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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7(토마스 왓슨)

토마스 왓슨

by 김경호 진실 2012. 10. 16. 09:07

본문

 

제 7장 유효한 부르심

이 본문의 특권을 소유하는 사람의 두 번째 자격은, 그들이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자라는 점이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선을 이룬다. 부르심을 받는다는 말이 순서상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 다음에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그것에 선행한다. 사랑이 먼저 거론되었지만 먼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앞서 먼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아야 한다.
부르심은 구원의 황금 목걸이의 중간 고리이다.(롬 8:30) 이는 예정과 영화의 중간에 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중간 고리를 단단히 붙잡으면, 이 목걸이의 다른 두 끝에 관해서도 확신하게 된다. 이를 좀 더 분명하게 예시하기 위하여 여섯 가지 관찰 가능한 것들을 들어 보겠다.

1. 부르심에 관한 한 가지 구분
이중적인 부르심이 있다.
 
1) 외적 부르심이 있다.
이는 바로 하나님이 복음으로 베푸시는 복된 은혜이다. 하나님이 죄인을 불러 긍휼을 받아들이게 하시는 교섭 행위이다. 우리 구주는 이 점에 관해 말씀하신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 22:14). 이 외적 부르심은 구원에는 충분치 못하지만 사람이 변명하지 못하게 하기에는 충분하다.
2) 하나님이 마음을 놀랍게 압도하여 그 의지를 이끌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게 할 때 내적 부르심이 있다.
이는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듯이 유효한 부르심이다. 하나님은 외적 부르심으로 귀에 나팔을 부시며 내적 부르심으로 마음을 여신다. 루디아의 마음을 여셨던 것처럼 말이다. (행 16:14) 외적 부르심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데 이르게 하겠지만, 내적 부르심은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데 이르게 할 수 있다. 외적 부르심은 죄인을 억제하고 내적 부르심은 죄인을 변화시킨다.

2. 부르심을 받기 전 우리의 한탄스러운 형편
 
1) 우리는 종의 상태에 있다.
하나님이 사람을 부르시기 전에 그는 마귀의 부름을 받는다. 그는 마귀가 가라 하면 간다. 속임에 빠진 죄인은 광산을 파고 채석장을 만들고 노를 젓는 노예와 같다. 노새가 부리는 자의 명령을 받듯이 그는 사단의 명령을 받는다.
2) 우리는 어둠의 상태에 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엡 5:8). 어둠은 지극히 서글프다.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은 두려움이 가득하여 발을 옮길 때마다 떤다. 어둠은 위험하다.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은 바른길에서 쉬 벗어나 강이나 소용돌이에 빠질 수 있다. 그처럼 무지의 어둠에 있을 때 우리는 지옥의 소용돌이에 쉽게 빠질 수 있다.
3) 우리는 무능의 상태에 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롬 5:6). 시험에 저항할 힘이나 부패와 맞서 싸워 이길 힘이 없다. 죄는 우리의 힘이 있는 머리 타래를 자른다(삿 16:20). 그러나 무능함만 아니라 완고함이 있다.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행 7:51) 선을 싫어할 뿐만 아니라 반대한다.
4)우리는 오염의 상태에 있다.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겔 16:6, 영어 성경에는 “네가 피에 오염되어 있는 것을 보고”라고 되어 있음). 공상은 지상의 생각을 지어낸다. 마음은 정욕의 불꽃이 날아다니는 마귀의 대장간이다.
5) 우리는 저주의 상태에 있다.
우리는 저주 아래 태어났다.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에게 있다. (요 3:36) 하나님이 긍휼의 부르심으로 우리를 자기 가까이 이끄시고 우리를 전에 빠져 있던 비참에서 자유롭게 하기를 기뻐하시기 전에 우리의 상태가 그러하다.

