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전도단은 젊은 대학생들은 물론이고, 기독교인이라면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한 번쯤은 들어
보거나 접해본 기관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이 10집 음반을 ‘거룩한 성전’이라는 제목
으로 내면서 교회 음악을 동양음악과 혼합시키게 되었다. 그리고 이 음반에 실린 14곡 모두는
하나같이 동양의 가락으로 편성되었다. 그리고 마치 이러한 위험천만한 시도가 복음적이고, 한국
의 교회에 풍토에 맞는 것으로써 더욱더 교회에 유익을 가져다 주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러한 동양적인 가락에 성경의 내용을 가사화 하게 된 근본적인 동기는 굳이 이유를 묻지 않아도
될 만큼 뻔한 것이다. 그 이유인즉 동양의 문화에 심취되어 있는 한국 사람들에게 접근하기 위한
것이며, 그들에게 복음을 보다 더 효율적으로 전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러나 복음은 그 자체로
증거 해야지 순수성을 결여시키면서 까지 증거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들이 그 동안 누려왔던
생활습관들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그 속에서 나오도록 불러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복음은 결코 그 어디에도 구속되거나 심취될 필요성이 전혀 없는 것이다.
10집에 실린 곡들과 가락들을 살펴보면
1.거룩한 성전 - 굳거리(굿거리)
2.영광 영광
3.그대 내사랑 - 자진모리
4.이 날은 주의 지으신 날 - 굳거리(굿거리)
5.선포하라 - 중중모리
6.할렐루야 우리 예수
7.저 성벽을 향해 - 육채 장단에 맞춰
8.나의 영혼 싸울 때 - 자진모리
9.너영 나영 - 세마치,제주 전통민요
후렴) 너영 나영 두리둥실 어-영 낮에 낮에나 밤에 밤에나 참 사랑이로구나
10.마음속에 근심있는 사람 - 동살풀이
11.감람산
12.여호와여 - 자진모리, 휘모리
가사중에 아리 아라리요, 아이 아라리요가 포함되어 있음
13.아버지의 사랑 - 굳거리
14.문놀이 - 덩더쿵 이다.
그리고 이 찬양집 뒷 표지에 기록되어져 있는 글을 보면 “거룩한 성전에서 울리는 찬양을 통해 우리
의 어깨에 두신 민족의 흥이 되살아나게 하시고 우리의 가슴 깊숙이 숨겨 두신 우리의 혼이 일어
나게 하소서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신명나는 소리를 끄집어내 주시고 슬픔과 한으로 가
득한 어두운 그늘을 벗어나 기쁨과 신명의 한마당이 되게 하소서” 이다.
이 내용 중에 어깨에 두신 민족의 흥이라든지 우리의 혼이라든지 신명나는 소리라든지 한이라든
지 신명의 한마당이라든지 라는 단어는 전혀 기독교적인 색채가 아닐뿐더러 지극히 동양적이며
주술적인 것이다.
이 찬양집에서 12번에 해당하는 ‘여호와여’ 라는 곡은 다윗이 그의 아들인 압살롬을 피할 때에
지은 시로써 가사 중에 ‘아리 아라리요’ 라는 내용이 삽입되어져 있다. 이는 기독교 문화와 주술
적인 동양 문화를 혼합시킨 것으로써 기독교의 순수성을 결여시키는 것이다. 또한 14번에 해당
하는 ‘문놀이’라는 곡은 시편 100편을 가사화한 것으로써 전래 동요의 음으로 편곡했으며, 제목
에는 지극히 동양적인 색채를 띠게 하였다.
이 찬양집은 상황화 예배(Contextual Worship)를 주장하면서 그에 대한 의미를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에게 주신 아름다운 색채, 장단, 노래, 춤, 언어 등을 통하여 그들 민족의 문화적 정서를
구속하여 드리는 예배라고 하며, 특히 서구 민족들에 비하여 자신들의 문화를 구속하여 하나님
께 드리지 못했던 아시아 민족들에게 구체적으로 적용되어져야 할 예배이며, 21세기 문화의 세
기에 새로운 선교적 접근 방향의 중요한 수단으로 쓰여질 예배라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이 긍정적으로만 받아들여진다면 끝내는 종교 다원주의와 혼합주의를 주창
하게 된다. 그리고 한국의 음악은 죽은 혼을 달래주는 지극히 샤머니즘(Shamanism)적이므로
기독교와는 전혀 상관관계가 없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장 22절로 24절에서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서 ‘썩어져 가는’ 에 해당하는 헬라어 ‘Φθειρομενον’ (프데이로메논)은 ‘부패시키다’ ‘타
락시키다’ ‘멸망시키다’ 라는 의미를 가진 ‘φθειρω’(프데이로)의 현재 수동태 분사이다. 이는 계
속하여 썩어져 간다는 의미로서 구습을 좇는 이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또
한 ‘구습’에 해당하는 헬라어 ‘την προτεραν αναστροφην’ (덴 프로테란 아나스트로페)는 ‘옛
생활방식’ ‘예전의 행실’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 ‘αναστροφη’(아니스트로페) 는
본래 어떤 한 장소에 머물러 있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구습이란 옛 본성인 자기 중심의 정욕대
로 살아온 과거의 모든 행태 및 생활 방식을 가리킨다고 볼수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하다고 말
할 수 있는 것은 과거에 가졌던 잘못된 종교성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로 그 동안 자신이 옳다고 주장했던 과거
의 잘못된 종교관을 버렸다(빌 3:1-9).
끝으로, 찬양은 하나님께 드리는 면이 있는가 하면 우리가 찬양을 통해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면
도 있다. 이 둘 중에 어느 한 쪽에만 지나치게 기울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지만 받는 면보다는
하나님께 드리는 면이 더 앞서야 하며, 더 중요시 되어야 한다. 찬양을 부를 때 너무 개인적인 감
정에 호소하거나 충실해서는 안될 것이다.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들을 총 동원하여 인
격적이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찬양해야할 것이다.
“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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