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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틴(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

최더함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2. 12. 16.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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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틴(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

354년에 아프리카의 타가스테에서 출생하여 430년 히포의 감독 (현재 알제리 숙크아라스)으로 역사의 한 획을 그은 교부중의 한사람입니다.

그는 친구들과 함께 패거를 이루어 타락한 도시 바벨론의 뒷 골목과 환락의 진흙탕의 길을 마치 값비싼 향수나 향유의 거리인양 쏘다녔습니다. (어거스틴의 고백론 2권.3.8)

그는 도둑질도 장낭을 빙자하여 서슴치 않고 했습니다.

그 도둑질은 물건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단지 도둑질하면서 느끼는 쾌감때문에 그 같은 것을 했습니다.

알려진 대로 배나무 얘기도 그것이 먹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훔치고 싶은 충동때문이었습니다.

몰래 야밤에 들어가 배를 따냈지만 실제 맛본것은 두세 개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버리거나 돼지에게 주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훗날 그 같은 기억을 회고하면서 "죄악은 어떤 목적이 있어서 행한것이 아니라 단순히 죄악 그 자체를 좋아하는데서 생긴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범행동기도 심층적으로 분석했습니다.

범죄뒤에는 두가지 요인이 있는데 하나는 세상적 욕망을 채우고 싶은 소유욕이요, 다른 하나는 가진것을 잃지 않으려는 두려움이라고 했습니다.

범죄에는 범죄자체를 사랑하는것은 아니지만, 거기에는 어떠한 형태로든 동기가 있다고 했습니다.

범죄를 하는 동기가 시각의 즐거움이나 촉각 또는 감각의 즐거움이나 명예욕, 정복욕, 정권욕과 같이 그 대상에 따라 상이하게 적용한다고 본점에서 이 문제를 심리적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고백론2권 5,10,11)

"나는 우정의 샘을 불결한 더러움으로 모독하였고, 그 순결을 자옥과 같은 탐욕으로 훼손하였으면서도 외모로는 항상 인자한 인격을 지닌 인사로 보이려고 애썼습니다.

나는 이처럼 육욕적이고, 순수하지 못한 사랑에 사로잡혀 헤어나오지 못했습니다.(고백론3권1,1)

그는 키게로가 쓴 호르텐시우스에서

"행복은 육욕의 만족에 있는것이 아니라 진리의 인식에 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케게로가 제시한 지헤의 탐구는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일차하는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민한 젊은 시절11년을 카르타고에서 머물렀습니다.

17세에 카르타고에 가서 그곳을 떠난 29세까지의 13년은 그 지적 탐구와 수용력이 가장 왕성한 시기에 해당합니다.

그가 후에 겪은 기독교로의 회심조차도 어떻게 보면, 역설적으로 이때에 예비된 것이라고 불수 있습니다.

충분히 부식된 토양위에서 힘찬 생명력의 싹이 피어오르듯이 카르타고에서의 인생체험과 실험은 결국 4년후(387년) 암브로시우스에게 극적으로 세례를 받는 사건으로 연결된다는 점을 주시해야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카르타고 시절 어거스틴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졌다기 보다는 오히려 진지한 삶과 진리의 실험적 탐구기간이었다고 보는것이 타당할것입니다.

카르타고에서의 자유분방한 생활을 통하여 갈등도 많이 겪었지만 지적으로, 신체적으로, 인간적으로 크게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절실한 것은 선과 악의 문제였습니다.

자신의 실제 행동에서 범하고 있는 악한 행위와, 그것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고 싶은 간절한 바람사이에서 어떻게든 그 문제에 대한 답을 얻어야만 했습니다.

기독교로 돌아가려는 그의 노력에 가장 큰 방해가 되는것은 영적인 문제와 선악의 문제였습니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악을 있게 할수 있느냐의 의문이었습니다.

이세상의 불행과 고통을 만들어 놓은 이가 어떻게 이 세상을 사랑한다고 말할수 있는가가 그이 고민이었습니다.

선악 이원론에 근거한 마니교(Manicheism)는 원래 조로아스터교(Zoroaster)에서 유래한 것으로 3세기 마니(Mani274-279)가 최초로 설파한 이원주의를 주장하는 그노시스파 즉 영지주의적 종교의 일파였습니다.