3. 유효한 부르심의 방법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통상적인 방법은 황홀경이나 계시가 아니라,
 
1) “권능의 홀”(시 110:2)인 그 말씀이다.
말씀의 음성은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하늘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고 하는 것이다. (히 12:25) 즉, 말씀의 사역으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말씀이 우리를 죄로부터 불러 나오게 할 때, 이는 마치 하늘에서 오는 음성을 듣는 것과 같다.
2) 그의 신으로 부르신다.
이는 우렁찬 부르심이다. 말씀은 우리의 회개를 일으키는 도구인(因)이며, 성령님은 작용인이다. 하나님의 사역자는 피리와 오르간에 불과하다. 마음을 유효하게 변화시키는 것은 그들에게 불어 닥친 성령님이시다. “
베드로가 이 말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행 10:44). 땅이 결실하게 하는 것은 농부가 부지런히 밭 갈고 씨를 뿌리는 행위가 아니라 이른 비와 늦은 비이다. 성령님이 달콤한 영향을 내시고 마음에 비처럼 내리시지 않으시면 말씀의 씨만으로는 마음을 유효하게 회개시키지 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신이 그 강력한 음성을 내셔서 우리를 일깨워 불신의 무덤에서 나오게 하시도록 그분의 도움을 간구해야 한다. 사람이 놋쇠 문을 두드리면 열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손에 열쇠를 갖고 가면 그 문은 열릴 것이다. 그처럼 손에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하나님(계 3:7)이 오셔서, 하나님을 대적하여 아무리 굳게 닫힌 마음이라도 여신다.

4. 하나님이 죄인을 부르실 때 쓰시는 방법
주님은 특별한 방법만 쓰시거나 동일한 것을 모든 사람에게 쓰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때때로 고요하고 작은 음성으로 오신다. 경건한 부모가 있어서 신앙 교육의 따뜻한 햇살 아래 앉아 있는 자들은 종종 자신이 언제 어떻게 부르심을 받았는지 모른다. 주님은 비밀리 그리고 점차로 그들의 마음에 은혜를 주입하신다. 마치 이슬이 눈에 띄지 않게 방울로 떨어지는 것과도 같다. 그들은 천상의 능력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을 알지만 시간과 방법을 알지 못한다. 시계 바늘이 시계 위에서 움직이나 언제 움직이는지는 알아채기 힘들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은 그렇게 대하신다. 어떤 사람은 완고하고 까탈스런 죄인이라서, 하나님은 거친 바람으로 그들에게 다가가신다. 하나님은 율법의 쐐기를 써서 그들의 마음을 억지로 여신다. 하나님은 그들을 매우 겸손하게 만들어 그리스도가 아니면 정죄 받는다는 것을 보이신다. 그런 다음, 하나님은 겸손으로 그들의 마음의 묵혀 둔 밭을 일구어 위로의 씨를 뿌리신다. 그분은 그리스도와 긍휼을 그들에게 베풀어 주시고 그들의 의지를 이끌어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할 뿐만 아니라 열정적으로 소망하게 하시고 신실하게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그렇게 행하셨고 그를 불러 핍박자에서 전파자가 되게 하셨다. 이 부르심은 다른 사람의 경우보다 더욱 눈에 띄는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더 참된 것은 아니다. 죄인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다양하겠지만, 그 효과는 여전히 동일하다.
 
5. 유효한 부르심의 특징

1) 달콤한 부르심이다.
하나님은 꾀듯이 부르신다. 하나님은 억지로 하지 않으시고 자기편으로 끌어들이신다. 의지의 자유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의지의 완고함이 정복되는 것이다.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시 110:3). 이 부르심 이후에는 더 이상 논쟁이 없다. 영혼은 즉각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한다. 그리스도께서 스가랴를 부르셨을 때 그는 즐거이 그리스도를 자기 마음에 영접하고 집으로 모셨다.

2) 거룩한 부르심이다.

