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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바냐의 여호와의 날

박길현목사(대구)

by 김경호 진실 2012. 5. 28. 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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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바냐의 여호와의 날

스바냐의 여호와의 날
오늘은 스바냐서를 들으려고 합니다. 스바냐를 들으려고 한다고 말한 것은 스바냐서에서 어떤 일부분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스바냐서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뜻에서입니다. 오늘날 성경의 어떤 부분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어떤 부분은 사람의 말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성경은 부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있는 그릇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경향에 반대하여서 저는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강조하려고 합니다. 스바냐서도 전체가 하나님 말씀입니다. 그래서 스바냐서를 들으려고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1. 언제 스바냐가 선지자 활동을 했는가?
스바냐가 여호와의 말씀을 받은 역사적 배경에 대하여서 몇 곳에서 비교적으로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의 시대에 스바냐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1:1상)라고 했습니다. 유다왕 요시야는 주전 640-609년에 유다를 다스렸던 왕입니다. 유다의 왕중에서도 가장 악한 왕인 므낫세와 그의 아들 악한 왕 아몬을 이어서 왕이 된 사람이 요시야입니다. 가장 악한 왕들을 할아버지와 아버지로 두고서도 가장 선한 왕 중에 한 왕이 된 사람이 요시야입니다. 물론 요시아의 증조부는 선한 왕 히스기야였습니다. 이것을 볼 때에 신앙은 조상 탓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조상이 기도 많이 했다고 해서 자손이 신앙인이 되는 것도 아니고, 기도하지 않았다고 자손이 불신자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인은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이 믿어서 되는 것 같습니다.
스바냐는 요시야 때에 예언하면서 활동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언하며 활동했던 시기를 더 정확하게 알 수 있는 단서가 있습니다. 2:13절에 "여호와가 북쪽을 향하여 손을 펴서 앗수르를 멸하며, 니느웨를 황폐하게 하여 사막 같이 메마르게 하리니..."라고 한 것을 보아서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가 함락되기 전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니느웨는 주전 612 년에 바벨론에 의해서 함락되었습니다. 그러니 스바냐는 그 이전에 함락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요시아의 개혁하기 이전이었을 것이라는 짐작도 가지게 합니다. 1:2-6, 3:1-7절에 말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들은 요시아가 개혁을 한 이전의 죄악들을 가리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요시야가 개혁을 시작한 것이 주전 621년이니 스바냐는 주전 621년 이전에 활동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즉 스뱌냐는 요시야가 왕이 된 640에서 621 사이 어느 시기에 예언을 시작하였을 것입니다. 요시야의 개혁을 도울 목적으로 사역을 시작했다면, 요시야가 개혁을 시작하기 조금 전부터 사역을 시작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 봅니다.
2. 스바냐는 어떤 사람이었던가?
1:1 절 하반절은 스바냐가 어떤 사람이었던 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스바냐는 히스기야의 현손이요, 아마랴의 증손이요, 그다랴의 손자요, 구시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히스기야가 이사야 때의 히스기야 왕 즉 앗수르 왕 산헤립의 군대 185,000을 물리친 그 히스기야 왕을 가리킨다면, 스바냐는 왕족임을 알 수 있습니다. '히스기야-아마랴-그다랴-구시-스바냐'를 '히스기야-므낫세-아몬-요시야-여호아하스(여호야김, 시드기야)'와 비교하면, 스바냐는 요시야의 조카뻘(7촌)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이는 요시야보다 더 많았을 가능성이 많지만, 한국 촌수로 따지면 요시야의 아들들과 형님-동생(8촌)이라고 부르는 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계에서 볼 때에 스바냐는 요시야의 궁전에 자주 들어가서 말씀을 전하면서 개혁을 유도했을 것이라고 생각 됩니다. 히스기야의 선한 통치가 므낫세와 아몬의 악한 통치로 인하여 무색하게 된 것을 지적하면서 바른 통치를 하도록 촉구하고 유도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요시야가 드디어 개혁을 하도록 상황을 이해시키는 작업을 하였을 것입니다. 개혁이란 갑자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면 요시야가 개혁을 시작하기까지 스바냐가 가르치고 이해시키는 작업을 했었으리라고 추측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 됩니다(왕하 22장 참조).
