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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엘의 여호와의 날

박길현목사(대구)

by 김경호 진실 2012. 5. 28. 01:06

본문

요엘의 여호와의 날
요엘서의 저자
선지자 요엘이 언제 요엘서의 내용을 예언하였는지, 그리고 언제 그것을 기록하였는지에 대하여서는 구구한 학설이 있으며, 확실한 해결책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몇 가지를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적으로 유다가 포로로 잡히기 전 시기에 저작했다는 설인데, 이 설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둘 다 요엘이 웃시아보다 조금 앞에 활동했을 가능성을 암시하는 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것으로 요엘이 아모스나 이사야보다 먼저 활동했던 선지자라고 하는 이유로 요엘의 문구(욜3:16)를 아모스가 인용한 듯하고(암1:2), 이사야도 요엘을 인용한 듯하기 때문입니다(욜2:1-11, 3:15,16;사13:3,6,8,10,13). 하지만 제 생각에는 선지자들의 비슷한 문구 사용으로는 누가 누구보다 앞이다 또는 뒤이다를 확정하기가 어려운 점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요엘이 아모스나 이사야를 인용할 수도 있고, 또 비슷한 문구가 '인용되었다'고 하기 보다는 선지자들의 공동적인 문구일 수가 있겠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공동의 역사에서 나온 표준과 죄악의 반복으로 인하여 공동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문구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것으로는 웃시아 왕 당시에나 혹은 웃시아 왕보다 조금 이전이었을 것으로 생각하는 이유로 요엘 3장에서 두로와 시돈과 블레셋이 유다를 침략하여 성전을 약탈하고 이스라엘을 헬라인에게 팔았다는 언급은 여호람 때(주전889-883)에 있었던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블레셋에게 원수를 갚는 일이 웃시아 왕 때(대하26:6)에 있었습니다. 때문에 요엘서는 웃시아 왕 당시나 그보다 조금 이전에 선포되고 기록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유다의 포로 후기에 저작되었다는 설입니다. 이런 설을 제시하는 이유는 본서가 유다의 정권에 대한 말이 없는 것을 보아서, 유다 민족이 외국에 포로 되어 정권이 붕괴 된 후의 것이겠다고 추론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포로 후기의 용어들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사장들을 수식한 "여호와께 수종드는"(1:13,2:17)이라는 문구는 포로 후기에 (제사장을 가리키는) 전문적인 용어라고 생각합니다(사61:6,렘33:21,22,겔45:4,5,46:24,욜1:13). 하지만 이 용어가 (제사장을 가리키는) 포로 후기의 전문적인 용어라고 하기가 어렵습니다. 출애굽시의 여호수아에게 '시종'(출24:13)이란 말로 사용되었고, 다윗 시대에는 '부리는 종' 또는 '하인'(삼하13:17,18), 솔로몬의 시위자들(왕상10:5), 선지자의 사환(왕하4:43)에도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이 용어가 포로후기의 문구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권에 대한 이야기가 없는 것은 유다 정권 오래 전이든지(예를 들면 사사시대; 하지만 사사시대일 가능성은 적다), 정권이 없는 상태로 오래 지난 후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3:1절에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 가운데서 사로잡힌 자를 돌아오게 할 그 때에...이는 그들이(만국) 이스라엘을 나라들 가운데 흩어버리고 나의 땅을 나누었음이며 '라는 구절을 볼 때에 포로 후기라는 말이 가능성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이상 박윤선, 소선지서-요엘 서론 참고)

이런 점들을 염두에 두면서 본문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기록된 역사적 배경을 정확하게 알 수 있다면, 그것은 성경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는 방도가 됩니다. 하지만 명확하지 않다 싶을 때는 가능성들을 염두에 두고 본문을 살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본문의 내용
