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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김영재박사

by 김경호 진실 2011. 11. 8.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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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호세아 6:1-3)

Come! let us return to the LORD(Hosea 6:1-3)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을 사랑하실때에 그들이 수없이 배신하고 죄악의 길로 행할 때에도 변치 않는 사랑으로 돌아보시고 때로는 거센 폭풍우와도 같은 징계를 통해서 돌아오도록 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징계의 근본적인 목적은 죄에 대한 책망에 우선한 것이 아니라 사랑에 우선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무리 매몰찬 책망 속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 징계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사랑은 믿음을 통해서만 발견할 수가 있는 것이며, 감사할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때에 섣불리 판단하여 원망하거나 불평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자신에게 행하는 징계가 남달리 거세다고 할지라도 불평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는 그러한 이유가 자신의 죄악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신약성경보다 구약 성경에 하나님의 사랑이 더욱 더 충만하게 담겨져 있는 것인데 우리는 흔히 구약 성경보다 신약 성경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더 충만하게 나타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것은 신약 성경보다 구약 성경속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을 끝없이 돌보시는 사랑이 담겨져 있고, 신약 성경에는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구약 성경속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인생들은 흔히 원인을 간과하고 결과만을 중요시 하는 경향이 있는데 비록 결과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 결과가 어떠한 과정과 원인을 통해서 주어졌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며, 심오한 진리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 성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값지게 알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성부 하나님의 계획하심 가운데 오신 것이며, 그 계획하심이 구약 백성들의 끝없는 죄악 속에서도 변하지 아니하셨기에 구세주로 오시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성부 하나님의 신실하신 은혜와 사랑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사랑하시는 놀라운 은혜를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인류를 향하신 변하지 아니하시는 끝없으신 사랑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가 임하게 되었음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진정으로 감사하며, 찬양하며, 예배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것들, 즉 예배와 찬송과 헌금과 믿음의 봉사와 헌신과 충성속에 열심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을 감사하는 믿음의 고백이 담겨져 있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성경은 온통 하나님의 사랑을 기록하고 있기에 성경의 주제를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말한다면 하나님의 인류를 향하신 사랑이라고 할수 있으며, 더 간단히 말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이며, 더 축소한다면 바로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서신가운데 믿음, 소망, 사랑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단호하게 말한 것입니다(고전 13:13). 또한 로마에 보낸 서신 가운데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한 것입니다(롬 13:10). 이 로마서와 고린도 전서는 똑같이 16장으로 되어져 있으며, 일관성 있게 13장에 가서 각각 사랑에 대해서 기록되어져 있는 것을 볼수가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전에 율법에는 흠이 없을 정도로 완전하다고 할수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사랑이 그에게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 아니라 믿음이라고 주장했을텐데 사랑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마스커스 도상에서 만났기에 사랑이 제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통해서 사도바울이 획기적인 변화되었음을 알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는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이전에 이 중요한 사랑을 배제하고 율법을 지키기에만 열심이었던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면서 잘못된 것이라고 반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이름은 흔하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마치 구약에 아브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소명을 받은 이후에 아브라함이라고 이름이 개명된 것과도 같이 사울에서 바울로 이름이 개명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사울과 바울, 두가지의 이름이 그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사울은 유대인으로써의 이름이고, 바울은 로마인으로써의 이름입니다. 