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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전후사 제7강~제9강

최더함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2. 12. 14.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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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강. 중세교회개혁운동

1. 시대적 배경

1-1. 중세 후기의 서방교회와 수도원은 축적된 부와 권력 때문에 타락하여 영적인 능력을 상실하였다. 이에 교황청의 아비뇽시대를 겪은 후 국가주의가 확산되면서 교황의 권위가 출가했다. 여러 명의 교황이 등장하고 이를 해결키 위해 공의회운동(Counciliar Movement)이 펼쳐졌다. 전체교회를 대표하는 공의회가 교황을 결정하고 교회의 분열을 치유하고 이단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이 또한 실패했다. 개혁을 외치던 사람들도 서서히 부정부패로 얼룩지고 교회는 다시 만신창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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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이때에 부패한 교회를 개혁하고자 의분의 사람들이 일어났다. 위클리프, 롤라즈, 후스(후스파), 타볼파, 사보나롤라 등이 개혁운동의 불씨를 지폈다. 그들은 하나님을 제도보다 더 사랑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교황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가졌다고 확신했다.

2. 개혁의 선구자들

2-1. 존 위클리프(J. Wyclif 1330-1384)

1) 영국 출생. 옥스퍼드에서 박사학위를 받음. 1354년에 메르톤대학, 1360-1361년에는 발리올대학, 1365-1367년에는 캔터베리홀대학에서 교수로 활약했다. 1381년, 에드워드3세에 이어 미성년자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존은 위클리프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1376-1378년까지 그를 왕실의 외교가로 초빙했다.

2) 그는 교황과 교회에 대해 증대되는 대중의 혐오감을 의식하면서 교회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표시했다. 그는 누가 예정을 받은 사람인지 분별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신앙생활에서 맺어지는 열매를 보고 짐작할 수 있다고 하면서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교황은 예정의 은총 아래 있는 자가 아니며 따라서 구원받을 수 없다는 폭탄선언을 했다. 나아가 그는 부도덕한 성직자들의 재산을 정부가 몰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무렵 교황청은 프랑스왕국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교회세 징수와 교황의 세속권력의 문제로 교황청과 갈등을 보이고 있던 영국의 왕실은 즉각 위클리프의 주장을 환영했지만 그것이 자기들에게도 유리하지 않게 전개되자 곧 지지를 철회했다. 그의 이 주장은 뒤에 교황 그레고리 11세에 의해 정죄 당했다.

3) 교회의 타락을 혐오한 그는 성경의 권위가 교회의 전통이나 권위자들보다 수위에 있다고 선포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주신 것이지 부패한 성직자들이 독점하도록 준 것이 아니라고 했다. 성경이 교황의 독점물이며 교회만이 성경을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다는 기존의 관념을 거부했다. 교회는 모든 택정한 사람들로 구성된 그리스도의 몸이므로 성경은 그들의 손에 넘어가야 하며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강조했고 성경번역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성경만이 기독교 교리의 유일한 표준이며 교황제도는 성경적 근거가 없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4) 그의 철학의 핵심은 어거스틴의 실재주의(realism)를 반영한 것으로 개인은 우주적인 계급(hierarchy)을 통해 왔으며 본질적으로 불변하고 파괴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회의주의에 대해선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는 어거스틴의 가르침에 따라 교회를 눈에 보이는 유형적인 계급이 아니라 영원하고 불가시적이며 이상적인 실재(ideal reality) 즉, 참교회는 택정한 사람들로 이루어지는 무형의 몸으로 여겼다.

5) 특히 <하나님의 주권에 관하여>와 <세속주권에 대하여>라는 책에서 그는 하나님만이 다른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는 정당성과 필연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주권은 모든 주권의 근거가 된다고 주장했다. 또 모든 합법적 통치권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으므로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 사용되어야 하며, 지배자가 아니라 피지배자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고 했으며, 이를 위반한 통치는 권한을 부여한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며 더욱이 교회권력이 세속권력까지 확장하는 것은 비합법적이라고 힐난했다.

6) 그의 성만찬교리는 격렬한 논쟁의 중심에 섰다. 당시 교회는 1215년 제4차 레이란트공회를 통해 화체설(성만찬에서 물질이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살과 피로 변한다는 설)을 공식 교리로 선언한 것에 대해 위클리프는 이 교리가 미신을 조장하고, 성육신의 교리를 부정하며 합리적이지 않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본질과 연합했을 때 신성의 임재가 인성을 파괴하지 않은 것 같이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떡 속에 임재하지만 떡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는 신비적인 형태로 성찬에 임재하시므로 떡은 여전히 떡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수도사들과 귀족들은 그가 과격하다고 하여 등을 돌렸고 1381년엔 대학당국이 그의 성만찬론을 이단사상으로 규정하였다. 이어 1382년의 블렉프레아 공회에서도 정죄했다.

7) 1381년에 은퇴하여 루터워스에서 조용히 저술에 몰두했다. 그는 마지막 10년 동안 어거스틴에 견줄만한 학문적 역작들을 대량으로 쏟아내었다. 1384년 뇌출혈로 사망했고 1415년 콘스탄스 공의회는 그를 이단자로 정죄했으며 교회 부속묘지에 안장되어 있던 그의 유골을 파내어 화형에 처했고 그 재를 스위프트 강에 뿌렸다. 그의 사상은 영국에서는 환영받지 못했지만 체코슬라바키아의 개혁신앙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16세기 종교개혁가들에게 중심적 지침이 되었다.

2-2. 롤라즈운동

1) 위클리프는 가난한 설교자들이라고 불리워진 롤라즈 전도자들을 여러 마을로 파송했다. 이 무리는 그의 가르침에 따라 하나님의 예정과 성경을 강조했다. 그들은 성경은 교황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일반 신자들 모두의 것이며, 성경은 최종적인 권위이며 모든 인간은 그것을 읽고 해석할 권한을 가졌다고 외쳤다. 나아가 성직자들의 세속관직을 겸하는 것을 반대했고, 화체설, 죽은 자들을 위한 예배와 기도, 면죄부판매, 성지순례 등은 모두 거짓된 것이며, 성상의 사용과 성직자들의 독신제도는 신성모독이라고 가르쳤다.

2) 이 운동은 처음에 귀족층에서 시작되었지만 차츰 서민층으로 파고 들었다. 1413년 존 올드캐슬 경이 롤라즈운동을 기초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처형당했다. 이후 롤라즈운동은 점점 극단적으로 변해갔다. 교회의 명령을 무시하고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였으며, 이단처벌법 개정을 위해 투쟁했다. 그러다 1431년 롤라즈음모사건이 터지고 이들은 교회개혁과 정부전복을 시도했다는 미명아래 추종자 대부분이 사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이 운동은 저변으로 확대되었다. 16세기 초의 영국종교개혁운동의 기초가 되었다. 영국은 헨리8세의 결혼문제와 롤라즈운동 등의 정치적 사회적 변화와 함께 개혁이 시작되고 완성되었다.

