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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제 2의 탕자

김영재박사

by 김경호 진실 2011. 11. 8. 09:08

본문

제 2의 탕자 (눅15:25-32)

본문을 포함하고 있는 누가복음 15장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나타내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 누가복음 15장에는 세 가지의 비유가 기록되어져 있는데 바로 이 세 가지의 비유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각각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첫 번째, 1절로 7절에 기록된 잃은 양의 비유는 제 2위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며, 두 번째, 8절로 10절에 기록된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는 제 3위이신 보혜사 성령을 나타내며, 세 번째, 11절로 32절에 기록된 탕자의 비유는 제 1위이신 성부 하나님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의 비유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각각의 독특한 성품을 표현하고 있으며 또한 이 삼위일체 하나님이 동일하신 성품을 가지고 계신 한 분이신 하나님이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 증거로써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표현한 잃은 양의 비유에서 6절에 말하기를 ‘잃은 양을 찾았노라.’ 고 기록하였고, 보혜사 성령의 성품을 표현한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에서 9절에 말하기를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고 기록하였고, 성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한 탕자의 비유에서 32절에 말하기를 ‘잃었다가 얻었기로...’ 라고 기록하였다. 이는 삼위의 하나님이 일체이신 동일하신 하나님이심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가복음 15장에서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잃어버린 것을 찾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점에서 동일하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탕자의 비유라는 제목보다 잃은 아들의 비유라고 해야 만이 본문의 문법 구조상 맞는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본문에 제 2위 하나님과 제 3위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것을 찾으시는 하나님으로 기록되어져 있으므로 제 1위 하나님께서도 잃은 것을 찾는 하나님으로 기록되어져야 만이 균형이 맞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성품은 잃은 것을 찾으시는 분으로써 급기야는 잃어버린 죄인들을 찾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육신을 입으시고 오신 것입니다. 이러한 면에서 기독교가 유일무이한 구원의 종교인 것입니다. 기독교 외에 수많은 종교들은 하나같이 사람이 신을 찾아가는 종교입니다. 하지만 결코 인간은 신을 찾아갈수가 없는 것이며, 아담 이후로 모두가 죄인이기에 더욱 더 신을 찾아갈수가 없는 것입니다. 철학자 니이체는 사람들이 말하는 신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하고 찾아보았는데 끝내는 찾지 못하자 ‘신은 죽었다.’ 라고 하였는데 어쩌면 사람 편에서 솔직한 것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오늘 말씀의 비유는 어떤 사람에게 두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 둘 중에서 첫째도 아닌 둘째가 아버지에게 재산 중에서 자신에게 돌아올 분깃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그 요청에 응하여 둘째 아들에게 돌아갈 재산의 분깃을 주었습니다. 신명기 21장 17절에 재산 상속에 관해서 기록되어져 있는데 장자는 재산 중에서 두 몫에 해당하는 ⅔를, 차자는 그 나머지인 ⅓을 상속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재산을 상속해 주기 전에 분깃를 요구하였기에 이는 관례를 무시하는 부도덕한 행위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둘째 아들의 요구는 성급한 것이며, 정당하지 못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직은 그럴 만한 때가 되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과는 달리 시간과 때를 정확하게 잘 맞추시는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시간과 때를 만드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갈라디아서 4장 4절의 말씀처럼 때가 차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죄인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인생은 저마다의 때가 있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기록한 전도서 3장 2절로 8절의 말씀처럼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습니다.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습니다.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습니다.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습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습니다.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습니다.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습니다.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습니다.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습니다.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습니다.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습니다.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습니다.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때에 맞추어서 신실하게 믿음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믿음은 현재의 상황이 슬프고 괴롭더라도 나중에 올 기쁨과 즐거움을 미리 바라보고 현재의 상황 속에서도 기뻐하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8장 18절에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기록되어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환난의 바람이 더 거세게 불어 닥칩니다. 