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규 (2006.11.12) http://kmcmi.org
전적타락(Total corruption)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한동안 어린아이들이 즐겨보았던 ‘피카추’라는 TV프로가 있습니다. 등장인물들 중에 스스로 귀염둥이 악당이라 주장하는 개구쟁이들이 있는데요, ‘누구냐?’고 묻기만 하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가 누군지 물으신다면, 대답해 드리는 게 인지상정”하면서 한바탕 거창하게 자기들을 소개합니다.
여러분에게 똑같은 질문을 주어진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각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대답하겠지요: ‘나는 임산부다’ ‘나는 집사다’. 그러면 그 모든 사람들, 곧 ‘인간은 누군가?’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인간을 누구라고 이해하느냐에 따라 구원의 방법에 대한 이해도 결정적인 영향을 받습니다. 어거스틴과 동시대에 살았던 펠라기우스(Pelagius, 약 350-420)는 인간이 타락으로 인해 죽은 존재임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인간은 타락전의 아담과 같은 상태로 태어난다고 주장했습니다. 인간은 하얀 도화지 같은 상태로 태어나며, 어떤 그림을 그릴지 결정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인간 이해는 즉각적으로 구원 방법에 대한 잘못된 태도를 가져왔습니다. 인간이 자기 삶의 도화지에 선한 그림을 그리면 구원을 얻고, 악한 그림을 그리면 심판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기 때문에, 펠라기우스에게는 구원자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을 본받고자 했던 이유는,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한 나쁜 모델인 반면에, 예수님은 순종하며 선을 행한 좋은 모델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모델이란 그림을 그리는데 도움이 되지만, 없어도 아쉬울 것은 없습니다. 오늘날도 펠라기우스와 같은 인간이해를 가진 사람들은, 예수님을 구원자로 생각하기보다는 단지 도덕적인 모범으로만 생각합니다.
성경은 인간이 죽은 존재라고 말합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이 말씀은 아담만이 아니라, 그 이후의 사람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기 전까지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존재였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다면 스스로 구원할 수 없고, 외부의 구원자가 꼭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엡 2:4-5)이라 말합니다.
성경의 주장과 펠라기우스의 주장을 반쯤 섞은 사람들을 세미펠라기안(Semi-Pelagian)이라 하는데, 중세 로마 가톨릭은 온통 이런 생각에 지배되었습니다. 대표자는 서방에 이집트 수도원제도의 정신을 소개한 존 카시안(John Cassian, 약 360-435)입니다. 그는 인간의 타락과 원죄를 인정했지만, 그것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말살하지는 않았다고 보았습니다. 인간은 죄로 죽은 것이 아니라 단지 심각하게 병든 존재이며, 미약해지기는 했지만 인간의 마음에는 아직도 선의 씨앗이 남아 있다고 보았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부싯돌과 같아서 하나님이 치셔야 불꽃이 튄다. 하지만 하나님은 불꽃이 튀는 최초의 반응이 일어날 때 은혜를 부어주신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구원은 하나님과 인간의 협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인데, 인간 의지가 먼저 불꽃을 튀기는 반응을 보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어도 회복을 위한 첫걸음은 내디딜 수 있습니다. 이는 결국 구원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말이 됩니다.
16세기 소시니안(Socinianism)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등장해서 펠라기우스처럼 다시 인간의 원죄를 부정했습니다. 17세기에는 아르미니우스(James Arminius, 1560-1609)의 주장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타락을 좀 더 심각하게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죄와 허물로 완전히 죽은 것이 아니라 죽기 일보직전의 상태처럼 보았습니다. 죽어가는 사람이라도 마지막 유언은 남길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이 심히 타락했으나, 예수님을 영접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할 만큼의 힘은 남아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여기서도 결정적인 구원의 열쇠는 인간이 쥐고 있습니다. 인간 스스로 마음의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하나님도 못 들어오신다는 것이지요.
19세기가 되어서도 많은 사람들이 인간을 낙관적으로 생각했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 1831)은, 중세 시대 토마스 아퀴나스처럼, 인간의 이성만큼은 타락하지 않은 것같이 생각했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자의 아버지라 불리는 슐라이어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 1768-1834)는 인간의 신의존 감정만큼은 부패하지 않은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인간의 도덕적 의지가 남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인간은 정말 타락했지만, 지ㆍ정ㆍ의 중에서 어느 한 부분만큼은 죄와 허물로 죽지 않고 남아 있다고 본 셈입니다. 이 모든 사상들이 성경을 떠난 펠라기우스의 잔재들입니다.