2-3. 얀 후스(Jan Hus, 1372-1415)

1)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샤를4세에게는 앤(Anne, 1366-1394)이라는 명석한 딸이 있었다. 그녀의 오라버니는 체코슬로바키아의 국왕인 웬체슬라스 4세였다. 그녀는 영국의 리차드2세와 정략 결혼해 왕비가 되었다. 그녀는 성경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함께 오빠의 나라, 체코의 보헤미아에서 우수한 학생들을 선발하여 옥스퍼드로 보내 공부를 계속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아니했다. 그들이 고국으로 귀국하면서 위클리프의 책들과 사상을 수입했으며 보헤미아지방은 교회개혁운동의 진원지가 되었다.

2) 보헤미아의 개혁운동의 기수는 얀 후스였다. 그는 샤를대(프라하대학)를 졸업하고 1390년에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1400년에 사제로 서품되었고 1401년에는 모교의 철학교수로 부임했다. 1402년에는 학교 근처의 베들렘헴 교회에서 매주일 설교를 담당했다. 당시 금서로 알려진 위클리프의 책을 읽고 감명을 받은 후 개혁의 기수가 되었다.

3) 후스는 먼저 성직자들의 도덕적 타락과 성직매매를 강하게 질타했다. 교회관습의 개혁과 성직자들의 생활개혁을 주창했다. 동료 성직자들은 그의 거친 설교를 싫어했다. 그는 위클리프의 성직자 재산 몰수와 성만찬론을 제외한 예정론과 교회론을 진지하게 수용했다. 그는 위클리프의 책과 영국에서 수입한 신학관련 책들을 번역했고 보헤미아는 들끓기 시작했다. 특히 당시 교회는 평신도들에게 떡만을 분배했는데 포도주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해 이후 포도주를 담는 그릇이 체코 교회개혁의 상징이 되었다. 그이 친구들과 동료들이 그를 적극적으로 도왔고 추기경도 번역의 일을 적극 도왔다.

4) 당시 프라하대학은 독일인과 체코인 교수로 구성되었는데 독일인 교수들은 위클리프와 후스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았다. 그들은 프라하를 떠나 라이프찌히에 대학을 설립하고 프라하를 이단사상의 온상이라고 매도했다. 이에 체코인들은 격분했다. 반독일정신이 고조되었다. 이때 신임추기경이 프라하에 임명되어 왔고 그는 교황으로부터 칙서를 받아 위클리프의 책을 읽는 것을 금지했다. 성직자들에게는 자기 교구 안에서만 설교하라고 족쇄를 채웠다. 후스를 염두해 둔 조치였다. 1407년에는 교황 인노센트 7세는 후스의 설교사역을 완전히 금지시켰다. 그러나 후스는 명령에 불복종하고 계속 베들레헴교회의 설교를 했고, 이에 1410년 로마교황청은 그를 소환한다고 통보했다. 후스는 불응했고 1411년 교황청은 그를 파문했다. 체코의 국왕과 국민들은 분노하며 후스를 적극 지지했다. 사태가 확산되자 교황 존 23세는 후스를 재차 파문했다. 그리고 국왕에게 압력을 가했고 국왕은 할 수 없이 후스에게 침묵하라고 요청했다. 후스는 강단을 떠나 시골에 은거하며 저술에 전념했다. 이 기간에 그의 <교회,De Ecclesia>가 저술되었다.

5) 그러나 후스에 대한 압박은 계속되었다. 지기스문트 황제는 후스에게 콘스탄스 공의회에 출석하여 자신을 변호하라고 명령했다. 황제 자신이 직접 회의에 참석할 것이며 신변을 보장한다는 전제를 두었다. 후스는 황제를 믿고 참석을 했지만 교황 존 23세는 황제의 의사와 상관없이 후스를 체포했다. 교황은 그에게 이단사상을 철회하라고 명했다. 그러나 후스는 자신의 무엇이 이단사상인지 증명하라며 오히려 역공했다. 격렬한 언쟁이 오갔고 후스는 죄인으로 간주되어 결국 수도원의 독방에 감금되었다. 황제는 교황에게 항의했다. 그러나 계속 그를 옹호했다가는 이단자로 낙인찍힐까봐 황제도 잠잠했다. 마지막 공의회에서 온몸을 쇠사슬로 묶인 채 자신의 주장을 철회할 것을 강요받았지만 그는 '공의로우신 심판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항소할 것이며 처분은 그의 손에 맡긴다"는 말로 뜻을 굽히지 않았고 드디어 1415년 7월 6일 화형에 처해졌다. 그의 사제복은 찍겨졌으며 머리는 삭발당했고, 그가 저술한 책들과 위클리프의 저서들이 함께 불탔다. 그는 큰 소리로 마지막 기도를 외쳤다.

"주 예수여, 나는 바로 당신을 위해 이처럼 잔인한 죽음을 아무 불평 없이 감당합니다. 부디 나의 적들에게 자비를 내려주소서" 그리고 불에 타 죽으면서 시편을 끝가지 암송했다. 사형집행이 끝난 후 집행관들은 타다가 남은 재를 모두 쓸어 담아 호수에 뿌렸다. 이단자의 흔적도 남기지 말라는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1년 뒤, 후스의 동료 학자이자 개혁운동가인 프라하대학의 제롬도 똑같은 방법으로 후스의 뒤를 따랐다.

2-4. 후스의 추종자들

1) 보헤미아인들은 분노했다. 452명의 귀족들이 만장일치로 콘스탄스공의회를 거부한다고 발표했다. 그들은 후스의 신념을 따르기로 엄숙히 맹세하며 자격 없는 교황에게는 복종할 필요가 없음을 선언했다. 후스는 체코의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프라하대학은 지금까지 순교자 후스를 높이 기리고 있다.

2) 이후 후스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세 그룹으로 나뉘어졌다. 후스파는 귀족들과 부르주아계급으로 구성되었고, 온건한 개혁파이자 후스의 적극적인 지지자들의 모임인 타볼파는 농부들과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으며 특히 종말론적인 기대감을 가진 대중들의 지지가 있었다. 호렙파는 타볼파의 유형이면서 온건한 종말관을 지닌 점에서 달랐다.

3) 이들은 모두 성경의 권위를 수위에 두었다. 그러나 교회개혁에 대한 방법론에서 의견을 달리 했다. 후스파는 성경이 구체적으로 거부하는 것 외의 교회관습을 유지할 수 있다고 보았고, 타볼파는 성경이 구체적으로 지시하지 않은 일체의 교회의 관습들을 거부했다. 예컨대 예배 중에 촛불을 사용하는 문제에 대해 후스파는 성경이 금하지 않기 때문에 사용할 수 있다고 했고 타볼파는 성경이 그것을 행하라고 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금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여기에 타볼파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여자들과 어린이들도 성경을 읽돌고 해야 하며 사제복 착용과 성화와 악기의 사용을 금했다. 값비싼 옷을 입거나 댄스를 하거나 사치스럽게 사는 것을 죄로 여겼다. 그들은 저항운동의 상징이 된 프라하의 4개 헌장을 발표하고 체코의 교회개혁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4) 체코의 국왕이 죽자 독일황제 지기스문트가 합법적인 후계자로 대두되었다. 보헤미아인들은 신임황제에게 4개 헌장을 받아들이고, 예배의 자유보장, 독일인의 공직임명금지 등을 약속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황제와 교황의 연합군은 3차에 걸쳐 보헤미아를 공격했지만 후스의 추종자들이 결사대가 프라하 인근까지 침공한 연합군을 완전히 궤멸시켰다. 이에 교황은 협상을 원했다. 일부가 협상에 응하고 로마교회의 소속으로 돌아갔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존 교회를 떠났다. 그들은 모라비아 지역의 후스추종자들과 연합하여 보헤미아형제연맹을 조직했다. 그리고 15세기 들어 이들은 왈도파와 연합하여 성경적 교회개혁의 이상을 실현했다.