“거룩한 부르심으로 부르심”(딤후 1:9). 하나님의 이 부르심은 사람들을 그 죄에서 불러내신다. 이로써 그들은 거룩하게 되며 하나님을 위하여 구별된다. 성막의 기명은 일반적인 용도에서 벗어나 거룩한 용도를 위해 구별된다. 그래서 유효하게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섬기는 데로 성별된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거룩하시고 우리가 참여하는 일이 거룩하며 우리가 으르고자 하는 곳이 거룩하다. 이 모든 것이 거룩함을 요구한다.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복되신 삼위일체의 현실이 되어야 한다. 그러니 주님께 대한 거룩함이 그 위에 기록되어야 하지 않는가? 신자는 성부 하나님의 자녀이며 성자 하나님의 지체이며 성령 하나님의 성전이다. 그러니 그들은 거룩해야 하지 않겠는가? 거룩함은 하나님 백성의 기장과 제복이다. “주의 거룩한 백성”(사 63:18)이다. 정숙함이 덕스러운 여인과 음녀를 구별하듯 거룩함이 경건한 자와 불의한 자를 구별한다. 이는 거룩한 부르심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살전 4:7).
죄 가운데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자신이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하게 하지 말라. 하나님이 당신을 불러 욕하는 자와 주정뱅이가 되게 하셨는가? 단순히 도덕적인 사람이라고 유효하게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하게 하지 말라. 거룩함 없는 교양이 무엇인가? 그것은 꽃으로 뒤덮인 죽은 시체에 불과하다. 놋쇠 위에 찍혀진 왕의 그림은 황금으로 통용되지 않을 것이다. 단순히 도덕적인 사람은 겉보기에 하늘 임금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할 가짜 금속에 불과하다.

3) 불가항력적인 부르심이다.
하나님이 은혜로 사람을 부르실 때 그는 오지 않을 수 없다. 사역자의 부름은 저항할 수 있겠지만 성령님의 부르심은 저항할 수 없다. 복되신 성령님의 손가락은 그 율법을 돌비에 쓰셨듯이 굳은 마음에도 쓰실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하는 말씀이다.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실 때 빛이 있었으니, “믿음이 있으라.”고 말씀하실 때 그대로 될 것이다. 하나님이 바울을 부르셨을 때, 그는 그 부르심에 응답했다.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행 26:19). 하나님은 복음의 마차로 정복 길에 나서신다. 눈먼 자를 보게 하시며 돌 같은 마음을 아프게 하신다. 하나님이 사람을 부르시고자 하면, 그 길에 방해할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롬 9:19) 하나님은 철근을 구부리시며 놋문을 자르신다. (시 107:16) 주님이 그 신으로 사람의 마음을 감동하실 때, 모든 교만한 생각이 낮아지고 의지의 강한 요새가 하나님께 항복한다.
시편 114:5을 인용하겠다. “바다야 네가 도망함은 어찜이며 요단아 네가 물러감은 어찜인고.” 전에 사나운 바다같이 불의를 거품 일으키듯 내놓던 사람이 이제 갑자기 돌이켜 떨며 죄수처럼 넘어진다.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행 16:30) 오, 바다야 너를 괴롭히는 것이 무엇이냐? 이 사람을 괴롭히는 것이 무엇인가? 주님은 그를 유효하게 부르고 계셨다. 그분은 은혜의 일을 이루고 계셨으며 이제 그의 완고한 마음을 달콤한 힘으로 정복하신다.

4) 위에서 부른 부르심이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4) 이것이 고상한 부르심인 이유는, 우리가 신앙심의 고상한 발휘를 위하여, 즉 죄에 대하여 죽고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믿음으로 살고 아버지와 교제를 나누기(요일 1:3)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는 고상한 부르심이다. 여기에는 자연의 상태에서 사람이 수행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활동이 있다. 이것이 고상한 부르심인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후사가 되기 위하여 높은 특권 즉 칭의와 양자됨으로 부르심을 입었기 때문이다. 유효하게 부르심을 받은 자는 지상의 군주보다 더 높다.

