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종교개혁전후사 제1강~제3강

최더함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2. 12. 14. 10:00

본문

종교개혁전후사

 

<교회사의 대강과 주요 쟁점들>

 

1세기

1. 초기 기독교 공동체

2. 바울과 이방기독교

3. 사도시대의 마감과 예수에 대한 해석

 

2세기

1. 기독교의 조직화

2. 이단들-영지주의, 마르키온, 몬타누스주의

3. 변증가들

  <?xml:namespace prefix = o /><?xml:namespace prefix = o />

3세기

1. 로고스신학과 단일신론

2. 알렉산드리아학파

3. 교회의 제도적 발달-예배, 절기, 세례, 성찬식, 사죄 등

4. 최후의 투쟁

 

4-5세기

1. 콘스탄티누스황제와 기독교 공인

2. 아리우스 논쟁

3. 교황권의 성장

4. 수도원주의

5. 기독론 논쟁들

6. 동방교회의 분리

7. 암브로시우스, 크리소스톰, 제롬 등

8.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 논쟁-半펠라기우스주의

9. 대 그레고리(Gregory the Great)

 

중세초기

1. 기독교와 프랑크왕국-교황청과 프랑크, 샤를마뉴, 교황청과 오토제국

2. 9세기 유럽의 기독교

3. 교황청의 개혁

4. 힐데브란트와 하인리히 4세

5. 서임권투쟁의 종결

 

중세후기

1. 십자군운동(전쟁)

2. 새로운 신앙운동-수도원운동. 왈도파와 탁발수도회 등

3. 중세의 이단(카타리파 등)과 종교재판소. 마녀사냥

4. 스콜라주의와 신학- 아벨라르, 피터 롬바르드, 안셀무스, 토마스아퀴나스, 둔스 스코투스, 오캄 등

5. 아리스토텔레스의 재발견과 대학의 등장

6. 신비주의-보나벤투라의 영혼의 순례, 엑크하르트의 범신론

7. 교황권의 쇠퇴-아비뇽사건, 대분열

8. 개혁의 시초- 위클리프, 후스 / 개혁 공의회들

 

종교개혁기

1. 마르틴 루터와 종교개혁

2. 울리히 쯔빙글리와 스위스의 종교개혁

3. 재세례파, 독일의 개신교, 스칸디나비아국가들의 개혁주의

4. 존 칼빈

5. 유럽의 종교개혁-영국의 성공회, 청교도주의, 자유교회들, 스코틀렌드의 감독주의와 장로교주의

6. 소지나주의, 아르미니우스주의

7. 퀘이크 교도들

 

근대이후

1. 근대과학과 철학의 발전

2. 청교도들의 신대륙 이주

3. 이신론, 회의주의 유니테리온주의, 경건주의, 모리비아주의, 위슬리와 감리교 등

4. 대각성운동, 복음주의적 부흥과 근대선교의 발흥

5. 19세기 개신교

6. 근대의 로마 카톨릭과 동방교회

7. 자유주의 신학- 슐라이허마허, 폴 틸리히 등

8. 칼 바르트와 그 이후- 루이스 벌콥, 워필드, 바빙크, 영, 카이퍼 등

9. 프린스턴신학과 웨스트민스터신학의 독립-메이첸, 반틸 등

0. 에큐메니칼운동, 종교다원주의 등

 

 

 제1강. 십자군전쟁(1095-1291)

 

Ⅰ. 교회가 전쟁을 일으킨 까닭

  (명목상의 이유)

- 동로마제국의 황제 알렉시우스 콤네누스(1081-1118)는 모슬렘의 공격을 받아 위기에 처하자 교황청에 구원을 요청했다. 당시 동방제국은 약 25년 동안 이슬람교로 개종한 터키인들의 줄기찬 공격에 시달렸다. 1071년에는 황제 콤네누스 자신이 상처를 입고 사로잡히는 참패를 당했고 아르메니아와 소아시아 지역 대부분을 빼앗겼다. 터키인들은 팔레스틴과 시리아, 그리고 남으로 이집트 국경까지 세력을 넓혔으며 급기야 제국의 심장부인 콘스탄티노플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다급해진 황제는 서방교회에 지원군을 요청하게 된 것이다.

 (실질적 이유)

교황 우르반이 십자군 파병을 결정한 데는 실제적인 이유가 있었다.

첫째, 예루살렘이 모슬렘에 점령당한 것은 신성모독으로 하루속히 성지를 탈환하고 싶었다.

- 당시 성자들의 유품과 유골을 숭배하는 서물숭배사상이 만연해 있었고, 성지순례는 중요한 신앙행사였으며 특히 예루살렘을 순례만 해도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예루살렘은 귀중한 장소였는데 이곳을 순례하지 못하는 현실은 그들에게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을 되찾는 것은 서방교회에 있어서 하나의 성전이 되었던 것이다.

둘째, 전쟁은 인구증가로 인한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 당시 서방은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오자 급격한 인구의 증가로 개인의 경작면적이 점점 감소되고 있었다. 사람들은 숲 속의 빈 터에 불을 질러 농경지를 개간했고, 늪지를 건조시키거나 매립하여 씨를 뿌렸다. 그러나 인구의 급속한 증가로 식량난이 가중되었다. 교회와 제국의 입장에서 전쟁은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두는 것이었다.

셋째, 교회의 재산을 증대시킬 수 있는 기회

- 전쟁에 참가하는 십자군기사들은 재산관리를 교회에 위탁했다. 교황청은 영주들과 농민들이 전사하면 그들이 위탁한 재산을 고스란히 교회의 소유로 돌릴 수 있다는 계산을 했다.

넷째, 교황권에 대항하는 세속권력을 분산시킬 수 있었다.

- 당시 교황은 우르반 외에 황제 헨리가 선택한 교황 귀베르트와의 양두 체제였다. 우르반은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전전하며 고초를 겪다가 우여곡절 끝에 교황청을 장악하였는데 이로 인해 우르반은 유럽전체를 장악할 수 있는 보다 원대한 계획을 실행할 필요를 느꼈고 각 제국의 힘을 분산시키는데 십자군전쟁은 안성마춤의 전략이 된 것이다.

다섯째, 파병지원을 통해 동방교회와 제국에 대한 우월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 1054년 동, 서교회의 분리 이후 교황은 동방지역에 대한 수장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이 때에 파병은 교황제국의 기초를 닦고 동서간의 불협화음을 제거할 수 있는 기회였다.

한편, 영주들과 귀족들은 이 전쟁에 출전하여 자신이 통치할 땅을 확보하고 영예를 얻고 죄 사함을 받고자 했다. 원정을 주도했던 볼드윈은 조상으로부터 상속받은 토지가 없어 영지를 확보하기 위해 전쟁 길에 올랐고, 남부 이탈리아 출신의 타느레드는 재산을 얻을 목적으로, 헨리 4세의 가신이었던 부일롱(현 벨기에)은 교황 그레고리 7세를 대항한 죄를 용서받기 위해 원정에 나섰다.