사도행전 13장은 안디옥 교회에서 사울과 바나바를 복음증거를 위해 파송하는 내용이 기록되어져 있는데 9절에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 이라고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이는 사도바울의 이름이 바울과 사울 두가지의 이름이라는 증거입니다. 또한 사도행전 22장 27절에서 천부장에 바울에게 '네가 로마 사람이냐? 내게 말하라' 라고 묻자 사도바울은 '그러하다' 고 대답합니다. 또한 28절에서 천부장이 '나는 돈을 많이 들여 이(로마의) 시민권을 얻었노라'고 하자 바울은 '나는 나면서부터로라' 고 대답합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이름이 바뀐 것이 아니라 자신이 복음을 증거하는 상황과 지역에 따라서 두가지의 이름을 적절하게 사용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유대권 안에서 복음을 증거할때에는 바울이 아닌 사울의 이름을 사용할 것입니다. 그 이유인즉 만약 바울이라는 로마의 이름을 사용하면 유대인들은 자신의 민족들을 억압하는 로마사람의 말을 들을 리가 만무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민족의 동질성을 주기 위해서 유대인의 이름인 사울을 사용하는 것이며, 유대권을 벗어난 이방 땅과 로마에서는 사울이 아닌 바울의 이름을 사용할 것입니다. 만약에 사울의 이름을 사용한다면 약소국가인 유대인의 말을 들을 리가 만무할 것입니다. 이에 대한 증거로 고린도전서 9장 19절로 23절에서 사도바울을 말하고 있습니다. 19절에서 사도바울은 자신이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지만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해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었다고 합니다. 22절에서 사도바울은 여러 사람에게 자신이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을 구원코자 함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의 시작인 창세때부터 이 세상의 끝인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The Second Coming)때까지 결코 변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인류를 향한 사랑이 성경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13장 8절에서 사랑에 빚진 자로서 서로 사랑할 것을 말하며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빚진 자임을 고백합니다. 그는 자신이 이전에 그리스도 밖에(Out Christ) 있었을 때는 하나님의 말씀속에서 사랑을 발견하지 못했으나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 그 놀라운 사랑을 발견하게 되어 그 사랑에 빚진 자로써 그 사랑을 증거하며 살겠다고 고백하며 다짐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서신을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이 참으로 많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볼수록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충만하게 넘쳐나야 할 것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하나님의 변하지 아니하시는 사랑의 결정체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보다도 남을 비판하는 시각이 앞선다면 성경을 바로 보지 못한 것이며, 그 지식이 자신을 교만하게 하여 패망의 길로 들어서게 할 것입니다(잠 16:18).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성경은 온통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며, 나타내기 위해서 기록되었는데 호세아서는 슬픈 사랑을 기록하고 있으며, 반면에 솔로몬이 기록한 아가서는 대조적으로 기쁜 사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호세아는 선지자이며, 예언자로서 북방 이스라엘 출신인 브에리의 아들입니다. 당시의 시대는 물질적으로는 심히 풍요로왔지만 반면에 영적으로는 심히 빈곤한 시대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나 쾌락을 쫓아 행하였던 패역하고 부도덕한 시대였습니다. 그 때에 호세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의 심판이 다가올 것과 포로 생활을 예언하면서 회개하기를 강하게 촉구하였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개하기는 커녕 더욱 더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회개하지 않고는 결코 하나님께 나아올수가 없으며 구원에 이르러 천국에 갈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늘 성도들에게 회개할것을 권면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설교중에 회개를 강조하지 않는다면 그 설교는 결코 합당한 설교라고 할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나서 예수님을 갈을 예비하였던 세례요한의 첫 번째 메시지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 3:2)이고, 예수님의 첫 번째 메시지도 '회개하라 천국이 기까왔느니라' (마 3:17)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의 모습을 지적하시기 위해서 호세아로 하여금 음란한 여인과 결혼하여 음란한 자녀를 낳게 하셨습니다. 호세아가 아내로 취한 여인은 디블라임의 딸인 고멜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의 음란한 가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을 지적하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에 호세아가 고멜을 통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이름의 뜻은 '하나님께서 흩으신다. 