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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족감에 대하여 (토마스 왓슨)

토마스 왓슨

by 김경호 진실 2012. 9. 20.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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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빌 4:11)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라고 하였다. 사도는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나는 자족해야 한다고 들었다”라고 말하지 않고 “자족하기를 배웠다”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자기의 의무가 무엇인지 듣는 것 가지고는 불충분하며, 자기의 의무에 대해서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듣는 것과 배우는 것은 전혀 별개의 일이다. 음식을 먹는 것과 소화하는 것은 별개의 일인 것 같다.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듣기는 하는데, 배우는 바가 극히 적다는 사실은 우려할 일이다.

만일 당신의 재산이 변변치 못하더라도, 하나님은 정도껏 축복해 주실 수 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돈을 가지고 있느냐 보다는, 얼마나 많은 축복을 받느냐가 문제이다. 흔히 황금 주머니에 저주를 내리시는 분이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엔 축복을 내리시는 수가 있다. 그대가 진수성찬에 미식을 먹지 못한다고 그게 무슨 문제인가? 하지만 그대는 “내가 이 성의 식료품에 충족히 복을 주고”(시 132:15)라고 하신 약속을 받았으며 되레 적은 양이 크게 도움이 되는 것이다. 그대는 축복의 이슬이 방울져 떨어지는 것에 만족하라. 푸른 푸성귀의 한 끼 식사도 거기에 사랑이 있으면 맛있다. 거기다가 ‘하나님의 사랑이 있으면’이란 말을 나는 덧붙이고 싶다. 다른 사람이 당신보다 재산이 더 많을지도 모르지만, 근심도 더 많은 법이다. 부요할수록 그만큼 휴식은 더 부족한 법이다. 수입이 더 많아봐야 그만큼 더 지출도 많아진다. 많은 재산상속이 있는 사람이라도, 어쩌면 하나님이 그에게 “능히 누리게 하심을 얻지 못하게”(전 6:2) 하실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은 보다 많이 소유하지만, 보다 덜 누린다. 요컨대 그 사람보다 그대가 황금을 덜 가지고 있더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죄책감도 덜 가진다.

불만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소유를 맘껏 누리지 못하게 만든다. 한두 방울의 식초가 포도주 잔 전체를 시게 만든다. 안락은 자족하느냐에 달려 있다. 괴롭히는 주범은 괴로움이 아니라 불만족이다. 배를 침몰시키는 것은 배 밖의 물이 아니라, 새는 구멍으로 스며드는 배안의 물이다. 그리스도인이 생활을 슬프게 만드는 요인은 외적인 고생이 아니다. 만족하는 마음은 고생의 바다 물결도 헤치고 달려가리라. 그러나 불만의 새는 구멍이 뚫려서 괴로움이 마음속에 스며들면, 그때 마음이 동요되어 침몰하고 만다.

불만을 품은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을 위해 하는 모든 일은 너무 많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하시는 모든 일은 너무 적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백성이 빠지기 쉬운 죄 중에서 불신앙과 조급증보다 더 취약한 것은 없다. 그들은 불신앙 탓으로 낙담하거나 조급증 탓으로 짜증을 내기 일쑤이다. 사람들이 불만과 조급증으로 하나님께 대든다면,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고 하신 말씀을 믿지 않는다는 증거이다. 우리는 고난보다 긍휼을 더 많이 받았기에, 불만족은 배은망덕한 죄이다. 고난은 유익하도로 작용하는 것이기에 , 불만족은 또 도리에 어긋난 죄이다. 불만족은 우리의 죄를 가중시키는 죄이다.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시 37:8)고 하였다. 투정꾼은 악을 행하기 마련이다. 투정부리던 요나는 죄를 짓고 있었다(욘 4:9). 마귀는 정욕과 불만의 땔감에다 불을 질러놓고 그 다음 그 불에 자기 몸을 쬔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하였다 우리의 유익을 이루는 일에 우리는 불만을 품을 터인가? 한 친구가 다른 친구에게 돈 자루를 던져준다고 한다면, 그 과정에서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 좀 까졌기로서니, 이를 기화로 돈을 자루 가득히 횡재한 것을 생각한다면 그다지 괴로워할 일이 아닐 것이다. 이와 같이 주님은 고난으로 우리를 상하게 하실 수 있지만, 그것은 우리를 풍요롭게 하시기 위한 조치이다. 이런 고난은 우리에게 영광의 중량을 안겨다 준다. 그런데 우리는 불만을 품을 셈인가?

터무니 없는 근심은 보다 복된 일에서 마음을 멀어지게 한다. 그리고 살기 위해 어찌하나 궁리하는 사이, 우리는 어떻게 죽을까를 망각한다. 우리는 근심함으로 한 치의 위로를 보태기는 커녕 한 마장의 슬픔을 추가시킨다.

그대는 이곳에 하루밖에 더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대가 갈 길은 단거리에 지나지 않건만, 단거리를 가는 데 장거리 식량이 무슨 소용인가? 만일 여행자가 목적지까지 거기에 충분한 식량을 지니고 있다면, 그는 더 이상 욕심낼 것이 없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눅 18:24) 그가 가진 무거운 황금의 중량이 그를 하나님의 동산에 올라가지 못하게 한다. 그러니까 조금으로 만족하라. 하늘나라로 통행하는 데 족할 만큼만 소유하면 그것을 충분하다.

겸손은 그물에 달린 납제 추과 같이 정욕으로 솟아오르는 영혼을 가라앉히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만족하는 마음은 의기소침한 침체된 심령을 코르크처럼 위로 치솟게 하는 역할을 한다.

