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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죽음과 그것에 대한 증언

박길현목사(대구)

by 김경호 진실 2014. 11. 6.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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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죽음과 그것에 대한 증언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것에 대한 증언(19: 30-37)
 저는 예수께서 영혼을 버리셨다고 하는 말씀에서 한 가지를 더 생각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영혼을 버리셨다는 말이 복음서마다 좀 다르게 표현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께서 '그 영을 버리시니라'라고 되어 있지만, 누가복음 23:46절에는 '아버지여, 내 영을 아버지 손에 위탁합니다 하시고,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마지막 숨을 내어 쉬시니라(숨지시니라;운명하시니라; evxe,pneusen)'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 마가복음 15: 37절에는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마지막 숨을 내어 쉬니라(숨지시니라; 운명하시니라; evxe,pneusen)'라고 했고, 마태복음 27: 50에는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그 영을 `떠나보내니라'(avfh/ken to. pneu/ma)라고 했습니다. 같은 상황에 대한 표현들이지만, 기자마다 조금씩 다른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영'(프뉴마)이라는 말이 '숨'(breath)이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이해할 수 있게 표현 되었다는 점입니다. 영을 인간이 내어 쉬는 숨결로서 이해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숨이 떨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숨지시니라'고 번역한 것은 이런 의식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고 보면 '영'이라는 것이 하나의 숨결을 말하는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인간의 '영' 또는 '영혼'이라는 것이 '숨'을 말하는구나라는 생각으로 이끌게 됩니다. 그래서 '영'이라는 것을 바람이나 공기와 같은 것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사실 이 말은 바람이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니고데모에게 '바람이 임의로 불되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네가 알지 못한다'고 하셨을 때에 이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고 보면 '사람의 영이라는 것이 별 것이 아니구나, 사람이 호흡하는 숨결을 이렇게 표현했구나'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인간의 보이지 않는 내적 주체인 그 무엇을 부인하는 자리에까지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이란 물질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인간관을 유물론적인 인간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신세상은 이런 유물론적인 인간관이 지배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빠질 수 있는 함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영 또는 영혼이라는 것이 없는 것일까요? 저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자아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자기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자기의 의지를 따라서 행동하려는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인간은 모두가 자기가 주체가 되려고 합니다. 매여서 종속적으로 사는 것을 싫어합니다. 근본적으로 자유를 누리기를 원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것도 주체적으로 자유함 속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강제로 찾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생각하고 결정하여서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주체적인 만족을 위하여 인간은 문화를 추구합니다. 이런 일들은 모두가 인간의 영 또는 영혼이 자기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단순히 먹고 배를 채우며, 생리적인 활동을 하면서 사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은 그저 짐승의 삶이요, 육체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이런 육체적인 삶으로 만족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 만족되어야 만족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가족을 이루는 것도 동물적으로 후대를 잇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런 영적인 측면이 만족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때문에 동물들이 새끼들을 낳고 양육하는 것도 아름다운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인간이 가정을 이루고 서로를 위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아름답고 놀라운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가정 삶은 인간의 영적인 활동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이러한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인간 자아 또는 주체를 우리가 영 혹은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저는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삶을 생각할 때에 영혼이 육체를 통해서 자신을 표현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영혼이 육체에 깃들여 있는 것 즉 들어와서 사는 것이 아니라, 원래 영적인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인간은 영적인 주체자로서 세상에 태어나서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 자체가 영적인 주체자요, 영적인 존재인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본래 '영적인 존재자인 인간'인 것입니다. 이런 인간이 창조자 하나님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인간이 본래 존귀한 존재인 것입니다.
