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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전후사 제4강~제6강

최더함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2. 12. 14. 2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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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강. 스콜라주의(신학)

1. 배경 및 포인트

- 전통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성경과 기도를 통해 진리에 도달할 수 있지만 타락하고 취약한 이성은 도움이 안 된다고 평가했다. 그러므로 철학과 신학은 서로 양립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했다.

- 헬라 철학자들은 인간이 경험이나 이성에 의해 자연적으로 얻을 수 있는 지식 즉, 자연적 지식의 달인들이었고 반면에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계시의 결과인 성경을 유일한 지식의 원천으로 보았다.

- 기독교신학은 일찍부터 철학을 도구로 삼아 합리적인 방법으로 진리를 탐구하려고 노력해 왔다. 순교자 저스틴은 이러한 신학전통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 그런데 스콜라주의가 이 둘을(헬라철학과 기독교신앙) 상호 조화시키려고 노력했다. 스콜라는 본래 교회당부속학교였는데 이곳에서 신학자들의 학문이 진행되었고 신학을 정립시키고 교부들의 가르침을 체계화시켜 나간 것이다.

- 스콜라주의자들은 신앙하는 바를 이성적으로 사유하고 논증하려고 했다. 이 과정에서 신앙이 이성적으로 뒷받침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신학자들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찾았다. 신앙과 이성의 관계를 규명하고 질문을 제기하고 반대되는 답을 제시하면서 독창적인 답을 찾았다. 그들은 이성을 통해 얼마든지 기독교신앙과 주요 교리들을 증명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즉, 이성과 관계없는 진리, 이성과 양립되는 진리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스콜라주의는 초기의 안셀무스와 아벨라르를 시작으로 파리의 알베르투스 마그네스를 거쳐 그의 제자인 토마스 아퀴나스에 이르러 절정을 이루었다.

-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스콜라적 방법을 사용하면 할수록 기도교의 진리에 이를 수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윌리엄 오캄을 비롯한 후기 스콜라주의자들은 이성으로 해결할 수 없는 진리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교회의 권위와 하나님의 계시를 기록한 성경에 입각하여 신조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 한 마디로 스콜라주의는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헬라철학적인 신학을 새롭게 모색한 하나의 거대한 실험이자 중세 신학자들의 열정과 학문적 탐색이었다.

2. 초기 신학자들

1) 안셀무스(Anselmus, 1033-1109)

- 이탈리아 태생. 프랑스 노르망디 수도원장 역임. 영국 캔터베리 대주교로 생을 마감

- 신앙은 이성 없이 불가능하고 이성 역시 신앙 없이는 목적한 바를 이룰 수 없다고 하면서, '나는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 그는 이를 확증키 위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논리적인 증명, 즉 존재론적 논증을 만들어내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라는 존재는 생각과 현실에 함께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생각에만 존재한다면 생각과 현실에 동시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의 이 존재론은 사유의 방식(3단 논법 등)에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많은 영향도 끼쳤다.

- 사역 초기에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명상을 집중적으로 다룬 <모노로기온>과 하나님에 대한 존재론적 증명을 다룬 <프로스로기온>을 저술했다. 캔터베리 사역기간에는 <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는가?>, <동정녀 임신과 원죄에 대하여>, 그리고 서방교회의 필리오케 교리를 옹호하는 <성령의 발출에 대하여> 등을 집필했다. 말년에는 <예지, 예정, 은총이 자유의지와 일치함에 대하여>라는 탁월한 작품을 남겼다.

- 그가 남긴 공헌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신학방법에서의 공헌이다. 그는 정통교리를 벗어나지 않으면서 이성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이용했으며 창의적인 신학활동을 했다. 그의 신학적 서술은 세심하고 정확하다.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핵심을 간파했다. 그의 신학방법은 어떤 주제를 먼저 제시하고 그것을 합리적으로 설명했다. 질문을 제기하고 그것에 답하는 스콜라주의 학문방법을 따랐다.