5) 은혜로운 부르심이다.
이는 거저 주시는 은혜의 열매와 산물이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은 부르시고 어떤 사람은 부르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취하시고 어떤 사람은 버리신다. 더 누추하고 성미가 까다로운 사람은 부르심을 받고 지성이 예리하고 성품이 좋은 사람은 버림을 받는다. 가난한 사람이 믿음에서 부요롭고 나라의 상속자가 되며(약 2:5) 세상의 귀인과 큰 자가 대체로 버림을 받는다.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 1:26). 이것은 거저 주시는, 풍부하신 은혜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 이니이다.”(마 11:26)
동일한 설교를 듣고 한 사람은 유효한 영향을 받고 다른 사람은 죽은 사람이 음악 소리를 듣듯 전혀 감동받지 못한다. 한 사람은 말씀에서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다른 사람은 듣지 못한다. 한 사람은 하늘의 영향을 입어 부드러워지고 촉촉하게 젖지만, 다른 사람은 기드온의 마른 양털처럼 그 안에 이슬이 없다. 여기서 구분하는 은혜를 보라. 동일한 시련이 한 사람은 회개케 하고 한사람은 강퍅케 한다. 한 사람에게는 시련이 향기로운 냄새를 발하는 향료를 빻는 것과 같고, 다른 사람에게는 냄새가 좋지 않은 잡초를 불쾌한 냄새가 더 많이 나는 모르타르에 으깨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 말고 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은혜로운 부르심이다. 온통 거저 주시는 은혜로 입혀져 있고 짜여 져있다.
 
6) 이는 영광스러운 부르심이다.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벧전 5:10). 우리는 영원히 복되신 하나님을 즐기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 마치 사람이 감옥에서 나와 보좌에 앉도록 부름을 입은 것과 같다. 퀸투스 쿠르티우스는 정원에서 땅을 파다가 왕이 되어 달라고 부탁을 받은 사람에 관하여 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불러 영광과 덕에 이르게 한다. (벧후 1:3) 먼저는 덕에 그 다음에는 영광에 이르게 한다. 아덴에는 두 사원이 있는데 그것은 덕의 사원과 명예의 사원이다. 그런데 덕의 사원을 지나지 않고는 명예의 사원에 이를 수 없었다. 그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되 먼저 덕에 이르게 하시고 그 다음에 영광에 이르게 하신다.
사람들이 가장 간절히 찾아 헤매지만 바람에 나는 깃털 같은, 사람 가운데 영광이란 대체 무엇인가? 바람에 나는 깃털이 영광의 무게에 비하면 과연 무엇인가?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를 큰 이유가 없는가? 하나님은 높아지게 하려고 부르신다. 여기에 무슨 손실이나 편견이 있을 수 있는가? 하나님은 우리가 고수했을 경우 저주를 받게 될 것으로부터 우리를 떠나게 하려 하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계획 말고는 세우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불러 구원에 이르게 하시며 (약속하신) 나라에 이르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디매오처럼 부르실 때 죄의 누더기 겉옷을 던지고 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

7) 희귀한 부르심이다.
부르심을 받아 구원에 이르는 자가 별로 없다.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 22:14). 전체적으로는 적은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적다. “부르신다.”는 말은 어떤 사람들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구분한다는 뜻이다. 많은 사람이 빛을 받지만 그 빛을 볼 수 있도록 기름부음을 받은 눈을 가진 자는 적다.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계 3:4) 어두운 곳에 앉아 있는 자가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의의 태양이 비치는 곳에는 진리의 빛을 받되 진리의 사랑이 없이 받는 자가 많다. 형식주의자는 많으나 믿는 자는 별로 없다. 믿음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믿음이 아닌 것이 있다. 플리니우스가 말하듯이 사이프러스의 다이아몬드는 진짜 다이아몬드처럼 번쩍이지만 진짜가 아니라서 망치로 치면 부서질 것이다. 그처럼 위선자의 믿음은 핍박의 망치에 부서질 것이다. 참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는 거의 없다. 보석의 수는 자갈의 수에 비하면 적다. 대부분의 사람은 시대의 유행에 따라 종교를 만든다. 그들은 음악과 우상을 위하여 존재한다. (단 3:7) 이 점을 진지하게 생각할 때 우리는 두려움으로 구원을 이루고 하나님이 은혜의 상태로 옮기신 소수 가운데 속하려고 힘쓰지 않을 수 없다.