이런 인간이 세상에서 살다가 이 땅의 삶을 마치는 것을 우리는 죽는다고 말합니다. '운명(殞命)한다' 또는 '숨을 거둔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표현들은 인간 죽음을 온전히 표현한 것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더구나 이런 말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나 신자의 죽음을 온전히 표현하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하나님을 섬기든 주체적인 모습으로서의 인간이 하나님 아버지의 품에 안기는 것이 곧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이 죽음의 상태를 '몸을 떠나 하나님(주)과 함께 있다'고 하거나, '잠을 잔다', 혹은 '쉰다'고 하기도 했습니다. 이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 우리는 잘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상태는 그야 말로 '자고 쉬는' 상태 곧 안식의 상태이며, 낙원과 같은 상태임을 성경은 암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의 영혼을 버리셨다고 하는 것도 이런 상태로 들어가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즉 이 세상에서 살던 영적 주체로서의 삶을 끝내고 이러한 상태로 들어가신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오늘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영혼에 대한 신학적인 답을 찾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제가 오늘 말하고자 하는 바는 여기서 말하는 '영'이라는 표현을 가장 축소시켜서 마지막 한 호흡이라는 의미로 이해하고자 한다 해도, 그것이 큰 계시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수께서는 자기의 숨결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셨습니다. 그만큼 아들은 아버지를 신뢰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도 그의 숨결을 자기의 품에 받으신 것이 틀림 없습니다. 이것은 아들의 마지막 지상에서의 생명의 기운을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 속에 받으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은 아버지께서는 아들의 한 숨길이라도 버리지 아니하시고 귀중히 여기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아들 그리스도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도 마찬 가지임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자기 백성의 한 호흡도 귀중히 여기시는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마지막 한 호흡뿐만 아니라, 인간으로 우리의 생애 전체가 하나님과 더불어 걸어 온 것이 틀림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생명이 처음 배속에서 시작될 때에 주께서 그것을 조성하기 시작하셨다고 하십니다. 심장이 움직이고, 뼈가 생기며, 호흡을 시작하여 피가 작은 몸속에서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을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하여 인간이 어머니의 배속에서 자라왔으며, 태어나고, 앉고 일어서며, 움직이면서 사는 것이 다 하나님을 의지하여서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살다가 죽을 때가 되면, 신자는 또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백성이 알아야 할 것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 안에서 나서, 하나님 안에서 살다가, 하나님에게서 돌아간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지상 생애 동안 이 사실을 믿고 신뢰함으로 살았고, 또 마지막 순간에도 아버지께 자기의 영을 맡겼던 것으로 생각 됩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을 믿고 이렇게 해야 할 것이라 생각 됩니다. 즉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신자의 일생을 그 생명의 출발부터 끝날 때까지 그리고 영원히 떠나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신뢰하여야 할 것입니다.

 죽으심과 부활암시(19: 31-37)
이 본문에서 사도 요한이 증거하고자 하는 목적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가짜가 아니라 실제적인 사실이라는 점입니다.  유대인은 안식일에 시체를 십자가에 달아두지 않으려고 하여 빌라도에게 시체를 치워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군인들이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들의 다리를 꺾었습니다. 이렇게 다리를 꺾는 것은 죽음을 확실하게 하는 목적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의 다리를 꺾고 난 후에 예수의 다리도 꺾으려고 예수의 십자가에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예수께는 이미 죽어있었습니다. 그래서 군병들은 이미 죽은 자의 다리를 꺾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그의 다리를 꺾지 아니하였습니다.  대신에 한 군인이 창으로 죽은 예수의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그 즉시 피와 물 곧 체액이 흘러나왔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이미 죽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일종의 '확인사살'과 같은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찌름에 아무런 반응을 발견할 수 없었음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이것은 정신을 잃은 상태에 있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가령 정신을 잃었다고 해도 다시 살수는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달린 채로 창으로 찔러서 흘릴만한 피와 물은 다 흘렀기 때문입니다. 살래야 살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는 이렇게 해서 십자가 위에서 완전히 죽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러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하여 사람들은 도무지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상한 가설을 내세웁니다. 몇 개의 가설들을 아는 것도 유익하리라고 생각 됩니다.  첫째, 가사설입니다. 예수가 진짜로 죽은 것이 아니라 쇠약함과 피 흘림으로 까무라쳤는 것입니다. 죽지 않은 상태였는데 군병들이 그의 다리를 꺾지 않아서 다시 깨어나게 되었다는 설입니다. 요한의 증거가 이런 설을 아예 거절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죽었으며, 창으로 찔렀을 때에 십자가에서 피와 물을 다 흘렸기 때문에 살아날 수 없었다고 강변하고 있습니다.