둘째, 존재론적 증명이다. 그는 신앙과 이성이 서로 충돌한다고 보았다. 그는 이성의 역할을 강조했다. 교회가 가르치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받아들여진 교리를 이성적 활동을 통해 논증했다. 이러한 논증을 통해 진리들이 이성에 의해 뒷받침될 수 있음을 증명해 보인 것이다. 그는 성경이나 교부들의 권위에 직접 호소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신학이론과 이단에 대한 정확한 논박들은 성경에 대한 깊은 사색의 결과이며 가르침을 지성적으로 체계화한 것이다. 그의 <모노로기온>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우주론적 증명을 담고 있다. 이에 다르면 존재하는 것이 있는 이상 최고의 존재가 있기 마련이며 최고가 아닌 존재는 최고의 존재를 전제로 존재한다. 최고의 존재는 만물의 원인인 하나님이다. 존재하는 것은 반드시 원인이 되는 존재를 가진다. 원인을 찾아 나서면 최고의 원인에 도달할 수 있다. 이 최고의 원인은 창조자 신이다. 창조주가 없으면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 우주가 생겨날 수가 있는가? 신비한 세상이 있는 것은 그것을 있게 한 창조주 하나님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셋째, 그의 가장 탁월한 기여는 <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는가? Cur Deus homo>라는 책에서 밝힌 구속론이다. 그리스도의 속죄와 성육신의 교리를 최초로 일관성 있게 체계화했다. 여기서 그는 성육신의 필요성을 밝히고 원죄, 하나님의 사랑, 공의의 속성을 근거로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어 오신 까닭을 성경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의 구속론은 한 가지 질문으로부터 시작된다. '왜 하나님은 동일한 방법으로 인간을 구원하지 않는가?' 말씀 한 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 굳이 성육신 과 수난과 죽음, 부활이라는 방식을 사용해야 하는가하는 질문이다. 말씀 한 마디로 인간을 구원하실 는 없었는가 하는 그의 물음에 대한 대답은 기존의 속사도들과 교부들과 감독들의 가르침과 이론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신 목적이 빚을 갚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마귀에게 갚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갚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속죄사역과 희생의 필요성을 하나님의 속성에 기초하여 설명했는데 이것을 "만족설"이라고 부르고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곧장 벌하지 않으시고 공의의 속성을 만족시키는 보상을 받으시고 사랑을 베풀었다고 하는 것은 성경이 제시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속성을 정확히 반영한 것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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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벨라르(Peter Abelrard, 1079-1142)

- 프랑스의 천재학자로서 11, 12세기 중세신학을 주도한 인물로 스스로를 '세상에서 유일한 철학자'로 자부하며 사람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 그는 성경과 기도 이외에 실제로 실재하는 것(보편자, Universals)을 설명할 수 있는 또다른 방법이 있는지를 깊숙이 탐구했다. 당시 한쪽에서는 보편자가 사물이나 그것을 생각하는 사람과 무관하게 존재한다는 논리(실재론)가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존재하는 것은 이름뿐(유명론)이라고 주장했다. 아벨라르는 양족 모두를 비판했다. 그는 보편자는 존재하지만 물리적이 아니라 관념적이며 즉 생각에 존재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 그는 독창적인 저술을 남긴 문필가, 철학자, 신학자였다. 변증서인 <철학자, 유태인, 기독교인의 대화>, <로마서주석>, <신학입문>, <기독교신학>, <예와 아니오>등의 저술을 남겼다. 그는 이성을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신앙을 간과하지 않았고 교부들이나 교회의 권위를 부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학문이라는 것이 고작 교부들의 작품을 그대로 인용하고 재탕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한계를 벗어나서 창의적으로 발전하도록 자극한 것이다. 즉, 신학적 주제에 얽힌 어려운 문제들을 정확하게 풀어내고 자신이 인용하는 성경본문들이 내적으로 서로 일치하며 성경을 이러한 방법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실증한 것이다. - 그의 이런 가르침은 환영받지 못하였으나 기독교신학의 발전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아퀴나스 등이 그의 이런 도전을 받아들였다. 각 질문을 나열한 다음에 그것에 대한 답을 제시하고 그 옆에 반대되는 답을 열거했다. 이런 학문적 방법은 스콜라주의의 특징이 되었다.

- 그러나 그는 어거스틴의 원죄론을 부정했다. 각 사람은 선행으로 하나님의 형벌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인간에게 주신 이성적 능력을 가지고 선한 것을 찾아낼 수 있다고 믿으며 '도덕적 감화설'이라고 하는 속죄관을 제시했다.

- 수도사이자 당대 기독교계의 최고 실력자인 끌레르보의 버나드는 아벨라르의 삼위일체론, 속죄론, 자유의지론, 원죄론 등이 파괴적인 것이라고 규정했다. 이에 교회는 1140년 쌍스공회의를 소집하고 그를 이단자로 정죄했다.

3) 휴(Hugh,1096-1141)

- 아벨라르의 학문적 방법을 추종하며 학문의 목적이 호기심을 만족시키는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더 높은 차원의 삶을 살도록 하는데 있으며 그것은 영혼을 만족시켜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 그는 <기독교신앙의 신비에 대하여>에서 성례전의 중요성을 갈파하며 화체설을 주장했다. 성만찬에 실제로 그리스도가 임재하며 떡과 포도주는 단순한 표지나 상징이 아니라 실제적인 은혜가 작용하는 물질적 매체라고 했다.

4) 피터 롬바르드(Peter Lombard, 1100-1160)

- 버나드, 아벨라르, 휴와 동시대 인물. 이탈리아에서 수학하고 1130년부터 파리에서 가르쳤다. 나중에 휴가 차지하고 있던 노뜨르뎀신학교수의 자리를 물려받았다.

- 그는 <4권의 문장서>를 통해 중세의 조직신학을 통괄했다. 1권은 하나님과 속성, 삼위일체, 예장을 논하고 2권에서는 천사들의 창조를 포함한 하나님의 창조사역, 인간, 죄, 자우의지, 구속의 필요성을 다루고 3권에서는 기독론, 구속론, 성령의 능력과 선물, 하나님의 계명을 다루고 4권에서는 성례전과 종말론을 논의하고 있다.