이외 병사들은 진급과 군자금조달, 아내의 강권과 명예심 때문에 또는 모험심 때문에 원정길에 올랐고, 농민들은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다수의 사람들은 신앙심 때문에 십자군전쟁에 자원했다. 원정을 부추기는 열정적인 설교에 흐느꼈으며 옷에 십자가를 그려 넣고 하나님의 뜻에 순교하기로 결심하였다.

 

 

Ⅱ. 전쟁의 과정

 

<1차 원정>

1. 동로마제국 황제의 파병요청을 받은 교황 우르반 2세는 1095년 11월에 프랑스 클레르몽에 공의회를 소집하고 십자군파병 교서를 반포한다. 교황의 설교를 듣고 군중들은 '하나님이 원하신다'(Deus vult!)고 외쳤다.

 

2. 수많은 선동적 설교가들이 동원되어 '십자군에 참여하면 어떠한 죄도 용서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1만 5천 명의 사람들이 은자 피터(Peter the Hermit)의 뛰어난 언변을 듣고 십자군에 자원했다.

 

3. 1096년, 은자 피터와 빈자 월터(Walter the Penniless) 수하의 용사들이 가장 먼저 해협을 건넜으나 터키군의 매복에 걸려 몰살당했다.

 

4. 뒤를 이어 프랑스 국왕 동생인 휴, 부일롱의 고드프리, 볼드윈, 이탈리아의 보헤몬드, 레이몬드와 스테픈이 이끄는 십자군 주력부대(4천명의 기사들과 2만 5천명의 보병들)가 콘스탄티노플에 도착. 이 때 동방황제는 십자군으로 하여금 황제에 대한 충성과 탈환하는 성읍들을 황제에게 돌려준다는 서약을 강요했다.

 

5. 1097년, 동로마군과 십자군의 연합군이 터키의 수도인 니케아를 탈환하고 이어서 도리레움을 함락.(이 때 볼드윈은 약속을 어기고 대열에서 이탈하여 에데싸와 유프라테스강 일대를 독자적으로 점령하고 지배자가 되었다).

 

6. 10월경에 안디옥에 도착하고 성을 포위했으나 대치기간이 장기화되자 식량난과 전염병 등으로 도망병이 속출(은자 피터도 야반도주함). 이후 로마황제와 군대가 귀환하고 10만 명 중 겨우 2만 명만이 남아 대치하던 중, 98년 6월에 성 안의 아르메니아계 크리스찬들이 성문을 열어 겨우 함락하고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 이번엔 터키 지원군이 도착하여 성을 포위하자 십자군이 고립됨. 이 때 피터 바돌로메우가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성창환상'을 보았다고 거짓 진술하자 성창의 신비한 힘을 믿고 있던 군사들이 성안의 어느 한 곳을 파내려갔고 이윽고 창 하나를 발견. 용기백배한 십자군들은 5일간 금식기도한 뒤 성 밖으로 돌격하여 터키군을 함락시키고 대량학살을 자행함.

 

7. 시리아진격- 고드프리의 지휘 아래 바라와 마라성 정복. 기근이 들자 죽은 시체를 먹었다. 1099. 6월에 예루살렘에 도착. 성 안에 거주하던 이집트계 파티마족은 성 밖의 모든 곡식을 불태우고 모든 우물에 독약을 풀었다. 십자군은 8일간 성 밖을 돈 다음, 두 개의 부교를 만들어 성벽을 타고 점령하고 성 안의 파티마조과 유태인들을 불태워 죽이고 어린아이들은 성벽에 던져 쳐 죽임.

 

8. 고드프리는 나라이름을 예루살렘왕국이라 칭하고 자신이 왕위에 올랐다. 산하에 안디옥과 다소성을 왕국에 편입시키고 10년간 통치 후 사망. 뒤이어 볼드윈이 권력을 계승

 

9. 예루살렘을 되찾자 많은 순례자와 유럽인들이 찾아왔으며 이주했다. 지배계급인 라틴인들은 토착인들을 선대했으며 종교를 강요하지 않는 등 평화의 시기를 지냈다. 동서양 문화가 잘 혼합되고 융화되어 독특한 문화가 생성되었다. 그러나 귀족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권력투쟁으로 내분이 일었고 1187년에 이집트의 술탄 살라딘의 공격으로 함락됨

 

<2차 원정>

1. 1144년 살라딘에 의해 에데싸가 함락됨. 이 소식을 듣고 버나드가 나서 정규군을 파병할 것을 주창함. 이에 (프)루이 7세, (독)콘라드 3세의 주도하에 20만 명의 십자군을 거느리고 원정길에 올랐으나 터키군에 의해 괴멸됨.

 

2. 교황 그레고리 8세는 이 패전의 소식에 충격을 받고 쓰러진 후 2달 만에 사망

 

3. (독)프레드릭 황제가 헝가리를 거쳐 소아시아로 진격했으나 강을 건너다가 익사함.

 

<3차 원정>

1. 1191년, (영)리차드, (프)필립2세의 십자군이 아크레를 탈환. 이후 프랑스군은 퇴각하고 영국군이 계속 전쟁을 수행함(프랑스는 이 때 영국 본토를 공격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음)

 

2. 리차드 왕은 술탄과 평화조약을 맺음- 예루살렘의 술탄 지배를 인정하는 대신, 안디옥에서 욥바까지의 해안에 위치한 도시들의 반환과 안전보장, 그리고 성지순례 및 예배참여를 허용할 것 등이 주 내용임.

 

<4차 원정>

1. 1198년, 37세의 나이로 교황에 오른 인노센트 3세는 모든 세속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교황제국 건설을 주창하고 교황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전 제국에 4차 십자군원정을 명령했다.

 

2. 이에 1204년 십자군은 동로마제국 황제 알렉시스 3세가 황위를 찬탈했다는 것을 빌미삼아 먼저 같은 기독교 제국인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고 제국을 함락시킨 다음 콘스탄티노플라틴제국을 건설함. 저항하던 비잔틴 기독교인들을 무참히 살해하고 900년의 역사를 가진 유서 깊은 유적들을 모두 파괴함. 죽은 황제들을 부관참시하고 부녀자 농간과 약탈을 일삼음. 그리고 점령지를 황제의 몫과 공신들, 그리고 십자군 자금과 선박을 제공한 이탈리아 상인들의 몫 등 셋으로 분할함.

 

3. 그러나 라틴제국은 불과 56년간 존속하다가 1261년 헬라인들이 세운 비잔틴제국에게 함락됨. 두 세기 후 비잔틴제국은 모슬렘 투르크 군에게 정복당하고 완전히 역사에서 사라짐.

 

<5차 원정>

1. 교황 인노센트가 다시 원정을 명령하여 1217년에 팔레스타인에 도착하였으나 몇 개의 유물만 습득하고 성과 없이 귀환함.

 

2. 본래 계획은 팔레스타인을 거쳐 이집트를 공격하는 것이 목표였으나 지원을 약속한 (독)프레드릭 2세가 약속을 어기는 바람에 철수한 것임.

 

<6차 원정>

1. (독) 프레드릭 황제가 파문당함. 그는 예루살렘으로 군사를 이끌고 와서 왕위에 오르고 술탄과 협정을 맺음. 이에 교황 그레고리 9세는 예루살렘지역의 순례를 금하자 예루살렘 영주들이 프레드릭을 축출함.