뿌리신다' 는 것이며, 이를 통해 그들의 죄악을 책망하시고 경고하시기 위해서 흩으실 것을 말씀하시며, 반면에 회복하심과 구원의 언약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뿌리실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의미 속에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담겨져 있는데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책망도 하시면서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반드시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뜻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은 책망하신 후에 회복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끝까지 참고 인내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책망의 과정을 잘 참고 견디면 회복의 은혜를 통해서 풍성한 사랑을 받지만 그렇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사랑안에 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호세아가 또 고멜을 통해서 딸을 낳았는데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로루마하로 지으라고 하시며, 그 이름의 의미처럼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겨서 사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로루하마의 뜻은 '절대로 아버지가 자녀에게 베푸는 사랑이 없다'는 것으로서 하나님께로부터 선택함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그들이 심판받아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의 자녀의 이름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을 지적하시고 회개하여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로루하마가 젖을 뗀 후에 고멜이 아들을 낳았는데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로암미라고 지으라고 하셨는데 그 이름의 뜻은 '너희는 결코 나의 백성이 아니다' 입니다. 이 의미속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악을 범하므로 하나님의 백성됨을 포기하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하였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가 고멜을 통해 낳은 자녀들의 이름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을 지적하셨는데 첫째인 이스르엘의 이름을 통해서는 단지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흩으시고 다시 뿌리실 것을 말씀하셨으나 둘째인 로루하마의 이름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죄악으로 가득 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없음을 말씀하셨고, 셋째인 로암미의 이름을 통해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이 점점 가중됨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며, 급기야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그들이 죄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의 장중에서 멀어짐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 두어야 할 한 가지는 하나님께서는 변함없는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지만 우리의 죄악으로 우리 자신 스스로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입니다. 지독한 절망 가운데 하나님이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이 아니라 그 자신이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 대신 버림을 당하셨기 때문에 그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당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시거나 떠나시지 아니하시는 분이십니다. 다만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며,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우리들이 돌아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급기야 죄악으로 잃어버린 양인 우리들을 찾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가 고멜을 통해 낳은 자식들의 이름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을 지적하시고 이제 2장 1절에서는 다시 이름을 통해서 회복시켜 주시며 구원을 약속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로암미와 로루하마의 이름을 암미와 루하마로 고쳐 부르게 하십니다. 로암미는 '결코 아니다' 라는 뜻을 가진 '로'와 '나의 백성이다' 는 '암미'의 합성어로서 '결코 나의 백성이 아니다' 는 뜻인데 부정어인 '로' 를 제거하면 '암미' 로서 '나의 백성이다' 는 뜻입니다. 로루하마도 역시 '결코 아니다' 는 뜻을 가진 '로' 와 아버지의 사랑' 인 '루하마' 의 합성어로서 '결코 아버지의 사랑이 없다' 는 뜻인데 부정어인 '로' 를 제거하면 '아버지의 사랑과 긍휼을 받은 자' 라는 뜻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부정어인 '로' 를 제거하시고 죄악으로 사무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으로 감싸 안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십자가의 고통을 통해서 죄인된 우리들을 사랑으로 품으시고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 죽으신 것이 우리의 죄악 때문이며, '로'를 제거하기 위해서라고 말할수 있는 것입니다. 3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른 신을 섬기고 그들이 바알에게 드렸던 우상제물인 건포도 떡을 즐길지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전히 사랑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언급된 바알은 음행과 관련이 있는 우상입니다. 이 바알은 단순히 비를 내려 풍요로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남 바알신과 여 바알신의 성 행위(Sex)를 통해서 비가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땅에서 꼭 비가 필요할 때에 이 남녀 바알신이 성 행위를 하지 않게 되면 비가 오지 않게 되므로 땅에 있는 바알 산당에 남 사제와 여 사제가 들어가서 알몸이 되어 변태적인 성 행위를 하게 되면 이 성 행위를 하늘에 있는 남 바알신과 여 바알 신이 보게 되어 음욕을 품게 되고 성 행위를 하게 되어 비가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바알을 통해서 이방인과 결혼을 하게 되어 하나님이 철저하게 금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의 민족성이 말살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른 우상들 보다도 이 바알에 대해서 만큼은 철저하게 금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바알에게 드렸던 건포도 떡을 먹을지라도 사랑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영원하신 사랑은 그 어떠한 인간의 죄악도 능가하시는 것입니다. 