인간이 허물과 죄로 죽었다는 성경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수용하지 못하거나, 수용할지라도 상당히 약화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가 없고, 인간의 공로가 미약하나마 있었다고 말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공로가 조금이라도 기여했다고 결단코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인간을 하얀 도화지 같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렘 17:9)이며, “죄악 중에 출생하였”(시 51:5)다고 말합니다. 인간 안에 약간의 희망이라도 둘 수 있는 선의 씨앗이 남아 있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롬 3:10-18)고 합니다. 성경은 인간이 허물과 죄로 완전히 죽은 존재이며, 전적으로 타락하였고 전적으로 부패하였다고 말합니다. 이점에 있어서는 조금도 낙관적이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비관적입니다.
죄로 죽었다는 말은 인간의 모든 기능이 정지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기능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하나님의 뜻에 맞게 바르게 작용하는 것이 전혀 없다는 의미입니다. 타락으로 인한 죄책과 부패는 인간 존재 전체에 미쳤습니다. 그래서 구원 받지 못한 인간의 모든 생각과 모든 감정과 모든 의지는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 한 것이 전혀 없을 만큼 왜곡되었습니다. 인간의 지·정·의 내에는 선의 씨앗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지성이든 감성이든 의지든, 그 모든 것이 하나님에 대하여 죽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 곧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리셨”(엡 2:5)습니다. 우리가 일방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기 때문에 구원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엡 2:8)이라 말합니다. 은혜를 인하여 구원 받은 사람은 원칙적으로 하나님에 대해 살았습니다. 원칙적으로는 지ㆍ정ㆍ의 모두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게 회복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완전히 회복되지는 못했습니다.
완전한 비유는 아닙니다만, 다리가 완전히 부러져서 전혀 움직이지 못하던 사람이 수술을 했다고 바로 회복되지 않는 것과 비슷합니다. 수술을 해서 뼈를 다시 맞추어 놓았어도 한 동안 깁스(gyps)를 해야 하고 석고붕대를 푼 후에도 재활치료하며 한동안 목발을 집고 다닙니다. 이처럼 이미 구원 받은 인간이도 이 땅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완전한 회복 상태가 아닙니다. 때때로 그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는 하나님의 뜻을 향하려고 소원할 것입니다. 그러나 건강한 다리로 걷듯이 잘 되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어설프게 비틀거리면서, 때로는 쓰러지면서 걷습니다. 따라서 회복의 과정 중에 있는 인간의 전존재는 반드시 성경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를 목발처럼 의존해야 합니다.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도록 철저히 의존하지 않으면 금방 쓰러지게 됩니다.
무슨 말을 했다가 상대편이 화를 내면 ‘내가 없는 말 했나, 사실이 그렇잖아’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란 있는 사실을 그대로를 적나라하게 말하면 아주 싫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에게 교만하다고 말할 때보다, 교만한 사람에게 교만하다고 말하면 더 화냅니다. 성경이 인간을 죄인이라고 한다고 해서, 막상 대면했을 때 ‘당신 죄인입니다’라고 말해보십시오. 아마 대번에 반격할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죄를 지적하면 거품을 물고 달려들 것입니다. 약간 좋게 말해줘야 인간관계가 원만하기 때문에 서로 좋게 말해주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설 때만큼은 자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직시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이 증언하는 인간의 모습은 허물과 죄로 죽은, 선의 씨앗이라고는 어느 구석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전적으로 타락한 자입니다. 구원 받은 사람도 그 내면에는 아직 온갖 죄들이 가득합니다. 이기심과 정욕과 교만 등등 성경이 언급하는 죄악의 요소들에 걸리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사람도 온전히 회복되기까지는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용납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전적으로 타락한 자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얻었음을 아는 사람은 자기를 자랑하거나 변명하지 않습니다. 절뚝거리는 남의 허물을 정죄하지도 않습니다. 온전히 회복되는 그날까지 부단히 성경에 의존하여 재활 훈련할 뿐입니다. 주신 은혜가 감사해서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씁니다(딤후 2:15).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더욱 그분의 은혜에 의존하는 삶이되시기 바랍니다. ♥
06년11월12일(전적타락)-칼빈주의_5대교리_1강.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