요엘은 먼저 이전에 보지 못했던 일이 있을 것을 말합니다(1:2-4). 메뚜기 떼가 공격하여서 식물을 남김 없이 먹어버릴 것을 말합니다. "팥중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느치가 먹고, 느치가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 여기서 나오는 팥중이, 메뚜기, 느치, 황충이는 다 메뚜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아마도 메뚜기를 생애 과정에 따라서 이와 같이 달리 부르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 표현은 메뚜기가 사람이 먹을 것을 남기지 않고 다 먹어치우는 것을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메뚜기들이 일생의 과정을 지나면서 잔인하게 식물들을 먹어치우는 재앙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메뚜기들을 '다른 한 민족이 내 땅에 올라왔음이로다'라고 합니다. 이것을 보아서 메뚜기 떼는 수많은 이민족들의 대군이 몰려오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들은 강하고 셀 수가 없으며, 사자의 이빨 같은 이빨을 가지고 포도나무, 무화과나무를 갉아서 말갛게 벗겨버리니 가지들이 하얗게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마시고 취하는 일이 끊어지게 되었습니다(5-7). 밭은 황무하고 토지는 말랐습니다. 곡식은 동이 났고, 포도주와 기름도 말랐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전에 드릴 것이 사라졌으므로 제사장은 슬퍼합니다. 성전 제물이 없으니 그것으로 먹고 사는 제사장도 굶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니 백성들은 처녀가 어릴 때 약혼한 남편을 잃은 것 같이 굵은 베로 허리를 동이고 애곡하라고 합니다. 포도와 밀과 보리가 다 없어졌고,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대추나무, 사과나무 등 모든 나무가 시들고 말라버렸습니다. 그러니 이런 것들을 먹고 즐거워하는 사람에게 즐거움이 말라버리는 것은 당연합니다(8-12). 먹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씨도 흙속에서 발아하지 않고 썩어지고 곡식도 시들어버리니 창고는 비었고 모든 가축과 들짐승이 먹을 것이 굶어서 곤하고 지쳐서 죽어가는 상황입니다. 제사를 드리지 못하는 제사장들에게 굵은 베옷을 입고 성전에서 밤이 새도록 누우며, 장로와 백성들을 불러모아서 금식을 선포하고 여호와께 부르짖으라고 합니다(13-20). 약속의 땅이 총체적인 위기에 처할 것을 말합니다. 메뚜기의 침략은 물론이고, 비가 없으니 흙에 습기가 전혀 없어서 씨앗과 식물들이 썩어 없어지고 말라버리는 상황입니다.
2장 전반부에서는 메뚜기 떼의 임함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인 날이라 새벽 빛이 산꼭대기에 덮힌 것과 같으니 이는 많고 강한 백성이 이르렀음이라'(2)고 한 것은 하늘을 가리고 햇빛을 가려서 땅이 캄캄하고 짙은 구름이 덮인 날과 같이 만드는 메뚜기 떼의 많음을 묘사합니다. 이 메뚜기들이 땅에 내려와서 먹어 없애는 것이 불이 사르고 없애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이 지나가는 땅은 황폐한 들 곧 황무지가 되고 맙니다(3). 그리고 그것들이 지나가는 모습을 4-10절까지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방해하고 막을 것이 없습니다. 줄을 지어 달리는 것이 용사 같으며 성을 기어오르는 것이 무사 같습니다. 성과 성위와 집에 기어오르며 창으로 들어가니 가지 못할 곳이 없습니다. 땅이 진동하고 하늘이 떨며 해와 달이 캄캄하며, 별들이 빛을 잃습니다. 그런데 그 앞에서 여호와께서 소리를 발하시며 메뚜기 대군을 지휘하고 계십니다. 메뚜기 대군은 그 명령을 따라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니 그것을 당할 자가 없다고 합니다(2:11). 이것은 메뚜기의 침입이 여호와가 보내시는 재앙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선지자는 이스라엘에게 회개를 촉구합니다(2:12-17). 하나님께서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고 하셨으니,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선지자는 외칩니다. 하나님은 '은혜롭고, 자비롭고, 노하기를 드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며', '뜻을 돌이키시고 복을 내리사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지 아니하실는지 누가 알겠느냐'라고 선지자는 반문합니다. 그리고 시온에서 나팔을 불어 거룩한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소집하고 백성을 모아 그 모임을 거룩하게 하고, 노인들과 어린 젖먹이를 모으고, 신랑과 신부를 그 신방에서 나오게 하며, 제사장들은 낭실과 제단 사이에 서서 울며 '여호와여 주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소서, 주의 기업을 욕되게 하여 이방의 조롱거리가 되지 말게 하옵소서'라고 간구하라고 선지자는 말합니다. 선지자는 온 이스라엘이 여호와 앞에 모여서 마음을 찢고 회개하라고 말합니다. 방도를 일러주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그 때에'가 아니다. 그냥 접속사 '와우'다. 그래서 때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그러면'이라고 번역하였다. '회개하면'이라는 뜻으로 읽은 셈이다),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불쌍히 여기시고, 이스라엘이 회개하면서 구하는 간구에 응답하여서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주셔서 이스라엘이 이방 가운데서 욕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이며, '북쪽의' (것들을) 멀리 광야로 몰아내어서 결국 동해로 서해로 빠져 죽게 하실 것이라고 합니다(18-20). 