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베투스(Servetus) 는 삼위일체를 부인하여 화형을 당한 자이다.
이 사람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책과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2권의 책을 썼다. 이 사
람은 유아 세례를 거부한 자이기도 하다. 이러한 잘못된 가르침을 했기에 제네바에 그가
왔을 때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아 화형을 당하게 된 것이다.
당시에 이단을 화형에 처하는 일은 보편적인 것이었다. 당시에는 로마교회와 개신교 모두
다 신성모독을 하는 자들을 화형에 처했다. 그래서 이러한 시대적인 흐름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Servetus' 가 제네바에 왔을 때는 제네바에 있는 권력가들이 ‘Servetus'를 법에 기
소하였다. 그러자 로마의 권력으로부터 ‘Servetus' 가 도망을 하였는데 제네바에서는
‘Servetus'를 풀어 주게 되면 로마교가 제네바에 대해서 이단에 대해 부드럽다고 평가하는
것을 염두해 두고 ‘Servetus'를 화형에 처하게 된 것이다. ‘Servetus' 는 형편없는 신성모독
가로 평가되었다. 그리고 유죄로 투표 결과가 나오게 되었다. 칼빈도 이단자가 처형을 당
할 것을 주장한 자이다. 그러나 칼빈은 의회에 가서 ‘Servetus' 의 유죄만을 판결하고, 화
형에 처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리고 칼로 죽이는 방법을 택하라고 하였다. 칼빈은 처형은
하지만 화형의 방법은 아니라고 말하였다. 칼빈이 ‘Servetus'를 죽였다는 것은 바른 사실
이 아니다. 칼빈은 ‘Servetus'를 제네바에서 화형시키기를 원하지 않았다.
칼빈은 ‘Servetus' 가 이단 죄에 해당된다고 시 의회에 고소한 자이다.
칼빈은 20년 동안의 편지를 통해서 ‘Servetus' 가 이단에서 나오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이단자 중에 대표인 ‘Servetus' 가 제네바에 왔을 때 칼빈은 그 사실을 묵인할 수는
없었다. ‘Servetus' 는 이미 이단자라는 이유로 처형 당할 위기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법
정에서 ‘Servetus' 는 칼빈에게 이리석고 멍청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칼빈이 재판에서 지면 그 재산을 모두 자신에게 주리고 했는데 그 말을 들은 시 의
회원들은 웃었다. 왜냐하면 칼빈의 재산은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칼빈의 집은 시 의회의 것이었다. 칼빈이 시 의회에 ‘Servetus'를 화형에 처하지 말라고 요
청했는데 그만 거절 당하였다. 당시에 칼빈에게는 제네바 시민권이 없었다. 그러므로
‘Servetus'를 기소는 했지만 그의 판결에 관한 투표를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시 의회가
칼빈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아나하였다. 그래서 칼빈은 제네바에서 영향력이 있는 목회자
였지만 시민권을 받지 못한 것이다.
1903年 10月 27日에 ‘Servetus' 가 죽은 그 장소에 기념비가 세워졌다. 그 기념비의 돈을
전 세계에 있는 장로 교인들이 지불하였다.
“우리는 칼빈의 후예로써 감사한다. 우리는 시대의 오류에 대해서 회개한다.” 라고 비문에
쓰여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시대의 오류란 ‘Servetus'를 화형시킨 것을 말한다. 그러나 로마교에서는
잘못을 많이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한 적이 없다.
특별히 미국의 장로 교인들은 ‘Servetus'를 화형에 처한 것을 잘못된 것이라고 했다. 비록
한 번이지만 그것은 지나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로마 교인들이 기독교인들을 화형시킨
것을 회개해야 한다고 말한다.
1555년 1월에 제네바에 있는 시 의회는 마지막으로 당회를 허락하였다.
이는 교회가 스스로 교인들을 책벌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것은 1536년 칼빈이 제네바에 온 해부터 그렇게 해야 한다고 외친 것이다.
1559년 성탄절날 작은 시 의회는 칼빈에게 마침내 제네바의 시민권을 허락하였다. 칼빈이
젊었을 때에는 건강하였다. 그러나 그는 공부를 너무나도 열심히 했기에 밥을 걸러 먹어서
여러 가지의 가벼운 잔병치레를 하게 되었다.
칼빈의 병은 각질과 천식과 소화 불량과 만성 편두통과 관절염과 치질과 잇몸질환과 늑막
염 등이다. 그래서 칼빈은 말년에 이러한 여러 가지의 병들로 인하여 고통을 받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병들 가운데에서도 위대한 업적을 남기게 되었다.
칼빈은 1564년 2월에 마지막 설교를 하였다. 또한 칼빈은 1564년 4월에 부활절 예배에 참
석하였다. 1564년 4월 27일에 칼빈은 작은 시 의회에 때때로 자신이 화를 낸 것을 사과하
고, 개혁 신앙을 권면했다. 1564년 5월 2일에 칼빈은 그의 친구이자 스승이었던 파렐에게
편지하여 작별을 고하였다. 칼빈은 편지에서 자신이 임종을 맞이함을 말하고 오지 말 것을
말하였다. 그러나 파렐은 칼빈을 보기 위해 제네바로 오게 되었다. 칼빈이 자신의 죽음 직
전인 마지막 한 주간에는 여러 가지로 존경을 받는 목회자들을 초청하였는데 그들은 칼빈
을 보고 슬퍼하였다.
1564년 4월 25일날에 칼빈은 유언을 남기고, 아무런 유산을 남기지 않고 1564년 5월 27일
날에 그의 여러 가지의 질병중에 하나인 폐결핵으로 사망하였다.
이 때는 칼빈이 55세의 생일을 6주나 앞둔 해였다.
베자는 칼빈의 장례식을 집례하였다. 그리고 칼빈은 자신의 요구에 의해서 아무런
표식도 없는 무덤에 묻히게 되었다.
지금의 “JC” 라고 표시된 무덤이 죤 칼빈의 무덤이다.
그러나 아무도 이것이 칼빈의 무덤인지는 정확하게 알수가 없다.
【내가 여러 가지의 실수를 저질렀지만 용서해 달라.
나의 전 생애를 통해서 이룩한 것은 미약하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고 바르게 가르칠려고 노력했다.
나는 남을 미워하면서 대항하거나 글을 쓴 적도 없다.
나는 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였다.】 - 죤 칼빈의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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