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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된 신학의 현주소: “칭의”와 “성화” 의 문제

성화

by 김경호 진실 2011. 3. 28.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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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된 신학의 현주소: “칭의”와 “성화” 의 문제

                                                                                                                   튤립 교육 선교회
                                                                                                                   김명도 교수
                                                                                                       www.tulipministries.com

        (요즘 기독교 교계는 요란하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온갖 비성경적 혹은 이단적
         가르침이 교계를  풍미하고 있는데 이는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다음은 외국의
         어느 청년이 보내온 질문이며 이에 대한 본 선교회의 답변이다.
         질문을 보내오신 분의 보안을 위해서 가명을 썼다.)
              
                                       --질문 내용-
안녕하세요 김명도 박사님...

저는  개혁주의 신학을 사랑하는 청년입니다.
비록 교회는 자유스러운 교회에 출석하지만(제가 살고 있는 곳에는 개혁주의 교회가 없어서요...ㅜㅜ) 참으로 감사하게도 제가 다녔던 대학에 OPC에서 오신 선교사님이
계셔서 그 분을 모시고 개혁주의 공부를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 요즘에 제 친구와  신학적논쟁을 하게 되엇습니다.
초점은 죄에 대한 부담감과 죄의식감,죄책감, 그리고 죄에 대한 주님의 용서인데... ...
저의 친구는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죄(앞으로 지을 죄들)를 모두 사하셨기 때문에 ( 용서하셨기에) 우리는 더이상 죄의 사슬에서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해방받은 상태에 있기 때문에 , 하나님한테 죄의 용서를 구하면 않되는거라고 하셨습니다. 죄의 자백, 즉 죄의 인정은 합당하나, 하나님한테 지은 죄로 인해서 주여 , 용서해주세요  이런 식으로 기도하는 것은 이미 용서받은 자 다운 자세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저한테 온누리교회의 CGNTV에서 볼 수 있는 Joseph Prince의 설교를 추천해주셨는데...

Rejoice daily knowing your sins are forgiven 라는 설교에서는 <<하나님은 이미 그 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를 미래에 질 죄까지도 다 용서 해주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를 누르고 있는  죄책감이나 죄의식은 다 마귀 사탄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 라는 설교를 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분은 설교 중에서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에 해야 될 반응은 죄의 회개가 아니라, 그 죄조차도 사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라는 설교를 하십니다. 저는 마치 회개가 필요없다는 식으로 들립니다. 제가 민감했나요? 아니면 misunderstanding했을가요?

설교동영상사이트는 http://www.cgntv.net/CGN_Player/player.htm?bit=high&vid=70431에 있습니다.

저의 친구는 제가 나의 죄를 싫어하고 주님께 나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죄의 용서를 구하는 그러한 나의 모습이 너무나도 주님의 구원을 받은자 답지 못한 죄에 눌린듯한 삶을 사는 것 같다면서 말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죄의 용서를 구하지 않으면 너무나도 힘이 듭니다. 그리고 용서를 구하고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자유가 임하는 것을 느낍니다. 근데 그 친구는  제가 주님께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드리는 것에 대해서 많이 동의를 하시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친구는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 사람과 교제를 하기 위함이며 , 그의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게 하시기 위함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고 그로 인해 즐거워 한다는 교리문답을 체현도 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즉 , 하나님이 사람과의 교제, 그리고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게 하시는 것으로 영광을 받으시고 기뻐하신다고 주장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리는 것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며 , 나를 부인하고 주님을 내 맘에 철저히 모시고 사는 only Christ의 가치관과 인생관으로서 우리의 비참한 상태를 깨달아 우리의 죄를 항상 주님께 아뢰며 그 분의 긍휼과 용서하심을 구하고 또 그 분께 의지하고 지옥에 갈수 밖에 없는 나를 구해주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감사하는 맘으로  순종하는 삶이라고 생각하는데... ...

제가 볼 때에는 저희 친구의 주장은  죄를 미워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너무 무시하는 거 같은 느낌이 들고 그는  제가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을 너무 무시하는 거 같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즉 하나님은 이미 미래의 죄를 다 용서하셨는데..., 왜서 자꾸 죄를 가지고 용서해주세요 용서 해주세요 하는 가고 ... 그건 죄를 용서하신 주님에 대한 불공경이라구...너무 치우쳤다구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모른다구...

