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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아가 체휼한 하나님의 사랑

박길현목사(대구)

by 김경호 진실 2012. 5. 27.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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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아가 체휼한 하나님의 사랑
1. 호세아가 사역한 연대
호세아의 사역 시기를 1:1은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이어 유다 왕이 된 시대 곧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왕이 된 시대.."라고 말했습니다. 웃시야는 주전 767년에 왕 위에 올랐고, 여로보암 2세는 주전 793-753년에 통치를 했으니, 호세아는 767에서 753년 사이에 사역을 시작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중간을 택한다면 760년 경에 사역을 시작하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히스기야가 홀로 다스리기 시작한 해가 715년이니 호세아는 715년 이후까지도 사역을 했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에 호세아는 45년 이상을 사역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호세아 자신은 북쪽 이스라엘을 향하여 예언했던 선지자이었음에도 그가 기준으로 삼고 있는 왕들은 주로 남쪽의 유다 왕이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는 모두가 유다 왕이며, 여로보암 2세만이 북쪽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보조적인 위치에 두었습니다. 이렇게 한 이유는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어쩌면 호세아는 다윗 왕권을 이어 받은 정통적인 왕권은 유다에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을 수 있습니다. 역사의 진상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역사란 흐르고 나면 가려져서 진상을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라고 흔히 말합니다. 그래서 객관적인 역사의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는 말을 흔히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시적인 흐름을 아는 자는 역사의 진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호세아는 계시의 흐름을 파악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여로보암 2세 이후의 북쪽의 왕가는 암살과 모반을 일으켜서 죽이고 죽는 일이 계속되었습니다(스가랴 6개월 통치-살룸의 1개월-므나헴의 10년 통치와 자연사-브가히야 2년 통치후 베가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그러니 더욱 정통성을 인정할 수 없는 저질스런 왕들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왕들이 짧은 기간을 다스렸다가 바뀌고 하였으니 왕들의 숫자도 많았습니다. 아마도 호세아는 이런 왕들을 언급하고 싶지도 않았는지 모릅니다(레온 우드, 이스라엘의 선지자, 396쪽 참고).
2. 역사적 배경
북쪽 여로보암 2세(793-753)는 정치적으로 보면 유능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강력한 통치력을 행사하여 북쪽 이스라엘을 강력한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전왕(前王) 요아스의 하던 일을 이어받아 잃었던 땅을 회복하였고, 마침내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점령했던 북쪽과 동쪽의 거의 모든 지역을 회복하였습니다. 그는 북쪽으로 솔로몬이 넓혔던(왕상8:65) '하맛 어귀'까지 영토를 회복하였고(왕하14:25,28), 동쪽으로는 아람왕 하사엘에게 점령당했던 요단 동편 지역을 다시 회복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지중해 연안에서 가장 강력한 왕국으로 만들었으며, 자신 또한 주변 나라 왕들 중에서도 가장 명성을 떨치는 유능한 왕으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남쪽 역시 비슷한 상황이었습니다. 웃시야의 통치 아래서 남쪽도 강력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성과 들에 망대를 세우고, 물웅덩이를 많이 파서 생수를 마셨으며, 고원과 평지에는 가축이 많았고, 산과 들에는 곡식과 포도가 풍성했습니다. 군대도 대군이요 강력한 군대였습니다(대하26:6-15).
결국 남북의 이스라엘 백성은 안정과 부를 누렸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부와 사치에 빠져있었고, 교만하여져서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을 멀리하게 되었습니다. 사회적으로 도덕적으로 타락하였고, 착취로 인한 가난과 그로 인하여 고통하는 자들도 양산되었고, 종교적 지도자, 관리들, 백성의 어른들 할 것 없이 물질적 이익을 위해서 사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가난한 사람들이 신 한 켤레에 팔리기도 했습니다(암8:4-6). 이스라엘의 신앙이 음녀 같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호세아의 예언은 주로 이런 세태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로보암 이후의 정변 시대의 혼란과 그로 인한 쇠퇴기에도 이스라엘의 이런 세태는 계속되었을 것으로 생각 됩니다.