2-5. 지롤라모 사보나롤라(1452-1498)

1) 이탈리아의 세례요한이라고 불리우는 교회개혁가. 토마스 아퀴나스의 가르침과 요아킴의 묵시문학을 결합시키고 성경적 기독교의 회복을 주창. 1474년에 도미니크수도회에 입단.

2) 1482년 하나님의 영감을 받았다고 하며 플로렌스에서 타락한 교회와 성직자들, 시민들을 향해 회개하라고 외침. 그의 강연과 설교가 점점 인기를 얻음. 그는 학문연구가 교회개혁의 추진력을 제공한다고 확신하고 수도사들과 함께 라틴어, 헬라어, 히브리어, 아랍어, 갈대아어를 공부했다. 그는 프랑스의 침공으로부터 플로렌스를 지켜낸 이후 플로랜스를 지도하며 부흥 발전시켰다. 그러나 그이 엄격한 태도는 점점 사람들이 싫어하게 되었고 교황 알렉산더 6세는 1497년에 그를 파문했다. 이에 불복종하자 폭도들이 마가수도원을 급습하여 그를 결박하고 고문으 가했다. 플로랜스정부는 교황으로부터 신병을 인도받아 그를 화형시켰다. 우명한 변증서인 <십자가의 승리>를 남겼다.

2-6. 윌리엄 틴테일(William Tyndale, 1494-1536)

- 위클리프 영어성경의 문제점을 보완키 위해 히브리어와 헬라어성경을 근거로 영어성경 번역에 착수해 1526년 신약을 출판한 뒤 모세5경과 구약을 번역 중 1536년 체포되어 화형.

<?xml:namespace prefix = v />제8강. 대중운동과 르네상스

1. 근대경건운동

- 14-5세기 들어 독일에서 가장 왕성한 활동을 벌인 신비주의자들은 경건생활과 영적행복을 추구하면서 거룩한 명상을 즐겼다. 사치와 향락을 배격하고 평화와 내적인 기쁨을 얻고자 했다. 기존 교회의 방해와 탄압으로 변두리 지역에 머물며 방외인들이 되었다.

- 특히 게르트 흐로테(Geert de Groote, 1340-1384)는 이러한 풍토에서 근대 경건(Devotio Moderna)이라고 하는 신비주의 대중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1379년에 공동생활규칙서를 만들어 그것에 기초한 공동생활형제단을 설립하고 성결과 경건의 생활에 전념할 것을 가르쳤다. 그는 소명을 받은 직업에 충실하면서 근대경건의 원칙을 따라 살도록 했다. 그의 지도 아래서 많은 사람들이 공동생활을 하면서 학문연구와 명상에 전념했다. 형제단원들은 그리스도의 삶을 모방하면서 엄격한 금욕생활을 했다. 내적 자아의 계발에 힘썼다. 그리고 서로 간에 죄를 고백하며 성결을 이루어 갔다. 이 운동은 네덜란드에서 시작하여 독일과 유럽 전역에 확산되었다. 경건운동에 동참한 사람들은 매일 노동을 하고 성경과 경건서를 읽으며 명상과 기도에 힘썼다. 서로 충고하고 서로의 양심을 점검했다. 공동생활규칙을 지키며 서로 권면하며 겸손을 유지하는 일에 서로 협조했다.

- 근대경건운동은 신학적인 논쟁을 피하고 영적생활에 역점을 둔 탓에 그다지 탁월한 신학자가 배출되지 않았다. 서간문, 수기, 전기 등 경건서들만 남겼다. 그러나 근대경건운동이 낳은 가장 탁월한 작품은 토마스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Imitatio Christi>이다. 그가 남긴 기도문은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 공동생활형제단은 학교를 설립하고 개혁의 강한 열망을 가진 졸업생들을 배출했다. 인문주의 종교개혁자로 불려진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Erasmus)가 여기서 배출되었다.

- 근대경건운동은 교황에게 충성을 했던 프랜시스수도회나 도미니크수도회와는 달리 독자적인 공동체를 구성했으나 종교성과 도덕성만 추구함으로서 로마교회의 틀을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 그러나 신비주의는 로마교회를 통하지 않고도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길이 있다는 신념을 확산시켰다. 이 신념은 사람들의 마음에 교황의 권위와 제도교회의 존재에 대한 의구심을 심었다. 그들은 복음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기존교회의 행습과 거짓교리와 결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신비주의자들은 스콜라신학자들이 지식은 많으나 신앙생활은 바르게 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지식과 신앙이 별개라는 결론을 내렸다.

2. 대중운동

1) 배경

- 부패와 타락, 개혁에 대한 저항으로 로마교회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여러 명의 교황들이 서로 정통성을 주장하며 싸우는 통에 사람들은 손사래를 쳤다. 그럼에도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전파에 열중한 것이 아니라 고대 로마의 영광을 복구하는데 열심을 냈다. 성직자들은 양떼를 돌보는 것이 아니라 세속권력을 확보하는 데 혈안이 되어 전쟁을 일으킬 음모마저 꾸미고 있었다.

- 이에 공의회운동은 교회 안에 만연해 잇는 타락과 무질서를 개혁하고자 했다. 특히 성직궐석제도, 성직중임제도, 성직매매를 바로잡고자 노력했다. 한편 교회가 부패하고 영적 활기를 상실하자 극단적이거나 비정상적인 신앙운동이 생겨났다. 이른바 신비주의운동이 대중적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교회라는 제도의 도움 없이도 직접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다고 하며 복음에 충실하려면 타락한 교회와 결별하라고 대중에게 호소했다. 교회세와 십일조에 시달리던 대중은 이들의 반 성직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 마침 인쇄술의 발달로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하여 일반 대중에게 보급하는 일이 증대되었다. 여기에 국가주의가 팽창되면서 신대륙의 발견과 더불어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감이 부풀려졌다. 대중은 새로운 교회를 원했으며 선각자들은 올바른 신앙을 세우기 위해 골몰하기 시작했다.

2) 대중운동의 실제

- 중세에는 교항청의 인가를 받지 않은 여러 형태의 수도공동체가 있었다. 이들은 기존의 프랜시스와 도미니크에 입단하고 싶었지만 여러 조건 상 허락을 얻지 못한 사람들로 쇼규모 공동체를 만든 것이다 그들은 빈곤하지만 경건하게 살았다. 남성들을 '베가드'로 여성은 '베긴'이라고 불렀다.

- 채찍질고행자들에 의한 새로운 대중운동도 획기적이었다. 그들은 종말이 임박했음을 강조하면서 자신의 몸을 학대하며 참회에 몰입했다. 인간이 회개하지 않으면 하늘이 벌을 내리고 전염병 같은 재앙을 내린다고 경고했다. 어떤 때는 수천 명이 모여 33일간, 또는 반 나절도안 무릎을 꿇은 채로 찬양을 계속하면서 등에서 피가 날 때까지 자신을 채찍질 했다. 채찍질을 제2의 세례라고 했다.