근데 제가 볼 때에는 그러한 신학적 주장은, 지극히 기복주의며, 인간중심적으로서  안개같은 인생 사는 우리는 아직도 죄짓는 우리의 상태를 낙관적으로 바라 볼 아무 이유도 찾지 못하겠는데요... 그리고 죠셉 프린스의 설교는 많이 인본주의적인 설교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며,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누리라는 식의 설교를 많이 하는 것 같아서 평소에 많이 경계를 하는 편인데... ...

아직  저의 신학 지식이 짧아서 , 분별이 잘 않되네요...  교수님 도와주세요...

교수님께서 <다음은 2009년 9월에 한국 대구에 사는 어느 성도 (익명 KBH)로부터 받은 신앙상담 편지의 내용과 그 상담 답신이다. 신앙생활에 도움이 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편집자> 라는 글을 어느 개혁주의 까페에서 읽었습니다. 교수님께서 그 성도님께 보낸 답장에서 <구원 얻는 날자를 알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이 구원을 받았는지 여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자신이 죄인이며 죄의 댓가는 죽음인데 예수께서 내가 죽을 자리에 대신 죽어주시어 내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용서해 주셨으니 이제는 내가 예수를 생명의 구주로 모시고 평생 그분에게 충성하며 살겠다“ 라고 거짓 없이 정직하게 서약할 수 있는 사람은 구원을 얻은 사랍입니다.  거짓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성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죄와 싸우며 마귀와 싸우며
상아갑니다.  성도들도 omission 의 죄, commission 의 죄를 짓습니다. 성도는 비록 상습적으로 반복해서 의식적으로 죄를 짓지는 않으나 죄를 지으면 회개해야 합니다.> 라는 요지의 내용이 있습니다.

이 내용 중에 주님께서 이미 내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용서해주셨다는 말씀이 나오네요? 그러면 정말 매형 말씀대로 제가 틀린 건가요?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자다운 모습으로 살려면 정말 죄로 인한 주님의 긍휼과 용서를 비는 게 필요 없을가요?

고맙습니다. 안녕히 계셔요... ...

교수님의 답장을 고대하며
--학생 THS
   중국에서 드림

                                                           ___답신 내용 ___
답신 드립니다.
우선 개혁주의를 사랑하시는 형제에게 감사 합니다.  그리고 OPC 목사님으로부터 배우셨다니 틀림이 없습니다. 현재 미국에서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가장 성경적으로 믿는 신실한
교단은 OPC 와 몇몇  교단뿐이고 다른 교단들은 모두 <신비주의> 나 <신사도 운동> 같은 이단에 빠져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분별력이 필요한 때입니다. 자칫하면 속아 넘어 갑니다.

질문에 답해 드리지요.

제가 보내온 질문중 나중부분은 제가 옛날 대구에 있는 어느 성도님에게 상담한 내용인데
어디에도 죄를 가볍게 여기거나 죄를 지으면 주님이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욯서 햇으니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비성경적인 신학입니다. 구원을 얻은
증거를 논할 때 첫째는 하나님은 누가 그의 백성인지 아실 것이고 둘째로는 본인이 거짓없이
주님에게 신앙고백하면서 주께서 내 과거 현재 미래의 죄을 십자가에서 용서해 주셔서 칭의를
이루어 구원을 얻었다는 사실을 알고 믿고 의지한다면 그는 구원을 얻었다는 말입니다.

Joseph Prince 목사의 설교에 관하여 친구되시는 이는 신학이 잘못되어 있습니다.  그 분은 <칭의> (Justification, 稱義) 와 <성화> (Sanctification, 聖化)를 혼동하고 있습니다.  “칭의로 사람의 신분이 죄로 멺망 받을 상태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얻을 상태로 변화하면 그 다음부터는 아무 것도 걱정할 것 없이 “행복하게 살기만하면 그만“ 이라는 생각은 성경의 가르침을 모르는  가장 비성경적이며 거의 이단에 가까운 생각입니다. 그 이유를 말씀 드리지요.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은 하나님이 창세전에 예정하시고 택해 주시고 (엡 1:4), 믿음을 선물로 받아서 (엡 2:8) 말씀을 통한 성령의 효과적인 부름을 통해서 (롬 10:17) 중생하게 되고 (요 3:5, 디도서 3:5) 중생하면 회개가 일어납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상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심으로 구속을 완성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은 그가 이룩한 의(義, Righteousness)인데 어떻게 <의> 를 이룩하셨는가하면 주님의 “의” 는 <능등적순종>(能動的順從, Active Obedience) 과 <수동적 순종>(受動的 順從, Passive Obedience) 로 인하여 얻어졌습니다.