3. 스바냐서의 내용
스바냐는 마치 온 세상의 심판을 결심한듯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내가 땅위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리라 내가 사람과 짐승을 진멸하고,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와 거치게 하는 것과 악인들을 아울러 진멸할 것이라 내가 사람을 땅 위에서 멸절하리라"(1:2-3)라고 합니다.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까지 진멸할 것을 말씀하는 것은 마치 노아의 홍수 때의 심판을 말씀하시는 것 같고(창7:21-23참조), 심지어 고기까지 진멸하겠다고 하는 것은 오히려 홍수 때보다 더 무섭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곰곰이 살펴 보면 이 말씀은 인간에 대한 철저한 심판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이해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 짐승, 새, 바다 고기, 거치는 것 다음에 또 악인들을 거론하고 있는 것을 볼 때에 사람에 대한 철저한 심판으로 이해 됩니다(행10:12 참조).
심판하게 되는 원인은 죄악입니다. 죄악은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바알숭배는 다산과 윤택함을 비는 가나안 종교요, '그마림'은 이스라엘을 이교적인 우상숭배로 인도하는 제사장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지붕에서 하늘 것들을 숭배하는 '하늘 뭇별들'도 있었습니다. 원문은 '하늘 군대'라고 직역할 수 있습니다. 당시 상황을 생각해 보면 별들을 가리키는 것이 틀림 없습니다. 또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밀감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들'은 여호와를 섬긴다고 하면서도 바벨론 신 밀감에게 맹세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여호와인지 바벨론 신 밀감인지를 구별하지 못하는 소경과 같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만큼 사람들이 혼합주의적인 종교관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요즘도 이런 혼합주의적인 종교관을 가지고 성경의 하나님과 부처님과 하늘 상제님과 무당들이 부리는 신을 구별하지 못하고 섬긴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것을 종교 다원주의라고 말합니다. 모든 종교는 다 결국 같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또 '여호와를 배반하고 따르지 아니한 자들 곧 여호와를 찾지도 구하지도 아니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여호와 신앙에서 떠나가버린 사람 곧 배교자들입니다. 여호와께는 전혀 관심이 없게 된 무신론자와 같은 사람을 말합니다. 이들은 지적으로 명석한 사람들일 수가 있습니다. 또는 부를 축적하여 누리다가 보니 신이란 별로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게 된 사람들일지도 모릅니다. 이스라엘의 타락한 종교적 상황이 이러하였습니다. 이런 풍토 속에서 3:1-4에 말하는 강포가 성행하고, 여호와의 신앙은 무의미하게 되며, 방백은 부르짖는 사자요, 재판장들은 굶주린 늑대요, 선지자들은 야비하고 간사하며, 제사장들은 성소를 더럽히며 율법을 무시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는 이런 이스라엘 백성을 희생으로 삼고 그것을 즐길 자들을 청할 것이라고 합니다(7). 이것은 바벨론 군대를 불러 와서 이스라엘 백성을 희생물처럼 살해하도록 할 것을 말합니다(7). 그래서 이날을 '여호와의 희생의 날'(8)이라고 합니다. 이날에는 방백들과 왕자들과 이방인의 옷을 입은 자들을 벌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방인의 옷을 입었다는 것은 이방인 행세를 하고 싶어서 이방인의 옷을 입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바벨론 사람, 블레셋 사람의 행세를 하고 싶어서 그들의 옷을 입고 그들처럼 행동하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또 남의 집에 침입하여 탈취한 물건으로 자기 주인의 집을 채우는 강도 짓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9). 주인은 그들의 두목이었습니다. 요즈음의 조직폭력배나 다름 없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은 배금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없다. 복도 화도 내리지 않는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살아계시는 분이라는 것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모습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광야와 그 동안의 모든 역사를 부정하는 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질적인 무신론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될 때에 사람들은 재물을 모으고 권력을 추구하는 데만 집착하게 됩니다. '어차피 살다가 죽는 세상 누리고 지배하면서 즐기자'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마음이 찌꺼기 같이 가라앉아서 어떤 선지자의 말에도 흥미가 없습니다. 이런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벌하시며 그들이 모은 것을 다 빼앗기고 없어지게 하겠다고 하십니다(10-13).
그러므로 여호와의 날은 통곡의 날이요(14), 분한과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폐와 패망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며, 나팔을 불어서 경고하며 견고한 성읍들을 치며 높은 망대를 치는 날이라고 합니다. 이 날은 온 땅의 거민을 멸절하는 날이라고 합니다(14-18). 참으로 무서운 심판의 날이 여호와의 날입니다.
