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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들이 받는 고난의 성격과 하나님의 공의

송영찬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1. 6. 24.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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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들이 받는 고난의 성격과 하나님의 공의
송영찬 목사, 기독교개혁신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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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 교회는 많은 핍박과 고난 가운데서도 지속적인 성장을 이루고 있었다. 이처럼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신앙으로부터 나오는 인내에 대해 사도들은 기꺼이 자랑으로 여기고 있을 정도였다. 왜냐하면 그들이 보인 영적 성장은 '핍박과 환난 중에서' 이루어내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된 신자들이 이 땅에서 당하는 고난의 성격이 무엇인가를 규명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보여준 믿음과 인내는 정적이거나 평면적인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역동적이며 생산적이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신자들 역시 이 땅에 살면서 당하는 고난에 대하여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역동적이며 생산적인 증거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에 데살로니가후서 1장 6-9절을 중심으로 신자들에게 임하는 고난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우리들이 과연 그러한 삶을 살고 있는가를 점검해 보고자 한다.  

 

1. 핍박과 고난에 대한 바울의 이해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서 그들의 삶에 나타나고 있는 믿음과 사랑과 인내의 진보가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는 증거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또는 의로운 심판을 나타내는 명백한 표상이라고 강조한다.

그것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고 있다는 사실과 더불어 그들이 고난 가운데서도 나타내 보이고 있는 믿음과 사랑과 인내를 통해 분명히 증거되고 있다.


이에 바울은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살전 1:5)고 정의하고 있다.

본문에서 '표'(        )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환난과 핍박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그들과 그들을 핍박하는 모든 자들이 받게 될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에 대한 확실한 '표'가 될 것을 강조하고 있다(빌 1:28 참고).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성도들에게 고난은 이미 예견되어 있었다. 예수님 자신뿐 아니라 그를 따르는 제자들 역시 고난은 영광을 향하는 피할 수 없는 길이었다(막 8:31-38; 눅 24:26; 요 12:24-43).

바울 역시 많은 고난을 통해서 신자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으며(행 14:22), 그리스도의 고난을 함께 받아야만 그의 영광도 함께 받을 것이라고 가르친 바 있다(롬 8:17). 이처럼 고난과 영광, 환난과 하나님의 나라는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고난을 받도록 허락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이 받을 영광을 위해 준비시키신 것으로 해석하고 있었다. 이런 이유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받는 고난 자체가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는 증거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영광이 주어진다는 보장은 바로 고난을 통해서이기 때문이다(Jhon Stott).


이처럼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고난을 받은 상태에서도 그것을 극복하고 오히려 신앙의 진보를 보인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보상으로 불굴의 정신을 부여하신다는 증거이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는 표(        )가 된다.

이 표는 하나님을 자신을 충성스럽게 따르는 신자들을 그의 영원한 왕국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자들이라고 모든 사람들 앞에서 선포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마지막 심판의 때에 하나님 자신이 이 공의를 명백하게 나타내실 것이라는 증표이다. 이에 바울은 이것을 가리켜 '심판의 표'라고 한다.

 

2. 고난 가운데 담겨진 하나님의 의도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다스리시고 그의 주권이 기쁘게 인정되고 복종되어지는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기꺼이 환난을 즐겁게 참고 견딜 수 있었다.

앞선 서신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환난은 그들의 믿음이 순전하다는 것에 대한 증거임을 밝힌 바 있다(살전 2:14; 3:4, 4). 환난 중에 오래 참음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가 되게 한다(살전 2;12). 이런 점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 것을 권면한 바 있다(살전 5:4, 5, 9).


이제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인자하신 뜻, 즉 고난을 통해 그들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자들로 여기신다는 뜻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을 요청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단지 죄인들을 심판하실 뿐만 아니라 믿음과 순종에 보응하시며 약속을 항상 지키시는 분이기 때문이다(William Handriksen). 이처럼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받는 성도들의 고난은 그의 나라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받는 고난에 동참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렇지만 성도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받기 위해 고난을 받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성도들에게 약속된 하나님 나라의 기업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받으신 고난을 통해 이미 주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도들이 받는 고난은 하나님께서 성도들 속에 더 나은 생명을 회복시켜 주려는 뜻으로 신자들 속에 있는 세상적인 것을 파괴하신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 어떤 박해나 환난이라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신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게 여겨질 정도로 유익을 주는 것이 아니다. 단지 하나님은 고난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신자들에게 영생의 가치를 보여주시며 아울러 고난을 수단으로 세상을 버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목표로 할 것을 배우도록 하신다. 이런 이유에서 신자들은 영생에 대한 소망을 위해 싸우고 있는 동안에도 이미 고난이라고 하는 영생에 대한 확증(표)을 받고 있는 것이다(J. Calvin).


이 사실은 비록 하나님께서 핍박자들에게 어느 정도 활동의 범위를 허락하시기는 하지만 분명히 데살로니가 성도들 안에서 특별하게 역사하고 계신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하나님은 성도들 편에 서서 그들을 지지하며 성화시키시는 분이시다(빌 1:28). 하나님은 성도들이 받는 핍박을 그들의 믿음과 사랑과 인내를 개발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신다. 이것은 성도들을 핍박하는 자들의 편견과 분노와 신랄함이 더해지는 것과 전혀 반대의 현상이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가치가 있다는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얻게 되었다.