둘째, 제자들이 죽은 예수의 시체를 도적질하고는 예수가 부활했다고 선전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겁쟁이 제자들이 어떻게 이런 대담한 일을 할 수 있었으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대답하게 그리고 능력을 행하면서 복음을 전하면서 다녔겠습니까? 앞뒤가 도무지 맞지 않는 황당한 주장입니다.
셋째, 마리아 착각설입니다. 묘지 주변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마리아가 비어 있던 다른 무덤에 들어갔다가 예수의 시체가 없는 것을 보고 눈물을 펑펑 흘리며 울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가 눈물에 흐려진 눈으로 동산지기를 보게 되었는데, 마리아는 동산지기를 부활한 예수라고 착각하고는 예수가 부활했다는 말을 퍼뜨렸다는 것입니다. 믿지 않으니까 그야말로 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코메디를 넘어서 불신앙으로 돌덩이 같이 굳어진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넷째, 환상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는 실제로 부활하지는 않았는데,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주관적인 경험을 실제로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을 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제자들이 예수를 그리다가 보니 집단적으로 이런 환상을 보게 되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니 이런 주관적인 경험을 실제적인 사실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추론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집단적으로 예수 부활을 경험했다는 것은 집단적으로 예수를 그리면서 담대하게 기도에 몰두하든지 해야 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제자들이 겁을 먹고 문을 잠그고 숨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떨면서 숨어 있었던 것은 성경이 증언하는 대로 아주 타당한 사실이었음을 우리는 인정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환상을 보지 못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소리를 하는 인간의 완악한 사고방식을 보게 됩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역사도, 어떤 기적도 있을 수 없으며, 자연적인 질서를 벗어나는 어떤 계시도 이적도 인정할 수 없다는 인간의 완악한 사고방식을 봅니다.  이런 사고방식의 기준은 인간의 합리성입니다. 인간 이성으로 그럴듯한 것은 인정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눈으로 보고 듣고 함께 살았던 자가 증언을 해도 그 증언을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니 이 합리성이라는 잣대를 가져다 대는 인간이 얼마나 완악하고, 건방지고, 독선적입니까? 인간이 신의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이성이 신인 셈입니다. 현대인들이 이런 사고방식을 많이 가지고 있으며, 특히 배웠다고 하는 사람들에게서 이런 경향은 더욱 심하며, 서구 지성인들이 이런 사고에 젖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의 교만이요, 가장 무서운 죄악성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죽었다고 말합니다. 창으로 찔러서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흘러서 이미 죽었음을 증명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이렇게 죽으신 것은 우리의 죄악을 속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절대적인 진리로서 온 세상에서 부름을 받을 자기 백성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하나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알고 믿는 법을 고쳐야 한다는 점입니다. 현대인들은 무엇이든지 자기가 확인하고 판단하고 옳다고 생각되어야 인정하고 믿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항상 자기가 판단의 주체가 되어 있습니다. 사실 자기가 판단의 주체가 되어 있다는 것은 아무 것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아무도 자기와 똑 같은 상황에서 똑 같은 경험을 하고 똑 같은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현대인은 오로지 외톨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외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결국 독선과 허무주의 경향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믿을 수 있는 길은 다른 사람의 말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믿을 만하고, 더 실제적으로 어떤 것을 경험하고 함께 살았다면, 그 사람의 말 이상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좋은 것이 없습니다. 사도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듣고, 보고, 경험한 것을 증거하는 증인이 사도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일생에 대하여는 그들의 증언 이상 좋은 증언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어떤 인간도 그들의 증언을 능가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는 사도들이 가장 믿고 받아들일 수 있는 최고의 증인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증거하기 위하여 제자들을 자기의 증인으로 세웠습니다. 별로 많이 배우지 못하였고, 우수하지도 못했던 그들을 세웠던 것은, 가감 없이, 그리고 논리적으로 증명하려고 하지도 않고, 꾸미고, 미화시켜서, 이상한 것으로 만들 만한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라야 우직하지만, 자기들이 본 그대로를 전하기에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죽음은 전혀 생소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곧 출애굽과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역사가 곧 죽었다가 다시 살리시는 역사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은 메시야의 부활(37)을 암시해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생소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또 메시야의 부활도 믿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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