원수를 처단하셨음을 이렇게 말합니다(북쪽의 것은 성경에서 '대적, 원수'에 대한 표현이기도 하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베푸신 큰 일 곧 구원사건입니다. 그래서 이런 큰 사건을 맞은 땅도 두려워하지 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라고 합니다(2:21). 또 짐승들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들의 풀과 나무와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힘을 내어서 싹을 내고 열매를 맺기 때문에 주리지 않게 되었습니다(21-22). 자연이 새로운 힘을 내는 것은 저주가 걷히고 소성하는 새 시대가 되었음을 암시해 줍니다. 이런 때에 시온의 자녀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알맞게 주셔서 밀과 포도주와 기름이 넘쳐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여서 하나님은 전에 보내었던 메뚜기와 느치와 황충과 팥중이가 먹은 햇수대로 되갚아 주십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배부르게 먹고 여호와를 찬송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백성들은 주림으로 인한 수치를 영원히 당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스라엘 가운데 임하여 계셔서 다른 신을 생각할 수 없게 할 것이라고 합니다(23-27).
그리고 그 후에 하나님이 하나님의 신을 만민(모든 육체)에게 부어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신을 받은 결과 '자녀들은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보며, 하나님의 남종과 여종들은 하나님의 영의 부음을 받을 것이며, 이적을 베풀어서 하늘과 땅에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심판의 이적들인 동시에 구원을 위한 이적들입니다.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듯이 이 세상 권세가 깨어질 것이지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합니다(2:28-32; 히브리어 성경 3:1-5).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음을 느낍니다.
첫째, 선지자 요엘이 묘사하는 여호와의 날은 암시적인 방식을 사용하여 묘사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메뚜기 재앙도 실제적인 사건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의 징조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메뚜기 재앙으로 인한 하늘의 태양빛을 가림과 땅의 어두움(2:10)은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전에 있을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는'(2:31) 것에 비유되고 있습니다. 또 이른 비와 늦은 비(2:23)는 만민에게 내릴 하나님의 신에 비유되고 있습니다(2:28-29). 즉 땅에 임하는 메뚜기 재앙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상징하는 것이요,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만민에게 임할 성령을 상징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회개할 때에 주실 땅의 회복과 먹을 것의 풍부함은 하늘에서 내릴 성령의 배부름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즉 심판과 성령 주심이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 교회에서는 요엘 선지자가 사용하고 있는 이러한 상징적인 암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충만함과 육신의 배부름을 혼동하고 있습니다. 요엘이 진정으로 말하고자 했던 바는 성령의 충만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으라고 하였습니다. 육신적인 배부름은 성령으로 충만할 것을 가르치는 상징적 도구였습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육신적인 배부름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작은 교회는 경시하고, 하나님의 축복이 없는 곳으로 여깁니다. 대형 교회가 되어야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요엘의 메시지가 무엇을 말하려고 의도하고 있는 것인지를 알지 못하는 소치입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는 자본주의 교회를 성령 충만한 교회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행태에 집착하는 것이 한국 교회의 현주소입니다.
