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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고난에 세 가지 경이(사무엘 루터포드)

사무엘 러더퍼드

by 김경호 진실 2011. 9. 23.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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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고난에 세 가지 경이(사무엘 루터포드)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온 땅에서 삼분지 이는 멸절하고 삼분지 일은 거기 남으리니 내가 그 삼분지 일을 불 가운데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슥 13:7-9)

이사야 53장을 읽을 때, 내시가 "그 선지자가 말하는 이것은 누구에 대해서 말씀하신 건가? 자신에 대한 것인가? 혹은 다른 어떤 사람에 대해서 말하는가?"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난들은 그를 세상의 경이로 삼을 만큼 그렇게 기이한 일이다. '마치 내가 무슨 장관을 보는가?'라고 어떤 사람이 물을 것 같지 않은가? 그와 동일한 것을 나는 결코 보지 못했도다! 손과 발이 모두 난도질당한 하나님의 아들, 생명의 주를 나는 본다.

우리의 주님의 고난들에는 세 가지 경이의 근거들이 있다. 1. 그의 인격을 보라. 2. 그를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라. 3. 자비와 공의를 나타내는 진기한 길을 보라.

1. 그의 인격을 보라.

그러면 그 길이 처절해야 한다는 것에 놀란다. 힘은 어질어질하고, 생명은 죽어 있으며, 빵에 굶주려 있고 물에 목말라하고 있다. 이것이 기이한 내용이 아닌가? 신성이 고뇌의 사람과 인격적 연합으로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이 경이이다. 상처나 있고 피가 있으며 저주와 부끄러움이 과 연결되어 서 있도록 그의 인격적 실재(personal subsistence)를 주는 것과 비교될 때, 영을 가진 하나님이 슬픔 속에 있는 인간으로 버티어 간다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신성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저주받으며 십자가에 달려 죽어 장사지낸 바 된 사람과 똑같이 숨쉬고 살며 거하는 일이 진실로 경이로운 것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저주받고 하나님이 부끄러움이 되며, 신성의 인격성은 아직도 부끄러움과 저주를 감수하고 계신다.

2. 다른 사람과 그를 비교하라.

모세가 진노에 복종하는 것을 보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스가랴는 문과 제단 사이에서 살해되었다. 많은 족장들이 찢겨졌다. 그러나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의 경우 그렇게 취급되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하나님이시여, 세상이 놀라고 소리치는 모든 것이 경이롭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얼마나 놀라운 것을 보고 있는가! 별들 위에서 밟히고 나무에 못 박히신 그의 발을 보라!

3. 자비와 공의를 나타내는 진기한 길을 보라

사람이나 천사가 공의가 하나님이요 인간이신 자를 고난받도록 하는 이런 기이한 역사요 하늘에 이르는 이상한 길에 대해서 어떤 꿈을 꿀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 내려오시고 인간을 구원하시는 일은 의도적인 역사이었다. 그가 자연의 어떤 필연성에 의해서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다. 하나님의 자유로우신 의지가 이런 정해지고 작정된 공의의 법 위에,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 그리고 그 앞에 있었다. 그의 자유로우신 의지로부터 그는 선과 사랑과 자비와 유연한 감정을 내 품으신 것이다. 어떤 신비인가? 무한한 하나님이 천한 인간들을 위해서 고난을 당해야 했도다!

적용

그러면 죄를 조금도 찾을 수 없는 자이신 그가 조금도 하나님으로 간주되지 않고 있다. 죄를 가슴에 안으신 고의적 죄인은 그를 지으신 자에게 잔인한 일이다. 그리스도가 너의 남편이고 너는 그의 아내라면, 죄가 너의 남편을 살해했다. 그녀의 남편의 목을 자른 그 칼을 그 아내가 사랑하겠는가? 우리는 말할 것이다. 아내가 그 남편을 추적하여 죽게 하고 그가 교수형에 처하도록 도왔던 남자를 그녀의 가슴에 품었다면, 그녀가 그 남편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으로부터 구원받은 자가 그리스도를 추적하여 죽게 하고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한 강포자들을 사랑하겠는가? 계속해서 죄 가운데 있으면서 그리스도의 피를 흘림에 '아멘'이라고 말하는 일에 조심하라.

그의 백성을 위해서 고난받으신 그리스도를 사랑하라. 그리고 그를 보고 배우라. 오 하나님의 사랑이여, 그것은 모든 지식을 넘어서고 있다. ... 그리스도가 그의 사랑의 기초와 토대를 깊게 놓고 있다. 땅으로, 무덤으로, 부끄러움으로, 저주로, 지옥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로 내려가기까지! 참으로 그의 사랑 안에서, 그는 그의 택한 모든 자녀들을 하나님에 대해서 왕과 군주로 삼으신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지배하실 것이다. 그렇다면, 왕과 군주이기를 원치 않은 그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자들인가!

그리스도가 유대인들에게 자비를 베풀었겠는가? 자비를 발로 짓밟은 자들에게도 자비가 베풀어지는 것이 공의에 반대되는 것이 아닌가?

대답
1. 네가 그리스도의 본성과 직책을 생각한다면, 그가 그의 얼굴에 침을 뱉던 자들에게도 마땅히 자비를 베푸시리라 짐작할 것이다.

2. 죽는 그리스도로서 그리스도의 직책을 생각해 보라. 우리 주님은 우리의 주제넘음에 '아멘'하지 않으며 우리를 멀리하고 떠나지 않으며 그는 율법의 저주에 '아멘'이라고 말하기를 원치 않으신다.

3.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무슨 말로 대담하셨는가? 그는 죽으라는 명령을 받으셨으나, 계속해서 받으신 것이 아니다. 그는 이르기를, "만족합니다. 내가 죽을 것입니다. 그들을 따뜻한 마음으로 사랑할 것입니다. 내가 나의 팔로 높이 안아 올릴 것입니다. 그들을 지옥으로부터, 그리고 그들의 곤한 모든 고통으로부터 끌어낼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우리 주께서 이르기를, "나에게 악마와 같이 그들로 병들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하나님처럼 좋은 자가 되고자 한다."라고 하신다.

적용

"칼아 깨어서 내 목자를 치라." 마치 칼이 귀를 가진 것처럼, 칼이 잠들어 있는 것처럼, 그것에게 주님은 말하고 있다. (겔 14:17) 그는 그것이 마치 사명으로 보내는 귀를 가진 사신처럼 칼에게 말하고 있다. ... 섭리와 공의에는 많은 친구들이 있지만, 자비에게는 많은 종들이 있다. 하나님께서 "칼아 독일로 가라, 스코틀랜드로 질주하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감히 그 사명을 맡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모든 피조물들에게 은밀한 충동이 있게 한다. 재난이여 일어나라, 그리고 그들에게 임하라. 악마여 깨어라. 새긴 우상들이여 이리로 와서 스코틀랜드에 앉으라. 로마의 매춘부여 이리로 와서 스코틀랜드를 살육하라. 그 곳을 짐승의 밀실로 삼으라고 하나님께서 말하시면, 그들은 순종해야 한다. 그는 칼에게 그의 아들이요 양이며 그리스도이신 자를 대적하여 깨라고 명하신다. 이는 하나님의 정해진 작정에 의해서 그는 살해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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