 

2. 이후 예루살렘이 무정부상태가 되자 모슬렘이 협정을 어기고 침략. 이에 1239년, 교황은 평화조약을 파기한 모슬렘을 징치하기 위해 공격을 가함. 다시 예루살렘을 탈환한 뒤 모든 성직자를 학살하고 교회당을 불태움.

 

<7차 원정>

1. 1254년, 모슬렘의 총공세가 시작되자 (프)루이 9세가 진두지휘하여 술탄왕국의 수도인 카이로를 직접 공격키 위해 대함대를 이끌고 이집트 해안에 상륙함. 먼저 다미에타를 점령한 뒤 만슈라 운하를 사이에 두고 적과 대치함. 이 때 루이 9세의 동생 로베르가 달랑 군사 250여 명을 데리고 이집트군을 기습하였으나 괴멸 당함.

 

2. 2달 동안 지루한 대치가 계속됨. 진내에 전염병이 돌아 사기가 와해되던 중 이집트의 총 공격을 받고 모두 체포당함. 매일 300명 씩 십자군을 처형함. 루이와 귀족들은 몸값을 지불한 뒤에야 겨우 석방됨

 

<8차 원정>

1. 16년 뒤인 1270년, 루이 9세는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원정을 시도했으나 북아프리카 튜니스에서 열병에 걸려 전사함.

 

2. 1291년, 최후의 점령지인 아크레가 술탄에 의해 함락되면서 십자군전쟁은 종말을 고했고, 점령지의 모든 기독교인들은 모두 노예로 전락함.

Ⅲ. 십자군전쟁이 남긴 것

 

<부정적 측면>

1. 전쟁의 광풍- 기독교 역사상 가장 어리석은 광대놀음이었고 전쟁의 광풍이 불던 무시무시한 시대였다. 성전이라는 미명 하에 잔혹성이 부추어지고, 수도원마저 전투요원을 양성하는 등 미친 시절이었고 내부적으로는 이단을 색출(inquisitim)키 위한 마녀사냥(witchcraft)으로 사회가 흉흉했다.

 

2, 목적달성의 실패- 십자군원정의 목적을 하나도 성취하지 못한 실패한 전쟁이었다. 교황제국의 건설, 성지탈환의 꿈, 인구과잉의 해소, 토지확보의 계획 등 하나도 이루지 못했다.

 

3. 살육과 약탈의 악마의 행위- 무죄한 사람을 학살하고 심지어 같은 기독교인들인 동방기독교인들까지 살육한 것은 기독교 역사에 있어 가장 부끄러운 일이었다. 특히 목적이 선하면 방법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로마카톨릭주의의 잔혹성이 그대로 드러난 악마의 제전이었다. 결국 평화 대신 검을 가져다주었다.

 

4. 모슬렘에게 모두 잃다- 십자군의 동방제국의 점령으로 찬란했던 동로마제국의 역사와 문화가 사라졌다. 이로 인해 아시아지역은 완전히 모슬렘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긍정적인 측면>

1. 동, 서양 문화의 만남- 새로운 문화가 창출되었고 상호 시야가 넓어짐으로 세계화가 진착됨

 

2. 산업의 발달- 교역과 해운의 발달, 농업과 수공업 등의 확대 등으로 산업이 발전함. 여기에 아랍과학의 우수성이 유럽을 자극하여 중세경제시대를 여는 초석이 됨. 특히 십자군에 선박과 자금을 제공한 이탈리아의 제노바, 베네치아 상인들이 자신들의 경제력을 이용하여 아드리아연안과 크레타섬, 에게해 연안도시, 이오니아해의 섬들을 장악하고 그들만의 상업제국을 건설하고 새로운 경제주체로 활약함.

 

3. 개혁의 시작- 호전적이고 진취적인 분위기는 새로운 학풍과 신앙운동으로 연결되어 많은 학교와 대학이 설립되고 스콜라철학과 교회의 개혁운동이 싹트기 시작했다.

 

4. 국가주의의 생성과 교황권의 추락- 전쟁 중에 생사고락을 같이 한 사람들끼리 동질감, 일체감을 가지면서 애국주의로 발전하였고, 동일 언어를 중심으로 국가의 체제가 갖추어지면서 국가주의가 형성됨. 십일조 등 헌금이 이탈리아로 유출되는 것에 대해 저항이 일어났고 점점 교황주의가 쇠퇴함. 프랑스가 앞장 서 교황청을 자국 내에 두고 운영함(이를 두고 교회의 바벨론 포로시대라고 부름)

 

5. 근대국가의 시작- 국가가 형성되면서 지역별로 구별이 생기고 통행세가 요구되면서 화폐제도가 발달함. 이에 상업과 은행이 생겨나고 상인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권력층인 중산층에 의해 근대국가가 형성됨. 이것이 훗날 프랑스혁명(1789-1795)의 산실이 됨. (2강으로)

<?xml:namespace prefix = v /><?xml:namespace prefix = v /><?xml:namespace prefix = v /><?xml:namespace prefix = v />

 

 

 

 

 

 

제2강. 새로운 신앙운동 08. 09. 22(화)

 

Ⅰ. 배경

- 교황제도와 쌍벽을 이루며 중세를 이끌었던 것은 수도원주의다. 8-11세기의 서양사회는 베네딕트의 시대였다. 신앙생활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의 거의 모든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수도원은 점차 수도원장들과 고위 성직자들의 탐욕을 채우는 곳으로 전락했다. 귀족들과 감독들은 수도원을 사유화하고 개인적인 출세와 영달을 위한 도구로 삼았다.

- 특히 십자군운동이 가져다 준 진취적인 분위기는 교황의 권력아래 숨 쉬고 있던 경건한 신자들의 영성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그들은 독특한 시각과 형태로 그리스도를 믿기 시작했고 단순한 신앙생활을 도모하면서 탁발 수도사들이 되었다.

- 이러한 일련의 현상은 교황좌를 두고 연출되는 유혈극, 성직매매, 성직자들의 탐욕과 성적 타락, 가난한 자들을 멸시하는 풍조 등에 대한 대중적인 거부감의 표현이었다

 

Ⅱ. 새로운 수도원운동

 

1. 클루니 수도원(Cluny Cistercium)

- 아퀴데인의 공작 윌리엄 3세가 설립. 베네딕트 수도규칙을 엄격히 지키고 금욕적 생활을 유지. 세속화된 성직생활을 바로잡고 교황과 감독들, 세속 황제들을 대항하고 개혁을 주장.

- 초대 원장 베르노는 수도원의 토지를 베드로와 바울에게 바치고 재산을 사유화하지 모사도록 조치. 지경을 넓혀 모든 수도원을 베네딕트수도규칙에 의거한 개혁을 하고자 했으며 점차 일련의 조직망을 갖추고 중앙에서 수도원장을 임명하기 시작함. 마침내 수도사 출신인 부루노가 교황에 오름(레오 9세, 1049-1054)

- 가장 큰 문제점은 베네딕트가 강조한 육체의 노동을 경시했다. 클루니 수도원에는 귀족출신의 수도사들이 많았다. 그들은 노동을 대부분 농노들에게 맡기고 성경강독, 기도, 예배 등 경건생활에 전심전력했다. 또 빈곤문제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보였고 수도사들의 재산소유는 반대했지만 수도원의 재산 소유는 반대하지 않았다. 개혁을 외쳤던 그들은 축적된 재물과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생활 때문에 11세기를 넘지 못하고 실패했다.