마니는 엄격한 이원주의를 가르쳤는데, 빛과 어둠, 선과악, 영체와 물체를 대립된것으로 보았으며 이들을 실체로 파악하였습니다.

선과 악의 본질은 원초적으로 그리고, 존재론적으로 서로 분리되며, 반되되는 원리입니다.

다만,악의 원리의 그릇된 행동으로 인해 이 세상이 혼돈스럽게 되었다는것입니다.

(Britnica Encyclopedia 783)

선악 이원론에 따르면, 근본원인은 신에게 까지 구해지며 결과적으로 자기가 저지른 잘못도 신의 책임으로까지 추적해 갈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때문에 자신의 죄에 대한 죄책감을 덜수가 있습니다.

(마니교는 구약성경적 하나님 개념에 대한 두려움으로 부터 빠져 나올수 있게 하였습니다.)

자애로워야 할 유일신이 징벌적이고, 복수적이며, 고통르 주는 전능자라는 점을 이해할수가 없었습니다.

플라톤은 육체적 쾌락의 추구가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했고, 철학의 시조인 키게로는 관능의 탐닉은 철학의 가장 큰 적이라고 가르쳤습니다.

플라톤의주의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로티누스 그리고 포르프리우스로 이어집니다.

포르프리우스(Porphrius)는 그의 저서 에네아드(Enneads)를 집필하여 최초의 조직신학자라고 이야기 하기도 합니다.

플로티누스의 주장에 따르면 악은 홀로있지 않다고 이야기 합니다.

선의 힘의 속성에 따라 악은 혼자일수 많은 없습니다. 마치 황금의 족쇠에 붙잡혀 있는 포로처럼 악은 필히 선의 사슬에 매어 있는것으로 나타납니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악은 결코 실체일수가 없으며 그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선을 내포하고 있는것이었습니다.

"악은 원천으로부터 멀어졌을때의 상태이며 그것은 실체가 아닌 상대적인 선의 불충분일뿐이며 그 원인은 역시 선에 있는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악이란, 질서로부터 분리를 의미한다. 다시말해 보다 상위존재와의 접속점을 읽고, 자기의지적부분(self willed part)이 되는것을 뜻한다."

밀라노의 교회 감독 암브로시우스는 로마의 고위급 관료인 리구리아(Liguria)와 에밀리아((Aemilia)의 주지사로 명망높은 명문귀족이었습니다

그는 34세에 밀라노 감독이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이 밀라노에 갈 무렵 암부로니우스는 44세 였고, 어거스틴은 30세였습니다.

-Fredrick Copleston의 A History of Philosophy (전9권)의 제2권 Augustine to Scotus

Westminster. Maryland : The Newman Press 1962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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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부로 시우스는 당시의 석학이었습니다.

어거스틴과는 달리 그리스어를 유창하게 읽어 관계서적들을 독파하고 있었으며, 설교는 지적 내용이 가득하고, 새로운 통찰력이 번득이고 있어 당대 라틴 세계의 최고의 설교자로 평가받고 있었습니다.

그가 처음으로 듣기 시작한 설교는 창세기 내용이었던 같고, 이것은 그때까지 물질주의적 사고에만 젖어있던 그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는것 같았습니다.

그의 자신에 찬 모습은 어거스틴에게 퍽 인상적으로 비췄습니다.

기독교 신앙르 변호한다는것이 수치스럽게만 느껴졌던 그에게 처음으로 신앙도 변호도리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특히 구약성서의 해석은 그가 고민해 왔던 여러문제들에 대한 답을 주는것 같았습니다.

암브로시우스 자신도 차안의 세계보다는 피안의 세계에 중점을 두며 설교 하였습니다.

그는 인간의 영혼에 관해서 집중적으로 설교하였습니다.

"인간은 바로 영혼이라는 것입니다.몸이란 단순히 헝겊으로 만들어진 옷과 같은것이며, 우리의 몸이란 영혼의 수동적인 도구에 불과합니다. 적은 바로 우리 내면, 우리안에 있는것이며, 잘못의 원인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라고 설교하였습니다.

어거스틴은 성서를 문자적으로만 해석하려던 태도의 잘못을 인지하기 시작했습니다.