8) 변할 수 없는 부르심이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 11:29) 즉, 한 박식한 저술가가 말하듯이, 이는 선택에서 나오는 은사이다. 하나님이 한 사람을 부르실 때 그 점을 후회하지 않으신다. 많은 친구들처럼 하나님은 하루는 사랑하다가 다음날은 미워하지 않으신다. 신하를 총애하다가 그 후에 감옥에 던져 넣는 군주들과 다르시다. 이는 성도의 복된 상태이다. 그의 조건은 전혀 변화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그의 작정 위에 서 있고, 그의 작정은 변할 수 없다. 은혜의 행위는 뒤집어질 수 없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죄를 지우시지, 그들의 이름을 지우시지 않는다. 세상은 매시간 변화하지만, 신자의 조건은 고정되고 불변하다.
 
6. 우리의 유효한 부르심의 목적은 하나님의 존귀이다.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2). 짐승이 이성의 행위를 할 수 없듯이 자연 상태에 있는 자는 하나님을 존귀케 할 수 없다. 회개 전의 사람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행동을 계속 행한다. 소택지에서 일어나는 검은 수증기가 땅을 더럽히고 태양을 가리며 어둡게 하듯이, 인간의 자연적인 마음에서 나오는 죄의 검은 수증기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 죄인은 배역하는 데 능하지만 하늘 임금님께 대한 충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거저 주시는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쓰레기가 보석처럼 구분되듯 유효하게 부르심을 받았으며, 이들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인다. 주님은 어느 시대든지 시대의 부패를 대적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증거하고 죄인을 회개케 하여 그 잘못된 길에서 돌이키게 하는 사람이 있게 하실 것이다. 다윗 왕처럼 하나님은 훌륭한 인물을 두실 것이다. 하나님의 긍휼을 나타내는 기념비였던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나팔이 될 것이다.
이 고찰을 통하여 우리는 유효한 부르심의 필요성을 보게 된다. 이것이 없이는 하늘에 갈 수 없다. 우리는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골 1:12)자가 분명하다. 하나님이 우리로 하늘을 받기에 합당하게 하시는 것처럼 하늘로 우리에게 적합하게 하신다. 그러니 유효한 부르심 말고 이처럼 적절하게 하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죽은 사람이 재산을 상속할 수 없듯이 본성의 추한 쓰레기 가운데 머무는 자는 하늘에 적합할 수 없다. 고상한 부르심은 자의적이거나 대수롭지 않은 것이 아니라 구원처럼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렇게 필요한 것이 얼마나 자주 무시되는가! 대부분의 사람은 이스라엘 백성처럼 이리저리 헤매어 지푸라기를 줍지만, 자신의 유효한 부르심의 증거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
하나님이 죄인을 부르시는 데 나타나는 능력이 얼마나 강력한지 주목하라!
하나님은 자신에게 이끌기 위하여 부르신다.(요 6:44) 회개는 일종의 부활이라고 한다.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계 20:6). 즉 죄에서 일어나 은혜에 이르는 것이다. 죽은 사람이 스스로 일어날 수 없듯이 사람이 스스로 회개할 수는 없다. 이는 창조라고 불린다. (골 3:10) 창조한다는 것은 자연의 힘을 넘어선다.