왜냐하면 믿는 자들을 진정으로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죽은 물고기는 물이 흘러가는 대로 그대로 따라서 흘러갑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물고기는 물결이 흘러가는 반대 방향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세찬 물결의 아픔을 몸으로 느끼면서 올라갑니다. 왜냐하면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자녀들이 당해야 할 환난과 핍박은 이 세상에 너무나도 많습니다. 하지만 성령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로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십니다. 이제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 요구에 응하여 분깃을 나누어주자 그 후 며칠이 못 되어 둘째 아들은 이 분깃을 가지고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여 그 분깃을 소비가 아니라 다 허비해 버렸습니다. 둘째 아들은 자신의 분깃을 아버지에게 맡겼다면 그는 아버지의 품에서 평생토록 아니 영원토록 풍성한 삶을 살 것인데 그가 아버지의 품을 떠나자 그 분깃을 순식간에 다 허비해 버렸습니다. 분깃이 다 없어지자 설상가상으로 그 나라에 흉년이 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둘째 아들은 궁핍하게 되었고 그 나라에 사는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가 둘째 아들을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고, 둘째 아들은 배가 심히 주려서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 쥐엄열매도 주는 자가 없었습니다. 이처럼 아버지의 아들의 신분이 돼지 쥐엄열매 조차도 먹을 수 없는 천한 신분으로 하락하여 버렸습니다. 아니 타락하여 버렸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돼지가 심히 부정한 짐승이므로 그들은 돼지고기를 먹지도 아니하며 돼지를 보기만 해도 자신들의 눈이 부정해졌다는 이유로 눈을 씻는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돼지가 부정한 이유는 레위기 11장 7절의 말씀처럼 굽이 갈라져 쪽발이며, 새김질을 못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품을 떠나서 이방인의 풍습에, 세속의 풍습에 물들어 버렸고 이제는 부정한 돼지와 함께 거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의 신분으로 돼지와 함께 거한다는 것은 더 이상 내려갈래야 내려갈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하게 부패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는 더 이상 천해질래야 천해질 수 없는 상황에까지 도달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에 둘째 아들은 17절의 말씀처럼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라고 하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한탄은 아무도 들어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 둘째 아들에게 있어서 가장 최선의 방법은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아버지께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그는 자신의 비참함과 천함과 나약함을 통해 자신의 죄를 뉘우치게 되었고,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서 자신의 죄를 철저하게 고백하고 19절의 말씀처럼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라고 말하기를 다짐했습니다.   이처럼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길은 바로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그 죄를 철저하게 회개하는 이 길 외에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우리가 죄에 빠져 방황하여 죄인임을 알지 못하였을 때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오셔서 우리가 죄인임을 알게 하시고 그 죄를 회개하게 하시며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이 둘째 아들은 자신의 아들의 신분을 포기하고 품군으로써 아버지께로 돌아간 것입니다. 품군은 종 중에서도 가장 낮고 천한 자이므로 인격의 대우를 받지 못하고 짐승과도 같은 취급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종 중에서 가장 천한 자가 품군입니다.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어쩔 때는 개만도 못한 자가 품군입니다. 노예 해방으로 알려진 미국의 제 16대 대통령인 아브라함 링컨의 일화가 있는데  링컨 당시에 노예 시장이 있었습니다. 그 시장은 사람을 팔고 사는 시장인데 마치 짐승들을 파는 시장과 별 다를 바 없는 시장이었습니다. 굳이 차이점이 있다면 매매의 대상이 짐승과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어느 날 링컨이 그 노예 시장을 지나가다가 문득 오누이의 눈물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눈물의 의미는 자신들이 노예로 팔려 가는 것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주인에게로 팔려 가기에 이제는 서로 영영 볼 수 없음에 우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링컨은 자신에게 있는 모든 것을 다 동원해서 이 오누이를 사게 됩니다. 그러자 이 오누이는 링컨 앞에 무릎을 꿇고 또 다시 눈물을 흘립니다. 이 눈물의 의미는 앞서 흘렸던 서러움의 눈물이 아니라 감사함의 눈물이었습니다. 이제 한 주인에게 팔리게 되었으니 영영 같이 지낼 수 있음에 감사하는 눈물이었습니다. 링컨은 그 오누이에 ‘가라 너희는 이제 자유의 몸이다.’ 라고 하며 그들을 해방시켜 주었습니다. 둘째 아들은 지난날의 모든 죄와 허물과 과오를 다 청산하고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집을 나간 이 둘째 아들의 아버지는 그 아들이 언제 올까 애타는 마음으로 문밖에 서서 사랑의 눈물로 아들을 기다렸습니다. 이제 저 멀리서 아들이 돌아오는 것이 보이자 아직도 아버지와 아들의 간격 차이인 상거가 먼데 아버지는 달려나가 그 아들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이는 아버지가 아들을 무조건적으로 용서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지난날의 죄를 묻지 아니하시고 무조건 용서하신다는 의미로 목을 안고 입을 맞춘 것입니다.  