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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신학서론2-계시

조직신학

by 김경호 진실 2012. 6. 20.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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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서론2-계시

 

1.계시의 정의

유한한 인간은 무한한 하나님을 알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자기 자신을 알리실 때만 알 수 있는데 이렇게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드러내시고 알리는 것을 계시라고 한다.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이다. 타종교와 기독교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바로 계시에 근거한다. 초월이 아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초월은 모든 종교에 다 있다. 가장 원시사회에서도 종교는 있고 그 종교도 초월을 특성으로 가지고 있다. 하다못해 무당도 초월적인 능력을 보여주지 않는가? 한편 계시는 하나님의 본성의 일이 아니고 의지의 일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고 그를 인하여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다. 그러므로 계시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계시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이라면 계시를 기본으로 해서 진행되는 기독교 신앙과 신학의 목적도 자연히 하나님의 영광이 되어야 한다.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함이 아닌가?(소요리문답 1문)

 

2.계시의 범위와 특징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신다고 할 때 모든 것을 다 나타내시는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가 알고 싶고 궁금해 하는 모든 것을 다 증명하시고 백과사전처럼 모든 정보를 다 설명하거나 드러내지 않는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이것만 이해되면 믿겠다고 하는 그런 것들을 다 답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시73편의 기자 같은 물음과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실 때 필요한 것만 기쁘신 뜻대로 계시하시고 이를 통하여 영광받기를 원하신다. 이것을 계시의 제한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제한적인 것이 무엇인가? 인간을 향한 영원한 목적과 계획,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와 권능과 지혜, 영광이다. 그것마저도 제한적이다. 그것 외에는 언급하지 않는 것이 계시의 특징이다. 그러므로 계시라고 할 때 정보적 차원의 계시개념을 몰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3.계시의 분류

1)일반계시

①창조

하나님의 최초계시는 창조이다. 칼빈의 말대로 창조를 통하여 불가시적인 하나님이 가시적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창조를 통하여 하나님의 존재와 권능과 영광을 알리시고 그의 지혜와 권능을 나타내셨다. (롬1:20. 시19:1)

②인간의 양심과 도덕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피조물이므로 인간의 구조자체가 하나님의 존재를 현시한다. 특별히 인간에게 주신 양심을 통하여 윤리법을 세워 하나님이 선악 간을 심판하시는 것을 알게 하셨다. 칸트가 밤하늘에는 별들이 반짝이고 내 마음에는 도덕률이 반짝인다고 경탄한 그것이 바로 양심이다. 양심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의식하게 된다. (롬1:19, 롬2:14)

 

2)일반계시의 한계와 직임

하나님은 창조와 인간에게 주신 양심과 도덕률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셨다. 이 계시는 하나님의 존재와 영광과 신성을 알리는데 부족함이 없는 계시이다. 그러나 죄가 이 모든 것을 깨트려버렸다. 죄에 빠진 인간은 일반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되었다. 오히려 일반계시인 창조와 양심을 가지고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섬기는 우매함에 빠져버렸다. 롬1:19-23절을 보라. 사람들은 본성적으로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것은 고의적인 악이다. 그러므로 일반계시는 죄인들이 하나님을 몰라서 믿지 못했다고 하는 핑계나 변명에 대해 입을 막는 역할을 한다.

 

3)일반은총

하나님이 창조 시에 주신 일반계시가 인간의 타락으로 방해를 받고 막혀 있어도 하나님은 일반계시를 주실 때 함께 허락하신 은혜와 은사들을 계속 유지하고 계신다. 이것이 일반은총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이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구원이 완성되는 그날 까지 그대로 흘러가도록 유지하시는 것이 일반은총이다. 일반은총으로 인간은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제한적이지만 여전히 도덕적인 기능들을 통해 과격한 악을 억제하고 시민생활이 가능한 것이다. 상식이 유지되고 문화가 발전하고 과학이 발전하는 것도 일반은총의 결과이다.