허다한 사람들이 자기의 정욕을 유지하려고 치욕도 감수하지 않던가? 그런데 우리는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 치욕을 감수하지 않겠는가? 어떤 이들은 자기들의 수치거리를 영광으로 삼는다(빌 3:19).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영광된 일을 수치스러워하는가?

하나님의 충만으로 가득 차 있는 세상의 공허함에 불평을 토할 필요가 무엇인가?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시 16:5)라고 다윗은 말한다. 그렇다면 나에게 줄로 재어준 구역이 어디가 되어도 좋으리라. 그곳이 병상이 되었든지 혹은 감옥이 되었든지, 나는 말하리라, “내게 줄로 재어준 구역이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시 16:6)라고.

“나의 모든 삶과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창 48:15)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당신에게 풍부하게 공급해 주시지 않았던가. 긍휼이 그대 위해 밥상을 차려 먹여 주지 않으면, 그대는 결코 먹지 못한다. 긍휼이 커튼을 내려주고 그대 옆에 수호천사들을 세워놓지 않는다면, 그대는 결코 잠들지 못한다.

“여호와께서는 만유를 선대하시며”(시 145:9)라고 하였다. 달콤한 이슬방울은 장미꽃에도 떨어지고 가시나무에도 떨어진다. 하나님의 긍휼은 값없이 주신다. 공로를 쌓는다는 것은 긍휼을 파기하는 행위이다. 아무것으로도 긍휼을 얻을 자격이 없고, 강요할 도리도 없다. 우리는 우리를 처벌해 달라고 하나님께 요청할 수 있을지도 몰라도, 우리를 사랑해 달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내가 즐거이 저희를 사랑하리니”(호 14:4)라고 하였다. 구원의 사슬을 잇는 모든 연결 고리마다 값없는 은혜로 제공되어 있고 엮어져 있다. 택하심도 값없이 주신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엡 1:4,5)라고 하였다. 의롭다 하심도 값없이 주신다.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자 되었느니라”(롬 3:24)고 하였다. 구원도 값없이 주신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하셨나니”(딛 3:5)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나는 받을 자격이 없다고 말하지 말라. 긍휼은 값없이 주시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자격 있는 사람에게만 긍휼을 베푸신다면, 그는 아무에게도 절대로 베풀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의 긍휼은 넘쳐흐르는 긍휼이며 무한하신 긍휼이다. “인자하심이 후하심이니이다”(시 86:5)라고 하였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엡 2:4)이라고 하였으며, 또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시 51:1)라고 하였다. 진노의 대접은 하나씩 쏟아지지만, 긍휼의 샘물은 연이어 흐른다.

하나님은 아침에 긍휼을 베푸신다. 그의 긍휼은 “아침마다 새로우니”(애 3:23)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밤에 긍휼을 베푸신다. “밤에는 찬송이 내게 있어”(시 42:8)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긍휼은 영원하시다.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시 103:17)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긍휼은 넘쳐흐르듯이 그것은 또한 끊임없이 흐른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주시는데, 우리에게 빵 조각을 거절하실까? 하나님은 우리가 간청하는 바를 주시지 않더라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실 것이다.

번영은 종종 하나님께 대하여 귀를 먹게 한다. “네가 평안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네 말을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엘 22:21)고 하였다 보드라운 쾌락은 마음을 완악하게 한다. 번영은 꿀맛도 가지고 있고 독침도 가지고 있다. 노심초사 근심걱정은 부유한 사람을 달달 들볶는 악령이다. 부자의 돈궤에 돈이 가득 차 있을 때, 그의 마음은 근심걱정으로 가득 찬다. 햇빛은 상쾌하지만, 때로는 그것에 그을려 죽기고 한다. 식탁 가득한 상차림은 올가미로 가득 차림이 될지 모른다. 많은 사람이 황금의 중량 때문에 지옥 속에 가라앉는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곡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딤전 6:9)고 하였다. 세상의 황금 모래는 빠지는 모래사장이다. 식량이 적은 들 어떠랴. 함정도 적은 것을, 높은 지위가 덜하면 위험성도 덜하다.

세상의 풍부한 식량이 우리에게 없으면, 그만큼 시험도 우리에게 없다.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주신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전 세계를 주신 것보다 더 많이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능히 더 많은 세계들을 지으실 수 있지만, 그는 더 많이 주실 그리스도는 없으시다. 만일 당신이 체력을 충족시킬 충분한 일용 양식을 가지고 있다면, 족하게 여기라. 인생을 언제나 안락하게 해주는 것은 충족한 소유가 아니라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라. 지팡이가 여행자에게 도움이 되겠지만 한 다발의 지팡이는 그에게 짐이 될 것이다. 세상은 단 하나의 초대형 여인숙일 따름이다. 만일 하나님이 당신에게 여인숙의 숙박비를 지불할 만큼 충분히 주시거든, 당신은 만족히 여길 만하니, 당신이 본국에 도착할 무렵이면 충분히 받아가지게 되리라.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주를 의지하리이다”(시 56:3)라고 하였다. 믿음은 마음속의 두려움을 치유해 주신다. 기름이 물 위에 뜨는 것처럼 믿음은 두려움을 극복한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곧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하나님 되시게 하시는 요건이다. 하나님은 모든 악을 우리에 유익이 되도록 돌리실 것이다(롬 8:28). 요셉의 징역살이는 그가 입신출세하는 방편이 되었다. 아무리 독한 마약으로부터도 하나님은 자기의 영광과 우리의 구원을 추출해 내실 것이다. 간단히 말해, 하나님은 죽음에 이르도록 우리의 인도자가 되실 것이고, 죽음의 순간에 우리의 위로자가 되실 것이며, 죽음 후에는 우리의 보상자가 되실 것이다.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백성은 복이 있도다”(시 144:15)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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