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그리스도를 장사한 사람들

박길현목사(대구)

by 김경호 진실 2014. 11. 6. 09:10

본문

그리스도를 장사한 사람들(요19: 38-42)




오늘은 예수를 장사한 사람들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다 이루었다고 외치시면서 자기의 영혼을 버리신 예수님을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라는 사람과 니고데모가 장사를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못 박히신 그 곳에 동산이 하나 있었고, 그 동산에 아무도 묻힌 적이 없는 새 무덤이 있었는데 그 무덤이 예수님의 시체를 묻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날이 예비일이었으니, 빨리 돌아가서 유월절 지킬 준비를 해야 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가까이에 준비된 그 무덤에 예수의 시체를 두었던 것입니다.

먼저 아리마대 사람 요셉에 대하여 생각합시다.  '요셉'이라는 이름을 먼저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은 태어날 때와 죽을 때에 다 요셉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에 의해서 보호를 받았습니다. 마리아의 남편이 '요셉'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에 의해서 아기 예수는 보호를 받고 양육되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죽고 난 후에 또 '요셉'이라는 사람에 의해서 예수님은 무덤에 묻힘니다. 이 무덤은 요셉의 무덤입니다(마27:59-60). 죽고 난 후에 예수의 시체가 요셉에 의해서 보호를 받은 셈입니다.
이렇다면 예수님의 생애에서 요셉이라는 인물을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요셉이라는 인물들을 사용해서 예수의 생애 시작과 종결을 보호하도록 하셨을까요?  이런 질문을 하고 나니 우선 요셉이라는 이름의 뜻을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이름의 뜻에 하나님의 어떤 뜻이 담겨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요셉'이라는 이름은 아이를 낳지 못하던 라헬이 아들을 낳고서 붙인 이름입니다. '하나님이 내 부끄러움을 씻으셨다'라고 기뻐하면서,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해 주시기를 원합니다'라는 뜻으로 붙인 이름입니다(창30: 22-24). 그래서 '요셉'(@seAy)이라는 이름은 '더하는, 더하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이름대로 라헬에게 아들이 더해졌습니다. 그 아들이 '베냐민'이었습니다.  라헬은 베냐민을 낳으면서 난산으로 인하여 죽습니다. 그래서 라헬은 이 아들을 '벤오니'('나의 슬픔의 아들')라고 부르면서 죽어갔습니다. 하지만 그 아버지 야곱은 그를 '베냐민' 곧 '오른 손'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오른 손은 능력과 힘을 뜻합니다. 아마도 야곱은 라헬이 요셉에게 건 소원대로 아들이 하나 더 태어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능력을 느꼈던 모양입니다. 그냥 육정으로 한 아들이 더해졌구나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느꼈던 것입니다. 요셉은 이런 하나님의 능력을 상기시키는 자요, 하나님의 능력을 더해주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요셉은 하나님의 능력을 중보해주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죽을 임시에 이 요셉에게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것을 예언했습니다. 창세기 49장에는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활 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았으나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내 아버지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창49:22-26)라고 했습니다. 여기 이스라엘의 목자는 전능하신 하나님임을 보여 줍니다. 이 전능자 하나님이 요셉을 담을 넘어 다른 나라에까지 힘을 뻗치도록 할 것이라고 야곱이 예언합니다. 야곱이 이렇게 예언한 것은 요셉 생애에서 겪은 고난과 희생과 그 후에 도달하게 된 영광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능력이 미래에도 요셉을 통해서 나타나게 될 것임을 야곱이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계시역사에서 과거는 미래를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요셉은 미래에도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낼 자입니다. 더하는 것이 단순히 아들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전능자 하나님의 능력을 더할 자가 요셉임을 말해 줍니다.
이러한 계시적인 맥락은 예수님의 지상 생애에서 활약했던 요셉이라는 인물들에게도 진실인 것 같습니다. 예수의 탄생과 자라는 과정에서 울타리가 되어 주었던 요셉의 임무는 하나님의 능력이 이 땅에 뿌리를 내리도록 했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장사 지내기 위해서 동원된 요셉은 이제 하나님의 능력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도록 하는 일을 섬긴 인물입니다. 누에의 번데기가 나비가 되어서 하늘을 날게 되기 직전에 그 번데기를 보호해 주는 것이 고치이듯이, 부활하시기 직전의 예수의 몸을 보호하는 무덤을 요셉이 마련하였습니다. 부활은 최고의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입니다. 요셉은 이런 것을 드러내도록 하는데 하나님이 사용한 인물입니다.