 

4)특별계시

특별계시는 창조 후에 말씀으로 온 계시이다. 창조는 하나님의 존재와 영광과 신성과 능력을 드러내는데 충분하지만 인간을 만드시고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작정과 경륜을 다 알리지는 않는다. 일반계시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창조주이며 우리는 피조물이라는 인식만이 가능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단순히 피조물로만 만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인격체로 만드셨고 신적인 교제가 가능한 언약의 대상으로 만드셨다. 이것은 일반계시로 나타내시지 않고 직접 말씀하심으로 드러내셨다. 인간에게 문화명령을 주고 선악과 언약을 맺는 하나님을 보라.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인간이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대리자로 서며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는 특별한 존재임을 알게 되며 하나님이 언약의 하나님인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말씀으로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과 인간의 본분을 알리신 것이 특별계시이다. 그러므로 특별계시는 말씀의 계시이다. 특별히 죄가 오기 전의 말씀계시를 비구속적 특별계시라고 한다. 인간이 죄로 타락한 이후에는 일반계시에도 어두워지고 말씀계시에도 미련해졌기에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비구속적인 특별계시인 최초의 말씀계시는 필연적으로 구원을 위한 구속적 특별계시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특별계시는 무엇인가?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이다. 하나님은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의 죄를 극복하시면서 하나님의 경륜을 알리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재창조하여 인간의 창조목적을 이루어가신다.

 

5)특별계시의 방법

▶직접적인 말씀-아담에게, 아브라함에게, 노아에게, 모세에게, 구약의 여러 선지자들에게, 그러나 신약에 와서 성경이 완성된 후에는 직접계시는 종결되었다.(히1:1-2)

▶하나님의 현현-때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자의 모습으로 나타나 심판과 구원의 경륜을 펼치셨다. 이 때 나타난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현현이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예표라고 볼 수 있다.

▶꿈과 환상-때로는 꿈과 환상으로 자신의 뜻을 알리셨다. 요셉의 경우, 선지자들의 예, 사도요한. 사도바울, 이것도 성경이 완성된 후 종결되었다. 성경은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을 담고 있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는데 온전한 계시이다. 그것이 부족해서 지금도 꿈과 환상과 예언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딤후3:16-17)

 

6)자연계시와 초자연계시로 분류하는 오해

흔히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를 분류할 때 일반계시는 평범하고 보편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특별계시는 그보다는 뭔가 초월적인 방식의 보다 직접적인 신적계시라고 오해하는 경향들이 있다. 이런 생각의 바탕에는 천주교의 이원론이 원인이다. 천주교는 세상을 인간이 살아가는 자연과 그 자연을 통제하는 신적인 은총의 세계로 구별했다. 자연을 하부계층으로 분류하고 그 위의 상부계층으로 은총의 세계로 분류했는데 문제는 자연에는 신적인 내용을 배제하고 은총의 세계에만 신적인 내용을 담았는데 그 신적인 내용을 초자연적인 초월의 세계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자연은 신적인 내용을 담을 수 없고 초월만이 신적인 내용을 담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신적인 것이라고 하면 무엇인가 우리 인간이 가진 것과는 다른 것이고 범상한 자연과도 다를 것이라는 이런 생각이 계시를 분류할 때 일반계시를 자연계시로 보고, 특별계시를 초자연계시로 보는 오해를 초래한 것이다. 예를 들면 특별한 계시는 초월적인 것으로 증명된다는 것이다. 예수를 믿으라고 할 때 내 주먹을 믿으라고 대드는 사람이 있다면 그 주먹이 잘려나가는 초월적인 현상이 나타나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증명하는 방식이 특별한 계시라고 생각한 것이다.

 

헬라철학이 육체와 정신을 구별하는 이원론이었다면 천주교의 이원론은 이렇게 자연과 초자연을 구별한 이원론이다. 천주교에 의하면 자연은 일반적인 것이고 초자연, 즉 초월만이 특별한 것이다.