약성서의 여러구절을 영적으리로 해석하는것을 듣고서 율법과 예언서에 대한 마니교의 비난은 무엇인가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의 마음에는 두가지 입장에 대한 저울질의 어려움을 겪게 되고 때로 판단 중지에 이르기까지 된것 같았습니다.

아직도 기독교 신앙을 변호하며 마니교 신앙을 저주할 생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당시 그에게 있어서 기독교 신앙은 승리도 패배도 아니었습니다.

이제 저울추의 균형이 차츰기울어지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마니교의 사상에 심취하여 그리스도교를 비판하던 마음이 반대로 그리스도 신앙에근거하여 마니교르르 비판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돌아섰습니다.

그자신이 그토록 불변의 진리로 인식하고 있던 정신적 실체론(Spiritual Substance)도 더 이상 신방할수 없었습니다.

이세계와 모든 자연의 구조와 본질이 육체의 감각적 기능을 통하여 이해할수 있다는 사상과 모든 학파를 비롯한 철학자들의 주장도 그에겐 회의를 불러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그전까지는 공간속에 형태적으로 위치하며, 존재하지 않는것은 단순히 없는것으로 확정짓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에게 정신세계속에 형성된 형성이란 눈으로 확인할수 있는 궁극적 실체이어야 하며 모든 철학적 사상도 개념화 형상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이 마음속 깊은 내면에는 에피쿠로스적 쾌락주의가 스스로를 정당화 시켜주고 있었습니다.

육체의 쾌락이 있을때에 행복한 것이며, 죽음후에는 고통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진정한 절제가 따를때 참행복이 있다는 사실을 이론적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생활은 매우 방만하였습니다.

행복이란 영혼안에 진리의 원천인 신을 소유하는것입니다.

지혜란 신의 아들입니다.

자신들은 신을 얻은것이 아니라, 신을 구하고 있기 때문에 지혜롭거나 행복하다고 간주할수 없다고 결론지었습니다.

어거스틴의 회심은 두가지의 과정을 겪었는데, 하나는 지적인 것이었으며, 다른하나는 의지적인 것이었습니다.

첫번째 회심은 물질주의적 사고와 선악의 문제였습니다.

두번째 회심은 의지적인것으로 세상의 부와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는것이었습니다.

진리를 깨닫고도 습관때문에 차마 뿌리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그이 영혼속 깊숙이 숨겨져 있던 그 자신의 비참한 모습이 눈앞에 스크린처럼 드러나고, 폭우같은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하였고, 그는 통곡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홀로 한없이 통곡하고 싶어 알리피우스의 곁을 떠나 정원의 호젓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왜 나의 더러운 생활을 이 순간에 깨뜻이 끝내지 못합니까?"라고 애통하여 울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이웃집에서 한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소년의 음성인지 소녀의 음성인지 구별은 안갔지만 그 노래의 가사는 "집어서 읽어라, 집어서 읽어라"라고 들렸습니다.

그는 알피리우스가 앉았던 장소에 사도바울의 서신을 펴들고 제일 먼져 눈에 띠는 곳을 읽었습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로마서13:13-14]

이는 광명한 확신의 빛으로 어거스틴의 폐부를 찌르는듯이 박혀 들어갔습니다.

이제는 더이상 버틸수가 없었습니다

선택의 폭풍은 지나가고 은밀한 정적과 평화가 그의 온몸에 가득하였습니다.

그의 오랜 방황이 종착역을 찾는 순간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회의함으로 존재한다"

근대철학의 시발자인 데카르트는 존재론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존재를 사람들에게 조명해 주시기는 하지만, 신은 무한하시기에 우리의 한정된 마음을 가지고는 그 전제를 인지할수 없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성어거스틴의 고백록

제2권. 열여섯 살 되던 때의 청년기 : 배나무 밑에서

제1권에서 어거스틴은 유아기 시절의 원죄와 소년기 시절의 자범죄에 대한 고백을 다루었다면, 제2권에서는 청년기 시절에 육체의 쾌락에 빠졌던 것과 배를 훔쳐 먹었던 일들을 회상하며 죄에 관한 동기와 결과 등 보다 더 구체적인 것들을 조명하고 있다.