“능동적 순종” 이란 우리가 다 지키지 못하는 율법을 그리스도께서 완전하게 우리 대신 지켜 주신 일이고, “수동적 순종” 이란 죄의 삯은 사망이므로 우리가 죽을 대신에 그리스도가 우리 대신 죽어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주님은 하나님의 공의(公義Justice of God)를 만족시키시고 의(義) 을 이룩하셨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그의 의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에게 전가(轉嫁, impute) 되어서 이루어집니다.  반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의 죄는 그리스도에게 전가되었습니다.  즉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이룩한 <의>는 우리에게 전가되고 우리의 죄는 그리스도에게 전가 되는 이중전가 (double imputation, 二重轉嫁) 로 인하여 “우리는 공로 없이 의롭다함을 얻은 것”입니다. 그는 십자가상에서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모두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 말을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 말을 오해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용서함 받았으니 이제는 기도할 필요도 없고, 죄를 회개할 필요도 없다는 말이 결코 이닙니다. 사람이 지옥에 내려가려면 몇 가지 죄를 지어야 합니까?  단 한 가지의 죄만 지어도 지옥에 내려갑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라는 (롬 6:23)의 말은 여러 가지 복합적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가지의 죄라도 범하면 죽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에덴동산의 하와는 선악과를 먹는 한 가지 죄를 범했을 뿐인데 하나님은 “네갸 정녕 죽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그 한가지 죄로 인하여 아담은 죽게 되었고 그는 인류의 대포자로 연대적 책임이 있는 까닭에 그의 후손들인 모든 인류는 모두 죽게 되었습니다. 로마인서 5:12-19 이 이를 증명합니다.  한 가지의 지만 지어도 영벌을 받아야 하는 인간이
구원을 얻었다는 말은 과거에 지은 죄, 현재의 죄, 미래에 지을 죄까지 모두 남김없이 용서 받았다는 말입니다.

구원은 항상 신학적으로 세 가지 면(面,three aspects) 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과거면, 현재면, 미래면 입니다. 과거 면에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하나도 남김없이 용서함 받았습니다. 그 말은 우리의 죄가  하루 아침에 갑자기 모두 없어졌다는 말이 아니라 <죄가 없다고 하나님이 간주(看做) 해 주셨다,  we are counted as righteous>는 말입니다. "칭의(justification 稱義) 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룩한 의가 근거(根據 ground)가 되고 우리의 믿음이 수단 (means) 이 되어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우리를 죄 없다고 <법적으로 선언해 주시는 행위, forensic declaration on His part>" 입니다.  우리의 죄가 하루아침에 다 없어져서 천사 같이 되었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구원을 얻은 다음에도 죄를 짓습니다.  고의적으로, 반복적으로, 상습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이 요일 3:9 의 의미입니다. 헬라어를 아시는 분은 헬라어 원문을 보시기 바랍니다.  죄를 짓지 않는 인간은 세상에 전혀 없습니다. 구원 얻은 성도도 죄를 짓습니다. 믿는 성도가 “죄 없다고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않다” 고 사도요한이 요한일서 1장10절에서 말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거듭난 성도도 죄를 짓는가?” 라는 논문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과거 면에서는 우리는 “죄가 있으되 죄 없는 자” 로 인정을 받고 의로워졌습니다. “의로워 진다” 라는 원래 헬라어는 “dikaiow) 인데 이 말은 ”의롭다고 여김을 받는다“ 라는 말이며 ”의로워 졌다“ 란 말이 아닙니다. 헬라어에서 ”ow" 로 끝나는 동사가 윤리나 도덕을 나타날 때는 “......으로 여김을 받는다” 또는  “....라고 인정받는다” 의 의미만 갖습니다.  따라서 “homoiow" 란 말은 “같다고 여김을 받는다,” 혹은  “같다고 인정을 받는다” 란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나를 의롭다고 “법적으로 선언해 주었다” 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많은 목사나 성도가 착각을 합니다. 우리가 완전히 죄를 짓지 않을 정도로 성화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모세도, 다윗도, 바울도 모두 거듭난 다음에도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과거면” 에서는 모두 죄를 용서 받은 탓에 정죄함이 없으니 지금 죽어도 천국에 올라갑니다.