여기에서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함이라'는 말은 '합당하다고 간주한다'는 선언적 의미를 가진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들로 간주되었다. 이처럼 성도들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은혜는 하늘의 유업을 받도록 그들을 적절하게 준비시키고 있는 것이다(Jhon Stott).

 

3.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공의의 근거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고난을 인내하며 감수하는 모습에 대해 바울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단에 따라 그들이 천국의 영광에 합당한 자들로 여겨졌다고 선언한다. 이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바울은 "(사실이 그러하다면) 너희로 환난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신다"(살후 1:6)고 말한다.

개역 성경에는 빠져있지만 이 구절은 '만일 사실이 이러하다면'이라는 의미의 접속사인 '에이페르'(     )로 시작하고 있다. 이 접속사는 '신자들이 참는 환난은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의 확실한 표이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사실이 그러하다면' 또는 환난받는 신자들에게는 안식을 주시고 신자들로 하여금 환난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보상성(condignity)의 가치라기보다는 적합성(congruity)의 가치에 따른 것이다. 따라서 고난은 신자들을 강건케 하여 주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준비시킬 뿐만 아니라 범죄한 자들을 징벌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 원칙에 따라 하나님은 자신의 공의 때문에 성도들의 정당함을 공개적으로 입증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공의 그 자체이시다(신 32:4; 대하 19:7).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도 공의롭게 하실 뿐 아니라 죄인을 심판하실 때에도 공의로 시행하신다. 하나님의 심판이 공의롭다는 것은 먼저 자기 아들을 보내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써 죄의 대가를 담당케 하셨으며 그 십자가 사실과 그리스도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들만 구원케 하셨다고 선언하셨기 때문이다(요 3:36).


하나님의 공의는 두 가지 면으로 나타난다. 한편에 있어서 하나님의 공의는 보복적이다. 즉 신자들로 환난 받게 하거나 신자들을 괴롭히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신다(요 16:33; 살전 3:9). 다른 한편에 있어서 하나님의 공의는 보수적(報酬的)이다. 하나님은 환난받는 신자들에게는 안식을 주신다. 이때 안식은 진리를 위한 용감한 투쟁으로 인하여 그들이 겪었던 모든 역경으로부터의 휴식을 상징한다.


그 결과 그리스도의 희생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하나님과 결합한 신자들은 악한 세상과 결합되지 못하게 됨으로써 핍박과 환난을 당하게 된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기 백성으로 환난받게 한 자를 환난으로 갚아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공의가 시행될 때 하나님은 박해와 고난을 가한 이들에게 반드시 그보다 더 심한 박해와 고난을 받게 하신다(Grant Osborne).


악인들이 자신들의 행악에 대해서 벌을 받는 것이 마땅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아직 벌하지 않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신자들로 하여금 다가오는 심판을 기대하는 가운데 침착하게 지내는 법을 배우게 하려는 뜻 때문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신자들은 곧 무서운 파멸로 뒤바뀌고 말 불경건한 자들의 일시적이며 근거가 박약한 행복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알게 된다.

 

4. 신자들에게 위로가 되는 하나님의 공의

 

하나님은 환난과 고난을 받은 신자들에게는 영원한 위로와 안식을 주신다. 이에 바울은 "환난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살후 1:7)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안식은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 3:19)라고 심판의 날을 다시 새롭게 하는 날로 해석하는 베드로의 말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J. Calvin).


바울은 자신과 자기 동료들을 데살로니가 신자들과 동일한 위치에 놓고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안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 안식에는 두 가지의 내용을 담고 있다. 하나는 이미 언급했듯이 신자들은 고통을 통해 강건해짐으로써 그리스도의 나라에 예배된다는 사실을 앎으로써 안식을 누린다는 점이다(살후 1:5). 다른 하나는 언젠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며 그때 그릇된 것은 곧게 되고, 심판이 선포되며, 악이 종말을 고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로부터 누리는 안식이다.


따라서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된 안식에 참여하고 있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의 증거를 가지고 이 땅의 현상들을 분별해야 한다. 이것을 가리켜 영적 분별력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성도들을 핍박하는 악한 자의 악의, 잔인함, 권세, 교만 등을 보게 됨으로써 정의가 실패한 것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도 성도들이 반대를 받고, 조롱당하며, 배척당하고, 괴롭힘을 당하며, 투옥 당하고, 고문당하며, 살해당하는 고난들로 인해 하나님께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고 불평할 수 없다(Jhon Stott). 마치 현상적으로는 악한 자가 번영하고 의로운 자가 고난을 받는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위해 끊임없이 일하시기 때문이다.

 

마치는 말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하늘 나라에 적합한 사람들이 되도록 하기 위해 그들이 고난당하는 것을 허용하신다. 그리고 악한 자들이 일시적으로 승리하도록 허용하신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그 악한 자들에게 내리실 것이다.

바울과 사도들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가리켜 '우리와 함께'라고 덧붙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왜냐하면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 역시 각자 자기가 당할 고난의 몫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거기에 합당한 영광의 보상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고전 4:9-13).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눅 16:25)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결국 그리스도의 오심, 즉 '파루시아' 그 자체는 신자들에게 공정한 응보와 보상의 기회가 될 것이다(F. F. Bruce).

 

http://cafe.daum.net/C.N.B./QeyT/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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