 

2. 시토(Citeaux) 수도원

- 클루니의 타락과 문제점에 염증을 느낀 사람들이 1098년 프랑스 디용(Diyon)지역에 로베르를 중심으로 설립. 이 수도원을 중심으로 두에 시스턴 수도회가 탄생하였고 여기서 베네딕트와 쌍젹을 이루게 되는 위대한 끌레르보의 버나드(Bernard, 1090~1153)가 탄생.

- 시스턴 수도회의 수도사들은 워낙 비현실적이고 기인들의 형태를 보여 인기는 없었다. 그들은 빵, 야채, 식용유, 소금, 물만으로 식사를 했고, 옷을 입은 채로 잠을 잤으며 하루 6시간의 공공기도회를 가졌다. 이 수도회는 1115년에 이르러 4개의 수도원으로 분립하여 발전했고 점차 서유럽 전역에 확산되었다. 물론 버나드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버나드>

- 디용지역 영주의 아들이었던 그는 1112년 23세의 나이에 친구 30명을 대동하고 시스턴 수도회에 가입

- 시스턴은 버나드의 영향력 아래 343개의 수도원을 거느리게 되었다.(자치권 허락)

- 교황제작자(the Pope Maker)로 불리워짐...1130년에 교황청은 인노센트 2세를 교황으로 선출했는데 같은 날 다수의 추기경들이 아나클레투스 2세를 교황으로 선출하고 인노센트를 몰아냄. 이 때 버나드가 인노센트가 합법적인 교황이라고 역설하면서 전세가 역전됨

- 1130년부터 약 23년간 서방세계의 실제적인 통치자로 군림. 이 기간에 교황좌에 오른 4명의 교황은 전적으로 버나드에게 의존함.

- 그는 성직자들이 여자를 두는 것을 정죄했고, 십일조 사용과 성직자 선출방법을 새롭게 했고, 각종 정치적 문제와 종교분쟁을 중재하고 조정했으며, 동시에 교회의 개혁을 단행했다.

- 그의 관심은 그리스도의 인성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에 깊이 사로잡히는 것이었다. 묵상을 강조했고, 급격한 개혁보다 점진적인 진보를 주장했으며, 지식보다는 체험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며, 겸손과 사랑이 그리스도인의 최상의 덕목으로 여겼다. 대부분의 시간을 성경연구와 교부들의 작품연구에 바쳤으며 많은 저술들을 남겼다.

- 그는 해박한 교리연구가로 '마지막 교부' 라고 불리웠고, 찬송가 작시자로 '감미로움의 박사'로 흠모를 받았으며 그의 설교를 듣고 수많은 인파가 2차 십자군 원정에 자원할 정도록 '뛰어난 설교가'였다.

- 그는 1140년, 센스공의회로 하여금 피에르 아벨라르를 이단자로 규정하여 종신 침묵형을 선언토록 했다. 그는 어거스틴과 교회의 정통성에 입각하여 '믿기 때문에 이해한다'는 원리를 가지고 '이해하기 때문에 믿는다'는 합리적 주장을 굽히지 않은 아벨라르를 정죄했다. 아벨라르는 '우리의 인식이 없다면 죄도 없다'며 죄를 의지의 행동으로 보고 아담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된 것을 부인했다. 그러나 바나드는 어거스틴의 정통성을 고수하면서 오직 하나님의 은총과 계시로만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 그는 세속적인 지위에 관심을 버렸다. 왜소한 체구에 수줍은 성격, 풍부한 감성을 지녔지만 용기가 필요할 땐 과감히 행동했다. 그에게는 군사도 없었고, 돈도 없었다. 그러나 그에겐 하나님이 주신 영적인 권위가 있었다. 그 무기 덕분에 그는 한 시대를 호령했고 교황과 잔인한 세속군주들의 위협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 그는 평생을 묵상과 기도와 말씀 연구와 집필과 교리 연구에 시간을 보냈다.

 

Ⅲ. 탁발수도사들

 

1. 왈도와 왈도파들

 

1) 탁발수도사 왈도(Waldo, 1205~)

- 리용 출신. 도매업 상인이자 거부. 고리대업으로 가난한 자들을 착취함. 아내와 두 딸 외에 기타 베일속의 인물로 알려짐. 어느 날 5세기경의 전설적인 수도사 알렉시스 이야기(성지순례자의 삶과 청빈의 실천자)를 듣고 자신이 부유하게 사는 것에 양심의 가책을 받고 회심. 이후 아내와 두 딸을 수도원에 맡기고 사도적 빈곤을 실천키로 하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순회설교자가 되었다.

- 초기에 그는 복음서들과 성경의 몇몇 책들, 그리고 어거스틴, 제롬, 암브로즈, 그레고리1세의 작품들을 프랑스어로 번역하고 평신도들에게 성경을 보급하는데 주력함.

 

2) 왈도파의 신앙고백과 탄압

- 점점 추종자들이 생기고 그들은 열심히 성경을 읽었다. 그리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 등 가르침을 실천했다. 소박하고 경건한 이들의 삶의 모습은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추종자들은 늘어만 갔고 왈도파들의 순수한 신앙과 청빈한 삶, 수도사적인 고행과 가난한 자들에 대한 보살핌은 기존 교회와 부패한 성직자들로부터 사람들을 멀어지게 했다. 사람들은 세상적인 부를 소유하며 온갖 권세를 누리는 교황과 감독, 성직자들이 참 목자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은 길거리와 공공장소 등 어디에서든지 복음을 가르치고 전파하고 설교를 했다. 수많은 남녀 개종자들이 뒤를 따랐고 그들은 둘씩 짝을 지어 복음을 전도했다. 심지어 여성들도 거리에서 설교를 했다. '리용의 빈자'들로 불리어진 이들은 성직자들의 타락과 카타리파의 이단적 주장을 질타하며 초대 기독교의 소박하고 단순한 모습을 재현했다.

- 로마교회는 왈도파 사람들이 무식하여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또 사도직을 우습게 여긴다고 조롱했다. 리용의 추기경은 그들의 설교사역을 금하면서 설교는 성직자의 고유한 과업이라고 못 박았다. 그러나 왈도파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설교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그들의 주장은 사도직 계승을 교회의 본질로 여기는 로마교회에 대하여 엄청난 도전이었다.

- 교황 알렉산더 3세는 1179년 제3차 레이란트공회를 소집했다. 왈도파는 이 때 공회가 자신들의 선교활동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줄 것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제출하며 교황에게 자신들의 성경을 선물했다. 공회는 여러 심문 끝에 왈도파의 자발적인 빈곤서약은 용인했으나 성직자들의 초청이 없는 한 설교는 금한다고 결정했다.

- 왈도파는 불가피하게 교황의 명령을 무시하고 설교사역을 계속했다. 왈도파는 교황의 명령을 지키는 것보다 당시 흥행하던 이단 카타리파의 혹세무민한 주장을 근절시키는 것이 더 시급하다고 보았다.