어거스틴은 청년기의 죄에 대해 구체적으로 다루기 전, 죄를 고백하는 이유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함임을 밝힌 후, 지난 날 하나님을 떠나 헷갈림의 생활에 빠져있던 자신을 하나님 안에 거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또한, 그는 청년기 때 육체의 정욕과 순수한 사랑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했음을 고백하면서 그 시절 방탕한 생활을 접을 수 있도록 부모나 누군가가 결혼으로 인도했더라면 방황기를 빨리 마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내비친다. 동시에 하나님 안에서 죄를 짓지 아니하는 삶보다 세상적인 성공(뛰어난 수사학자)을 바랐던 부모의 관심과 관련시켜 하나님을 떠나 살았던 자신을 돌이켜 줄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다. 동시에 어머니를 통해 음행하지 말라고 하셨던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하며 쾌감과 친구들로부터의 찬사를 사랑하여 육체의 쾌락에 빠져있던 자기의 죄를 자백한다. 뒤이어 어거스틴은 배 도둑질을 했던 일들을 고백하며, 도둑질 자체 즉 죄 자체를 즐겼던 습성을 이야기 한다. 이러한 짓은 소년기 때부터 하지 말라는 것을 재미있어하던 자범죄의 연장선상에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어거스틴에게 있어 죄를 짓게 되는 동기는 무분별한 사랑, 즉 사랑의 질서의 왜곡이다. 그는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로서 모두 나름의 매력을 갖고 있고 사랑할 만하다고 본다. 그런데 그에게 있어서, 명심해야 할 것은 피조물을 향한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구분이다. 하층에 속한 것들(수단)과 하나님, 하나님의 진리와 법도(목적) 사이에서 인간은 수단과 목적을 구분하여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가치가 전도되어, 하나님을 떠나 피조물을 사랑하게 된다면 그 헛된 사랑은 범행(죄)을 짓게하는 동기가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마치 하와가 아담과 함께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 범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동료들과 함께 배 도둑질했던 것을 기억하며 죄의 사회성, 집단성, 연대성을 이야기한다.

어거스틴은 인간의 교만이 하나님을 흉내 내거나 모방하게 만든다고 본다. 그 예로 낭비나 탐욕, 질투나 분노와 같은 것들을 이야기한다. 여기서 어거스틴은 인간이 아무리 하나님을 모방하려 들고 자기가 원하는 세상의 것들을 차지하려고 하지만, 그 모든 것의 주권과 온전함은 오로지 하나님에게만 존재함을 고백한다. 그는 이러한 잘못된 모방은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 밖에서 순수하고 깨끗한 것을 찾으려고 하는 것으로, 바로 이와 같은 외도가 사람을 불안과 파멸로 이끄는 죄임을 고백한다.

어거스틴은 이러한 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용서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 감사하면서 마지막 결론에서는 역시 하나님을 향해, 그리고 가장 선하신 하나님 안에서 살 때 진정한 기쁨을 느끼고 잘 살 수 있다는 어거스틴 고백록의 중심사상을 고백한다.

그는 고백록을 읽는 나로 하여금 나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어두운 죄와 나의 교만한 삶을 통해 하나님께 무릎 꿇도록 만들었다. 그 시간 하나님을 떠나 감각적인 것들, 분화되고 분열된 헷갈림의 사회와 문화에 휩쓸려 불안과 두려움에 떨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비록 어쩔 수 없는 죄인이지만, 어거스틴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던 하나님은 나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을 향해, 그리고 하나님 안에 살고픈 나에게도 용서의 은혜와 자비를 베푸심을 믿는다. 오늘도 어김없이 모든 선한 것들 위에 계신 하나님 안에 온전히 거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성어거스틴의 고백록

제3권 카르타고의 학생 시절과 마니교

어거스틴은 카르타고에서 빠져있던 육신의 정욕은 내면의 배고픔을 채워주기는 커녕 괴로움을 수반하는 것이라고 밝힌다. 그리고 연극관람을 통해(안목의 정욕) 슬픔과 동정하기를 사랑하며(진정한 사랑의 대상이 아님) 자기 감정의 표면을 긁기를 바랐던 것은 오히려 자기의 내면을 썩게하는 행동이었음을 고백한다. 또한 수사학에서의 뛰어난 재능을 남들에게 드러내기를 즐겨했고(교만) 난폭한 이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던(난폭한 행위를 하지는 않았다) 자기를 고발한다.