고멜은 호세아에게서 세 명의 자녀를 낳은 후에 호세아를 떠난 듯 합니다. 고멜은 호세아에게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호세아를 떠나 다른 남자에게로 갔습니다. 이렇게 음행을 하기 위해 떠난 고멜은 하나님께서는 다시 데려오라고 호세아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의 시랑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우상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선지자의 아내가 음행을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수치스러운 일이며, 사람들에게 지탄을 받을 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고멜을 데려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호세아는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고멜을 사오게 됩니다. 호세아가 아내인 고멜을 데려오기 위해서 지불한 것은 노예 한사람의 가치입니다. 즉 고멜은 남편인 호세아를 떠난 결과로 인해서 노예와도 같은 위치로 전락해 버린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고멜을 사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호세아는 값을 지불하고 고멜을 사오게 되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죄인들을 사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값을 지불하셨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속량이라고 하며, 그 뜻은 '값을 지불하다' 입니다. 제16대 미국 대통령인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은 노예해방으로 알려진 자인데 그가 노예시장을 걷다가 어느 남매가 각각 다른 주인에게로 팔려가게 되어 그들이 평생동안 다시 볼 수 없음에 흘린 눈물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링컨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돈을 지불하고 그 남매를 사게 됩니다. 그러자 그 남매는 링컨 앞에 와서 눈물을 흘리게 되는데 이 눈물은 방금 전에 흘렸던 눈물과는 달리 감사의 눈물입니다. 이는 한 주인 밑에서 남매가 함께 생활할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하는 눈물입니다. 이에 링컨은 그 남매의 눈물을 거두게 하고 그들이 자유의 몸이 되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링컨의 행위도 가슴 벅찬 의미심장(意味深長)한 일인데 예수 그리도의 사랑은 감히 비교조차도 할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사랑인 것입니다. 죄의 속박 아래 갇혀 있었던 자들에게 영원한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이제 4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으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이 기록되어져 있는데 그들의 죄악은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부정과 음행과 우상 숭배의 죄를 범한 것이며, 더욱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리를 선포하고, 죄에서 돌이킬 것을 권면할 책임이 있는 선지자와 제사장들마저로 부패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징계와 심판을 선포하신 긍극적인 목적은 그들을 멸망하시고자 하심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깨닫고 회개하여 돌아오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징계와 심판의 강도가 아무리 거셀지라도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한 것입니다.

4장 6절에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한다고 말씀하시며, 제사장들의 불의한 재물만을 취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백성들을 교훈하며 가르치는 것을 방관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잊어버리게 하였음을 책망하십니다. 아울러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싫어하는 백성들의 무지함을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5장 15절에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할 때까지 기다리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기다리심은 끝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개인적인 종말, 즉 죽음 이후와 역사적인 종말 즉 재림 이후에는 더 이상의 기회기 주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사랑이 있기에 우리가 죄악을 범할지라도 우리의 생명이 보존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러한 관점에서 '사랑은 오래 참고(고전 13:4)'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음탕한 고멜과도 같은 자들입니다. 고멜이 자식을 낳은들 하나님의 복에서는 멀어지고, 저주에 가까운 것처럼 우리 역시도 하나님의 진노하심 앞에 가까이 있는 자들입니다. 또한 호세아를 떠나 다른 남자의 품으로 간 고멜처럼 우리도 역시 세상의 사리사욕(私利私慾)에 얽매여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날 때가 얼마나 많은지 우리 스스로가 자신들에게 자문자답(自問自答)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이 하나님을 떠나 세상과 짝하고 음행하지만 우리가 돌아오기만을 하나님께서는 기다리시고 기다리시며 돌아오면 죄를 묻지 아니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정결한 보배 피로써 씻어 주십니다.