이렇게 볼 때에 성경에서 요셉은 하나님의 능력을 더하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더해져야 땅이 살고 사람이 삽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더해지기 전의 세상은 어두움이고, 무능력의 세상입니다. 죽음과 절망의 세상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하나님의 능력이 더해져야 빛과 능력과 생명과 소망의 세상이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만이 곧 세상의 유일한 가치입니다. 요셉은 이런 일을 하도록 하나님이 사용한 인물이요, 요셉이라는 이름 자체도 하나님의 능력을 더하는 자라는 의미에서 중요한 뜻이 있습니다.
이런 점을 생각할 때에 요셉에게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것을 본 유대인들은 정신을 바짝 차렸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무시하였습니다. 계시는 작은 부분이라고 가볍게 여길 것이 아니라, 삼가고 살피면서 신중하게 연구하여야 할 대상입니다. 선지자들이 이렇게 했다고 베드로 사도는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사람은 이런 태도를 버리고 세속화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하리마대'(~Arimaqai,a)라는 지명도 이러한 계시적인 맥락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헬라어의 이 이름은 히브리어 '하라마다임'(haramathaim; ~yIt:±m'r"h')의 음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하라마다임'은 사무엘이 출생하고 살았던 곳입니다. 이곳을 라마라고 하기도 합니다(삼상 1: 1,19). 여기서 '소빔'이라는 말을 붙였는데 아마도 이 말은 히브리의 어법으로 보아서 '숲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사무엘상 1:1절에는 '라마다임 소빔'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숲 사람들의 두 산들'이라는 뜻을 가진 고유명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숲 사람들이 거점으로 삼아서 살던 두 개의 산이 있는 산지를 이렇게 부르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이곳을 '라마'(삼상1:19;hm'r'; '높은 곳')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요셉이 이곳 출신이라고 생각할 때에 '요셉'은 사무엘을 연상하게 했던 인물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것은 요셉의 임무가 사무엘의 임무와 비슷하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사무엘은 왕이 없어서 엉망진창이었던 시대에 하나님이 세우시는 왕을 세워서 이스라엘에 왕국이 등장하게 했고, 그것을 통해서 조상들에게 약속했던 나라가 세워지도록 했던 인물입니다.  요셉의 임무는 바로 이러한 사무엘의 기능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셉이 그리스도의 시체를 무덤에 보존하였고, 예수님은 거기로부터 부활하여서 진짜로 이스라엘 곧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도 새로운 세상의 중재자 노릇을 했었고, 요셉도 새로운 세상의 중재자 노릇에 기여했습니다.
사무엘과 요셉의 유사성은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사무엘은 부패한 제사장 엘리의 아들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제사를 모독하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곳인 성전 성소 여호와의 궤 곁에서 등불을 돌보면서 자랐습니다(삼상3: 3). 부패한 지도자들이 진을 치고 사는 성소 속에서 하나님이 사무엘을 숨겨서 키운 셈입니다. 누가 정식 제사장도 아닌 이 사무엘이 성전 지배자들을 대신해서 제사장과 선지자와 왕과 같은 일을 하면서 새 시대를 준비하는 일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겠습니까? 만약 엘리의 아들들이 이런 낌새를 조금이라도 눈치 챘었더라면, 그들이 사무엘을 가만히 놓아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전 속 부패한 제사장들 한 가운데서 예상 밖의 작업 곧 사무엘을 키우는 작업을 하셨습니다.
요셉도 이런 점에서 마찬 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가는 요셉을 산헤드린 회원 중의 한 사람으로서 선하고 의로운 사람인데, 그는 산헤드린 회의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않았던 자라고 말합니다(눅23: 50-51). 하나님은 이런 자를 산헤드린 속에 심어 두었습니다.  아무도 산헤드린 속에 이런 사람이 있을 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 속에서 살아왔으며, 결정적인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도 처음부터 담대하고 용기 있게 행동하지는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서 예수의 제자임을 숨겼다고 요한은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서 죽자 용기를 내어서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를 자기를 위해서 판 무덤에 두었습니다. 산헤드린 속에 이런 인물을 두신 분이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이 요셉에게 용기를 주신 것이 틀림 없습니다.