- 교황청은 이듬해인 1180년, 왈도파들을 불러 성직자들 앞에서 신앙고백을 하도록 했고 그들은 자신들이 카타리파와는 다른 무리들임을 증명키 위해 신앙고백을 했다. 왈도파는 로마교회나 교황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교황이나 교권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더 중요하다고 이해했다.

- 로마교회는 점점 왈도파들이 성가시게 되었다. 왈도파는 로마교회의 여러 가지 교리를 지키지 않았다. 그들은 사제가 아니 사람도 성찬을 베풀 수 있다고 했고,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는 성경적이지 않다고 거부했고, 모든 종류의 살인을 거부했으며, 사제에게 참회 고백하는 것과 연옥교리 등을 부인했다. 이에 성직자들은 왈도파 사람들을 싫어하여 여러 가지 제재를 가했다.

- 드디어 1184년 교황청은 베로나공의회를 소집하고 왈도파를 이단목록에 추가시켰다. 그리고 1190년 바르본의 감독이 이단이라고 구체적으로 선포했으며 이에 교황 루시우스 3세는 카타리파와 왈도파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십자가 표시를 한 '신앙의 용사들'을 동원하여 검거명령을 내렸다. 이 때 검거자들은 왈도파들이 사도신경을 거부하는 것을 포착하고 잡힌 사람들에게 사도신경을 외워보라고 한 다음 거부하면 왈도파로 알고 검거했다.

- 이후 교황 인노센트 3세 때부터 왈도파를 무자비하게 박해했다. 그들은 군사들을 피해 알프스산맥의 피드몬트 계곡으로 피난하여 성전(Temple)이라는 교회당을 짓고 겨우 명맥을 유지했다. 겨우 나폴레옹 이후에 신앙의 자유를 얻어 박해에서 벗어났다. 종교개혁 이후에는 개혁주의 신학을 교육받아 프로테스탄트 신앙고백을 수용했으며 남부 독일과 스위스의 종교개혁에 영향을 끼쳤다.

 

3) 왈도파 교회

- 이단으로 정죄당한 후 그들은 새로운 신앙공동체를 만들었다. 지역별로 소사이티(Societies)라는 신앙공동체를 만들고 메조랄(Mejoral)이라는 치리기구를 두었다.

- 왈도파 교회는 감독, 사제, 집사의 직제를 교회 내에 두었다. 신자들은 상급자에게 순종했고 서로를 형제, 자매라고 불렀으며 공동체 밖에 있는 사람은 친구라고 불렀다.

- 특히 하층민들에게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처음엔 남부 프랑스에서 시작된 것이 스페인, 독일, 알프스, 롬바르디를 넘어 보헤미야, 폴란드, 헝가리, 스페인 등 전 유럽으로 확산되었다.

- 보헤미야 지역에서는 얀 후스의 추종자들인 후스파 사람들과 친교를 나누었으며 후스파 신학자들은 왈도파들에게 신학을 교육시켰다. 이들은 15세기경에 이르러 왈도-후스 연합기구를 만들기도 했다.

- 왈도파는 신자를 '완전자'와 '신자'로 구분했다. 완전자는 집이나 재물을 소유하지 않았다. 결혼한 사람이 완전자가 될 때는 아내를 포기했다. 신자들은 완전자들을 대접하고 필요한 것을 공급했다. 완전자는 오직 설교사역에 전념했다.

 

4) 평가

- 로마교회의 시각에서는 왈도파는 분리주의자들이다. 그러나 개혁주의적 입장에서는 왈도파교회는 성경이 제시하는 교회의 본질에 충실한 그리스도의 몸, 정통신앙을 가진 진리의 기둥과 터이자 교회개혁운동의 귀감이다.

- 다만 신앙은 마리아를 그리스도의 어머니라고 믿는 등 중세기적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2. 카톨릭 빈자들(the Poor Cathloics)과 수도회

 

1) 배경

- 고전적인 수도원인 베네딕트, 클루니, 시토수도원은 화려한 수도원 건물과 웅장한 교회당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영적 욕구를 채워주지 못했다. 교황청은 가난과 굶주림의 시대에서도 사치와 허영에 사로잡혀 있었다.

- 로마교회의 타락과 함께 교회를 비판하는 분위기가 더욱 확산되었다. 파트리아로 알려진 사람들은 성직자들의 부패에 대해 질타했고, 아벨라르의 제자인 아놀드는 추종자들과 전 유럽을 여행하면서 교회의 세속화를 비판하며 종교와 정치의 완전한 분리를 주장했다.

- 이 때 가난한 대중들은 탁발수도사들의 등장을 진심으로 반겼다. 왈도파 등의 초기 탁발수도사들의 영향으로 제도권의 수도원을 박차고 나가 가난한 대중들과 함께 생활했으며 십자가를 그려 넣은 겉옷을 입고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이교도들에게 복음을 전파했다.

- 특히 알프스 산의 롬바르디 지역의 카톨릭 빈자들이 주목을 끌었다. 롬바르디 지역은 교회비판자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어 새로운 교회갱신의 중심지가 되어 갔다. 그들은 카타리파 같은 이단과 자유방임적인 아놀드의 추종자들 사이에서 올바른 기독정신을 세우고자 소녕의식에 충전되었다. 이들은 왈도파인 리용의 빈자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유사한 형태로 하나의 신앙공동체를 형성했다.

- 롬바르디의 빈자들은 제국정치와 결탁하지 않고 교회갱신을 주장했다. 시골지역으로 다니며 설교를 하는 것도 사도의 사명이기도 하지만 그것만이 유일하다고 인정하지 않고 공동체적 삶이 더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노동관에서 리용의 빈자들과 관점을 달리했다. 리용의 삶들은 노동을 부를 축적하려는 유혹의 굴레로 보고 노동을 천시한 반면에 롬바르디는 노동을 봉사와 증거의 수단으로 삼았다. 리용의 빈자들은 여행하며 노래하고 설교하는 것을 좋아한 반면에 롬바르디 빈자들은 산업현장에서 일하는 것을 즐겨했다. 대표적인 인물로 두란트가 있다.

- 롬바르디의 빈자들은 사회적 연대감을 깊이 인식했다. 왈도파와는 다른 길을 걸으며 로마교회와의 협력관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새로운 관계를 모색했다. 왈도파가 로마교회와 완전히 단절한 것은 옳지 못하다고 여겼다. 드디어 1205년에 두란트는 교황 인노센트 3세의 허가를 받아 '카톨릭 빈자들'이라는 이름의 수도교단을 출범시킨다. 그들은 왈도파와는 달리 교회의 보호를 받으며 새로운 수도원 운동을 주도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제국의 정치와 연합한 것은 아니다. 필요성에 의한 협력을 통해 교회 내부의 갱신이 더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2) 제1, 제2, 제3 수도회

- 교황청은 탁발수도사들의 영향력이 점차 확대되자 이들을 제도권 내에 묶어둘 필요를 느끼고 각각 독립된 수도단으로 인정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 탁발수도원을 사회적 갈등과 교황청에 대한 반감을 해소하는 도구로 역이용한다.