반론.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의지는 죽지 않고 잠들 뿐이므로 하나님은 도덕적 설득으로 우리를 일깨우실 뿐이며, 그리하여 의지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복종할 수 있고 스스로 회개에 이르게 된다고 한다.
 
대답. 이 반론에 대하여 나는 이렇게 답한다. 모든 사람은 죄로 족쇄에 묶여 있다.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바 되었도다.”(행 8:23) 족쇄에 매인 사람에게는 당신이 주장을 펼치며 거기서 벗어나라고 설득을 해도 그것으로는 불충분하다. 그가 걸을 수 있으려면 먼저 그의 족쇄를 깨뜨려 그를 자유롭게 놓아주어야 한다. 자연인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에게는 부패의 족쇄가 채워져 있다. 이제 주님이 회개케 하는 은혜로 그의 족쇄를 자르셔서 그의 발이 달릴 수 있게 하셔야 되지, 그렇지 않으면 그는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적용. 부르심을 굳게 하라는 권고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벧후 1:10). 우리의 유효한 부르심에 관하여 확실한 증거를 얻는 것은 우리 생활의 큰일이다. 외적인 특권에 순순히 따르지 말라. 유대인들처럼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렘 7:4) 하고 외치지 말라. 세례를 의지하지 말라. 물은 있지만 성령님이 계시지 않으면 그게 무엇인가? 그리스도께서 당신에게 전하셨다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라. 공허한 고백으로 만족하지 말라. 이 모든 것이 있어도 당신은 번쩍이는 혜성보다 나을 게 없다. 그러나 당신이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은 것을 영혼에 확신하도록 애쓰라.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아덴사람처럼 되지 말라. 시대의 상태와 형편이 무엇인가? 그런 때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기 쉬운가? 당신이 유효하게 부르심을 받지 않았으면 이 모든 것이 무엇인가? 시대가 더 나아진들 대수인가? 은혜가 우리 마음에 거하지 않으면 영광이 우리의 땅에 거한들 대수인가? 오, 나의 형제여, 바깥의 형편이 어두울 때 속은 온통 환하게 하라. 부르심을 굳게 하는 데 부지런 하라. 이는 실행 가능하며 개연성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찾는 자들에게 부족함이 없으시다. 이 큰 일을 더 이상 손에 들고 서 있지 말라. 여러분의 나라에 논쟁이 벌어지면 모든 수단을 사용하여 권리를 분명하게 할 것이다. 그렇다면 구원은 아무것도 아니란 말인가? 당신은 이 점에서 권리를 분명하게 하지 않겠는가? 유효하게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면 당신의 형편은 얼마나 서글픈지 살펴보라.
당신은 하나님께 낯선 자이다. 탕자는 먼 나라로 갔다(눅 15:13). 이는 모든 죄인이 회개 전에 하나님을 멀리 떠난 것을 함축한다.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엡 2:12). 외인이 자유로운 시민의 특권을 갖지 못하듯이 죄 가운데 죽는 자는 약속에 대하여 아무런 권리가 없다. 만일 당신이 외인이라면 “나는 너를 모른다.”는 것 말고 하나님으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말은 없다.
유효하게 부르심을 받지 않았으면 당신은 원수이다.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골 1:21) 되었다. 성경에서 당신이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위협밖에는 없다. 당신은 하나님의 책에 기록된 모든 천벌을 받을 후사이다. 당신은 율법의 명령에는 저항해도, 율법의 저주로부터는 도피할 수 없다. 하나님께 원수 된 자들에게 그들의 운명을 읽어 주라. “그리고 나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눅 19:27). 그러므로 자신의 부르심을 굳게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성령님이 당신을 부르시기 전에 죽음이 당신을 부르면 당신의 형편은 얼마나 비참하고 저주스러운가!
 
질문. 그러나 내가 부르심을 받을 소망이 무엇이겠는가? 나는 큰 죄를 지었다.
 