- 한편 위클리프와 후스의 가르침은 전 유럽에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었다. 개혁신앙은 초기에는 학자들과 귀족들 사이에서 수용되다가 점차 가난하고 억압당하는 사람들, 종말론적 기대감을 가진 사람들에게로 이동했다. 그들은 교황의 권위에 복종할 의무를 느끼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교회는 더 이상 신앙의 요람이 아니었다. 교회는 불신과 억압과 착취의 상징이었다.

- 이 때 한스 뱀(Hans Bohm)이 나타났다. 당시 교구 감독은 흉년임에도 고액의 교회세를 요구했다. 독일 부르쯔부르크 출신의 젊은 목동이었던 뱀은 1475년 사순절에 순례자들에게 설교를 했다. 그는 성직자들의 탐욕과 부패를 질타하며 세습과 십일조 납부를 거부하라고 외쳤다. 그의 추종자들이 점점 늘어나 5만여 명에 달했다. 그들은 평등한 사회의 도래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벌였다. 그러나 감독은 병사들을 동원해 그들을 체포했고 뱀은 화형을 당했다.

- 뱀의 죽음으로 대중운동은 구심점을 잃었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구전으로 전해지며 서유럽사회의 기존질서를 위협하는 집단정신으로 부상되었다. 부유한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입지와 기득권을 위태롭게 하는 일체의 저항운동을 억압했다. 그러나 억압하면 억압할수록 대중운동은 더 확산되어 갔다.

3. 르네상스-인문주의

1) 배경

- 중세의 암흑기를 지나면서 이탈리아는 경제적으로 번영하고 있었다. 전염병과 전쟁이 안겨준 어려운 사회상황을 극복하면서 교역과 금융업을 발달시켰다. 그것의 수익으로 부유한 생활을 했다. 사람들은 상속받은 부를 유지하기 위해 부지런히 지식과 기술을 연마했다. 여기에 이탈리아인들의 특유의 진취성과 활동성, 창의성이 가미되어 예술과 인문주의에 대한 관심과 노력이 배가되면서 르네상스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특히 상업도시 플로렌스는 유럽전역에 은행지점망을 가진 메디치 가문의 후원아래서 가장 부강한 도시국가로 발전했다. 지성인들과 예술인들은 메디치 가문의 재정 후원을 받아 다방면에서 그들의 창의성을 발휘했다.

2) 발전과정

-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주의자들은 중세기를 암흑시대라고 불렀다. 중세사회의 가장 큰 오류를 무지라고 파악했다. 그들은 하나님, 우주, 인간, 사회에 대한 인문적 사색을 예술과 문화 활동으로 전환시켰다. 망각하고 있던 고대문명의 재생을 위해 전력을 다했다. 문학, 예술, 철학, 신학 등 각 분야에 걸쳐 인문주의가 영향을 끼쳤다.

- 이탈리아인들은 열심히 고전작품을 필사했고 키케로의 양식을 모방한 문학작품을 생산했다. 또 1453년 마지막 서로마제국(비잔틴제국)이 투르크인들게 멸망하면서 콘스탄티노플로부터 피신한 헬라 작가들이 막대한 분량의 헬라 고전 작품들을 가지고 왔는데 이것이 기폭제가 되어 고전작품에 대한 관심의 열기가 고조되어 독일과 프랑스 등지로 보급되기 시작했다.

- 인문주의는 14세기와 15세기에 이탈리아에서 서유럽전체로 확산되었다. 처음에 이탈리아에서 발흥되었지만 15세기 말부터 메디치가의 경제가 쇠퇴하자 중심은 유럽의 다른 나라로 이동하였다.

3) 특징들

- 플로렌스의 인문주의는 특히 단테에 의해 흥기되었다. 그는 그리스-로마문화의 영감을 받아 르네상스문학을 이끌었다. 르네상스는 특히 건축과 조각, 미술 분야에서 두드러진 발전을 보였다. 예술가들은 기독교예술품 뿐만 아니라 고대 예술품에서도 영감을 받았다. 이교예술에서 고전미를 재발견하고 그것을 작품에 응용하는 것이 유행하였다. 부가 축적되면서 사람들은 새로운 이상을 꿈꾸었고 세상의 아름다움을 즐겼다. 교양을 쌓으며 인격의 완성을 도모했다. 시인, 작가, 철학가들은 로마와 그리스의 고전을 선호하고 연구했다. 예술가들은 귀족들과 부르조아들의 후원을 받아 아름답고 화려한 예술품을 만드느라 혈안이 되었다.

- 예술품을 만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목적이 아니라 인간의 위대함을 나타내기 위한 목적이었다. 미켈란젤로(1476-1564)가 그린 아담은 중세기 작품에 등장하는 창백한 인간이 아니라 기상이 흘러넘치는 청년의 모습으로 르네상스시대의 인간관을 상징하고 있다.

-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는 인간능력의 가능성을 그림에서 뿐만 아니라 기계공학, 보석학, 탄도학, 해부학에서도 보여 주었다. 라파엘(1483-1520)은 미켈란젤로와 더불어 성경의 인물들과 사건들을 주로 그렸지만 인체의 아름다움과 힘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그의 원근법은 미술사에 한 획을 그었다.

- 인쇄술의 발전은 고전학문의 부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고대작품들의 원문들이 광범위하게 보급되었고 원문의 정확성을 밝히고자 하는 본문비평이라는 학문의 방법을 잉태케 했다. 필사과정에서 삽입되거나 오류가 생긴 부분들에 대한 확인 작업이었다. 이 때 키케로나 제롬의 작품에 이어 신약성경의 원문에 대한 확인과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이 작업에 의해 콘스탄틴 황제가 교황들에게 서방전체를 다스리도록 권한을 하사했다고 하는 '콘스탄틴의 기증서'가 조작된 것임이 밝혀져 다시 한 번 교황청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

- 종합적으로, 인문주의는 다음의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부르조아계급에 속한 사람들이 가진 인간중심적 정신을 말한다. 다음으로는 문학과 예술에서 추구된 것으로 플라톤철학에 근거한 지적 부흥운동이다. 결론적으로 인문주의는 인간의 가치와 개인의 창의성을 강조하는 정신이다. 인간의 위대성과 개인의 긍정적인 면을 강조하면서 무지로 인한 맹목적인 신앙과 미숙한 편견에서 벗어나고자 한 새로운 차원의 대중운동이었다.

4) 영향

- 르네상스시대의 문헌연구는 지식인들 사이에서 이루어졌지만 그들의 노력은 대중화되어 초기 기독교를 회복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신념을 신자들에게 각인시켰다. 당시 로마교회가 원래의 모습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은 신자들은 신약성경이 제시하는 원래 교회의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는 갈망을 가지게 되었다

- 르네상스시대의 인문주의는 인간의 세속적 가치를 부각시키고 인간 중심의 사고를 진작시켰다. 17세기의 계몽주의는 이러한 인문주의에 뿌리를 두고 그 정신을 계승한 것이다. 나아가 계몽주의는 전통적 기독교신앙을 부정하는 자유주의신학과 탈권위적인 포스터모더니즘을 낳은 것이다.