둘째, 이상의 관점에서 보면, 요엘이 이 예언을 할 때가 언제인지를 아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 같지 않습니다. 포로 이전이든, 혹은 포로 말기이든지, 중요한 것은 메뚜기 같이 이 세상 삶의 생명줄을 끊어버리는 여호와의 심판이 올 것이라는 사실과 이 세상이 불타고 망하는 가운데서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요엘의 초점은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우리는 이 세상 생명줄로 생각하는 이 세상의 권세와 재물과 먹을 것에 대하여서는 집착을 놓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특성입니다. 평생 믿음으로 살면서 땅의 것에 대하여 집착을 점점 놓아가는 모습이 성령의 배부름을 아는 자의 모습입니다. 이런 것들은 하늘나라에서 가치를 갖는 것이 아님을 아는 것이 성령을 아는 자의 모습입니다. 하늘나라에서 가치가 있는 것은 오로지 성령으로 배부르며, 충만한 것입니다.
셋째, 그렇다면 심판과 구원의 때 곧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때가 언제 옵니까? 이런 때가 구약 이스라엘 역사에는 없었습니다. 흔히들 이 때가 말세 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말세가 된 지금 성령 충만해지기를 기도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성령충만을 기다리면서 기도하고 간구합니다. 특히 오순절 신학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이 가르침을 성령 받아서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며, 병을 고치는 은사를 받아야 할 것으로 해석하여왔습니다. 하지만 사도 베드로의 사도행전 2장 설교에 의하면 심판과 구원이 이루어지는 일이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으셔서 성령을 보내시기 시작한 그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행2:17-21). 오순절에 성령이 불같이 바람 같이 임한 것은 이 시작을 이스라엘에게 알리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성령충만이란 것도 개인적인 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루신 구원적인 사건을 말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도 예수님의 사역으로 이루어졌다고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과 성령으로 다스림은 이 죄악의 세상 공중권세 잡은 마귀를 땅에 내던지고 무저갱에 감금하는 사건을 뜻합니다. 마귀가 감금되었으니, 이 세상 세력 곧 정사와 권세들도 깨어졌음을 뜻합니다. 이런 중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게 됩니다. 성령의 부어주심을 받아서 하늘 생명으로 배부르며 사는 자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성령으로 충만해진 자입니다.
따라서 구원을 얻은 자는 상징적인 껍데기에 연연할 필요가 없습니다. 방언, 예언, 치병, 등은 과거에 예수를 통해서 심판이 시작되었고, 성령이 주어졌다는 것을 보여 준 껍데기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을 새삼 가지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믿는 자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 즉 신앙하는 것으로 족합니다. 이것이 요엘이 의도했던 참된 배부름입니다. 요엘에 의하면, 요사이 사람들이 말하는 '순전한 복음' 혹은 '충만한 복음'은 없습니다.
넷째, 하박국서에 예루살렘을 '시온'이라고 여러 번 부르는 것이(2:1.15,32, 3:16,17)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시온은 다윗이 정복전쟁을 완성시킨 곳이라고 할 수 있으며, 천혜의 요새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정복전쟁을 완성시키고 성령의 철옹성으로 지키시는 구원사의 완성품인 교회와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요새인 성령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교회는 남은 자로 형성되는 것입니다(2:32).