3. 내용
14장의 내용을 가능한대로 요약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호세아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겠습니다. 1-3장은 이스라엘을 음란한 여인 고멜에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4-14장은 음란한 이스라엘의 죄를 책망하는 데 주안점을 둔 말씀입니다.
먼저 1-3장의 내용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1장에서는 호세아에게 음란한 여자를 아내로 맞아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고 합니다. 이것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행을 행하는 이스라엘을 호세아의 아내와 자식에 대조하시는 말씀입니다(1:3). 여기서 저는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음란한 여자를 취하여 자식을 낳으라고 말씀하시는 일이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견해에 대하여서는 별로 논하고 싶지 않습니다. 더러는 간음하지 말라는 율법을 주신 하나님이 선지자에게 이런 명령을 하실 수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저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자기의 뜻을 가지시고 이런 명령을 하실 수도 있고, 또 명령을 하시면 순종해야 하는 분이라는 사실만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호세아가 음란한 여인에게 장가갔다고 해서 그것을 간음이라고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장가가서 과거를 다 잊고 사랑하고 산다면 장가가는 것은 하나도 문제 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여튼 이 사건은 하나님이 음란한 본성을 가진 이스라엘(애굽의 이스라엘)에 장가들어서 사랑하고 산 것과 같음을 호세아의 가정을 통해서 예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아내와 같은 입장에 있는 이스라엘이 고멜이 행동한 것과 같이 음란한 행위를 하고 있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아들을 낳거든 이름을 '이스르엘'이라고 하라고 한 것은 이스르엘이 심판 받을 예표가 되도록 한 것입니다. 이스르엘 골짜기는 이스라엘에 원수 노릇한 사람들이 심판 받아서 죽음을 당한 곳이요(삿4:13,6:33,7:1,삼상29:1), 나봇과 그의 아들들이 이세벨의 간계에 의해서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곳이며(왕상21장, 왕하9:26), 특히 우상숭배로 유명한 왕 아합의 아들들과 이세벨이 살육을 당한 곳입니다(왕하9). 아합은 전쟁에서 죽었지만 그의 아들들과 이세벨은 이스르엘에서 예후에 의해 죽었습니다. 이와 같이 이스르엘은 피의 골짜기입니다. 호세아의 아들을 이 골짜기의 이름을 붙여서 이름 짓도록 한 것은 예후의 집과 이스라엘 멸망에 이스르엘이 징조가 되게 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 됩니다(4-5). 또 고멜이 낳은 딸을 '로루하마'라고 한 것도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기지 않을 것에 대한 징조입니다(6). '로루하마'는 긍휼을 입지 못했다'는 뜻으로 생각 됩니다. 이스라엘이 심판을 받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낳은 '로암미' 역시 '내 백성이 아니다'는 뜻이니 당시의 이스라엘을 버렸다는 징조입니다(9).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방 나라에서 모래 같이 많아져서 이스라엘과 유다가 합쳐져서 돌아올 것을 말씀합니다. 아브라함 언약이 그들에게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때에 돌아온 사람들을 '암미'(내 백성), '루하마'(긍휼을 입음)라고 부를 것이라고 합니다(2:1). 범죄한 현재를 멸망시키고, 이방 나라에서 새롭게 이스라엘을 형성하여서 하나님의 백성을 삼을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호세아 당시에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음란과 음행을 제거하지 않으면 망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면서도 이스라엘이 바알이 자신을 사랑하여 먹고 마시고 입을 것과 돈을 공급해 준다고 우기면서 완고하게 추종하는 것을 가시와 담으로 차단하겠다고 하십니다(2:2-7). 가시와 담으로 차단한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누리는 물질적인 풍요를 빼앗고, 그 땅을 황무지와 같이 만들고, 망하여서 앗수르로 잡혀 가서 종과 같이 살게 되는 것을 뜻할 것입니다(2:8-13). 그곳은 출애굽 때의 광야와 같이 거친 들 같은 곳이 될 것임을 말씀합니다. 출애굽 광야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극진한 사랑을 나타내신 장소입니다. 앗수르도 그런 곳이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 때야 비로소 이스라엘은 출애굽 때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따르듯이 하나님을 남편 같이 따를 것이며, 하나님은 그들을 돌아오게 하셔서 약속의 땅에서 평안히 눕게 하시며,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과 진실함으로 장가들어서 영원히 살 것이라고 하십니다(2:14-20).