- 인문주의가 기독교신앙에 부정적인 양향만 끼친 것은 아니다. 종교개혁운동의 선두주자들과 신학자들은 인문주의 풍토에서 교육을 받았다. 인문적 소양을 가지고 기독교신앙을 변호했다. 그들은 인간의 천부적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면서 중세교회의 모순을 자각했다. 로마교회의 교권적 횡포와 성직자들의 도덕적 타락과 미신적 교리, 계급적 성직제도의 모순, 종교재판에 의한 잔인한 인간학살과 독선들이 모두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것임을 깨달은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인문주의가 제공한 비평적 눈 덕분에 얻은 것이다. 인문주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을 아는 지식의 균형을 제공했다.

제9강. 종교개혁운동

1. 종교개혁전야

1) 성직자들의 타락

- 중세말기 사람들의 화두는 대부분 성직자들의 타락이었다. 특히 동성애를 비롯한 성적인 타락은 극에 달했다. 중세문학에 나타나는 귀족부인의 정부는 언제나 사제였다. 실제로 16세기 종교개혁자 에라스무스는 사제와 교회 여인 사이에 태어난 사생아였다. 교회당과 수도원 지하에는 낙태들이 즐비하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감독과 사제는 자식을 낳아 공개적으로 부양했다. 평신도 지도자들은 성자들의 유품을 수집하는 일에 열을 올렸다.

- 종교개혁전야의 성직자들의 지적 수준은 최저 상태였다. 초급라틴어와 기초교리문답 그리고 미사를 올리는데 필요한 문구를 배워 서품을 받았다. 사제들 중 극히 일부만이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그들은 바늘 꼭대기에 천사가 몇 명 앉을 수 있는가 하는 논쟁으로 허송세월을 보냈다.

2) 교황들의 탐욕

- 교황 니콜라스5세(1447-1455)는 바티칸을 기독교의 수도로 만들기 위해 예술적으로 치장하는 일에 몰두했고,

- 칼릭스투스3세(1455-1458)는 전쟁광이 되어 이탈리아를 혼란에 빠트렸고,

- 폴2세(1464-1471)는 사치와 향락의 밤을 즐기다 중풍으로 사망했고,

- 식스투스4세(1471-1484)는 추기경들에게 막대한 금품을 제공하고 교황직을 매수했다. 그는 재위기간 돈을 벌기 위해 온갖 부정부패를 저질렀다. 로마시민들은 굶고 있는데 바티칸의 시스틴채플(Sistine Chapel)을 화려하게 장식하는데 눈이 팔렸다.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도 이 때 만들어졌다.

- 인노센트8세(1484-1492)는 자기의 자식들에게 막대한 재산과 관직을 하사했다. 사생아들인 아들들은 면죄부를 팔아 부를 축적했다.

- 알렉산더6세(1492-1503)는 탐욕과 정욕의 대명사였다. 투르크족이 침략해 오자 술탄과 비밀거래를 했다. 그는 남을 독살시키기 위해 만든 음식을 실수로 자기가 먹고 죽었다.

- 줄리우스2세(1503-1513)는 폭군이었다. 로마의 영웅이었던 시저를 본받기 위해 자신의 교황명도 시저의 이름을 본땃으며, 전쟁과 약탈을 일삼았다.

- 레오10세(1513-1562)는 메디치가문의 아들로서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나던 시기의 교황이다. 그의 관심은 교회 치장이었다. 베드로대성당을 완성시키기 위해 자금조달의 방편으로 면죄부를 팔았다. 교황들은 새로운 수입을 늘리기 위해 기발한 방법들을 개발했다. 성직에 임명받으면 첫 해의 수입을 교황에게 바치는 것을 제도화했다.

3) 콘스탄티노플의 함락과 흑사병

- 서로마가 이슬람 투르크족에 의해 무참히 함락되자 서양세계는 공포의 도가니에 빠졌다. 교황들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술탄에게 아부를 떨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흑사병이 창궐하여 유럽인구의 절반이 희생되었다. 전염병이 돌자 성직자들은 직무를 저버린 채 도망을 쳤다.

4) 자각- 눈을 뜨다

- 교회가 도덕성을 상실하자 양식을 가진 신자들은 분노를 터뜨렸다. 실망한 사람들은 점차 종말론적인 기대를 가지고 급격한 변화를 갈구하게 되었다. 이 때 신비주의운동과 한스 뱀의 저항운동이 일어나 대중들을 사로잡았다.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공공연히 칭했다.

- 르네상스와 인문주의로 인해 신자들은 부패와 타락의 온상인 교회를 개혁하는 첩경은 기독교의 원천, 즉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임을 깨달았다. 여기에 교회의 개혁에 대해 진지한 자각을 가지게 된 일단의 성직자들이 있었다. 이들이 종교개혁의 기치를 올렸다. 그들은 기존세력과의 의견충돌은 물론이거니와 핍박과 희생을 감수하면서 교회의 근본적인 개혁을 위해 온 몸을 던졌다. 그것이 종교개혁을 탄생시킨 것이다.

2. 마르틴 루터

1) 생애요약

- 1483년, 11월 10일 독일 아이스레벤에서 출생.

- 1501년, 에어푸르트대학교 법학과 입학.

- 1505년, 6월경에 집에 갔다가 학교로 돌아오던 중 학교 친구가 번개에 맞아 갑자기 죽는 사건을 목격하고 깊은 충격을 받고 수도사가 되기로 결심. 7월 17일, 어거스틴 수도원에 가입

- 1507년, 에어푸르트 성당 사제가 되었으나 이상한 죄책감에 계속 시달림. 이 때 수도회의 선배이자 스승인 요한네스 슈타우피츠(1460-1524)로 부터 좋은 가르침을 받고 크게 깨달음

- 1510-1511년, 로마여행 중 이신득의를 깨달음.

- 1512년, 신학박사 학위 취득. 스승의 소개로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교수가 됨. 이 때 시편, 로마서, 갈라디아서, 히브리서의 주석을 썼다.

- 1517년, 어느 날, '돈 상자에 돈이 떨어지는 순간에 불타는 연옥으로부터 영혼이 곧장 날아온다'고 외치는 면죄부 판매원 테첼과 토론을 벌이기로 결심하고 테첼의 주장이 그릇되었음을 증명하는 95개 조의 반박문을 작성하여 10월 31일 비텐베르크교회 정문에 내걸었다.

-1518년, 잉골슈타트대의 신학교수이자 루터의 친구였던 요한 마이어(1486-1543)가 obelisci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고 루터를 이단으로 고소함. 이에 루터는 asterici라는 논문으로 답하고 이어 '하이델베르크 논제'를 통해 자유의지와 신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배격하고, '십자가의 신학'을 정립하게 됨. 그리고 마르틴 부처(1491-1551)와 요한네스 브렌츠(1499-1570)라는 든든한 지지자를 확보했다. 면죄부에 대한 보다 정교한 내용의 <해설>도 이 대 저술되었다.

