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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일천번제를 교회가 이해하고 있는 방향은 무엇인가?(2)

조영일목사(전주)

by 김경호 진실 2012. 7. 29.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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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천 번제를 교회가 이해하고 있는 방향은 무엇인가?(2)

 

오늘에 교회는 멋있는 말 찾아내기 운동이나 하는 것처럼 경합을 벌이고 있다.

<일천번제>, <중보기도>, <관상기도> 등의 단어들을 만들어 내고 성경의 바른 진리와 가르침을 매우 왜곡되게 해석하며 경건한 믿음의 삶인 것처럼 위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큰 교회를 이끌고 있는 목사들에게서 해석되어지는 성경관이 항상 주님의 뜻에 일치한다고 보는 사대주의를 요한 칼빈은 주의하라고 경고한다. 그것은 중세에 이르는 교회의 부패가 거대한 옛 교회의 교황으로부터 왔기 때문이라는 의미이다. 바른 신앙관을 가지고 있던 중세의 많은 사제들은 왜곡된 해석에 대항하여 싸우지도 못한 체 죽음을 보았던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살아서 왜곡된 성경관을 질타하며 윗텐베르히 대학의 정문에 종교개혁의 이유를 밝히며 개혁문을 내 걸었던 마틴 루터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교회는 이만큼 성경으로 돌아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칼빈의 말과 같이 개혁된 교회는 지속적으로 개혁되어져야 하는데(그릇된 성경관으로부터 다시 성경을 향해 변화를 가져오기는커녕) 오히려 그리스도만이 지니는 고유한 거룩을 도용하고, 이교적 신앙행위를 교회의 경건인양 목사 자신의 인지도를 내세워 교회를 미혹하고 있음은 사실이다.

지금 필자가 말하고자하는 일천 번제(一千 燔祭 ; a thousand burnt offerings)는 오늘날 교회가 성경의 문자적, 역사적 사실을 감추거나, 전혀 본문을 해석하는 기회를 상실하고 왜곡된 해석을 그대로 수용하여 교회와 자신의 사적인 용도를 위하여 교회에 강요해 온지가 상당한 시간이 지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신자는 일천 날 동안, 일천 번(numbers)의 헌금을 강단에 제물, 감사, 혹은 속죄의 제물로 드리고, 그 제물의 보상(reward)으로 만사형통이라는 주의 복 주심을 기대하라고 가르치면 얼마나 우매한 일인가! 차라리 양심 있는 목사라면 본문의 의미는 이것인데, 교회의 중요한 일들을 위하여 계속적으로 몇 번(numbers)의 헌금을 작정하고 드리는 일은 어떻겠느냐고 그들의 신앙에 동조를 구하는 것은 정직하기라도 할 것이다.

지난 호에 이어 오늘 드리는 내용은 이러하다. 왕상3:4에 ~ 기브온 산당은 크고 넓었다고 하였다. 당시 기브온 산당은 많은 무리의 제물(짐승의 떼)을 수용하기에 매우 장소가 컸다(the most important high place). 그러므로 한 번(一回)의 제사에도 많은 수의 짐승(소)을 잡아 제사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일천 마리의 제물(황소)를 드리기 위하여 일 천날을 사용하거나 매일 한 마리씩 잡아야 할 이유가 있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날 교회가 강조하는 일천 날의, 일천 번의, 헌금으로 축복의 기도를 필요로 하는 일천번제라는 말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다시 한 번 바른 성경해석을 교회를 위하여 하는 것은 목사의 바른 의무임을 자성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기브온에 머무는 밤이었다. 여호와께서는 솔로몬에게 “너의 원하는 무엇이나 말하라 네게 주겠노라”(Ask for whatever you went me to give you.") 밤에 꿈을 꾸는 동안에 여호와의 말씀은 이렇게 놀라웠다. 솔로몬은 이러한 보상을 위하여 일천의 제물을 드린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자에게 주시는 상급이었다. 사랑하는 독자 여러분, 하나님을 당신이 사랑하고 경외하면 복을 주실 것이며, 하나님을 진실히 알기를 원하면 당신에게 하나님 자신을 알리실 것이다. 당신의 아버지를 배우고, 아버지의 아버지를 본받으며 바른 믿음으로 살면 ..............

 

 

출처 : 창문
글쓴이 : youngill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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