대답. 구원 얻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는 자신으로부터, 즉 죄악된 자신뿐만 아니라 의로운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의무와 도덕적 능력을 부인한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빌 3:9). 그 마음이 성령님에 의하여 영향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발에 자기 의의 우상을 내려놓고 그리스도께서 발로 밟으시게 한다. 그는 도덕성과 경건의 의무를 이용할지언정 그것들을 의지하지 않는다. 노아의 비둘기는 날개를 사용하여 날았지 방주에 안전을 의탁하지 않았다. 사람이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도록 부르심을 받을 때 이는 특별히 그렇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듯이 이 자기부인은 구원 얻는 신앙의 첫 단계이다.
유효하게 부르심을 받는 자는 가시적 변화를 이루어 나타낸다. 기능의 변화가 아니라 자질의 변화이다. 그는 이전과 달라졌다. 그의 몸은 동일하지만 그의 지성은 같지 않다. 그는 다른 영혼을 갖고 있다. 바울은 회심 이후로 너무 달라져서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행 9:21) 은혜는 얼마나 놀라운 변화를 일으키는가!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전 6:11) 은혜는 마음을 변화시킨다.

유효한 부르심으로 삼중적 변화가 일어난다.
1) 지성에 변화가 일어난다.

전에는 무지했고, 어둠이 깊음 위에 머물렀지만, 이제는 빛이 있다.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엡 5:8).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첫 번째 작품은 빛이었다. 새 창조 때도 마찬가지이다. 구원 얻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는 복음서에 나오는 사람처럼 말한다.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요 9:25) 그는 죄 안에서는 그처럼 악한 것을 보고 하나님의 길에서는 전에는 보지 못한 그처럼 탁월한 것을 본다. 참으로 복되신 성령님이 가져다주시는 이 빛은 기이한 빛이라고 부를 만하다.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이는 여섯 가지 측면에서 기이한 빛이다.
(1) 기이하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이 빛은 별들이 있는 천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의의 태양으로부터 나온다.
(2) 이 빛은 그 효과에 기이하다. 이 빛은 다른 빛이 할 수 없는 일을 한다. 이 빛은 사람이 스스로 눈먼 것을 파악하게 한다.
(3) 이 빛이 기이한 것은, 다른 빛보다 더욱 날카롭기 때문이다. 다른 빛은 얼굴에 비치겠지만, 이 빛은 마음을 비추어 양심을 밝게 한다.(고후 4:6)
(4) 이 빛이 기이한 것은, 이 빛을 가진 자를 놀라게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빛이 없이 그토록 오래 만족하며 지낼 수 있었던 자신에게 놀란다. 자신의 눈은 뜨였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은 뜨이지 않은 것에 놀란다. 전에는 이 빛을 미워하고 대적했지만 이제는 이 빛이 자신의 영혼의 궁창에 빛나는 것에 놀란다. 이 빛 때문에 성도는 영원까지 놀라게 될 것이다.
(5) 이 빛이 놀라운 것은, 다른 어떤 빛보다 활기차기 때문이다. 이 빛은 밝게 할 뿐만 아니라 생기를 띠게 한다. 이는 “죄와 허물로 죽은”(엡 2;1) 자들을 살게 한다. 그러므로 이를 일러 “생명의 빛”(요 8:12)이라고 한다.
(6) 이 빛이 기이한 것은, 영원한 빛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은혜의 빛은 영광의 햇살을 가져오는 새벽별이다.

그러므로 이제 독자여, 성령님의 이 기이한 빛이 당신에게 밝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무지 가운데 싸여 하나님도 모르고 자신도 몰랐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한 빛이 당신을 둘러 비쳤다. 이는 유효한 부르심으로 생기는 복된 변화의 일부이다.

2) 의지에 변화가 일어난다.