- 1520년, 교황 레오10세는 '주님, 일어나소서'라는 교서를 발표했다. 이에 루터는 로마교황청이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타락한 곳이라고 질타하며 로마여, 안녕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발송했다.

- 2개월 뒤인 1521년, 황제 카를 5세가 주도하는 제국회의의 소환장이 발부되었고 루터는 독일의 제후인 프리드리히의 약속을 굳게 믿고 4월16일 보름스 회의에 도착하여 10일간 교황청의 심문을 받았으나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에 많은 민중들이 루터의 신앙심에 감동을 받아 루터의 종교개혁사상은 급속도로 확산되어졌고 많은 추종자들이 루터를 따르기 시작했다. 프리드리히는 급히 아끼던 루터를 보호하기 위해 바르트부르크 성에 그를 은신시켰다. 루터는 여기서 1년을 숨어 지내야 했다.

- 1524년, 농민들의 봉기가 일어났다. 루터를 추종하던 뮌처가 주동이 되어 남부 독일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뮌처는 농민들에게 지상의 천년왕국에 대한 기대를 불어 넣고 지배층의 회개를 요구했다. 그리고 정당한 이자의 도입, 농산물의 십일조, 농노제의 폐지 등 농민들의 권익을 보호해 달라는 요구를 했다. 그러나 루터는 이 때 결혼을 발표하며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농민운동이 점차 폭력적 양상을 띠게 되자 오히려 군주들에게 단호한 진압을 요구하는 등 태도를 달리해 세간을 놀라게 했다.

2) 메시지 및 의미

- 루터는 세계의 역사를 근원적으로 변경시킨 몇 안 되는 인물들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조직가나 정치가도 아니었고 혁명가는 더더욱 아니었다. 오직 심원한 종교적 신앙의 힘으로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구원에 대한 성경적이며 확고한 신학적 토대를 닦았다.

- 루터는 수세기 동안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이단자이자 교회의 분리주의자라는 신랄한 공격의 대상이 되었지만, 오늘날은 진정한 신앙인과 가치 있는 신학적 대화의 상대자로 카톨릭권 안에서도 널리 존경받고 있다. 루터는 교회사에 있어서 아주 탁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나라로부터 썩은 카톨릭교회를 도려내는데 쓰임 받은 하나님의 확고한 도구였다.

3. 울리히 쯔빙글리

- 종교개혁이 시작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스위스의 취리히 역시 로마교회의 지시를 공개적으로 거부했다. 취리히는 에라스무스의 영향으로 인문주의적이고 성서의 권위를 존중했다.

- 이후 스위스는 설교자와 학자로 유명한 쯔빙글리(Ulrich Zwingli,1484-1531)가 주도했다. 그는 성상을 제거하고 미사를 금지하고 수도원을 해산했다. 교황과 맞서 싸움을 벌이고 있는 루터와 쯔빙글리가 연합을 위해 마르크부르크에서 만났다. 두 사람은 성만찬에 대한 견해의 차이로 끝내 연합을 이루지 못했다. 둘은 화체설이 잘못이라는 데는 의견이 같았지만 특별한 대안을 찾지 못했다. 루터는 성만찬의 요소들은 변하지 않지만 그리스도의 몸은 떡과 포도주를 통해서 눈에 보이는 요소로 임재한다고 했다. 루터에게 "이것은 나의 몸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은 문자적으로 사실이었다. 그러나 쯔빙글리는 그리스도의 발언이 그저 "내 몸을 기념하라"는 의미 이외에는 없는 것이라고 했다. 5일동안 둘은 열심히 토론했지만 서로의 차이를 확인하는 데 머물렀다. 둘은 "양심이 허락하는 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정신을 상대방에게 보여줄 것"을 확약하는 선에서 마무리짓고 결국 갈라서게 되었다.

- 쯔빙글리는 1531년 카펠전투에서 사망했다.

4. 칼빈(John Calvin, 1509-1564)

1) 생애

- 1509년 북부 프랑스 <노와이온>시()에서 탄생하였다. 아버지는 노와이온시의 유력한 인사로서 교회의 서기와 회계를 오랫동안 맡아보았다. 그의 머리는 예리하였고 판단력이 빨라 특출하여 그 지방 고급 귀족들에게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칼빈은 이러한 아버지로부터 지식욕과 조직적 두뇌를 물려받았다. 어머니는 매우 경건한 여성으로서 칼빈에게 경건을 물려주었다. 그의 가정은 사회적 지위와 부를 함께 가졌으므로 어린 시절 칼빈은 행복하게 성장할 수 있었다. 칼빈은 어려서 귀족의 자녀들과 사귀면서 공부하였다. 11살 때 노와이온 주교가 지불하는 장학금을 받았고 그때부터 교회에서 섬기는 직책을 갖게 되었다. 그런 이유로 교직을 목표로 훈련을 받았다.

- 14살 때 칼빈은 파리에 유학의 길을 떠났다. 귀족들이 들어가는 대학에 입학하였다. 라 마르슈(La Marche)대학은 당대 프랑스의 인문주의 신문화의 대 본산이며 국왕의 교육정책에 따른 건실하게 발전되었다. 칼빈은 다시 몬테그(Montaigue) 대학으로 옮겼는데 이것은 아버지에 지시에 의하여 교회적 분위기를 가진 곳에 와서 교직을 목표로 한 신학 공부를 준비하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이 대학은 파리의 보수주의 진영의 중심지였다. 칼빈은 이곳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문학사가 되었다.

- 1527년 몬테그 대학에서 문학사의 학위를 받은 후 칼빈은 그의 행로를 변하여 법학을 배우려 돌연 오를레안(Orlean)대학에 입학하였다. 이것도 역시 아버지의 지시로 대로 순종 하였다. 아버지는 칼빈의 성품을 보아 교직자보다 법률가가 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1531년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하여 그 후에는 칼빈의 자유 선택에 의하여 다시 신학으로 되돌아섰다. 이렇게 칼빈의 회심은 루터와 같이 급격한 것이 아니라 점진적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그 당시엔 헬라어 공부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헬라어를 배우면 신약성경 내용을 알게 되고 성경공부는 교황청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칼빈과 그 친구들은 비밀리에 헬라어를 익히고 성경의 원문을 접하며 조금씩 종교개혁에 동조해 가고 있었다. 칼빈의 친구인 니콜라스 꼽이 1533년 11월 파리 대학의 총장으로 취임했을 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산상수훈을 주제로 설교를 했다. 내용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꼽은 이 연설 이후 사회 권력층, 성직자들의 많은 비난과 핍박을 받았다. 결국 꼽은 바젤로 피신했다. 연설문을 함께 작성했던 칼빈도 핍박 때문에 도망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시절에 아주 유명한 ‘기독교 강요’의 체계를 세우게 되었다.

- 피난 생활을 하던 칼빈은 ‘기독교 강요’ 출간한 후 제네바에서 개혁 운동을 일으켰다. 책의 출간으로 인해 그는 가톨릭 성직자들과 싸웠고 때로는 국가에서 추방 명령을 받아 떠돌이 생활을 하기도 했다. 14년 동안 제네바의 종교 개혁을 위해 싸웠던 칼빈의 개혁은 전 세계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 네덜란드, 스코틀란드, 영국, 독일 등에서 그의 사상은 많은 사람들에게 계승되었다. 하지만 그 동안 칼빈은 건강을 잃었다. 위궤양, 관절염, 천식, 폐병, 결석, 늑막염 등으로 고통스러운 생을 보냈다. 결국 그는 1564년 55세의 나이로, 비명 없는 무덤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긴 채 하나님 품으로 돌아갔다.