- 베네딕트 수도원 같은 고전적인 수도원을 제 1수도회(1st Order)라고 하고, 탁발수도단을 제2 수도회, 그리고 가정에서 수도사의 의무를 다하는 사람들을 제3 수도회로 분류했다.

 

3. 수도원의 양대 산맥

 

A. 아씨시의 프랜시스(Francis, 1181~1226)와 프랜시스 수도회

 

1) 프랜시스(프란체스코)

- 본명: 지오반니(Giovanni). 이탈리아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인 사이에서 출생. 고향 아씨시 사람들은 그를 프란체스코(작은 프랑스인)로 부른다. 아버지는 부유한 의류무역상으로 프랜시스는 20살 가지 아버지의 일을 도왔다. 1202년에 페루기아와 아시시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 뜻하지 않게 죄수로 몇 달간 수감된 후 고향으로 돌아와 중병으로 고생함. 이 떼부터 세상생활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내적 갈등을 겪으며 기도생활을 하기 시작함.

- 어느 날, 말을 타고 가다가 문둥병자를 만났는데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다. 이후 그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고 가지고 있던 재산을 가난한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고 부자들에게 가서 구걸을 했다. 그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나는 청빈이라는 부인과 결혼을 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아버지는 이런 아들의 행동이 탐탁치 않아서 그의 몫에 해당하는 유산처리를 성직자에게 맡겼고 감독은 그가 유산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판결했다. 판결 즉시 프랜시스는 입고 있던 의복조차 아버지에게 벗어주고 수도원을 찾아 갔으나 어떤 수도원도 거지같은 그를 받아 주지 않았다.

- 그는 산 속에 들어가 기도생활을 했다. 그는 온전히 벌거벗은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그리스도 앞에 서기 원했다. 그 무렵에 그는 새들과 대화를 하고 고행과 기도 끝에 신비체험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은자로 지내는 동안 자발적 빈곤을 통한 기쁨을 추구했다. 그러나 그는 산 속에서 은거하는 것보다 세상으로 들어가 가난한 사람과 병든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사람들에게 설교하기 시작했다. 친구들은 누추한 이 수도사를 경멸했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은 그의 뒤를 따랐다. 무리들은 '나는 왕의 아들이라네'라는 노래를 부르며 청빈생활운동에 앞장섰다. 1218년까지 무려 3천 명에 이르렀다. 그는 사람들과 함께 무소유공동체를 만들었다. 이것이 작은 형제들(형제단, order of friars)이라고 불리워지는 프랜시스수도회의 시초이다. 그는 교황 인노센트 3세에게 가서 자신이 만든 신앙공동체를 윤허받았다.

- 프랜시스는 여자들도 가난을 통해 하나님나라의 부요를 누릴 권리가 있다고 했다. 그래서 아씨시의 처녀 클라라에게 빈곤의 가치와 지혜를 가르치고 제자로 삼았다. 그녀는 1212년에 부모를 떠나 프랜시스의 공동체로 들어갔으며 이후 '빈자 클라라의 무리(The Poor Claras)라는 수녀회를 조직했다.

- 프랜시스는 겸손을 강조했다. 실제로 겸손을 실증하기 위해 1220년에 수도회의 지도자 자리를 후계자에게 물려주고 그 후계자 앞에 순종의 표시로 무릎을 꿇었다. 그는 부와 명성에 둘러 쌓인 채 파멸로 치닫고 있던 기존의 수도원을 개혁하기 위해 엄격한 수도원 규칙을 제정하고 육체노동과 영적 생활을 통한 수도원생활을 일상화하고 수도사들이나 수도원들이 재산을 소유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수도사들은 갈색 옷 두벌 외에 아무 것도 가질 수 없었다. 사람들은 그럼에도 늘 기쁨으로 춤추는 이들을 두고 ';하나님의 고아대'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 1226년 10월에 어느 예배당에서 숨졌다. 그의 단 벌 옷에는 이와 벼룩이 들끓었다. 죽기 전에 "나는 책임을 다 했다. 나의 자매인 죽음아 어서 오라"고 외쳤다고 전해진다.

2) 프랜시스 수도회

- 수도사들은 복음서의 가르침에 따라 소박하게 살았고 회색 옷을 입었다. 개인의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준 후에야 수도사가 될 수 있었다. 갈아입기 위한 두 벌 옷은 허용되었다. 그러나 가죽이 아닌 싼 값의 천이어야 했다. 수도사들은 걸어서 여행하며 노동을 제공한 대가로 음식과 잠자리만을 제공받으며 이곳저곳을 다니며 설교를 했다.

- 탁발수도사들의 모습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일체의 물질소유를 거부하고 남을 위해 봉사하는 그들의 신앙과 태도에서 하나님나라가 남의 나라가 아님을 대중들은 인식하기 시작했다. 특히 작은 형제단은 인기를 독차지했다.

- 초기 프랜시스수도회는 설교나 학문의 중요성을 별로 강조하지 않았다. 설교보다 모범적인 삶을 더 우선시했다. 모든 역경과 고난과 불의와 처참한 상황을 겸손하게 참고 견디는 영성을 추구했다. 그러다 도미니크 수도회에서 대학을 설립하고 학문을 장려하자 1236년 파리대 알렉산더가 교수로 임용된 것을 시작으로 뒤늦게 대학사회에 뛰어들었다.

- 프랜시스가 죽자 수도회는 두 파로 나뉘어졌다. 엄격파는 절대빈곤에 관한 그의 가르침을 엄격하게 순종할 것을 주장했고, 온건파는 상황의 변화에 따라 수도원 규칙을 문자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수도회가 재산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두 파는 결국 분열했고, 교황 그레고리 9세가 온건파를 지지하자 엄격파는 수도회를 떠났다. 온건파는 엄격파를 극단주의자, 형제애주의자, 구원주의자라고 비난했다. 이후 프랜시스수도회는 설립취지와 다르게 많은 재산을 소유하게 되면서 변질되어 갔다.

- 엄격파는 기존 교회와 수도회로부터 멀어지면서 피오르의 요아킴(Joachim)의 가르침을 수용했다. 요아킴은 독자적인 수도원을 세웠는데 그는 인류 전체의 역사를 3시대, 즉 성부, 성자, 성령시대로 구분하고 한 세대는 30년이며 성부시대는 아담에서 예수까지 42세대(1260년), 다음 42세대가 성자시대, 그리고 성령시대가 이어진다고 해석했다. 그리고 성령시대는 수도사들이 주도하므로 기존의 교황이나 교회지도자들이 필요치 않다고 가르쳤다. 이로서 엄격파는 '성령파'로 불리워졌다.

 

B. 도미니크(Dominic, 1170~1221)와 도미니크 수도회

 

1) 도미니크

- 스페인 태생. 어린 시절에 높은 수준의 인문과학과 신학을 공부. 20세 때, 자기가 살던 지방에 가뭄이 들자 아끼던 책들과 소유물들을 팔아 가난한 자들을 구제했다. 이후 팔렌시아에서 약 10년간 공부하고 29세 때 참사원이 되었다.