이런 중에도 선지자는 회개를 촉구합니다. 수치를 모르는 중에 있다가도 심판의 날이 이르기 전에 속히 회개하기를 촉구합니다.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사람도 역시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심판 때에 숨겨주실 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2:1-3). 죄에 빠져 있는 사람이 회개해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여호와의 규례를 지킨다고 하는 사람도 공의와 겸손을 구해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공의란 여호와의 은혜를 공적인 일에서 실행하는 것을 말하며, 겸손이란 여호와를 섬기고 복종해야 할 분으로 알고 굴복하고 의뢰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인간이란 온전한 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무리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며 산다고 해도 자랑할 수가 없으며 겸손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들을 심판하시는 중에라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선지자는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2:1-3).
하나님의 심판은 타락한 이스라엘만이 아닙니다. 부패한 블레셋 민족에게도 내릴 것이라고 합니다(4-7). 가사, 아스글론, 그렛은 블레셋인들을 가리킵니다. '버림을 당하며,' '폐허가 되며,' '쫓겨나며,' '뽑히우며,' 멸하여 주민이 없게 되며'라는 표현들이 블레셋의 운명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모압과 암몬도 이스라엘 심판을 듣고 조롱하고 비방하였습니다. 조롱하고 비방했다는 것은 교만했다는 말입니다. 자기들은 더 많은 죄를 지으며 살지만, 자기들은 망하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고 심판받아 망하는 이스라엘을 비방하며 조롱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들도 소돔과 고모라 같이 되어서 영원히 황폐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 땅은 찔레가 번성하는 황무지가 되며, 소금 구덩이가 되리라고 합니다. 생산할 수 없는 땅이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8-11). 다음으로 선지자는 남쪽의 구스(에디오피아)도 칼에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합니다(12). 구스에는 완전한 멸망을 선포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북쪽의 나라인 앗수르와 니느웨에 대하여서는 황폐와 사막같이 될 것을 말합니다. 폐허가 된 성읍에는 각종 짐들과 당아와 고슴도치가 사는 곳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나만 있고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고 말하던 곳이 황폐하여 들짐승이 거하는 곳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13-15).
선지자가 심판을 말하는 이스라엘 주변의 나라들은 서쪽, 동쪽, 남쪽, 북쪽 순으로 거론합니다. 이러한 순서를 따르는 이유를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스라엘 사방의 나라들이라는 점입니다. 온 세상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온 세상 나라들에 대한 심판을 말하고 있다고 읽는 것이 옳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이스라엘이 심판을 받을진대 하나님이 없는 세상 나라들이 심판을 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하지만 세상은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스라엘을 조롱하고 비웃습니다. 요즈음 기독교의 부패를 보고 욕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하지만 욕하는 그들도 파고 들어가서 보면, 더욱 부패하여 있습니다. 그들이 기독교를 욕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고로 기독교가 하나님께 부패하여 심판을 받는다면, 세상이야 더욱 심판을 받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3장 앞부분에서는 예루살렘의 타락을 탄식하고 있습니다(3:1-7). 패역하고 더러운 곳, 포학한 성읍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방 여러 나라들을 심판하시면서, 이스라엘만이라도 여호와를 경외하면, 형벌을 내리기로 정해놓기는 했지만, 그들의 거처를 끊어버리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부지런히 악행을 행하였다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탄식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열국을 불러 모아서 이스라엘을 칠 날을 기다리라고 말씀합니다(8). 이스라엘은 심판의 날을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중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은 백성들의 입술을 깨끗하게 하여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도록 할 것이며, 또 한 가지로 자기를 섬기게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9). 이 9절의 말씀은 이해하기가 애매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그 뜻을 파악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 백성'이라고 번역된 말은 흩어졌던 이스라엘 백성들 특히 구스로 흩어졌던 이스라엘 백성들 개개인들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10참고). 그래서 저는 '백성들'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신앙으로 불러 여호와를 섬기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한 가지로'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애매하게 여겨집니다. 이 말은 히브리말로는 '하나의 어깨로'라는 말입니다. 저는 '어깨로'라는 말에서 이스라엘의 제사장 됨을 연상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로서 여호와를 섬겨야 할 나라요, 그래서 제사장들이 법궤를 멜 때에 어깨로 메어서 모셔야 했던 것을 연상합니다. 따라서 저는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삼아서 하나님을 섬기게 할 것을 뜻하는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그리고 '하나의 어깨'라고 했으니 여호와를 섬기기에 한 마음 한 뜻이 될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때문에 많은 성경 번역본들에서 '한 뜻으로'(with one consent)라고 번역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간혹 '어깨와 어깨를 맞대고'(shoulder by shoulder)라고 번역한 것을 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에 여호와 하나님 섬김에는 종파도 교단도 없어야 하는 것이 옳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종파와 교단의 난립은 진리에 대한 이해가 짧은 무지와 분리주의적 폐쇄성 때문이며, 여기에 인간의 각종 부패한 세속적인 욕망들로 인하여 빚어진 결국입니다.