이런 맥락에서 3장을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흔히 3장의 사건들은 말세 일어날 특정한 사건으로 이해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민족적으로 대규모로 회개하고 돌아 올 것이며, 여호사밧 골짜기(3:2,12)는 이스라엘을 치러 온 군대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멸망하는 무덤이 될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이 거룩하며 이방인이 그리로 다니지 못할 것이라고 이해합니다(3:12-16). 하지만 이런 이해는 너무나 문자주의적인 해석입니다. 성경은 문자에 매일 수 없습니다. 선지자들이 당시에 자기 시대의 언어와 있는 것을 가지고 말을 하지만, 사실은 미래에 주님 시대에 있을 영적인 것을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요엘은 당시에 자기가 아는 언어들을 사용하여서 미래에 주님 시대에 있을 영적인 심판과 구원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요엘서에 나오는 두로, 시돈, 블레셋(3:4), 애굽, 에돔(3:19)은 당시에 요엘이 보는 하나님 백성의 원수입니다. 하지만 이 원수는 신약에서는 에돔족인 헤롯과 부패한 제사장들과 로마가 됩니다. 신약 시대에는 에돔의 헤롯과 부패한 제사장들과 로마가 한 통속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원수이기 때문입니다. 요엘은 미래의 원수들을 자기 시대의 원수들을 가리키는 말로서 표현하였습니다. 그리고 구원은 이런 원수에게서 구원을 의미합니다. 또 '유다와 예루살렘의 사로잡힌 자를 돌아오게 한다'(3:1)는 표현은 그리스도가 죄에 빠져 있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약 원문에서는 '그의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들'이란 당시에 의로운 사람들을 괴롭히는 제사장들과 타락한 유대인과 헤롯과 그 일당과 로마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여호사밧 골짜기는 하나님의 심판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세상이 성령에 의해서 심판을 이미 받았고, 계속해서 심판을 받아 왔습니다. 사실 세상은 하나님의 백성의 피란처입니다. 바벨론이 그렇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이 하나님의 백성된 교회를 괴롭히는 전쟁을 벌이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이런 일이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세상을 치는 '주의 용사들'은 주님 자신이 용사이셨고, 그의 부름을 받은 교회가 용사입니다.
이런 식으로 3장을 문자에 매이지 않고 신약적으로 잘 이해하여 읽는다면, 3장도 미래 재림 때에 있을 이스라엘 민족의 회개로 이해하지 않고 그리스도 사건 안에서 이루어지는 새 이스라엘의 구원과 세상의 악한 세력의 심판으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표현들의 계시역사적인 뜻을 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이해를 문자 안에서 중복적인 뜻을 찾는다고 하여서 '알레고리'라고 비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계시가 역사를 따라서 흘러왔으며, 역사 속에서 시작과 진행과 신약에서 완성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적어도 구약과 신약의 관계 속에서는 의미가 풍성해지고 달라졌으며, 표현의 껍데기를 벗어버렸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한 시대적인 문자적인 의미를 고집한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합니다. 계시라는 것은 다양한 시대를 통과하여 온 것이기 때문에 한 시대의 문자적인 의미로써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전에도 한 단어가 하나의 뜻만 가진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시대마다 생겨나는 여러 가지의 의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계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이런 어려운 것은 신학교에서나 강의로 할 것이지, 교회에서 설교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하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히려 교회에서 이런 것을 설교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할 때에 다양한 사람들이 계시의 풍성한 데서 자기 이해만큼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을 설교하지 않으면 들을 귀가 있는 사람들이 진짜로 들어야 할 것들을 듣지 못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교회의 문제들은 이런 신학적 원리들을 설교하지 않았던 것에 원인이 있으며, 천박한 종교심이나 자극하고 만족시키려고 한 것에서 원인이 있다고 생각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런 신학적인 설교에 힘써야 하고, 성도들은 생명의 도리를 배운다는 마음으로 깨닫기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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