- 그 무렵, 남부 프랑스지방에 카타리파가 성행했다. 교회는 그들을 진멸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했다. 이 때 도미니크는 감독과 함께 남부 프랑스지방으로 가서 카타리파를 개종하는 일에 앞장섰다. 박해받는 이단자들을 불쌍히 여기면서 사랑, 동정, 봉사를 기초로 이단에 속한 사람들을 인도하고 교화하려고 노력했다. 이단에 대항하는 것은 종교재판, 마녀사냥식의 무력사용이 아니라 교육과 설교라고 믿었다. 이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학문탐구와 기독교리교육에 충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점점 추종자들이 그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교리공부를 수도원의 일과로 삼았다. 도미니크는 6년 동안 남부 프랑스에 머물면서 수도원을 세우고(1206년), 정통신앙을 설교했다.

- 그는 거창하고 화려한 의복을 입은 고위 성직자들과는 달리 맨발의 수도사였다. 거지처럼 먹을 것을 구하며 박해와 조롱을 감수하며 이단자 개종에 몰두했다. 교황이 카타리파를 진멸하기 위해 특정 지역에서 무력을 사용할 계획이 있다는 것을 미리 알고 그 지역에 먼저 가서 이단자들에게 설교하고 가르치며 그들을 개종시키려고 힘썼다.

- 도미니크는 갑자기 몇 해 동안 종적을 감추었다가 44세가 되던 1214년에 다시 나타났다. 이 때 부유한 한 상인의 저택에서 자신을 따르던 인물들과 공동수도생활을 했다. 이 공동체에 감명을 받은 투울루즈 대감독이 그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 점점 수도사들이 그의 공동체에 가담했다. 이때부터 이들을 '도미니크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도미니크는 교황에게 이 수도회의 설립을 인가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는 어거스틴의 수도규칙을 제정하고 빈곤과 탁발을 수도생활의 원칙으로 삼았다. 드디어 1216년에 교황 호노리우스3세가 도미니크의 요청을 수락했다. 이 수도회의 공식명칭은 '설교자들의 수도회(The Order of Preachers)이며 도미니크수도회는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 도미니크는 사유재산을 가지지 않았다. 죽을 때도 남의 침대에 누워 남의 옷을 빌려 입은 채였다. 그는 사후에 높은 존경을 받았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수도회에 가입했고 그의 가르침을 따랐다. 죽은 뒤 13만에 그는 성자로 추대되었다.

 

2) 도미니크수도회

- 수도사들은 검정 옷을 입고 다녔다. 프랜시스수도회와는 달리 빈곤 그 자체를 신앙의 본질로 여기지 않고 단지 이단에 대항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보았다. 그들은 이단자들에게 대항하기 위해서 설교, 교훈, 교육, 신학탐구에 주로 매진했다. 훈련받은 수도사들은 전략적 요충지에 파견되어 다른 수도사들을 훈련시키고 설교자로 키웠다. 그들은 대학으로 들어가 많은 학생들을 가르쳤다. 파리대학교에서 가장 먼저 도미니크 수도사들을 학교로 초청하고 그들에게서 높은 수준의 신학을 전수받았다. 당대 최고의 지성인인 알버트토마스 아퀴나스가 이 때 배출되었다.

- 그들은 활동반경을 넓히어 유대인들과 모슬렘들을 개종시키기 위해 유럽 전역으로 선교의 영역을 넓혔다. 그들의 활동무대는 수도원이 아니라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상이었다. 수도사들은 설교를 통해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올바른 교리를 교육시킴으로서 사람들을 이단에 빠지지 않도록 가르쳤다.

- 수도회는 군대조직처럼 각 지방마다 이를 통괄하는 종신직의 원장을 두고 부원장을 선거에 의해 선출했다. 모든 수도사는 상급자에게 철저하게 복종했다. 도미니크가 사망한 지 50년 뒤 이 수도회 출신의 알렉산더 5세가 교황이 될 만큼 위세가 대단했다.

- 그러나 종교재판이 진행되면서 수도회는 이단자들을 진멸하는데 앞장섰다. 민심이 돌아서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사람들은 설립자의 이름인 도미니쿠스 대신에 '도미니 카네스'(주님의 개)라는 이름을 이 수도회에 붙였다.

 

3) 기타

- 갈멜 수도회: 1154년 팔레스틴에서 시작. 갈멜산 선지자 엘리야의 후예로 자처. 프랜시스수도회의 규칙을 추종. 주로 묵상, 기도, 신학연구, 선교에 매진. 갈멜여자수도회로 더 유명

- 어거스틴 수도회: 이탈리아 은자들의 공동체로 시작. 점차 도시로 파고들면서 인기. 도미니크수도회의 모범을 따름. 이론적인 것보다 실제적인 것에 더 관심. 독일개혁교회에 영향.성경연구와 비평적 사고를 곁들인 인문교육을 통해 16세기 종교개혁의 징검다리역할.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가 이 수도회 소속.

제3강. 중세의 이단 2008. 10. 7(화)

 

1. 이단의 역사

- 2세기 들어 기독교는 안팎으로 공격과 시련을 겪었다.

< 외부적 공격 >

1) 로마제국의 황제들과 권력자들의 정치적 공격

2) 루키안, 프르피리, 켈수스 등 사상가들의 교리 비판

<내부적 공격>

1) 에비온파(Ebionities) : 사이비 베드로 노선을 따르는 기독교화된 유대주의로서 그리스도는 사람이면서 하나님의 양자지만 신성은 부정. 예수는 단지 메시야로 지명된 (택함)사람. 그리스도는 이상적인 아담의 성육신이다. 동정녀탄생 부인 등.

2) 영지주의(Gnostics) : 사이비 바울적인 경향을 딘 이교사상으로서 사변적이고 신령주의를 추구. 여러 우주의 신화와 그리스와 동방의 철학사상에 기독교 교리를 혼합한 이단. 이원론적인 세계관으로 정신과 물질을 대립적인 것으로 보고 물질의 세계는 악의 원리에 지배됨으로 인간의 영혼은 몸의 무덤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주장.

3) 몬타누스파(Montanus) : 금욕생활, 금식, 엄격한 참회를 강조하면서 재혼 금지, 박해 시에 숨는 행위 금지, 가정과 남편을 버리고 페푸자에 모여 살도록 권유, 교회에는 성령은 은사가 떠났고 몬타누스가 성령이라고 주장.

4) 마니교(Manicheaism) : 배화교와 같이 페르시아의 이원론에 근거하고 빛과 어둠을 다스리는 두 신을 전제로 한다. 마니는 붓다, 조로아스터 및 예수님이 빛의 아버지로부터 인간을 구속하는 참종교를 위하여 세움을 받은 마지막 사자이다. 그 가운데서 마니가 가장 완전하다고 주장. 완전한 금욕생활을 강조. 모든 소유를 버리고 성욕도 자제하고 결혼도 포기

5) 노바티안파(Novatian) : 250년 경 데키우스의 박해가 끝난 뒤 배교자들의 수용문제로 교회가 다투었는데 로마감독인 코르네리우스는 수용을, 노바티안은 수용불가를 주장하고 추종자들과 따로 분리. 이후 스스로를 정결파로 부르며 독자 노선을 걸음. 노바티안은 발레리안 치하에서 순교함.