“원함은 내게 있으나”(롬 7:18). 전에 그리스도를 대적했던 의지가 이제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 전에 철근이었던 의지가 이제 녹아내리는 밀납 같다. 의지는 성령님의 인치심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의지는 하늘로 향하며 아울러 성정이 모든 전체를 이끈다. 중생자는 메아리가 울리듯 하나님의 모든 부르심에 응답할 것이다.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나이까.”(행 9:6, 한글 개역에는 이 부분이 빠져 있음). 이제 의지는 자원자가 되어 구원의 대장 아래 소속된다.(히 2:10) 이 얼마나 복된 변화가 일어났는가! 전에 의지는 그리스도를 멀리했지만 이제는 죄를 멀리한다.

3) 행위에 변화가 일어난다.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자는 이전과 정반대로 행한다. 그는 전에 시기와 악의 가운데 행했지만, 이제는 사랑 가운데 행한다. 전에는 교만 가운데 행했지만 이제는 겸손 가운데 행한다. 흐름이 전혀 다른 곳으로 움직인다. 마음에 새로운 탄생이 있듯이, 삶에 새로운 면모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얼마나 강력한 변화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 일어났는지 본다.
결코 변화를 보이지 않았던 자들은 이 유효한 부르심에서 얼마나 먼가? 그들은 40년 혹은 50년 전과 똑같이 교만하고 육적이다. 그들은 자기 시대에 변화를 보았지만 그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사람들로 하여금 음녀(세상)의 무릎에서 뛰어올라 아브라함의 품에 안길 생각을 하지 말게 하라. 그들은 사는 동안 은혜로운 변화가 있든지 아니면 죽을 때 정죄의 변화가 있다.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자는 이 부르심을 가장 큰 복으로 존중한다. 하나님이 이 은혜로 부르신 왕은 자신이 왕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보다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것을 더 존중한다. 그는 자신의 고귀한 출생보다 자신의 고귀한 부르심을 높이 친다. 테오도시우스는 황제가 되는 것보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더 큰 명예로 생각했다. 아이가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중요하게 생각할 수 없듯이 육적인 사람은 영적 복을 중요하게 여길 수 없다. 그는 세상적인 위세와 편함과 부요로움과 존귀한 칭호를 회개보다 좋아한다. 그는 성도보다 공작이라고 불리는 것을 더 좋아하는데, 이는 그가 유효한 부르심에 대하여 외인이라는 표시이다. 성령님이 조명하신 자는 거룩함을 자신의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며 자신의 유효한 부르심을 자신의 높아짐으로 생각한다. 그가 이 단계에 이르렀을 때 하늘에 들어갈 후보자가 된다.
유효하게 부르심을 받은 자는 세상에서 벗어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이는 “하늘의 부르심”(히 3:1)이다.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자는 하늘의 시각에서 사물을 생각한다. 그는 세상 안에 있지만, 세상에 속한 것은 아니다. 박물학자는 땅에서 캐낸 보석에 관하여 말하지만 그 번쩍이는 광채는 하늘의 영향에서 비롯한다. 경건한 자도 그와 같다. 그의 몸은 땅에서 비롯하지만 그 성정의 번쩍임은 하늘에서 비롯한다. 그의 마음은 그리스도처럼 높은 지경에 이끌려 간다. 그는 온갖 불의한 일을 내팽개칠 뿐만 아니라 모든 세상적인 짐도 내팽개친다. 그는 버러지가 아니라 독수리다.

우리의 유효한 부르심에 대한 또 한 가지 표시는 통상적 부르심에 대한 우리의 부지런함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고귀한 부르심을 자랑하지만 다른 부르심에는 게을리 누워 있다. 종교는 게으름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게을러서는 안 된다. 게으름은 마귀의 목욕탕이다. 게으른 자는 온갖 시험의 제물이 된다. 은혜는 마음을 고치지만 손을 불구로 만들지 않는다.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자는 하늘을 얻으려고 일할 뿐만 아니라 장사에도 힘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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