그런데 구원에는 현재면 (Present aspect  現在面) 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칭의를 통해서 “의롭다” 고 “인정”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우리는 아직 “죄의 몸”이고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인간들” 인데 그 이유는 구원을 얻을 때 우리 “영혼은 부활하여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겠다는 (롬 6장) 생각이지만 우리의 육신은 아직 부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육신은 주님 재림의 날에 부활 합니다 (그때 죽어 있으면 육신이 무덤에서 나와 부활할 것이고 그때 죽지 않고 살아 있으면 죽음을 맛보지 않고 홀연히 변할 것임).

그러므로 구원의 “현재면” 에서는 우리는 늘 “육신의 정욕”(옛사람) 을 죽이며 (mortification of our old man) (고전 15:31) 육신과 싸웁니다. 바울은 이를 로마서 7장에서 잘 나타내주는데 “내가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지만 내 지체 속에 다른 법이 있어서 나를 다른 곳으로 끌고 가는데 내가 원하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내가 원치 않는 악은 행한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구원의 현재면에서 “영의 생각”과 “육의 생각”의 싸움입니다. 이런 싸움은 무감각한 불신자는 죄에 대한 감각이 없으니 모르지만 중생한 성도라면  누구나 느낍니다.  그래서 이 땅의 교회를 “전투적 교회 Church Militant" 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싸웁니다. 내 육신의 생각에서 나오는 죄와 더불어 싸웁니다. 또한 마귀에게 대적하여 싸웁니다.  죽을 때까지 평생 싸웁니다.

그러기에 늘 회개가 필요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회개하며 기도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주기도문 자체에도 “....우리 죄를 용서 하소서” 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성도는 늘 죄를 아파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성경에는 죄를 회개하라는 말이 수없이 많이 나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는 말도 하고 있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는 말도 있습니다. 아마도 가장 유명한 성경구절은 빌2:12 일 것입니다. 그 성경구절에 보면,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의 구원을 이룩하라“ 고 했는데 이 말은 내 힘으로 구원을 하라는 말이 아니라, 구원의 현재면에서 늘 ”신앙이 성장하도록, 즉 성화(聖化, sanctification) 에 힘쓰라“ 는 말입니다.

“성화”는 두 가지 면(two (aspects) 이 있는데 첫째 <나 자신의 육신의 죄를 죽이는 일> 이요 (mortification of the old man, 십자가에 못 박는 일) 이고,  두 번째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 것, conforming to the image of Christ>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살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장성하는 생활)입니다(엡 4:13).  이를 위해서는 성도가 부단히 자신이 범하는 죄에 대해서  눈물로 회개하고 용서를 비는 것입니다. 요일1:9 에는 우리가 우리의 죄를 고백하면 저는 미쁘시사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것이요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구해 주실 것이라고 하나님이 약속하십니다.  중생한 사람도 죄를 짓습니다. 죄를 지으면 마땅히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참다운 성도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죄를 짓지 않을 수 없으므로 (육신이 약하기 때문에) 죄를 짓지만 죄를 지은 성도는 늘 아픈 마음으로 다윗처럼 울면서 회개하고 죄를 아파하고 죄에 대한 회개 의 기도를 드립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도가 죄를 상습적으로 짓지 않습니다(요일 3:9). 그 이유는 성령이 우리 마음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요일 3;9).  죄를 지으면서도 죄에 대해 아파할 줄도 모르고 회개도 없는 것은 구원의 도리를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 구원 받은 사람이 처음 알아야 할 것은 “용서받을 자격이 없는 나를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보혈의 공로로 구원해 주었으니 주님의 뜻대로 살며 죄를 미워하며 자신을 채찍질 하며 성화에 힘쓰는데 목적은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 때 우리가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마태복음 16장24절에 가르쳐 줍니다.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생활, 즉, 주의 계명을 지키는 생활 (요 14:15, 21, 23, 24, 요일 5:3, 요이 6 등참고) 로 주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성경말씀대로 살면 ”율법주의자"(legalist) 라고 매도하는 목사나 평신도는 성경의 가르침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구원의 도리를 도리를 가르쳐 주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 (시119:105) 으로 내 생활과 신앙의 유일한 법칙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은 모두 성경이 표준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을 외면하는 현대교회의 성직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거역하고 있다는 말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 이 아닌 증거입니다 (마태복음 7:22 이하를 참고).