6) 아리우스파(Arius) :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고 아리우스가 주장. 이후 삼위일체교리를 사이에 두고 치열한 신학논쟁을 벌이다. 318년 알렉산드리아 노회에서 아리우스가 이단으로 정죄 받고 출교를 당했고, 이후 325년 콘스탄틴 황제가 소집한 니케아 공의회는 아리우스를 정죄하고 니케아신조를 작성함. 그러나 이후에도 아리우스파가 득세하자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아타나시우스가 주도하여 니케아신조를 재확인함으로서 아리우스파 논쟁이 종식되었다.

7) 도나투스파(Donatism) : 4세기 북아프리카에서 발생. 1백년간 지속. 총독 펠릭스가 311년에 캐킬리안을 카르타고의 감독으로 임명하자 도나투스와 교회 감독들은 그가 한 때 배교자였다고 주장하며 마요리누스를 새 감독으로 따로 선출하고 교회의 정화운동을 시작. 이후 도나투스파는 교회의 성결을 강조하며 교회와 세상은 분리되어야 하고 국가권력에ㅐ 대해 부정적인 입장. 일종의 분파주의로 염세적이고 금욕, 고행, 순교, 기적 등을 내세우고 비타협적 극단적인 교회분립을 단행함. 어거스틴은 분파의 죄는 배교보다 더 무서운 죄라고 하며 도나투스파를 반대함. 411년 호노리우스 황제의 칙령으로 카르타고 공의회가 개최. 어거스틴과 도나투스파 감독 페틸리안이 치열한 논쟁. 어거스틴의 정통파가 승리. 이후 약화됨.

8) 펠라기우스파(Pelagius) : 동방과 서방은 은혜의 교리가 서로 달랐다. 동방은 헬라 철학, 유대주의, 동방의 신비주의 등의 영향을 받아 형이상학적인 사색에 관심을 둔 반면에, 서방은 인간과 구원에 대한 교리에 관심을 둠. 펠라기우스는 매 순간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값없이 주는 은혜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죄짓지 않는 가능성을 주신 것과 상급을 얻기 위해 율법과 그리스도의 교훈을 지키는 것이 은혜라고 주장. 즉 인간은 원하기만 하면 죄를 짓는 일 없이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히 행할 수 있다고 주장. 그의 사상은 어거스틴과 정 반대의 것으로 431년 에베소 공회에서 최종적으로 파문됨.

9) 단성론, 단의론 :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칼케돈회의의 결정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그리슫의 단설론과 단의론을 주장. 피터 몽구스는 하나님의 고난설을 말하고, 단의론은 신플라톤주의적인 사상을 기반으로 한 사변적인 주장.

 

 

2. 중세의 이단

 

1) 아놀드의 신앙운동

- 아벨라르(1140년 버나드에 의해 이단자로 규정받고 종신침묵형에 처해짐)의 제자인 아놀드와 그의 추종자들이 벌인 독특한 신앙운동. 아놀드는 성직자들과 수도사들의 토지소유를 반대했다. 토지를 소유하면 구원받을 수 없다. 부와 권력으로 구성된 교회는 진정한 교회가 아니다. 따라서 신자들은 거짓 교회로부터 성례를 받지 말아야 한다 등을 주장. 그는 프랑스 전역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주장을 펼치다 로마로 돌아와 교황을 반대하는 반란에 참여했다. 1155년에 체포되어 화형 당함.

 

2) 카타리파(Cathari)

- 프랑스 남부 알비젠스 지방에서 일어난 이단으로 마니교적 이원론에 기초한 교리를 신봉함. 즉, 물질은 악한 것이며 이 세상은 선과 악이라는 두 가지 영원한 힘과 원리에 따라 움직이며 양자는 모두 시간을 초월하므로 어느 한 쪽도 다른 것에 우선적이지 않다. 어느 한 쪽이 물리적인 힘이나 정복에 의해 기울어지는 것이 아니고 우월한 생명의 질에 따라 결정된다. 선을 택하는 것이 선하게 되는 길이다.

- 카타리파에 의하면 구원은 육으로부터 영혼이 해방되는 것이다. 세상은 선과 악이 혼합된 상태이다. 이것은 악이 가져다 준 것이다. 정경은 신약 전체와 구약의 예언서 일부다. 성경은 우화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유령의 몸을 가진 천사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고통을 당하지 않았고 부활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카타리파의 진리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로마교회는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잘못을 범하는 부패한 교회다. 성례, 지옥, 연옥, 몸의 부활에 관한 교리는 잘못된 교리다.

- 물질을 악한 것으로 여겼으며 일체의 성적인 표현을 삼갔다. 결혼을 금하고 육류, 우유, 계란, 버터, 치즈, 등 동물의 소산을 멀리하고 채식을 했다. 생선을 먹은 것은 그들이 성관계를 하지 않고 번식되는 것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 계율과 가르침이 너무 엄격하다는 불평이 대두되자 신자를 규율을 엄격히 준수하는 완전자와 진리를 배우는 과정에 있는 보통신자로 구분했다.

- 카타리파는 기존의 교회조직을 거부하고 로마카톨릭교회를 악의 집단으로 보았으며 따로 그들만의 교회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완전자들의 조직에서 교회의 감독과 사제를 선출했다. 완전자들은 성령의 세례를 받았으며 새로운 의식을 관장했다. 성찬식은 탁자 주위에 둘러서서 주기도문을 크게 낭독하는 가운데 빵을 나누는 방법으로 실시했다.

- 카타리파는 12세기에 북부 이탈리아와 남부 프랑스에 급속히 확산되었고 막강한 영향력을 끼쳤다. 교황 인노센트 3세는 카타리파를 포함한 이단을 처형하기 위해 십자군가지 동원했다. 그것은 종교사에서 지우고 싶은 피의 살육이었다.

 

 

3. 종교재판(Inquisition) 과 마녀사냥(Witchcraft)

 

- 카타리파를 축출하기 위해 각 교구마다 종교재판소를 설치하고 세속군주들은 무력으로 이단자를 색출함.

- 1184년 교황 루시우스 3세가 종교재판법을 공포함. 모든 교구가 최소한 1년에 한 번 이상 교인들을 조사하여 정통신앙을 고백토록 의무화. 이단자를 보호하는 사람도 이단자와 동일한 범죄로 처벌. 1215년 제4차 레이란트 공회에서는 이단자를 진멸하는 결정을 내림. 심지어 수도사들도 감독의 법정에 서서 자신의 신앙을 점검받아야 했다. 한마디로 성직주의와 교황권력에 항거하는 사람은 생존이 불가능했다.

- 서방교회는 이단자를 징벌키 위해 십자군을 일으켰다. 닥치는대로 무고한 백성을 이단으로 몰아갔다. 마녀사냥은 그래서 시작되었다. 이단자들은 교수형, 화형, 팔다리를 찢고 불에 태우고 물에 빠뜨려 죽였다. 새로운 사상의 씨앗까지도 싹을 잘랐다. 이단박멸을 지지했던 버나드 조차 이단자들은 칼에 의해서가 아니라 설복에 의해 개종시켜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였다.

- 그러나 교회의 이단박멸정책은 성공하지 못했다. 단지 힘으로 이단을 징치하려 했던 중세교회는 많은 선량한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은 우를 범했다. 중세교회는 최대의 살인집단이었다. 

728x90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