3. 절정기의 신학자들

1) 알버트 마그누스(Albert Magnus, 1200-1280)

- 도미니크수도회의 일반학연구소의 책임자로서 피터 롬바르드와 디오니시우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들을 주석하고 방대한 백과사전을 만들어 지식사회에 선물했다.

- 그의 가장 큰 기여는 신학과 철학을 구분한 것이다. 신학은 계시된 원리에 따라 어떤 것을 증명하는 일이지만 다른 학문과는 달리 증명되지 않는다고 하며 이성의 관찰과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고 했다.

- 사람은 수동적 지성과 능동적 지성이 있는데 능동적 지성은 하나님의 조명을 통해 감각적 자료가 전달해 준 지식을 추상화하여 수동적 지식에 각인시킨다고 했다.

2)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

- 알버트의 제자. 이탈리아 출생. 베네딕트수도회의 모체인 몬테카시노수도원에서 교육을 받고 1239년 나폴리대학교에서 수학한 후 도미니크수도회에 입단했다가 가족들이 반대하며 그를 2년간 가택에 감금했다. 겨우 탈출한 그는 파리의 알버트 산하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1254년 파리대를 시작으로 교수생활을 하며 저술에 몰두하다가 49세로 생애를 마감했다.

- 그가 남긴 작품들은 주로 철학서와 신학서이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의 주석서를 많이 썼다. 그러나 대표적인 두 가지 작품은 <이교도대전>과 <신학대전>이다. 전자는 모슬렘을 포함한 자연론적 세계관을 가진 비기독교인의 존재와 본성 등을 논하고 있고, 후자는 학문을 연구하는 초보자들을 위해 쓴 체계적이고 요약적인 해설서이다. 1권은 하나님과 창조, 인간의 본성과 지적 생명에 대해 논한다. 2권은 인간의 윤리적 생활을 고찰하고 3권은 그리스도와 성례를 다룬다.

- 토마스의 사상적 근본은 아리스토텔레스(-384~-322)의 철학이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기독교신앙을 과감하게 종합했다. 어거스틴의 신학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구조 안에서 해석했다. 자신의 학문 안에 종교와 철학의 요소들을 다 포함시켰다

- 그는 하나님이 초자연적 진리들을 직접 계시했을 뿐만 아니라 신의 존재와 같은 철학적으로 논증될 수 있는 진리들도 계시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자연적인 것들을 가지고 인간의 지성을 초월하는 초자연적인 진리들을 설명하는 '유비(Analogy)'가 탄생되었다.

- 토마스주의의 정수는 신앙과 이성 사이의 관계에 대한 가르침과 신 존재증명 방법이다. 그는 이성으로 획득할 수 있는 진리와 이성을 넘어서는 진리를 구별했다. 철학은 이성으로 획득할 수 있는 진리를 다루지만 신학은 계시된 진리를 다루는 동시에 철학에 속하는 진리도 다룬다는 것이다. 반면에 이성은 계시된 진리를 다루는 신학활동에도 필수적이다. 이성은 계시된 진리를 증명할 수 있다. 신앙은 계시된 진리에 의해 확실성을 부여받는다. 그러므로 신앙은 이성을 넘어선다고 했다.

- 그의 사상은 현재도 로마카톨릭교회의 주된 신학으로 자리잡고 있다. 사후에 카톨릭은 그에게 '천사박사' '전 교회의 박사'라는 칭호를 붙였다. 그러나 마르틴 루터는 토마스의 신학을 '영광의 신학'이라며 비판했다. 개혁가들은 이성중심의 토마스주의를 허물고 성경적 기독교를 회복코자 했다. 20세기의 칼 바르트는 토마스의 자연신학을 거부하고 토마스의 하나님은 인간의 인성에 의해 만들어진 피조물이며 결국 우상이라고 비판했다. 결론적으로 그가 제시한 신존재증명 방식은 신에 대한 이성적 물음에 답하려는 것이지 인간을 신앙으로 인도하려는 목적을 지닌 것이 아니라고 평가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그는 복음의 단순성을 간과했고 교회에 사변성을 심어 세속철학이 교회 안으로 침투되는 길을 열고 말았다. 전문가들이 아니면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와 술어, 문체들로 예수를 어렵게 만들었다.

<?xml:namespace prefix = v ns = "urn:schemas-microsoft-com:vml" /><?xml:namespace prefix = v />제5강. 스콜라주의(신학)

4. 후기 스콜라신학

1) 배경 및 포인트

-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앙과 이성 사이에 연계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이성의 합리적인 사용으로 하나님의 존재와 신적 진리를 추론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후기의 신학자들은 이 두 영역사이의 연계성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즉, 하나님의 존재, 신의 전지성, 영혼의 불멸성 등은 이성으로 증명되기에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신앙과 이성, 신학과 철학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괴리가 존재한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스콜라주의는 급속하게 무너졌다.

- 도미니크학파와 프랜시스학파는 14세기에 들어서면서 서로 대립되었다. 전자는 사변적이고 이론적인 학문에 관심을 가졌고 후자는 정통적이며 실제적인 학문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프랜시스학파는 신학은 단순해야 하며 실천적이고 적용 가능해야 한다고 했다. 특히 던스 스코투스, 윌리엄 오캄 등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론을 정면으로 반박하며 이성의 제한성과 이성을 통한 신적 지식의 획득은 불가능하다고 천명했다.