구원에는 또한 “미래면” 이 있습니다.
“미래면” 이란 세상의 종말을 말하는데 재림으로 인하여 구원이 완성되는 시기를 말합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 고 롬 8:18에 바울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했습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는 험하고 높은 이 길을 죄와 싸우고 육신의 생각과 싸우며 마귀와 싸우며 살아가지만 주님 다시 오실 때 우리가 하늘에 들려 올라가게 되며, 또 주 재림 전에 우리가 이미 죽어있다면 우리의 몸이 무덤에서 살아날 때, 우리의 모든 “싸움” “회개의 기도” 가 끝납니다. 왜?  성화(聖化) 의 과정이 끝나기 때문입니다.  

성화는 일순간에 일어났다가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중생”(Regeneration) 이나 "칭의"(Justification) 이나  “양자”(Adoption) 등은 일순간에 생기는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성화”는 평생을 두고 계속하여 지속(持續,continuing process)합니다. 그러기에 “성화”는 “과정” (process) 인 것입니다. 사람이 죽을 때까지  평생을 계속하여 지속되는 “성화의 과정” 은 우리가 죽을 때, 아니면 주님이 다시 오실 때 끝납니다.  죽을 때 우리 몸은 땅속에 들어가 “흙에서 났으니 흙으로 돌아 갈 수밖에 없지만 (창 3:19) 영혼은 사람이 죽는 즉시 하나님에게 돌아갑니다 (고후 5:8; 빌 1:23). ”주님의 재림의 날“ 에는 옛날 죽어  영혼이 하늘에 올라가 있던 그 우리 영혼이 하늘로부터 주님과 같이 내려와서 땅속에서 일어나는 우리의 시신(屍身)과 연합하여 <영화로운 몸> (glorified body)를 이루어 "새 하늘"과 "새 땅" (벧후 3:13)에서 영원히 거하게 됩니다. 이 지구는 불에 타서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신앙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도래했지만 미래에 속한다”Kingdom of God is already but not yet" 라는 교리를 가르칩니다.  이 말은 원래가 화란의 Herman Ridderbos (허만 리델보스) 가 사용한 말이지만 개혁주의 신앙의 표준 용어로 쓰입니다. 그는 The Coming of the Kingdom (왕국의 도래) 라는 책으로 유명합니다.

<Kingdom of God is already but not yet> 이라는 말은 우리가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죄 없다고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선언해 주셔서 “의롭다고 인쳐주신 때” 부터 성령이 내 마음속에 임재하시며 그리스도의 “왕권적 통치”를 받게 되므로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이며 (already) 그러나 구원의 현재면에서 보면 아직도 우리는 죄를 짓고 있고, 죄와 싸워야 하는 육신을 가지고 있고, 또 마귀가 아직도 “불 못”(Lake of Fire) 에 던져지지 아니했으니 마귀와 싸워야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으므로 아직까지 완전히 구원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그 구원은 주님의 재림의 날 (The Day of Judgment 심판 날)에 있게 되는데 그 심판의 날은 미래에 있을 일이므로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즉 미래에 속한다”(not yet) 라고 신학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구원관은 하나님이 예정하시어 효과적인 부름으로 피택자를 불러주시고 중생하여 믿음과 회개할 마음을 주시면 그 다음은 그리스도가 십자가 상에서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으로 이룩한 구속의 사역을 피택자에게 적용시켜 하나님이 그 십자가의 공로를 근거로 하고 우리의 믿음을 수단으로 하여 우리를 죄 없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해 주시는데 이를 신학적으로 “칭의” 라고한다.  칭의는 우리가 실제로 죄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죄가 있으되 죄가 없다고 판정하시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법적선언(forensic declaration)입니다.

칭의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하게 되어 “양자의 영”을 받아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 라고 부릅니다(롬 8:15). 양자가 되면 성화의 단계가 따르는데 하나님은 그의 자녀를 가끔 사랑의 채찍으로 징계하시기도 합니다 (히브리 12:8-13, 욥 5:17-19).  