 

▶로마카톨릭이 왜 이런 이원론을 가지게 되었는가? 그들의 인간론 때문이다. 천주교는 인간이 원래 이성적이고 도덕적으로 창조되었다고 본다. 이 때 이성적이고 도덕적이라는 말은 중립적이라는 의미이다. 이성과 도덕을 앞세워서 선하게 살 수도 있고 악하게 살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그 위에 하나님의 형상이 주어졌다고 본다. 그들에 의하면 하나님의 형상은 창조 당시 주어진 도덕과 이성에 ‘덧 붙혀진 은사’이다. 인간은 이 덧 붙혀진 은사로 언제나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죄로 타락할 때 이 덧붙혀진 은사가 파괴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타락 이후도 인간은 도덕적인 능력과 이성적인 능력은 여전히 중성적인 상태로 있고 덧붙혀진 은사만 없다는 것이다. 늘 승리한다는 보장은 없어도 열심히 노력하고 도덕적인 삶과 이성적인 삶을 살면 최소한 지옥은 안간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면 그렇게 살면 천국은 가느냐? 그렇지 않다.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최고의 선, 최고의 도덕적인 경지는 지옥은 면하게 해도 천상의 자리까지 인도하지 못한다. 연옥에 가는 것이다. 그 천상의 자리까지 인간을 인도하기 위해서는 초월적인 간섭이 동원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십자가, 신비라고 한다. 그리고 그런 초월적인 은혜를 시여하는 곳이 교회라는 것이다.

 

그들에 의하면 교회는 인간에게 초자연적 은혜를 베풀고 그래서 인간들이 천상적인 것들에 도달하기 위해 허락된 신적기관인 것이다. 이런 생각이 세상과 초월을 나누는 이원론의 근거가 된 것이다. 하나님의 초월을 강조해서 자연으로부터 하나님을 몰아내고 말았다. 자연은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나 독립된 영역이고 나중에는 초월과 자연이 대립적인 상황으로 만들어버리고 초월로만 하나님의 권위와 신적인 내용들을 증명하려고 한 것이다. 이런 생각이 얼마나 강했는가 하면 중세에는 초월과 자연이 부딪치면 초월이 이긴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면 종교재판에 결투가 그것이다. 어떤 재판이라 할지라도 맨 마지막에 피고가 항변하는 방법으로 결투를 신청할 수 있었다. 결투를 통해 자신의 무죄를 증명할 기회를 준 것이다. 왜 결투가 도입되었는가 하면 칼싸움을 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세상의 판단을 뛰어넘은 방식으로 진위를 구별해주실 것이라는 사상이 그것이다. 잘했으면 이길 것이고 잘못했으면 질 것이다...초월적인 방식으로....

   

그러나 개혁주의는 천주교의 이원론을 배격한다. 자연 속에도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신성을 인정한다. 단지 죄로 인해 인간이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인데 그 죄를 넘어서 하나님을 계시하시고 드러내는 것이 특별계시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개혁신학의 일반과 특별의 차이의 중요한 점은 초월이 아니라 죄를 넘어서 오는 하나님의 계시인 은혜이다.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계시하신 것은 일반계시이고 죄 문제를 극복하고 계시하는 것이 특별은혜이다. 죄 문제를 위해 주신 계시가 무엇인가? 성경과 그리스도 아닌가?

 

생각해보라. 죄를 넘어서 오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성경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아무런 계시가 되지 않는 일반이 되고 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은혜가 개입되면 우리는 미련한 눈이 열려서 자연을 보고도 우상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충만한 영광을 노래하는 것이다. 이처럼 개혁주의 신학의 중요한 계시관은 특별계시의 본질을 신비나 초월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은혜에서 찾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특별의 정의를 신비함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내용에서 찾는 것이다. 자연계시가 부족해서 초자연계시를 준 것이 아니다. 죄로 타락한 인간이기에 특별한 은혜가 필요한 것이고 그것이 구속적특별계시인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게 된 이유이다.

 

출처 : 한우리성경강해
글쓴이 : 한우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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