헬라어는 사랑을 네 가지로 구분하여 표현하는데 부모와 자녀간의 사랑은 ‘스톨게’ 라 하고, 남녀간의 사랑은 ‘에로스’ 라 하고, 친구간의 우정인 사랑은 ‘필로스’ 라고 하고, 하나님의 사랑은 ‘아가페’ 라고 합니다. 이 네 가지의 사랑 중에서 아가페를 제외한 스톨게, 에로스, 필로스는 쌍방간의 사랑이므로 한쪽이 그 사랑을 실행하지 아니하면 깨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페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일방적인 사랑이므로 그 사랑을 받는 우리들이 수없이 그 사랑을 저버려도 하나님의 신실하신 은혜로 말미암아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 없는 아가페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서 그 대가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는 주님을 늘 배반하고 욕되게 하며 죄를 범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죄인들을 조건 없이 사랑하십니다.사랑하시되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하십니다. 자신의 온 몸에 있는 피와 물을 한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흘리기까지 사랑하십니다. 이제 아버지의 품에 안기게 된 아들이 아버지께 말하기를 18절로 19절에 기록된 말씀처럼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이렇듯 회개는 자신의 죄를 아버지 앞에 솔직히 고백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신의 마음으로는 죄인임을 인식할지라도 고백하지 아니하면 허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백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이 회개를 들으시고 아들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과거의 죄를 묻지 않는 것입니다. 현재의 회개의 눈물을 보시는 것입니다. 그 눈물을 씻기시고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용서의 다른 말로 용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더욱 더 위대한 사랑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죄인된 우리들을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들과 딸로 용납하셨습니다. 이렇듯 용납은 용서보다도 더 강한 표현으로써 너는 내 것이라고 자신의 소유를 만드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납하셨습니다. 용서하신 것만도 크나큰 은혜인데 용납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 둘째 아들은 19절의 말씀처럼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라고 하면서 품군으로써 아버지께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 둘째 아들을 용서가 아니라 용납하셨습니다. 이 의미는 다시 아들로서의 직위를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용납입니다. 만약에 아버지께서 용서해 주셨다면 그는 그냥 아들이 아니라 품군으로서 아버지의 집에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용납해 주셨기 때문에 예전처럼 아들로서 아버지의 집에 사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죄인된 우리들을 용서하실 뿐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용납하신 것입니다. 바로 자신의 자녀로 용납하신 것입니다. 산모가 생명인 아이를 출산하기 위해서는 생명의 피를 흘려야만 하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우리를 새로운 사람으로 낳기 위해서 십자가에 보배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시편 2편 7절에 ‘너는 내 아들이라 내가 오늘날 너를 낳았도다’라고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회개를 들으시고 아들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아니 아들이 돌아올 때 이미 목을 안고 입을 맞추시면서 아들의 죄를 다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종에게 22절의 말씀처럼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고 명하셨습니다.이 말씀에서 가락지는 아들의 권위를 나타내는 것이며, 신발은 노예에서 자유인으로의 회복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노예는 신발을 신고 다니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천한 발을 그대로 드러내 놓고 다닙니다. 이것이 바로 노예입니다. 이는 돌아온 아들을 아버지께서는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다시 아들로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먹고 즐기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32절의 말씀처럼 죽었다가 살았으며, 잃었다가 얻었기 때문입니다. 이 의미는 영적으로 죽고 잃어버림을 당한 자가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때에 맏아들은 밭에서 일하다가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종들에게 그 이유를 물어 보았습니다. 그 이유인즉 아버지의 품을 떠나 방황한 둘째 아들이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그는 노하여 집으로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게 되었고, 이에 아버지가 나와서 들어가자고 권하였는데 그가 아버지께 말하기를 29절로 30절의 말씀처럼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라고 불평하며 말하였습니다. 이 맏아들은 형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동생이 돌아오게 되었음을 반가와하지 않고 전적으로 불평한 자입니다. 그는 동생을 가르켜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 버린 자라고 비난하였습니다. 이 비난은 그냥 말로만 그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로움을 나타내는 비난입니다. 인생은 의로운 인생이 아무도 없습니다. 맏아들은 동생에게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 버린 자라고 비난한 것도 큰 비난인데 이러한 비난을 통해서 자신의 의로움을 아버지 앞에 나타냈습니다. 참으로 어리석고도 무지한 인생입니다. 