성화는 평생 이어지는 하나의 과정(process)인데  성도의 생활 속에서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우리가 인내하도록 하나님이 성령으로 인도해 주시며 죄를 아파하고 죄를 지으면 회개하면서 평생을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며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려고 노력합니다. 다윗이 죄를 짓고 고민하는 모습을 시편 51편에서 읽어 보십시오.  과거 면에서는 모든 죄를 용서 받았지만 구원의 현재면에서는 아직 죄와 싸우고 육신과 또 사탄과 싸워야하는 까닭에 구원의 완성 (final consummation, 그리스도가 구원을 완성하시고 나라를 성부에게 바칠 때) 은 미래에 속하므로 주님의 재림 때에 이 모든 것이 완성 됩니다.  

사람이 죽으면 죽는 즉시 성도는 영혼이 하늘에 올라가고(고후 5:8, 빌1:23) 몸은 땅속에 흙으로 돌아갔다가 주님 다시 오시는 날 “영화로운 몸”으로 부활 합니다 주 재림 전에 이미 죽은 사람은 그 몸이 무덤에서 부활하여 공중 재림하는 그리스도와 함께 내려오는 영혼과 연합하여 “영화로운 몸 (glorified body)" 로 ”신천지“에서 살게 될 것이고 주 재림 때 아직 살아 있는 성도는 죽음을 맛보지 않고 홀연히 변하여 ”영화로운 몸” 이 되어 새 하늘과 새  땅에 살게 됩니다(고전15:51).

사탄과 불신자, 사이비 교역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지옥”은 실제로 존재하는 장소이며 천당도 실제로 존재하는 장소이며 “신자유주의”(NEO-LIBERALISM) 가 말하는 바,  “상징적인 상태(symbolical state” 가 결코 아닙니다. 구원은 <오로지 그리스도안에서>(Solus Christus), <오직 믿음을 통하여> (Sola Fide), 그리고 <오로지 은혜로> (Sola Gratia) 되어 집니다. We  have been saved by grace, through faith and in Christ.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모두 용서하여 (죄가 아주 없어졌으니) 죄에 대해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고 죄를 지으면 회개할 필요도 없고 (죄를 용서 받았으니), 죄를 지으면 오히려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모두 용서해 주신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라고 가르치는 교훈은 비성경적입니다.  이런 가르침을 신학에서는 도덕폐기론  (道德廢棄論, Antinomianism) 이라고 합니다. 기독교 교계에 널리 유행하지만 특히 세대주의자 (世代主義者 dispensationalists) 들 중에 많습니다.  

세대주의 체계의 가르침 (dispensationalistic doctrines)은 전에 없던 것인데 1840 년경 영국의 John Nelson Darbey (보통 J.N.Darby 라고 함) 이 고안(考案)해 낸 극히 비성경적인 교훈입니다.  이 교리가 비성경적이지만 미국에 건너온 1901년은 미국에 자유주의가 등장할 때라서 자유주의를 만대하는 사람들이 대거 이 세대주의 가르침을 수용하면서 신학교에 가서 원어를 공부해본 적도 없는 Cyrus Ingerson Scofield 가 1906년 소위 Scofield Reference Bible 이라는 성경을 펴내면서 급속히 이 세대주의가 미국에 퍼져 나갔습니다. 지금 목사들 중 대부분이 세대주의에 물들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Scofield 성경의 특징은 성경 여기저기에 Scofield가 제멋대로 성경의 해석을 써넣었기 때문에 어느 것이 성경이고 어느 것이 그의 주석인지 분간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런 성경이 20세기
초에 대단한 호응을 얻어 신학교마다 이 성경으로 신학을 강의했고 졸업한 신학생들은
목사가 되어 세대주의를 가르쳤습니다.  