2) 제네바 종교개혁의 배경

- 스위스 개혁 운동의 배경은 종교적인 면에서보다 정치적인 영향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제네바는 신. 구 사이에 낀 중간 위치였다고 볼 수 있었다. 후대의 학자들은 평하기를 "프로테스탄티즘의 가면을 쓴 '에라스무스'의 휴머니즘과 로마 카톨릭의 겉옷을 입은 '루후에부르그'(프랑스 인문주의 운동의 선구자)의 프로테스탄티즘이 사라지고 칼빈의 명백하고 적나라한 프로테스탄티즘이 '기독교강요'(基督敎綱要)라는 참신하고 박력 있는 운동으로 역사의 무대 위에 등장하였다"고 하였다. 칼빈의 「기독교강요」는 오늘날 모든 개혁 교회들 특히 장로교회의 교리의 근간을 이룩하게 한 유일의 책이 되었다.

- 칼빈의 개혁 당시 제네바의 인구는 약 1만 3천 정도로서 신성 로마제국의 치세 하에서 매우 복잡한 정치적 입장에 있었다. 스위스가 유럽 정치사에 등장한 것은 1291년경 독일어를 말하는 세 주()가 소위 '영원한 언약'이라고 불리는 상호 방위조약을 맺고 연방을 조직한 이후부터이다. 스위스 사람들은 유럽에서 영국과 같이 근면하고 용감한 국민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자유에 대한 정열과 애착심은 어느 민족보다 강했다. 그들은 자연의 여러 악조건과 싸우면서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쳐 들어오는 외국 세력을 물리치는 동안 민족 스스로가 과감한 저항 정신을 배양하였고 진취적 기상과 자유의 정신을 갖게 되었다. 1291년 이후 수 차례의 위기를 극복하면서 주()의 수()를 증가시켰다. 그리하여 1499년에는 신성 로마제국으로부터 정치적 독립을 인정받았다.

- 종교개혁 전야에 스위스는(1513) 자치주(自治州)가 13으로 증가하여 일종의 연방 체제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 연방의 여러 도시들과 외부 도시와의 관계는 매우 미묘하고 복잡하였다. 그 중에서도 제네바는 스위스 연방에 가입하지 않은 도시 공화국(City-Republic)이었다. 외형적 표면상에서는 제네바는 국왕의 주권 하에 있었지만 실제적인 행정권과 사법권은 로마교회의 주교(Bishop)가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시당국과 주교 양자 사이에는 지배력의 우열을 둘러싸고 심각한 대립과 긴장이 그칠 사이가 없었다. 시민들은 황제권(皇帝權)과 교황권(敎皇權)의 싸움의 틈바구니 속에서 어부지리를 노림으로써 그들의 세력 신장을 펴 나아갔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유시(自由市)로서의 특권과 자치권을 획득하려고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 그러던 중 13세기에 있어서 새로운 요인이 나타났다. 그것은 사보이(Savoy) 국왕의 출현이었다. 신성 로마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난 사보이 왕국은 근 2세기에 걸친 교회와의 싸움 끝에 결국 주교(主敎)의 지위를 왕가(王家)에서 선출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함으로써 사실상 제네바 시를 수중에 장악하는데 성공하였다.

- 한편 제네바 시민들은 이와 같은 사보이왕의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서 시민 전체를 대표하는 '총회'(總會)와 20인의 대표로 구성되는 ‘소의회’를 조직하였다. 정세는 급변하여 이번에는 정치와 종교를 한 손에 쥐고 좌지우지하는 사보이왕과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무력이 우세한 사보이군()을 상대로 싸우고 있던 제네바는 한때 위기 속에 빠졌지만 연방 도시의 원조로 위기를 모면하고 최후에는 승리를 쟁취하였다. 이 승리는 정치와 종교가 동시에 로마교회로부터 해방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때가 1519년이었다. 1535년 8월10일 제네바 시는 로마교회의 미사 의식을 폐지하기로 결의하고 시민 총회에서 복음주의적 신앙을 따를 것을 서약하였다.

3) 칼빈과 제네바

- 칼빈은 귀욤 파렐(G. Farel, 1489-1565)을 만나면서 제네바와 인연을 맺게 된다. 파렐은 유명한 기독교강요의 저자가 제네바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밤에 여관으로 칼빈을 찾아와 제네바에 머물 것을 강력히 요청했다.

- 칼빈은 제네바를 그리스도의 학교로 만들었다. 그곳에서 성직자는 어떤 권력도 누릴 수 없었다. 교회생활은 목사와 장로로 구성된 종무원의 치리를 받았다.

- 처음에 칼빈은 성경 강사의 일을 담당했는데 점점 파렐보다 영향력이 커져갔다. 그는 파렐과 함께 제네바시의회에 3가지 사업 제안서를 제출했다. 그 내용은 첫째, 매월 성만찬의 시행이었다. 이를 위해 시의회는 행실이 바른 사람과 바르지 못한 사람을 따로 구분해서 보고하도록 했다. 둘째, 칼빈이 만든 교리문답을 채택하라는 것이었다. 셋째, 제네바 시민들은 파렐이 작성한 신조를 고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 시민들은 그들의 계획에 동조하지 않았다. 갈등을 빚자 시의회는 그들에게 떠날 것을 요청했고 1538년에 칼빈은 스트라부스로 떠났다. 그곳에서 그는 심각한 생활고에 시달렸고 건강을 해쳤다. 그러나 그의 학문은 깊어만 갔다.

- 그 때 제네바에는 로마교회의 신학자가 개혁주의 신앙에 대한 공격을 가했다. 이에 제네바시는 1년 뒤 칼빈에게 다시 제네바로 돌아와 달라고 요청했다. 이후 그는 교회법과 도덕법을 제정하고 제네바를 개신교의 로마로 만들어 갔다.

- 1559년엔 그의 제네바플렌에 따라 아카데미를 설립했다. 교회의 직접적 통제를 받는 모두 7년 과정이었는데 어린이부터 16세 까지 참석할 수 있는 스콜라 프리바타와 대학과정의 스콜라 푸블리카로 나누었다. 나중에 제네바대학으로 발전한 이 학교를 통해 최초로 개혁 장로교회를 세운 존 낙스가 배출되었다.

4) 칼빈과 인문주의(人文主義)

- 칼빈은 젊은 날에 인문주의적 교양과 지식의 습득으로 그의 위대한 신학적 저술에 깊이 반영되어 타에 추종을 불허하였다. 그는 불어는 물론, 라틴어 문장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고, 그는 대중에게 쉽게 전달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한결같은 염원이었다. 칼빈이 회심한 후에도 여전히 고전에 대한 존경심과 인문주의에 대하여 호의적 태도를 가지고 있었으나, 그러나 그는 인문주의 사상 그 자체에 대하여 결코 긍정한 일은 없었다. 즉 기독교의 본질과 인문주의(Humanism)사상은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바탕 위에 서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칼빈의 인문주의적 사상이란 것은 세속적인 인문주의자들과 구별해야 한다. 그래서 칼빈을 일반 인문주의자들과 구별하기 위하여 <기독교 인문주의자>(Christian Humanist) 또는 <성경적 인문주의자>(Biblical Humanist)라고 부른다.