- 스콜라주의의 붕괴는 기독교의 계시의존적사색의 중요성을 일깨워 교회개혁운동을 자극했다. 사변적인 철학운동을 벗어나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호소했다. 교황보다 성경이 더 높은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2) 대학의 등장

- 중세사회가 남긴 유산 중 가장 위대한 업적은 대학의 설립이다. 이전의 학문연구는 사설학원이나 교회당부속학교에서가 고작이었다. 이곳은 학교를 태동시키는 역할을 했고 학자들의 연구가 진행되었다. 파리대학, 볼로냐대학에 이어 1224년에 나폴리대, 1229년에 뚤르즈대, 1244년에 바티칸대, 이후 옥스포드와 스투디움대가가 설립되었다. 13세기중엽엔 파리대가 약 7천여 명, 옥스포드대가 약 2천 명을 수용했다.

- 점차 수가 늘어가자 학교조합이 생기고 15세기부터 조합을 University라 부르게 되었으며 교수는 Master, Docter, Professor로 불리웠다. 대학공부를 시작하는 연령은 대개 12세에서 15세였으며 남자에게만 허락되었다. 입학자는 라틴어문법을 익혀야 했고 4년동안 수사학의 고급과정을 이수하고 논리학을 완전히 습득한 후 졸업시험에 통과하면 문학사 학위(B.A)를 받았고 이후 법학, 의학, 신학의 상급분야로 진학했다. 35세 이후부터 박사학위를 받았다.

- 상당수 대학들은 신학교육을 위해 설립되었으나 철학부와 신학부가 점차 나누어지면서 서로 독립하고자 했다. 수도사들이 신학교수를 역임했지만 도미니크와 프랜시스수도회의 두 학파 간의 치열한 다툼과 상호 공격이 전개되었다. 중세교회의 개혁자인 존 위클리프와 후기 스콜라주의자인 스코투스와 오캄은 옥스포드대에서 공부했다.

- 대학은 지식인들의 비평적 사고를 고무시키고 매사를 합리적으로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성경을 읽을 수 있는 눈을 주었고 대중의 미신과 교회의 횡포에 항거할 수 있는 용기를 심어주었다.

3) 던스 스코투스(John Duns Scotus, 1265-1308)

- 프랜시스회 소속의 영국인 수도사로 토마스주의의 붕괴시키는 단서를 제공했다. 그는 미묘한 차이를 가진 신학 주제들을 세밀히 구분하고 다룬 학자로 알려져 '미묘한 박사'로 불리었다.

- 그는 어거스틴과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동시에 수용했다. 그는 신앙과 이성, 신학과 철학 사이에 괴리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성적 논증의 노력을 비판했다. 인간의 마음이 물질적인 대상을 넘어 설 수 없음으로 감각적인 것들을 가지고 유추하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있다고 한 토마스주의를 거부했다. 그는 존재가 아닌 것은 알려질 수 없으며 존재하는 것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인식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또 필연적인 존재(하나님)를 우연적인 존재(피조물)를 가지고 증명하려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했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올바르게 하면 하나님의 존재를 긍정할 수밖에 없다는 '후천적 논증"(posteriori)을 주장했다. 또 그는 마리아의 무흠잉태설을 주장했다. 하나님은 마리아를 가장 완전하게 지킴으로 동정녀는 원죄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했다. 그의 이 이론은 1854년 카톨릭교회의 공식교리로 인정되었다.

4) 윌리엄 오캄(William Occam, 1285-1347)

- 영국 써리 지방 오캄 출신. 프랜시스수도회 소속으로 옥스퍼드에서 수학하고 그곳에서 교수생활을 하며 신학자, 변증가로서 활약했다.

- 그에 따르면 이성적 학문과 계시는 종합될 수 없다. 신의 존재와 성질은 증명될 수 없고 다만 유비로서 개연성을 추리할 뿐이라며 유명론을 부활시켰다. 신은 이성으로 추리하여 증명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신학은 결코 과학 즉 학문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스승 스코투스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절대 능력과 질서를 통한 능력 곧 제한적 능력을 구분하면서 인간은 단지 하나님께서 자유의지로 정하신 질서를 통한 권능의 범위 안에서만 논할 수 있을 뿐이라고 했다.

- 이런 그의 주장은 어떤 교리가 합리적인 것이기 때문에 옳다고 한 스콜라주의의 주장을 무력화시켰다. 그는 하나님께서는 항상 선을 행하신다고 말하기보다는 차라리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그 무엇을 막론하고 다 선하다고 말해야 한다. 무엇이 선인가를 결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기 때문이라고 설파했다.

- 그러나 오캄은 하나님의 절대능력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서 하나님은 인간들을 죄인이 아니라고 선포하실 수 있으며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죄의 값을 치르게 하실 수도 있었다고 주장해 신학적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그이 영향으로 그의 후학들은 하나님께서 마음만 먹으며 당나귀 속에서도 성육신할 수도 있다는 해괴한 주장가지 나오게 되었다.