동생을 비난하면서 자신은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는 자임을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31절로 32절의 말씀처럼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맏아들은 아버지의 진심 어린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뜻은 인생이 결코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가라고 명하신 길이 우리에게는 불평의 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식의 차원이 다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무조건 순종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께 그 뜻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명하신 길은 우리에게 있어서 심히 아프고, 쓰리고, 우리의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하는 안타까운 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만이 승리의 길입니다. 영광의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라고 명하신 길은 고통과 아픔이 수반되지만 끝내는 영광을 얻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의지하여 성령 하나님을 통해 그 길을 끝까지 따라가야만 합니다. 아버지는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탕자란 아버지의 품을 떠나 방황하는 자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가 방황하는 이유는 돈이 없어서도 아니며, 그에게 있는 소유가 부족해서도 아닙니다. 그에게는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자신의 분깃이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에게 있는 소유를 다 허비해 버렸기 때문에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조차도 먹지 못하고 주리는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소유가 아무리 풍족할지라도 결코 만족함이 없고 다 소비하고, 낭비하고 끝내는 허비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 처하게 되자 탕자인 둘째 아들은 아버지께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께로 돌아온 그는 더 이상 탕자도 아니고 종도 아니고 품군도 아닙니다. 이제는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먹지 않아도 되며, 다시는 허랑방탕한 생활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한가지 그가 아버지께로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또한 아버지는 그 아들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는 정말로 탕자가 아니라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그렇다면 탕자는 동생이 돌아와서 기뻐하시는 아버지를 보며 불평한 맏아들입니다. 그는 자신의 말대로 아버지를 여러 해 동안  섬기며 명을 어김이 없다 할지라도 돌아온 동생을 가리켜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 버린 자라고 비난하면서 자신의 의로움을 나타냈기 때문입니다. 이에 아버지는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렇듯 자신이 소유한 것을 누리지 못한 사람은 참으로 불행한 자입니다. 우리는 천지를 창조하시고 모든 것을 자신의 섭리로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분안에 있는 사랑과 용서와 긍휼과 자비를 누리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아버지의 관심은 탕자가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맏아들처럼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는 것에도 있지마는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탕자가 돌아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탕자가 돌아오는 것에 아버지의 주된 관심사가 있는 것입니다. 맏아들은 그가 비록 지금까지 아버지를 잘 섬겼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형식이고 외식입니다. 그 증거로서 그는 자신의 동생이 돌아왔을 때 동생을 비난하고 동생이 돌아오게 되었음을 기뻐하시는 아버지의 미소까지도 불평한 자입니다. 우리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섬기면서 우리보다 더 늦게 나온 사람이 대우를 받고 존칭을 받으면 불평할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남을 나보다 더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남을 나보다 더 낫게 여기지 않고 더 낮게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베풀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남을 나보다 더 낫게 여기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비록 그 사람이 나보다 천하고 낮고 약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를 나보다 더 낫게 여겨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행해야 할 마땅한 도리입니다. 그 사랑이 없다면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고린도 전서 13장 1절에 기록된 사도 바울의 말처럼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꽹과리는 처음에 칠 때에는 아주 소리가 큽니다. 마치 귀고막이 터질 정도로 너무나 소리가 큽니다. 그러나 그 큰 소리도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점점 적어지며, 나중에는 전혀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남을 나보다 더 낫게 여기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행해야 할 마땅한 도리입니다. 그 사랑이 넘쳐 날 때 비로소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지금의 시대를 회복하는 것은 그 사랑뿐입니다. 맏아들은 자신의 동생을 더 낫게 여기지 못했습니다. 