5) 그의 신학 사상(神學思想)

- 칼빈의 신학은 후대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관점에서 그의 신학 사상을 정리하려고 했지만 요약하면 "말씀" 신학이다. 그는 하나님의 힘에 억압되어 "말씀"에 계시된 하나님을 만났고 이것이 그의 신학의 특징이다.

① 신인식(神認識)

- 칼빈은 신인식을 "말씀"에 계시된 것으로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의 신학을 "말씀의 신학"이라고 일컬으며 이로 인해 복음주의 신학의 전통으로 이어졌다. 그는 철저하게 "말씀"이 신인식의 길이라고 단정하였다. 그는 그의 역작인 「기독교강요」 초판(1536년)부터 신인식이 신학의 주제라고 스스로 말하였다. 그러기에 1542년 공표한 제네바 신앙 문답 첫문답에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이뇨"라고 묻고 "그것은 하나님을 알고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답하였다. 바로 이것이 개혁 교회와 장로교회의 신앙 문답의 전통이 되었다. 이것도 신인식이 인생의 궁극의 목적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② 신인식은 인간편에서는 불가능하다.

- 다만 하나님께서 스스로 낮추어 인간의 능력에 적합한 방도를 취하여 계시함으로 가능하다고 했다. 에스겔 9:3-4절을 강해하면서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의 지식수준에 적응시키지 않으면 우리에게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이것은 창조자와 피조물 사이에 있는 균열을 다리 놓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스스로 어떤 모양으로 내려오심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본질은 알 수 없고 가까이 할 수 없으며 단지 그의 존재를 알게 함으로 그에게 경외의 마음을 일으키며 의뢰하며 찬미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지식은 하나님으로부터 생긴다고 했다. 이러한 신인식의 객관적 지식이 어디에서부터 오는가? 그것은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였다.

③ 절대 복종.

- 부패한 인간에게 잔존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우상 숭배와 미신의 원천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래서 참 지식의 근원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입증하시려고 계시하신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는 데서 성립한다고 했다. 신인식의 올바른 자세가 바로 이 복종(服從)이다. 복종한다는 것은 그 대상의 권위를 받들어 모시는 것이다. 그 구체적 대상이 바로 이 "말씀"이었다.

④ 칼빈주의

- 루터는 로마서1: 17절에서 얻은 <복음의 이해>에서 전체성서의 주제를 찾고 이것을 기점으로 하여 성서의 성서 됨을 판정함으로 극단적으로 기울여 졌지만(로마서, 요한복음이 가장 가치 있고 야고보 요한계시록은 이차적인 것으로 봄) 칼빈에게서는 그래서 「서책으로서의 말씀」을 강조함으로 이것을 극복하였다. 즉 성서가 글로 쓰여짐으로 제한성이 있기는 하나 반면에 시대가 흐르고 사람의 기억이 변전(變轉)하고 또 그릇됨에 떨어지는 경우에도 오히려 성서 본문만은 일정한 사상을 지시하고 있기 때문에 혹 오해될 수도 있으나, 다시 또 새롭게 그 참 뜻이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을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라고 보았다. 이렇게 칼빈은 성서 각책의 경중의 차를 보기 전에 먼저 주어진 권위의 책으로서 어느 책에서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는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신구약 전체를 하나 하나 주석 하였다. 이렇게 말씀의 권위를 주장한 칼빈이었기에 오늘까지 그의 사상은 복음주의 신학에 중심이 되었고, 개혁 주의 교회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후에 칼빈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의하여 칼빈주의(Calvinism)가 형성되어 그의 사상을 여러 가지로 체계화 시켰다. 그러나 그 중에는 칼빈 스스로의 직접적인 주장은 아니지만 칼빈의 사상을 주석하며 해석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들이 생겨 오늘날 칼빈주의 사상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⑤ 칼빈의 예정설(Predestination)

- 흔히 칼빈의 신학에서 예정설이 중심 사상인 것처럼 생각하기 쉬우나 칼빈 자신은 이 말을 처음부터 사용하지 않았다. 칼빈의 예정설은 신학의 출발점이 아니고 논리적 귀결점이었다. 그에게서 최우선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었다. 처음 그에게서 이 말은 교회론을 말할 때 '선택 받은 자의 무리'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행위로서 구원함에 이르게 한 것도 하나님의 선택이라면 그 반대의 경우도 하나님의 뜻에서 그렇게 하신 예정이란 것이다. 이러한 말에 대하여 칼빈을 비판하는 무리들의 반론이 제기되었다. 그렇다면 사랑의 하나님이 인간의 행위에 의하지도 않고 "영원한 포기"를 한다면 옳지 않은 것이 아니냐? 라는 질문에 대답으로 소위 '이중 예정설(二重 豫定說)'을 주장하였다.

- 칼빈의 예정설을 반대하는 주장은 아래와 같다.

(1)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원리에 모순된다.

(2) 하나님은 모든 인간이 회개하기를 참고 기다린다는 성경에 배치된다.

(3) 로마서 9:13절에 '강퍅하게 할 자를 강퍅하게 한다'고는 있어도 멸망시킬 자를 멸망에 정한다고 한 것은 없다.

(4) 설교가 필요 없어진다.

(5) 사람에게서 성결에 이르는 동기를 제거하게 된다.

(6) 사람의 운명이 영원 전부터 작정되었다면 그리스도로 인한 계시도 필요 없다.

(7) 하나님은 주지 않고서 가지지 않았다고 벌하시는 분이 되지 않겠는가?

- 칼빈의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 이러한 생각은 매우 무지하고 유치한 일이다. 선택이란 기각을 전제한 말이며 하나님의 의지가 절대적이라면 당연히 기각도 그에게서 당연한 일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자기의 성질에 따라 그 사람을 심판하기를 택한다면 그가 사람에게 얽매인 무슨 의무가 있기에 그것이 마땅치 않다고 하겠는가?" 라고....그러면서 결론적으로 "우리는 모두 미움을 받은 존재들이다"라고 했다.

- 이렇게 볼 때 칼빈의 예정설은 하나님의 주권적 권위를 강조한 결과에서 얻어진 논리적 귀결이었다. 즉 구원의 은총을 받는 입장에서 볼 때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그렇게 되도록 작정한 하나님의 예정이란 논리적 귀결이다. 그 이상 더 인간으로는 할 말이 없다. 그러므로 예정설은 숙명론도 아니고 개인의 운명을 알아내는 암호 읽기도 아니란 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우리의 예정의 최대의 목적은 하나님의 은총을 찬송하게 함이라" 고 하였다.

⑥ 칼빈주의 기본교리 (T-U-L-I-P)

1. 전적 타락 (Total Depravity) 2.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3. 제한적 속죄 (Liminted Atonement) 4. 불가항력적 은혜 (Irresitable Grace)

5. 성도의 견인 (Persiverance of the Sai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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