5. 스콜라주의에 대한 종합적 평가

1. 비평적(critical)이란 일반적으로 어떤 사물, 사상, 사건을 정확하게 분석하여 올바른 이해와 인지, 판단으로 좋은 결정을 하기 위한 사고의 활동을 말한다. 비평적 사고 활동은 논리를 기초로 하여 비평적인 대상에 대한 신중하고도 사려 깊은 분석과 연구의 총체적 두뇌활동이다. 그러므로 비평은 비난이나 비판과는 다른 목적의 사고활동이다. 전자들이 흠집을 잡고 쓰러뜨리기 위한 목적을 가지나 비평은 잘못된 부분을 짚어내어 개선하려는 목적을 가진다.

2. 교회의 개혁은 비평적 사고를 기초로 이루어진다. 중세의 교회는 비평적인 눈과 사고를 가지지 못함으로 교리와 관습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시행했다. 여기에 대학은 중세인들에게 비평적인 눈을 제공했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비평적인 눈을 가지고 기독교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종합하려고 했다. 이후 스코투스와 오캄도 비평적인 사고를 가지고 신학과 철학, 계시와 이성 사이의 괴리를 발견했다. 16세기에 들어 종교개혁자들도 비평적인 안목을 가지고 교회의 부정과 부패를 발견했으며 성경에서 교회의 개혁원리들을 찾아내었다.

3. 스콜라주의적 사고방식은 합리적인 것이라면 모두 옳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합리적이라고 해서 모두 옳은 것은 아니다. 논리적으로 옳다고 해서 모두 옳은 것은 아니다. 어떤 논증이 참되고 타당성을 가지는 것은 그 논증을 구성하고 있는 주장과 근거의 참과 거짓과는 관계가 없다. 논리적으로 맞는다고 해서 그것이 참이 될 수는 없다. 명백한 거짓도 논리적 타당성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이론이 그렇고 죄파들의 이율배반적이며 모순된 주장도 그런 맥락이다. 논리라는 틀에 얽매이게 되면 형식의 노예가 되기 쉽다. 내용물의 진실과 진리보다 자신의 주장을 논리화하는 것을 더 중요시하게 된다. 이런 곳에 덕과 겸손, 양보와 희생의 미덕이 보일 리가 없다. 그것은 단지 패배자의 실패의 넋두리라고 우긴다. 자신의 논리가 먹혀들지 않으면 자신이 수난 받는 선지자인양 행세한다.

4. 목회는 비평적 활동을 필요로 한다. 교회의 현실을 논하고 교인들이 토로하는 불만을 듣고 해결책을 찾기 위해 관련된 정보와 선이해가 있어야 하며 비평적 사고능력이 있어야 한다. 나아가 찾아낸 정보를 분석하고 비평과 재창조하는 능력을 겸비해야 한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지금 현대판 스콜라주의 목회자들로 인해 교회가 타락하고 분열되며 항상 불화에 휩싸이곤 한다. 즉 자기논리에 빠진 목회자들이 자기의 교회를 세우고 자기의 목회를 하며 자기의 성공신화를 쓰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면서도 예의와 염치를 갖추고 더 나은 결과를 얻기 위한 끊임없는 비평적 사고활동을 뒤로 하고 몰인격적인 신비주의와 자기 신학적 논리로 무장한 채 교회의 진정성과 순결성, 거룩성, 영원성을 훼손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그래서 개혁은 항상 우리 앞에 하나의 도전 과제로 남아 있는 것이다. (AL)

제6강. 교황권의 역사와 쇠락

1. 교황권의 성장

1-1. 로마교회는 사도 베드로와 바울의 무덤을 지키며 교회의 중심이 되었고, 콘스탄틴황제는 그 사실을 높이 평가해 성 베드로 성당과 성 바울 성당을 바티칸 언덕에 건축했다. 또 그는 밀티아데스 교황에게 도나투스파를 판결토록 힘을 실어주었다. 이후 로마의 주교에겐 '최고의 사제'라는 칭호가 주어졌다.

1-2. 율리우스 교황(주후337-352)은 동방교회로부터 아타나시우스와 마르켈루스를 폐위해 달라는 요청을 받음으로 그 지위를 인정받았다. 그러나 366년에 리베리우스 교황이 사망한 후 우루시누스가 로마주교로 선출되었는데 다수파인 다마수스파가 소수파인 우루시누스를 습격하여 3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다마수스파가 승리하고 다마수스(주후366-384)가 교황에 올랐다. 이후 교황들은 로마교회의 우위를 지키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그의 계승자인 시리키우스 교황(주후384-399)은 밀라노의 암브로시우스보다 영향력은 없었으나 유럽 전역에 강제적인 치리권을 행사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1-3. 5세기 들어 이노센트 1세(402-417)에 이어 레오1세(440-461) 부터는 교황이 로마기독교국가의 실질적인 수장이 되었다. 레오1세는 예수가 영원한 반석인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약속했으므로 로마의 주교가 베드로의 권위를 계승했다고 하는 교황제도의 이론적 기틀을 마련했다. 이후 지금까지 265명의 교회군주들이 베드로왕국을 계승하면서 로마카톨릭주의를 실천하고 있다.