만약에 동생이 아버지의 재물을 다 허비하지 않고 돌아왔다고 할지라도 형은 동생을 자신보다 더 낫게 여길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형이라는 헛된 우월감 때문에 동생을 낫게 여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유대인들도 선민이라는 헛된 우월감에 사로잡혀 자신들의 민족만을 하나님께서 구원의 민족으로 선택하셨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은 선택하신 목적은 그들을 통해 많은 민족들에게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에서가 형이지만 야곱에게 장자권이 주어졌음을 기록하였고, 르우벤이 야곱의 장자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이은 자는 장자가 아닌 네 번째인 유다라고 기록하였고, 요셉의 두 아들인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야곱이 축복할 때에도 장자가 아닌 차자인 에브라임에게 우수의 축복을 하여 에브라임이 장자가 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자신의 지위가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을 더 낫게 여기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자신의 지위가 높다고 할지라도 자신보다 낮은 사람을 더 낫게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인 것입니다.예수 그리스도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그러나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이 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겸손의 표본입니다. 마태복음 21장 28절로 31절에 기록된 두 아들의 비유를 살펴보면 한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하자 가겠다고 했으나 가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둘째 아들은 가기 싫다고 했으나 그 후에는 뉘우치고 갔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시고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라고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 물어 보셨는데 둘째 아들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아닙니다. 인간의 관점으로 본다면 첫째 아들이 아비의 뜻대로 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즉시로 순종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인간의 관점과 하나님의 관점은 다를 수 있습니다. 비록 인간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지마는 그것은 허시레입니다. 하나님만이 직시적으로 인간의 마음과 폐부를 살피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판단은 첫째 아들처럼 아버지의 말씀을 처음에는 순종했으나 나중에는 순종하지 아니했다고 할지라도 그가 연약해서 실수한 것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하지만 둘째 아들은 상당히 나쁜 사람으로 취급해 버립니다. 자식이 아니라고까지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하시지 아니하십니다. 오히려 참으십니다. 끝까지 그 사람의 행동을 사랑으로 지켜보십니다. 그리고 그가 뉘우치고 돌아오기만을 애타는 마음으로 기다리십니다. 그 결과 끝내는 아버지의 말씀을 불순종한 자가 뉘우치고 순종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의 말씀을 마치신 후에 31절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고 하셨습니다. 그 당시에 세리와 창기들은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는 자라고 낙인이 찍힌 자들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심지어는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창조하신 목적은 지옥의 땔감으로 사용하시기 위함이라고 까지 하면서 구원을 자신들의 민족들만을 위한 것인 양 국한시켜 버렸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들의 외식을 책망하시고 그들이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는 자라고 낙인을 찍어 버린 세리와 창기들이 그들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두 아들의 비유와는 달리 킹제임스(KING JAMES VERSION) 성경에서는 두 아들의 비유를 완전히 정반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맹세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지키며, 행할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행하는 순종은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인한 겸손한 마음으로의 순종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 34절로 36절에 하늘로도, 땅으로도, 예루살렘으로도, 네 머리로도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맹세는 그 순간뿐입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사람 중에서 자신의 맹세를 지킬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지킬 수도 못할 뿐더러 행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행하는 순종은 우리가 맹세한 말의 대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주신 겸손한 마음으로의 순종인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의를 통해서, 맹세를 통해서 하나님께 순종하였습니다. 본문에 등장한 맏아들을 통해 자신을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이 맏아들처럼 행동하지는 않았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자신의 신앙의 연륜도 아니고, 경험도 아니고, 직분도 아닙니다. 이러한 것들을 내세우는 것은 율법주의 사상에 매도된 것이며, 인간을 나타내는 인본주의에 불과한 것입니다. 인본주의가 무서운 이유는 인간을 나타내는 것 때문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저주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영광을 받으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십니다. 