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에 다시 심고, 하늘의 우로를 주셔서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먹게 하시며, 긍휼이 여기시며 자기 백성 삼으리라고 하십니다(2:21-23). '암미'와 '루하마'라고 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말씀해 주십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바알 종교의 마력 있고 감성적인 의식을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보여주기 위하여 바람이 나서 나가버린 음녀가 된 여인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그녀를 사고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음행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말라 나도 네게 그렇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이 음녀처럼 오랫동안 무법천지의 세상에서 여호와를 법도 있게 섬기지도 않을 것이지만, 우상이 그들을 구원해 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우상도 미워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다가 돌아와 여호와와 왕 다윗 즉 메시야를 찾을 것이며, 말일에는 여호와와 그의 선함으로 나아 올 것이라고 합니다(3:1-5). 결국 이스라엘을 여호와께 나아가게 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이상이 1-3장의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음녀와 같은 이스라엘의 죄악을 지적하심, 심판을 말씀하심,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이스라엘을 사랑하심으로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것을 말씀하신 것으로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4-14장까지는 1-3장 내용의 확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죄악을 구체적으로 더 설명하시며 책망하시고, 이방 나라에 흩어버릴 것을 말씀하신 후에 다시 회복시킬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호세아 1-3장의 핵심을 파악하면 4-14장의 내용도 파악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지 4-14장 속에는 무슨 말씀인지 이해하기에 어려워서 해설해야 할 구절들이 여럿 있습니다. 이런 구절들에 대하여 다음에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여기서 메시지 몇 가지를 듣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첫째, 역사적인 배경에서 생각해야 할 교훈으로서 '큰 군대를 가지고 강력해지고 물질적으로 부요해지는 것이 좋은 것이냐?' 하는 물음입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이 점에서 이구동성으로 '강성해고 부요해지는 것은 좋은 것'이라고 말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호세아 시대의 배경은 강성해지고 부요해지는 것은 절대적으로 좋은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강성해지고 부요해지는 것이 육신적으로 살기에 편하고 좋은 점이 있을지는 몰라도 영적으로는 참으로 위험한 것이라는 교훈을 주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보여주었던 것과 같이 소위 부국강병해지면,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려고 하기보다는 마음이 풀려서 힘과 부를 주로 여기는 경향에 빠지게 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을 '내 주'라고 하지 않고 힘과 돈을 '내 주'(내 바알)라고 하는 경향에 빠진다는 점입니다. 이런 경향이 너무나 본능적이기 때문에 음란과 음행에 비교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 됩니다. 음란한 성질은 타락한 인간의 본능적 경향이 되었습니다. 힘이 있으면 음행을 시도하려는 음란성처럼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힘과 부를 가지면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자기의 힘을 과시하고 싶어 하고 연락과 즐김을 추구하는 경향을 가졌습니다. 인간 집단은 이 경향을 좇아가는 경향을 발휘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집단적인 이런 현상을 막을 방법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결국 힘과 부가 쌓인 사회가 타락하여 망하는 길로 가는 것 같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타락한 인간에게 힘과 부는 인간을 멸망하게 하는 촉매제가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비록 힘과 부 자체는 가치중립적인 것이라고 할지라도 인간의 타락성 때문에 이 가치중립적인 것이 멸망을 촉진시키는 촉매제가 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에 우리는 힘과 부가 모아지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할 수만 없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이런 것이 모이면 교회는 좋은 일을 많이 한다고 하지만, 이런 것이 많이 모여서 교회가 좋은 일을 한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만큼 교회도 힘과 부에 취약하며 타락성에 노출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물론 개인이 이런 것을 초월하여서 살았던 경우도 있지만, 그러한 개인의 삶은 보편적인 신자들의 삶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것이 교회에 복이며 좋은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도록 합시다. 동시에 성도 개인도 이런 것이 좋은 것이요 복이라는 생각을 갖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이런 것이 복이라면 가난하고 힘 없는 것은 저주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식의 논리는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라 자본주의 논리입니다.