2. 프랑크족의 성장과 교회의 관계

2-1. 5세기 이후 야만족의 침입으로 드디어 서로마는 멸망한다. 476년 고트족의 오토아케르는 서로마의 로물루스황제를 폐위시킨다. 이 때 서부독일지역에서 프랑크족이 세력을 형성하고 클로비스왕(481-511)때 서유럽을 장악할만큼 성장한다. 그런데 그는 490년에 크리스찬인 클로틸드와 결혼하고 6년 뒤에는 3천 명의 병사와 함께 세례를 받고 니케아신조를 수용한다.

2-2. 이후 6세기엔 중부 유럽 대부분에 프랑크왕국이 세워지고 왕국과 교회는 급속히 가까워져 좋은 관계를 계속 유지한다. 프랑크왕은 교황의 신임을 업고 통치권을 안정화시켰고, 교황은 가장 위협적인 롬바르도족의 침입을 프랑크왕국의 힘을 빌려 막을 수가 있었다.

2-3. 7세기 들어 포팽왕(751-768)은 롬바르도족을 섬멸한다. 그리고 샤를마뉴 대제(769-814)는 대부분의 서방지역을 장악하고 800년 12월23일에 로마로 진군하여 교황 레오3세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아 황제에 임명되고 나라 이름을 신성로마제국이라고 칭했으며 교회와 왕국을 동시에 치리하게 되었다. 그는 교회 주교들을 직접 임명하고 모든 수도원에 학교를 세웠으며 수도사들의 활동을 지원했다.

2-4. 이제 교황들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의 눈치를 보아야 했다. 1세기동안 44명의 교황이 임명되었지만 비합법적인 교황들이 함께 세워지는 과정 속에서 치열한 싸움을 전개했다. 891년 포르모스 교황을 시작으로 896년 스테파노 교황은 전임자의 시체를 참시했고(시체공회), 교황청 역사에 있어서 가장 추문으로 얼룩진 시기는 세르기우스3세(904-911)부터 요한네스 13세(965-972)에 이르기까지의 '도색정치'(pornocracy, 창녀정치)의 시기이다. 창녀인 마로치아가 3명의 교황을 임명하고 배후 조종했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955년에는 교황 요한 12세가 '악마를 위해 축배를 들자'고 할 정도였다. 이 기간 동안 살해된 교황이 9명, 해임 9명, 추방 7명의 진기록을 남겼다.

3. 교황청과 오토제국(p.286-293)

3-1. 9세기 들어 교황청은 지역군주들과 로마귀족들의 노리개가 되었다. 영주들은 교회의 재산을 사용하여 권력 신장을 꾀하였고 추종자들과 일가친척들에게 성직록으로 하사했다. 성직자들의 도덕적 추문과 규율해이현상이 극에 달했다. 이러한 때 노르만족과 사라센족의 로마침입은 혼란을 더욱 가중시켰다.

3-2. 10세기 들어 개혁의 바람이 불었고 그 중심에는 클루니수도원이 있었다. 910년 이퀴텐의 공작 윌리엄은 베네딕트의 설립취지를 살리고 새로운 신앙운동을 일으켰다. 10세기 후반에는 클루니대수도원장의 권위가 모든 수도원을 압도했고, 11세기 들어서는 공식적인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영국도 이에 영향을 받아 둔스탄 등을 중심으로 교회의 개혁을 일으켰다.

3-3. 그러나 유럽에서 벌어진 회복운동에서 가장 강력한 매체역할을 한 것은 독일의 섹슨족의 왕들, 특히 사냥꾼이라 불린 하인리히 1세(919-936)부터였다. 당시 독일은 헝가리족의 위협에 직면해 있었는데 성직자들과 지방공국의 지도자들이 하인리히를 왕으로 선출했고, 그는 933년 헝가리와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의 후임으로 독일제국의 기초를 놓은 오토1세(936-973)가 즉위한 것이다.

3-4. 오토가 직면한 것은 왕권 신장과 왕국 강화였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께로부터 기독교백성을 보호하고 양육할 책임을 받은 신정왕으로 보았다. 그는 독일주교들과 대수도원들의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확보하고 서임권(성직임명권)을 주장했다. 그리고 951년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교황 아가페투스2세에게 자신을 황제로 기름부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교황은 이를 거절했다. 오토는 야심을 이루기 위해 기다리다가 교황 요한네스12세로부터 황제로 기름부음을 받았다. 그러나 오토는 백성들로 하여금 로마교회가 아닌 자신에게 충성 서약을 하도록 강요했다. 교황은 오토의 정적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요토는 로마에 교회회의를 소집하고 963년 교황을 폐위시켰다. 대신 평신도인 레오8세를 앉혔다. 그러나 오토가 로마를 떠나자마자 시민들은 레오를 몰아내고 요한네스를 다시 복직시켰다. 그리고 964년 교황이 죽자 황제의 동의없이 베네딕트5세를 교황에 선출했다. 오토는 즉시 로마로 돌아와 베네딕트를 독일로 추방하고 레오8세를 복직시켰으며 그의 후임인 요한네스13세도 직접 임명했다

3-5. 그러나 그의 가문은 그의 아들 오토2세(973-983)때부터 기울기 시작했다. 오토2세는 이탈리아에서 사라센족과 전투를 벌이다 죽었다. 이어 오토3세는 3살에 왕이 되어 8년을 다스렸으나 로마귀족들에게 교황청을 빼앗겼다. 이어 하인리히 2세(1002-1024)와 콘라드2세(1024-1039)가 독일 다스렸고 베네딕트 9세는 이 때 교황이 되었다.