그 영광을 탈취하는 자는 도둑이며, 엄청나게 무서운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광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 때문에 인본주의가 무서운 것이며, 인간을 추앙하는 자들이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연륜과 경험과 직분을 토대로 해서 겸손한 마음으로 남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분을 주시며, 남들보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게 하시며, 남들보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게 하신 이유는 그러한 모든 것을 가지고 남에게 주의 복음을 전하며, 주의 사랑을 실천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남에게 사랑을 베풀기 위해서는 앞서 말한 바와도 같이 그 상대를 나보다 더 낫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로 23절에 보면 성령의 9가지 열매가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그 9가지 열매 중에서 사랑이 으뜸인데 이 사랑으로써 그 9가지 열매를 풍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일 마직막인 9번째 열매는 절제입니다. 이 절제는 영어로 표기할 때에 ‘Self- Control'이라고 하는 하는데 이는 어떤 기준점을 정해 놓고 그 기준 점에서 넘으면 기준점에 맞게 내리는 것이고, 기준점에 못 미치면 그 기준점만큼 끌어올리는 것이다.  사랑이 첫 번째 열매이고, 절제가 마지막 열매인 의미는 절제하는 자만이 온전한 사랑을 나타내며, 이룰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너무 허비해 버리는 근본적인 이유는 절제하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절제하는 인생은 참으로 훌륭하고 아름다우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인생입니다. 자신의 감정과 의지로는 결코 절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품을 떠난 둘째 아들이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자신에게 있는 모든 분깃을 다 허비해 버렸습니다. 그가 절제하지 못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아버지의 품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안에만이 참된 절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품안에 있어야 만이 절제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절제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면 하나님 품안에 머물러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품을 떠나자 자신에게 있는 소유인 분깃을 다 허비해 버렸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품안에 있는 자만이 자신의 분깃을 허비하지 않고 절제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분깃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다만 자신은 하나님의 것을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일 뿐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있는 소유가 자신들의 것임을 압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마음대로 허비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청지기임을 압니다. 우리는 청지기로써 하나님이 주신 시간, 재물, 목숨, 그리고 우리에게 속한 모든 것을 맡아 관리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기 때문에 절제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 만이 참된 절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절제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나타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둘째 아들은 자신에게 있는 아버지께로 받은 모든 분깃을 다 허비하고,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아버지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그 아들을 기뻐하면서 맞아 주시고, 잔치를 배설하셧습니다. 그리고 둘째 아들에게 옷을 입히고, 반지를 끼우고, 신을 신기고, 그의 지위를 다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우리는 맏아들처럼 비난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의 죄는 누가 판단하거나 비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판단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써 우리의 죄는 다 정결케 되었고, 씻긴 바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정죄하는 자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부인하는 자와도 같은 것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하나 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서로서로 사랑하고, 아끼고, 용서하고, 섬기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죄를 회개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무조건 용서하는 조건 없는 아가페 사랑입니다.이제부터라도 우리는 서로 사랑합시다. 우리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합시다. 인간의 사랑은 금방 이면 싫증나고, 때가 되면 미움으로 바뀌어 버리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만이 영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합시다. 하나님의 사랑에 빚진 자로써 서로 사랑합시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죽기까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치시고, 그 사랑으로 우리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구원의 복음을 증거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많은 영혼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여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는 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장차 하나님 앞에서는 날 잘하였다고 칭찬을 받으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Αμην -

출처 : CORAM DEO
글쓴이 : KIM YOUNG-JA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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