둘째로 기억할 것은 죄성에 대한 이해입니다. 앞에서 죄성을 음란성에 비유한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그것에 대하여 한 번 더 강조하고 싶습니다. 죄성은 본능적으로 사람을 끌고 가며, 사람이 매력을 느끼고 집착하게 하는 힘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 때문에 인간이 좋은 것도 악하게 만든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믿음이란 이러한 사실을 깨달아서 이런 것이 참이 아니라, 하나님이 참이시며 하나님의 모습을 자기의 모습이라 생각하면서 살려고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셋째, 하나님이 호세아를 고멜에게 장가들게 한 이유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선지자의 고난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선지자는 원하지 않는 고통을 감당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모습을 오늘날 교회의 목회자들에게도 적용을 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로서 하나님의 참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 자로서 고난 받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목사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백성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는 것이 선지자와 그 백성이 하나님의 마음을 갖게 되는 길입니다. 즉 참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 되는 길이요,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는 사람 되는 길입니다. 호세아에게 이런 일을 시키지 않았다면, 호세아가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호세아는 백성을 비판하는 사람은 되었을지언정, 그런 백성을 하나님처럼 사랑하는 마음은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백성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깨어지고 망하여서 이방나라로 흩어지지 않았다면 거기까지 찾아오셔서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낮아지심과 고난을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깨어지고 낮아지고 흩어짐으로써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죄악으로 인하여 고통하시면서도 여전히 음녀같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이치는 모든 성도에게도 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고난과 고통은 진실로 하나님을 아는 자 즉 하나님의 고통을 아는 자 되게 하는 길이요, 따라서 구원에 이르게 하는 통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넷째, 3:5절의 말씀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와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들의 왕 다윗을 찾고 마지막 날에는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여호와와 그의 은총으로 나아가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구절은 '그 후에'와 '마지막 날'의 시간적인 구분을 명확히 하는 것 같습니다. '그 후에'는 이스라엘이 바벨론 지역에서 돌아 올 임시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날'은 '날들의 끝' 즉 '말세'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메시야가 올 때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다윗 왕'은 메시야 왕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메시야 왕이 오시는 때가 구약 성경 특히 호세아가 말하는 '말세'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말세관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사람들에게 잘못 이해되어서 혼란을 일으켰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통해서 호세아는 이스라엘에게 메시야가 와서 이스라엘을 근본적으로 돌이킬 미래를 믿고 기다리도록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메시야가 와서 다스릴 미래를 믿고 기다리며 사는 나라였습니다. 오실 메시야를 믿는 것은 옛 이스라엘의 믿음의 내용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미래는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성취되었습니다. 때문에 우리에게는 이 미래가 이미 과거요 또 현재가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와 그의 은총으로 나아가리라'는 말씀은 '여호와와 그의 선하심으로 나아가리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선'이라는 말은 메시야 왕을 보내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하신 것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선'이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신 구원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죄와 용서, 성령을 주셔서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됨, 하나님이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사는 것 곧 영생 등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로 여호와의 '선하심'은 여호와 '인자하심'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약에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도덕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죄인을 위하여 이루신 구원을 가리키는 절대적인 말로 이해는 것이 옳습니다. 절대적이라는 것은 인간이 더할 수 없는 성격의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에는 인간이 보태어야 할 것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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