이제 오늘 본문의 말씀인 6장 1절에서 호세아는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라고 합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돌아가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웨나슈바' 인데 이는 자기가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또한 헬라어로 죄를 가리켜 '하마르티아' 라고 하는데 이는 '화살이 과녁에서 벗어난 것' 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란 사람들이 각자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저마다의 있어야할 자리가 각양각색(各樣各色)으로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같은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인생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기에 그 말씀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으며 영원히 죽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 칼빈은 말하기를 '새는 공중에서는 자유롭지만 공중을 떠나서는 자유롭지 못하다. 물고기는 물속에서는 자유롭지만 물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다. 이처럼 인생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는 자유로울수가 없는 것이다.' 라고 합니다. 호세아의 여호와께로 돌아가자는 외침 속에는 그 동안의 고통과 괴로움이 자신들의 죄로 말미암은 것임을 깨닫고 이제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만 하면 모든 것이 회복될 것을 확실히 믿는다는 확신에 찬 고백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고난을 통해서 얻게 된 믿음은 영적인 힘이 솟구치며 그 어떠한 것일지라도 결코 장애 요소가 될수 없는 것입니다. 2절에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고 합니다. 이는 신속한 하나님의 회복하심을 말하는 것으로서 죄악의 기간은 비록 길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 회개하면 신속하게 회복시켜 주실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제 삼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표하는 것으로서 모든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것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3절에서는 우리가 여호와를 알되 힘써서 알자고 하며 지난 날 여호와를 바로 알지 못하여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을 자초했던 자신들의 어리석고도 무지했던 죄악을 회개하며 여호와를 알기에 힘쓸 것을 고백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비와 같이 임할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에서 특히 비를 언급한 것은 비가 자주 오지 않아서 늘 메말라 있는 그 땅의 현실에서 비가 내리는 것보다도 더 큰 은혜가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지혜를 구한 솔로몬의 명성이 이방땅에 까지 알려지게 되자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시험하고자 먼 거리를 위험을 무릅쓰고 여행하여 솔로몬에게로 오게 됩니다. 그리고 어려운 문제로 솔로몬을 시험하고자 했으나 솔로몬이 그 묻는 말에 다 대답하여 스바 여왕이 놀라게 됩니다. 이러한 지혜가 특출한 솔로몬이 전도서를 마감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는 것이 사람의 본분이라고 합니다(12:13). 이 말씀처럼 하나님을 바로 섬기고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따르는 것은 사람으로서 행해야 할 마땅한 도리이며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세상의 학문은 사람들의 악한 심성을 도덕적으로 제어할수 있을런지는 몰라도 변화시킬수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Sola Scriptura)만이 인생을 참되게 변화시키며 바른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디모데 후서 3장 16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기 때문이며, 17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하기에 온전케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히브리서 4장 12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는 말씀이며, 운동력이 있으며,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기 때문입니다.

호세아 6장 1절의 말씀처럼 지금의 이 시대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개개인이 먼저 하나님의 말씀앞에 바로 서야 하며, 그분의 말씀의 능력을 의지하고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 가운데서 자라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에 열심을 내어야 할 것입니다. 말씀만 묵상하고 기도하지 아니하면 우리의 믿음은 말라버릴 것이며, 기도만 하고 말씀을 묵상하지 아니하면 우리의 믿음은 폭팔해 버릴 것이며,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면 우리의 믿음은 아름답게 성장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이 변천이 되어 예수가 된 것입니다. 그 변천 과정은 여호와가 여호수아가 되고, 여호수아가 예수아가 되고, 예수아가 예수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자아를 버리고 겸손히 주의 말씀 앞에 머리를 조아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귀를 세상의 소리에 기울이지 말고 오직 주님의 말씀에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칼빈은 말하기를 '믿음이란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이는 것' 이라고 합니다. 이 말처럼 세상에 눈 감고 조용히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자세가 바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첫 시발점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징계를 통해 회개하고 돌아온 것처럼 우리들도 고난과 역경과 환난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끝까지 믿음을 지켜 승리해야 할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칼빈은 말하기를 '이세상의 고통은 천국을 소망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이 말처럼 우리가 보다 더 성숙한 신앙인으로서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세상에 속한 모든 허영과 욕심을 단호하게 버려야 할 것이며, 우리의 마음이 성령으로 충만하여 오직 하나님께로만 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께로 나아오기에 열심을 내어야 할 것이며, 우리의 모든 인생사를 하나님께 맡기고 오직 그 분의 뜻을 따르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끝으로, 호세아를 통해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을 알고 그 사랑에 감사하며 우리들도 그 사랑에 빚진 자로써 이 시대를 하나님의 나라로 확장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아멘 -

출처 : CORAM DEO
글쓴이 : KIM YOUNG-JA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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