3-6. 오토제국은 카롤링왕조가 가졌던 기독교국가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역할을 담당했으나 역사는 그들이 진정한 로마제국을 이끌었다고 평가하지 않는다. 그저 독일제국의 교회에 대한 지배와 간섭의 시대였다는 결론을 내릴 뿐이다.

4. 교황청의 개혁

4-1. 11세기가 저물어 갈 무렵, 개혁의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클루니수도회의 이상과 철학이 보급되었고 영국에서는 둔스탄의 개혁이 빛을 발하였으며 로렌과 이탈리아도 뒤를 이었다. 유럽 전역에 규율, 단순한 생활, 사제직에 온전히 전념하려는 정신에 대한 자각이 일어났다. 부패하고 세속적 관심사들에 빠져 있던 성직자들의 실태가 비판을 받았다. 특히 제도적인 악이었던 성직매매와 성직자의 결혼 또는 축첩관습은 개혁의 일차 대상이었다.

4-2. 그러나 이러한 개혁의 바람에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곳은 교황청이었다. 당시 교황 베네딕트8세(1012-1024)와 요한네스19세(1024-1032)는 황제들의 비위를 맞추며 자기 가문 지키기에 급급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3세(1039-1056)는 재위 기간에 교회 개혁작업을 주도했다. 그는 독일인 주교출신의 레오9세(1049-1054)를 교황으로 임명했다.

4-3. 레오9세는 성직자들의 기율을 바로잡고 정화하며 교황의 권위를 강화해 나갔다. 그리고 로마와 이탈리아의 파발들로부터 독립을 꾀했다. 그는 교회법을 제정하여 로마교회의 수위권을 내세웠다. 자신의 지지세력을 확보키 위해 비록 외국교회출신이라도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교황청의 핵심그룹인 추기경(cardinal)으로 임명했다. 그가 주도한 새로운 교황청은 성직매매라는 이단을 최고의 적으로 간주했다. 1049년 라테란회의에서 그는 성직자들에게 성직임명, 직위제정, 교회당축성 등을 금지시켰다. 이후 마인츠회의에서 성직자의 결혼을 정죄했다. 그런데 동방교회 즉 쿤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인 케룰라리우스(1043-1048)가 로마교회와의 관계에 있어서 동등성과 독립성을 주장함으로서 분쟁이 발생했다. 교황 레오는 두 교회의 통일을 위한 대화를 목적으로 훔베르투스와 프리드리히, 페트루스를 사절로 보냈지만 케룰라리우스가 이를 거부하여 결국 1054년 7월 16일, 교황 레오9세가 죽은 후 사절단은 콘스탄티노플을 떠나가기 전에 동방교회의 수장에게 파문장을 전달함으로서 공식적인 분열이 시작되었다.

4-4. 레오 9세의 죽음 이후 빅토르 2세(1055-1057)가 교황에 올랐고, 1056년에 하인리히3세가 갑자기 죽고 후임으로 6살 난 아들인 하인리히 4세가 즉위했다. 어머니인 아그네스가 섭정을 맡았다. 빅토르에 이어 북부 이탈리아의 실질적인 지배자였던 고드프리의 형제인 스테파누스9세(1057-1058)가 교황이 되었고, 이 때 사절단이었던 훔베르투스가 개혁에 앞장섰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왕은 세속사에만 권한이 미치는 단순한 평신도일 뿐이라고 주장하며 왕의 성직자 임명은 월권행위라고 공박했다. 이로 인해 그동안 왕에 의해 임명받았던 주교들은 임명이 원래 잘못되었기 때문에 주교로 인정받을 수 없다는 평신도서임권 문제로 비화되었다. 그러나 로마귀족들은 1058년 스테파누스 교황을 앞세우며 개혁작업에 반기를 들었고, 힐데브란트와 개혁파 추기경들은 로마시민들과 고드프리의 지원에 힘입어 그들을 몰아내고 니콜라스2세(1058-1061)를 교황으로 옹립했다. 이후 1059년 로마교회회의에서 교황선출에 대한 법령을 통과시켰다. 이후 교황은 추기경들에 의해 선출되는 역사와 전통으로 이어졌다., 이후 힐데브란트는 대중들에 의해 거의 떠밀리다시피 하여 교황에 선출되어 그레고리 7세가 되었다.

