야 그리스도에 의하여 그대로 이루어 진 것이니 그 언약 즉 유언은 유언한 자 가 죽어야 효력을 발생하는데 과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그 언약이 효과를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성찬식을 제정하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새로운 언약의 피” 라고 하신 것입니다 (고전 11:25).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기업을 주실 때에 땅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영적 기업도 주신 것입니다. 즉 구원을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역사는 바로 구원의 모형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갈대야 우르에서 택해 불러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430년간 애급에서의 죄악 생활에서 벗어나 현세의 광야 교회생활을 거쳐 영원한 구원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것이 모두 구원의 모형입니다. 성경에서 애급은 죄악 된 상태, 구원을 얻지 못한 상태를 상징하고, 광야는 현세를 말하고, 가나안은 구원 받은 상태 혹은 천국을 상징합니다.

  계시록 11장에 보면 “두 증인”이 죽임을 당하는데 “영적으로 말하면 애급에서 죽임을 당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애급의 불신의 죄악 세상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급에서 건저낸 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죄악에서 구원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주일에 지키는 이유도 출애급기 20장 말씀 때문이 아니라 신명기 5:15 말씀에 의거해서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강하신 팔로 너희를 종되었던 애급땅에서 건져 냈음으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킵니다. 주님이 우리를 죄악 상태에서 구원해 주신 “영적 출애급”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부활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와 부활이 복음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1620년에 신대륙으로 건너온 청교도들은 크리스마스도 부활절도 따로 지키지
않고 주일만 거룩히 지켰습니다. 주일에 우리 주님이 구원을 완성하여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미국의 OPC 같은 교단은 크리스마스 나 부활절을 따로 지키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를 봅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세 가지 약속을 주셨습니다. 아들을 주시겠다고 했고, 땅을 약속했고, 복을 약속했는데  실제로 이삭을 주었고, 가나안 땅을 주었고, 창성하는 복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역사적으로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지만 이 모든 사건 뒤에는 하나님의 구속사 (redemptive history) 가 숨어 있는데 이것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육적으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불가능한 가운데서도 아들 이삭을 주었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주셨고, 그리고 아브라함을 통하여 열방이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가르쳐 주려는 영적인 구속사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육적인 복이 있는가 하면 아브라함이 받은 “영적 복” 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받은 것처럼 신악성경 갈라디아 4:4 에 보니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겠다” 다고 했는데 바로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아브라함이 땅을 기업으로 받은 것 처럼 신약에서는 “새 하늘과 새 땅” 을 기업으로 성도에게 주십니다.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열국이 복을 얻듯, 그리스도를 인하여 세계만방이 구원의 복을 얻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 3:29에서 바울은 말하기를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얻을 자”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래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이 우리 신앙의 표준이 됩니다.

  바울은 모세보다 아브라함을 강조합니다. 모세는 율법을 받았는데 그 율법은 우리를 정죄하여 우리가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고 따라서 나 대신 모든 율법을 지켜 주신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와 그를 믿게 해 줍니다. 그래서 갈라디아 3:24 에 말하기를 율법은 <몽학 선생, paidagogos) 이 되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몽학 선생” 으로 번역한 부분을 살펴보도록 하십시다. 옛날 로마시대에는 로마 사람들이 집집마다 헬라의 노예들을 많이 사드렸습니다. 헬라 노예들은 천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었고 대개 로마사람들의 집에서 선생으로 일했습니다. 그래서 가령 Marcus
Aurelius 황제의 Meditation (명상) 이라는 자서전을 보면, 그의 어머니는 헬라 노예로부터 헬라어와 철학을 공부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로마 사람들의 집에 들어간 헬라 노예들은 또한 가정교사의 일을 했습니다. 가정교사의 임무중 하나는 주인집  어린애를 학교로 데리고 왔다 갔다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본문 갈라디아 3:24에서는 “몽학 선생” 이란 말의 원래 헬라어의 의미가 “paidagogos "으로 ”가정교사“ 란 말입니다. 율법이 ”가정교사“란 말은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해 주어 그리스도에게 돌아오도록 해 준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나아오는 믿음의 본을 보여 줍니다. 그의 본은 그의 순종에서 나타납니다. 바울을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의 신앙을 잘 설명합니다.