이 교리에 의하면 “과거의 모든 교리는 잘못된 것이며 내가 새로운 진리를 발견했으니 엤날 종교개혁 기에 나온 가르침은 모두 버리고 내가 발견한 새로운 교리를 보급하여 가르쳐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종교개혁 이후, 학자들 중에는 “새로운 교리를 발견했다” 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느 종교를 믿어도 선행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치다가 세상을 떠난 Billy Graham 이나, 미국 California 주 Pasadena에 있는 Fuller 신학교 교회 성장학 교수 C. Peter Wagner 가 오순절 운동을 기반으로 새로운 직통계시를 통해서 <새로운 사도로 부름을 받은> 목사들로 하여금 사회와 교회를 개혁하자는  “신사도운동” 이나,  방언이나 계시를 중심한 <Kansas 선지자 운동> 의 <IHOP> ( International House of Prayer ,국제 기도의 집 운동) 을 창시한 Mike Bickle (마이크 비클) 같은 사람 등이 있습니다.

그 외에도, 기독교의 목적은 다른 종교와 통합하여 P.E.A.C.E (P=Plant churches, E=Equip local leaders, A=Assist the poor, C=Care for the sick, E=Educate the next generation) 라는 사회 봉사단체를 운영하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Rick Warren 도 있고,   G.F.Hegel 의 “변증법 Dialectics" 와 Juergen Moltmann 의 “희망신학 (Theology of Hope) 을 본받아 기독교는 점점 좋은 방향으로 발전되어 가고 있으니 지옥이나 심판은 존재하지 않으며 이 땅에서 서로 충돌하지 말고 평화스럽게 살기위해서는 교회에서 절대로 “교리”를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에머징 교회 운동”( Emergent Church Movement) 을 창시한 Brian McLaren 이나 그에 동조하는 Rob Bell, Tony Jones, Leonard Sweet 도 있습니다.

또  중세의 수도사(修道師) 나 힌두교의 명상법을 <기독교 기도>에  접목시켜 소위 "Palm Up Parm Down Theology" (손바닥을 위로 펴고 아래로 펴는 신학) 을 고안해내어 새로운 “영성운동 ”(Spiritual Formation) 을 가르치는 Azusa 대하교의  Quaker 교도 출신의 Richard Foster 나 교회에 뉴에이지 운동을 도입하려는 프랑스 신부 Pierre Teilhard de Chardin(삐에르 타이하르드 드 샤르뎅), 및 개신교 목사 Carl Rogers, Gerald Jampolsky, Helen Schucman (A Course in Miracles 저자), Wallace Dallas,  Thomas Merton, Henri Nouwen, Thomas Keating 같은 사람이 있고, 하나님은 미래를 알 수 없다는  Gregory Boyd, John Sanders, Clark H. Pinnock 같은 신학자도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바울의 칭의“ 개념을 다시  해석해야 한다고 하면서 바울 신학을 유대교주의 (Judaism) 과 연결하려고 하는 영국 London Bible College 의 Noel Thomas Wright, 그리고 그의 추종자들인  미국의  James Dunn 나 감리교 목사 E. P. Sanders 등을 들 수 있으며,  Postmodernism (후기근대주의) 식으로 성경을 해석하려는 John Sanders   같은 사람들이 그 대표적인 인물들입니다.  종교개혁 이후, ”전에 모르던 새로운 교리를 발견했다“ 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거짓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이제 새로운 교리는 없습니다.


중세 1000년 동안 잘못되었던 모든 기독교의 교리는 16세기 종교개혁에서 모두 바로 잡혔습니다. 새로 발견할 교리가 없습니다.  지금은 주신 말씀 (성경 66권) 으로만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새로운 계시도 없습니다. Sola Scriptura (오직 성경) 이란 motto 는 성경의 충족성도 내포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1에 “계시는 종결되었다” 고 웅변으로 가르쳐 줍니다.  지금 직통계시를 믿는 Bob Jones, Bonnie Corner, Rick Joyner 같은 사람은 성경의 충족성(sufficiency of Scripture) 를 믿지않는 사람이니 하나님에게 도전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신학적 의견” 을 피력한다고 하지만 이들의 가르침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신 절대적인 영감(靈感)으로 기록된 말씀인 성경에 위배되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소극적(消極的)으로 말하면 말씀을 훼파하는 사람들이고 적극적(積極的)으로 말하면 기독교를 파괴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단들이 그 어느 때보다도 창궐하는 시대에 살고 있고 그 많은 신학교에서 신학을 제대로 공부하지 못한 사람이 대거 목사가 되어 목회를 하면서 인기 영합을 위하여 성경에 없는 교리를 고안해 내어  사람들을 미혹하는 모습을 보면서 탄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들은 대개 재정이 풍부하여 비싼 비용을 지불하고 TV 에 출연하여 자신들의 그릇된 교리를 전파하는데 이는 시청자에게 “독약을 먹이는 행위”입니다.  그 “독약”은 달콤한 사탕발림의 이쁜 포장에 쌓여 있어서 먹고 병들기 전에는 진짜인지 가짜인지 식별이 어려워서 많은 사람들이 그 독약을 먹고 죽거나 병들어 갑니다. 쥐약에는 0.3 펴센트 가 독약이고 나머니 99.07 퍼센트는 달콤한 양식입니다. 그러나 그 적은 0.3 퍼센트의 독약 때문에 쥐는 죽습니다.