성경 역사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일하신 이러한 사건을 거듭해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방 땅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는 야곱에게 자신이 야곱 속에 계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속에 계시는 사람을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고 부르셨습니다(창32장). 그리고 야곱의 자손 중에서 요셉에게 특별히 함께 계셨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하나님의 계시를 해석할 수 있었고, 애굽에서 유혹과 시련을 겪는 중에서도 그것을 다 극복하고 마침내 야곱의 자손들을 구원하는 헌신자 나실인이 되었습니다(창49). 요셉 속에 하나님이 계셔서 이런 일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요셉 이후에는 애굽의 이스라엘 중에 계시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번성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이스라엘 중에 계시면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셔서 가나안 땅에 도착시키셨습니다.  정착기 말엽에는 사무엘과 같은 사람들을 택하여서 그들에게 계셨고, 그 후에는 다윗과 그의 사람들에게 계셨습니다. 열왕 시대에 엘리야나 엘리사, 7000명의 남은 자와 그 후의 선지자들과 남은 자들은 바로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도 신앙을 잃지 않았던 남은 자가 이런 사람들이었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 에스더와 모르드개와 그 때의 신앙인들이 그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는 시대마다 이런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있었더랬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은 시대마다 선택하시고 일으키셨습니다. 자기의 언약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은 이러한 일을 하셨습니다.  이러한 인물들의 연속선상에서 하나님을 모신 한 사람이 바로 오늘 예수님을 장사한 사람 요셉입니다. 요셉은 이런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은 예수 시대에 숨겨져 있던 이스라엘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니고데모도 이런 사람들 중의 한 사람입니다. '니고데모'(Niko,dhmoj)라는 이름은 '백성의 승리'(victory of people)라는 뜻을 가졌습니다. 이 사람도 산헤드린 의원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몰약과 침향 섞은 것 백 리트라쯤 가지고 왔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침향이란 '알로에'(avlo,h)를 말합니다. 알로에 수액(sap)을 말하는 것이 틀림 없습니다. 그는 몰약과 알로애 수액 섞은 것을 가져왔습니다. 방부처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양이 100 '리트라'고 했는데, 여기서 '리트라'에서 요즈음 우리가 사용하는 '리트'라는 말이 나온 것으로 생각 됩니다. 하지만 당시 1리트라의 양은 325g이었다고 하니 요즘 우리가 생각하는 1리트라의 양과 다르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100리트라라면 32,500g이니 한국의 부피 단위로는 2 말이 채 못 되는 정도의 양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쨌든 이것은 부자가 아니면 제공할 수 없는 굉장한 가치의 방부향료라고 생각 됩니다. 자기 장례 하는 셈으로 예수의 장례에 이것을 사용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셉과 니고데모는 이 향료를 예수의 몸에 바르고, 세마포에도 바르면서 예수의 몸을 쌌을 것입니다. 그리고 요셉이 자기를 위하여 파 놓은 무덤에 예수의 몸을 넣어 두었습니다. '두었다'는 말이 우선 급하니까 임시로 그렇게 한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나중에라도 알맞은 장소에 장례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그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요셉은 예수를 자기의 가족처럼 생각하고 영구히 자기들의 가족 묘지에 둘 생각을 했을 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의인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자기와 한 가족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이렇게 거행된 장사는 부자들이 거행하는 장사가 되었습니다. 이사야가 말했던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사53: 9)는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숨겨진 사역을 보게 됩니다. 요셉과 니고데모와 같은 사람을 산헤드린 속에 두셨다가 자기의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숨겨진 사역을 봅니다. 이 사역은 사람의 눈에 드러나지는 않지만, 섬세하고, 세밀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이루어집니다. 이사야가 예언했던 것이 바벨론에서도 그대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고, 또 예수에게서도 정확하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뜻을 이루기 위하여서 하나님은 자기의 사람들을 택하여서 시대마다 사용하셨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택함 받은 '이스라엘'이었습니다. 부름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이러한 현상을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사람들이 하는 일은 인간이 이루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선택하셔서 자기 일을 하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택을 받은 사람은 자원함으로 그 일을 하게 되는 것이 틀림 없습니다. 그것이 그 사람 속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니,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선택 받은 사람 역시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이란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택된 모든 사람이 하는 일은 이 하나님의 구원의 일을 구원의 일로 받아들이는 것이요, 또 하나님이 살게 하는 구원의 삶을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각자가 자기에게 주어진 일이 어떤 것이든지 믿음으로 그것을 하면서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모신 사람들이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신앙을 자기 생명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 속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보호와 임재가 있습니다. 또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헌신이 있게 되어 있습니다. 소원을 두고 행하시게 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에녹과 같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요셉과 니고데모는 구속 역사상 이러한 수많은 사람들 중에 두 사람일 뿐입니다. 이들이 당시의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정체 곧 교회의 정체를 분명히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시대마다 하나님이 선택하여서 그 속에서 살던 사람들이다. 그리고 나라 이스라엘 곧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는 이런 사람들의 모임의 합이다'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살지 않는 사람은 그들이 어디에 속해 있든지 하나님의 백성도 교회도 아닌 것이 틀림 없습니다.
또 여기서 유추할 수 있는 바는 각 시대 마다 이렇게 남겨지는 하나님의 백성은 반드시 있으며, 또 이들은 그렇게 많은 대중이 아닐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들이 진정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은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내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은 진정 하나님의 승리 곧 백성의 승리를 보여주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아닌 사람들은 그가 유대인 곧 교회 밖에 있든지 안에 있든지 결코 이스라엘에 속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참 이스라엘 곧 예수님이 '내 교회'라고 말씀하신 것은, 개인이든지 집단이든지, 하나님이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http://www.covenant.kimc.net/






728x90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