  본문 23-24을 보십시오.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은 그의 뜻을 그의 백성에게 전하면서 백성이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불순종하면 백성이 받을 벌을 말하는데 이런 고통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입니다.  율법은 그리스도가 와서 우리를 속량할 때까지 그런 율법속에 우리를 가두어 둡니다. 그리스도가 오셔서 십자가에서 흘린 대속의 피, 그의 능동적 순종, 수동적 순종으로 인하여  이룩한 의(righteousness) 로 인하여 우리를 속량해 주어서 율법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건져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 준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율법의 목적은 우리가 죄인 됨을 깨닫게 해주고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게 하는
것 뿐인가요?  율법의 세 번째 목적은 우리 인간이 살아갈 규범 (norm) 의 역할을 합니다. 인간이 살아갈 규범은 하나님의 말씀 즉 율법입니다. 그래서 시편 119:105에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라고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법칙입니다. 믿는 도리도 살아갈 도리도 모두 성경의 가르침에 따릅니다.

   28절 말씀은 여성안수를 지지하는 분들의 증거구절입니다.
미국에서 CRCNA (북미주 개혁교단) 이 여성안수 를 총회에서 결의했을 때 이를  번복하도록 NAPARC
(북미주 보수 장로교단 및 개혁교단) 에서 많은 충고와 견제를 가했지만 저들은 그대로 저들이 갈 길을
가고 말았습니다. 그 무렵 NAPARC 의 임원들은 필라델피아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Van Til Hall
에 모여서 CRCNA 의 교단 친선부에서 활약하던 Clarance Boomsma 교수를 초청하여 debate (토론)
이 시작돠어 해가 넘어갈 때까지 4 시간동안 여성안수의 부다성과 또 이를 반박하는 여성안수의 정당성으로 서로 맛 섰던 기억이 있습니다.  결국 그 교다은 2001년 NAPARC 의 정회원 직을 상실하고 추받
되고 말았습니다.  요즘 여성안수만이 아니라 동서연애하는 여자도 목사로 안수하는 교단들이 생겨
났습니다.  기독교의 지도자들의 성경을 떠납니다.  심히 슬픈 일입니다. 여성이 성인 남자를 주장할
수 없다는 성경구절은 고린도전서 14:34, 딤전 2:12 말고도 창세기 3:16에서 찾아 봅니다.
고린도전서 14:34에 말한 "복종하라" 라는 말은 창세기 3:16에 비추어 생각하라고 어떤 성경에는
주가 붙어 있음을 볼 것입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하나이니라“  이 말을 곡해하여 이 성경구절이 여성안수를 성경적이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 성경구절은 디모데 2:12 이나 창세기 3:16이나 고전 14:34 과는
관계가 없는 성경구절입니다. 성경해석의 원칙은 성경을 성경으로 풀이하는 것인데 그 다음
구절인 29절을 보십시오. 29절에 “너희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가 그리스도에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는 여자이건 남자이건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으면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약속대로 유업 즉 ”구원을 얻을자“ 란 말이지 여자를 남자와 대등하게 안수해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죄악된 인간은 성경을 제 멋대로 왜곡하여 분변력이 없는 성도들을 속입니다.  속지 않도록 성경에 밝은 성도가 됩시다.  교리 공부를 하세요. 신앙고백서를 공부하세요. 성경이나 신앙고백서는  세상이 바뀐다고 그 내용이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영원토록 불변합니다.

  오늘은 갈라디아서 제3장을 공부했는데 갈라디아서 3장에서 요긴하게 가르치는 것은
1) 율법 아래 있는 자는 율법의 노예 상태에 있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자유 함이 있다는 것과,
2) 우리는 율법이 아니라 언약 안에서 은혜를 누린다는 것과,  
3) 우리는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연합되어 있으며 또한 동시에 모든 하나님의 백성과도 밀접     하게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는 공동체를 이룬다는 것과
4) 남자이건 여자이건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는 자면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자녀이고 구원     을 얻는다는 내용들을 공부했습니다.                             -갈라디아서 강해 #4, 끝-

                  http://tulipministries.com/bbs/view.php?id=theology&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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