그러므로 TV 나 라디오에 출연하다고해서 그 사람들이 모두 정통적 신학을 가르치는 목사들이라고 생각하고 존경하거나 헌금을 바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TV에서 각광을 받는 사람들 중에 이단이나 비성경적인 가르침을 주는 “사이비 목사” 들이 더 많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누구나 돈만 내면 방송을 할 수 있는데 이단 집단은 단결력이 강하기 때문에 재정이 넉넉하여  온갖 방법으로 저들의 그릇된 교리를 전파하며 기성 교인들을 현혹하여 진리에서 떠나도록 오도(誤導 misleading) 합니다.

그리고 오늘 “기독교를 파괴하는 무리” 는 대부분 소위 "대형교회“를 목회하거나 ”TV에서 각광을 받는 무리“ 들임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이비 목사, 부흥사“ 들이 TV에서 거짓 교리를 가르치는지 눈여겨 보십시오. ”천당에 갔다 왔다“ 는 Bob Jones, 히말라야 산맥에 있는 Mt. Everest 에 ”하늘의 황후가 있으니 가서 잡으라는 계시를 받은 사람“ 등 경천지동(驚天地動) 할 사이비(似而非) 들이 너무 많은 세상입니다. 속지 말아야 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속아 넘어가는가요?  얼마나 많은 교회가 분렬되고 무너지며, 얼마나 많은 가정이 파탄되고 있는가를 보십시오. 무서운 세상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정체를 교묘하게 위장하기 때문에 신학이 부족한 성도들과 목사들은 진실과 혼동하기 쉬우며 쉽게 속아 넘어가버립니다. 요즘은 교인이 목사보다 훨씬 더 똑똑해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목사들도 속아 넘어가는 세상이니 목사들만 믿고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속은 목사는 자신이 지금까지 가르쳐오던 “정통적 신학” 을 버리고 어느 부흥회나 수련회에 다녀온 다음부터는 이상한 이단적 교리를 교회 성도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근자에 뉴욕의 어느 한인 교회에서 생긴 일인데,  그 교회를 목회하는 목사는 한국에서도 건전하다는 “고려파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목사가 된 사람인데 주일 낮에 설교하면서 “하나님은 삼위일체로 계시지만 역사상 꼭 한번 삼위일체가 깨어져 무너진 적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동정녀 탄생하던 성육신 때 였습니다“ 라고 설교하여 그 교회 장로님으로부터 호된 질책을 받고 그 교회가 둘로 분렬된 사례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지금은 “어느 신학교를 나왔는가?” 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보수 신학교>를 나왔다고 해도 그 신학교는 이미 교수들이 대부분 이상한 신학에 물들어 있고, 따라서 학교가 자유주의나 신비주의로 물들었으며  또 설사 아직도 <정통적 개혁주의> 를 가르친다고 해도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고 책도 읽지 않고 좋은 점수를 적당히 받아 적당히 졸업하고 목사가 된 신학생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출신 신학교를 따질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목사 개인 개인을 보고 평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학생들도 각자가 자기의 신앙을 지켜 나가는 길이 제일 안전합니다.

문제의 TV 설교자 Joseph Prince 목사도 그런 부류의 목사라고 생각됩니다. 어느 신학교를 졸업했는지 모르지만 그의 출신 학교를 묻기 전에 그는 신학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는 목사인 것은 분명합니다. 따라서 그런 사람의 설교를 듣는 것은 영혼을 해치는 일이며, 시간 낭비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답신을 드립니다

튤립교육 선교회 김명도 교수 (1/26/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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