4-5. 힐데브란트가 죽자 추기경들은 모테 카시노의 대수도원장을 빅토르 3세라는 이름의 교황으로 선출했다. 이어 힐데브란트의 제자인 우르바노 2세(1088-1099)가 즉위하여 십자군운동을 이끌었다. 이어 파스칼리스 2세(1099-1118)는 하인리히5세와 협상하여 세속적 서임과 영적인 서임을 구분했다. 즉, 교회는 영적인 권위를 왕은 세속적인 권위를 갖는다고 주장했다. 이 협약은 1122년 보름스정교협약에서 하인리히5세와 교황 칼릭스투스2세(1119-1124)사이에 정식으로 체택되었다.

5. 교황권의 쇠락

5-1. 그러나 교황권과 제국 사이의 경쟁은 보름스협약으로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공방을 주고 받았다. 특히 프랑스와 잉글랜드처럼 민족국가들이 등장하면서 상황은 악화되어 갔다. 십자군전쟁 이후 전투적인 기독교를 상징하던 성전기사단이 해체되고 청빈을 강조하던 프란체스코회가 정죄되었다. 뿐만 아니라 토마스 아퀴나스 이후 신학을 주도하던 오캄의 윌리엄을 비롯해 학자들의 사상이 단죄를 받고서 교회 안에서 침묵을 강요받았다.

5-2. 농촌인구는 줄고 도시인구는 폭발했다. 스콜라철학의 영향을 받은 도시민들은 내세보다 현세에 집중되었다. 교육을 받은 일부 평신도들이 빈부격차와 불안정한 상태에 불만을 품고 조직적인 운동을 벌였지만 그들을 통제하지 못했다.

5-3. 교황권은 점점 약화되어 갔고 반면에 세속군주들은 영향력을 확대했다. 교회는 대성당과 비대한 조직을 유지하기에 급급했다. 영성이나 신앙의 성장보다 돈벌이에 매달렸다. 교회는 성물을 보관하는 장소가 되었다.

5-4. 1294년 추기경들은 거룩한 은둔자로 유명한 첼레스티누스5세를 교황으로 선출했다. 청빈과 거룩함을 강조하는 프란체스코 수도회 출신답게 그는 맨발로 나귀를 탄 채 교황청에 입성했다. 그러나 5개월 만에 그는 수도사의 삶과 화려한 궁중 정치사이의 괴리를 극복하지 못하고 추기경들을 소집하고 스스로 법복을 벗었다. 추기경들은 거룩함만으로는 교황직을 훌륭히 수행할 수 없다는 교훈을 깨닫고 이번엔 냉혹한 정치가인 보니파시우스8세(1295-1303)를 교황으로 선출했다. 그는 로마주교가 사방세계 전부를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인물이었다. 1302년 그는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라는 교서를 발표하고 모든 이들이 교황의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고 공표했다. 이 교서는 각국에 심각한 갈등을 불러 일으켰다. 1303년엔 성직자의 세금징수문제로 프랑스의 필리프 왕이 교황과 대립했고, 이에 위협을 느낀 교황은 이탈리아 아나니 성으로 피신했다. 그러자 필리프의 수하들이 아나니 성으로 쳐들어가 교황의 따귀를 때렸다. 이에 충격을 받은 교황이 한 달 만에 세상을 떳다.

5-5. 추기경들은 이제 프랑스의 국왕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그들은 국왕의 친구인 클레멘스5세(1305-1314)를 교황으로 선출했지만 국왕의 눈치를 보느라 로마로 들어가지 못하고 아비뇽에 거처를 정했다. 얼마 뒤 신임 교황은 무화과를 먹고 독살되었고 이후 6명의 프랑스 출신의 교황들이 자리를 이었고 그들은 아비뇽에서 국왕이 주는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 시민들은 분노했다. 결국 그레고리우스11세(1371-1378)가 1376년 72년 만에 로마로 돌아오게 되었다.

5-6. 하나님은 이런 교황청의 부패와 타락에 대해 심판을 가했다. 1340년 대에 들자 페스트가 유럽전역을 휩쓸었다. 이탈리아를 시작으로 1347년엔 도망쳐 나온 이탈리아인들에 의해 전염되어 콘스탄티노플의 시민들이 떼죽음을 당했고(88%), 프랑스를 거쳐 1349년엔 도버해협을 건너 영국에 상륙하여 인구의 절반이 목숨을 잃었다. 1350년에는 북유럽을 거쳐 아이슬란드와 러시아로 진군했다. 흑사병으로 인해 유럽인구는 2/3가 몰살당했다. 14세기의 작가 보카치오는 <데카메론>에서 1348년에 흑사병이 플로렌스에 닥쳤을 때의 끔찍한 상황을 생생하게 소개했다. 사람들은 희생자들의 두 볼에 불그스레한 반점들을 하나님의 표시라고 믿었다. 유대인들이 흑사병과 관련이 있다는 소문이 돌자 사람들은 닥치는대로 유대인들을 학살했다. 흑사병은 교회의 절대권력을 붕괴시켰다. 사람들은 이 병이 교황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시대상황에서 잉글랜드에서 위클리프가 주도하는 평신도중심의 개혁운동이 싹트기 시작했다. 교회개혁의 시동이 걸린 것이다. (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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