하나님은 9-10절에서는 흩어진 자들을 신앙으로 일깨워서 돌아오게 하겠다고 하시고, 11-12에는 이스라엘의 성산에서 교만한 자들 즉 그곳을 지배하던 이방인 세력(15참조='원수를 쫓아냈으며')을 축출할 것이며,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을 남겨 두어서 여호와의 보호를 받도록 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13절에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말씀합니다. 이들은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며, 거짓된 혀가 없을 것이라고 한 것을 볼 때에, 여기서 남은 자는 흩어졌다가 돌아온 사람들(9-'입술을 깨끗하게 했다')과 예루살렘에 남았던 곤고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포함되는 것 같습니다.
시온은 이런 사람들로 이루어집니다. 이런 사람들을 '시온의 딸'이라고 합니다. '딸'이라는 말이 이런 형태로 사용되는 일이 흔한데 이런 경우에는 '멤버쉽'(membership in group)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시온의 멤버는 이방 나라에서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새롭게 되어서 돌아 온 사람들과 원래에 남겨졌던 곤고하고 가난한 사람들로 구성된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제사장이 되어서 여호와를 섬기도록 할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시온은 두려워하지 말며, 맥이 빠져 손이 축 쳐진 모습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형벌이 끝났고, 원수가 쫓겨났으며,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 하나님 여호와가 그 가운데 계시면서, 시온의 백성들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잠잠히 시온을 사랑하시며,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17).
저는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시온이 이렇게 하나님의 기쁨이 된 때가 언제 있었습니까?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돌아와서 시온의 영광이 이렇게 회복되었습니까? 대관절 이러한 역사를 우리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사건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예수님 의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이 출애굽하시기 전에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기뻐하셨던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는 자신이 성령으로 다시 오셔서 임재하심으로 인하여 제자들이 말할 수 없이 기뻐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요14:28,16:21-24). 제자들의 이 기쁨은 물론 예수님의 기쁨을 근원으로 하고 있습니다(요15:11). 교회는 이런 기쁨이 충만한 곳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교회가 세상 가운데서 있을 지라도 '기뻐하라'고 말합니다(빌립보서, 살전5:16-18).
이런 구속사적인 맥락을 생각할 때에 스바냐가 예언했던 기쁨의 시대는 교회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교회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스바냐가 내다보았던 남은 자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와 그로 인한 하나님의 열락(悅樂)이 예수님의 사역으로 인하여 교회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를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교회는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기뻐하듯이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이 교회입니다. 그리고 교회 역시 말할 수 없는 열락(悅樂)을 가졌습니다.
둘째, 교회는 남은 자로 구성됩니다. 그리고 이 남은 자들은 세상의 고통에서 깨닫고 돌아 온 사람들이거나, 세상에 의지할 것이 없는 곤고하고 가난한 사람들로 구성됩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구성원은 세상에서 고통을 경험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고통의 곳이며, 기쁨이 없는 곳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억만금을 주더라도 세상에서 열락(悅樂)을 구하지 않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속성을 너무나 뼈저리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궁극적인 교회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기쁨은 육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셋째, 교회가 남은 자라면, 이 교회에서 벗어나서 나가는 사람들도 수도 없이 많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교회로 부름을 받았지만, 교회에서 떠나가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 역사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버렸듯이 오늘날도 교회 안에 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싫어하고 거절하며, 세상 사람으로 살다가 교회를 떠나서 영원히 망하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런 사람들이 원래부터 택함을 받았었는지 아닌지는 저로서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성경을 볼 때에 한 마디로 규정할 수가 없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마3:7-10, 롬11:20-24, 고전9:27, 10:1-13, 딤전1:19-20, 딤후2:17-18, 히6:4-8, 계2:4-5,16,20-23, 3:2-3, 16 등). 하지만 이런 사람들이 다 제거되고 남은 사람들만이 시온이요 교회라고 하는 것이 옳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런 자들에게 있는 것 같습니다. 주님이 자기 제자들의 무리를 보시고 가지셨던 사랑은 이런 관점에서였던 것 같습니다. 자기 제자들을 통해서 새로운 시작 곧 교회가 시작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교회가 곧 하나님의 나라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넷째, 지금도 심판은 교회에서 먼저 시행될 것이며, 또 시행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세상의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선민이었던 이스라엘을 먼저 심판하시고 주변의 여러 나라들을 심판하셨던 바와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은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마지막 심판 때까지 계속해서 심판을 시행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참 남은 자 교회는 주님이 지키시면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나라도 마침내 완성시키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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