하지만, 어거스틴은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라는 책을 통해 앞서 추구했던 정욕들과 자랑이 헛된 것임을 깨닫고 지혜 그 자체, 즉 진리를 추구하는데 관심을 갖게 된다. 이것은 지적 회심으로서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어거스틴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이 씌여진 성서를 통해 진리를 찾고자 했으나, 그 당시 본인은 교만하여 성서의 뜻을 헤아리기는 부족했으며 성서의 문체를 쉬이 여기고 성서를 멀리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어거스틴이 관심을 갖게 된 것이 바로 마니교이다. 그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던 마니교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진리에로 향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살았던 날들을 후회하고 마니교를 반박한다. 마니교는 물질적 존재 이외에 참 존재인 다른 실체를 모르는 종교로 진리(선)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악(선의 결핍)의 종교라고 밝힌다.

어거스틴은 마니교를 반박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주신 진정한 내적 정의(본질은 변하지 않으나 시간과 장소, 행위자의 동기에 따라 적용되는 정의)와 인간의 법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의 필요성, 그리고 인간의 어떠한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과 인간의 판단은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이야기한다. 종합적으로,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법 아래에 정해진 세상의 정의와 법을 따름과 동시에 이러한 것들은 상황에 따라 달리 해석되어야 함을 지적하고 있다.

끝으로 어거스틴은 어머니가 그의 회심을 확신할 수 있던 2가지의 근거, 즉 어머니의 꿈(잣대 위에서 만난 젊은 청년)과 어느 감독으로부터의 충고(이렇게 흘리는 눈물의 자식이 망할 리 없습니다)에 대한 회상을 하면서, 하나님 음성의 확신을 이야기하며 마친다.

<느낌> 청년기에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빠져 있던 어거스틴의 모습은 지금의 나와 너무도 흡사하다. 나도 하루하루를 쾌락과 감정적인 동요와 세상적인 평가에 빠져 허덕이고 있다. 그러나 어거스틴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나에게 바라시는 것이 영원한 진리요, 전능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유는, 최고의 사랑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을 사랑할 때 비로소 인간은 질서 있는 생활과 참된 기쁨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어거스틴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셨던 어머니 모니카와 같이 나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시는 나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되새겨보았다. 동시에 내가 훗날 어머니가 되었을 때 내 아이가 하나님 안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눈물로 기도할 수 있는 하나님의 종이 되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질문> 어거스틴이 중요시 여겼던 것은 세상의 질서, 전체성이라고 보여집니다(“어떤 부분이든 전체와 일치되지 못하면 추하게 보입니다”라고 말한 부분/p.109-2째단락 2째줄). 자칫 이러한 말은 사람들로 하여금 어거스틴이 부분을 무시하는 전체주의에 옹호한다는 비판을 일으킬 수 있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만일, 어거스틴은 개인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사람이라고 비판받게 된다면 과연 어거스틴은 무어라고 반박했을까요?

성어거스틴의 고백록

성어거스틴의 고백록

제4권 유혹하고 유혹받으며, 속고 속이는 삶

어거스틴은 열아홉 살 때부터 스물여덟 살 때까지 학예라고 부르는 학문과 마니교에 빠져 유혹하고 유혹받거나 속고 속이는 생활을 한다. 수사학 교수였던 어거스틴은 명성을 얻기를 소망했던 사람이다. 그러면서 어거스틴은 친하게 지내던 총독과 절친한 벗 네브리디우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점성술, 즉 속임수에 빠져 생활했다고 고백한다.

그러던 중 고향의 친한 벗의 죽음을 맞게 된다. 어거스틴은 친구의 죽음으로 한동안 슬픔에 빠져 살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어떤 사람이든지 유한한 것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았을 때 결과적으로 남는 것은 오로지 불행과 슬픔뿐이라는 깨달음을 이야기한다. 따라서 우리는 불변하는 하나님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며, 우리의 안식할 자리로 여겨야 한다. 그 때 비로소 인간에게는 진정한 평안과 사랑의 기쁨이 샘솟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친구가 죽었을 그 당시 마니교에 빠져있었고 실체하는 것과 감각의 대상을 쫓고 있던 터라 불변의 하나님께 자신의 짐을 내맡기지 못했다. 그 결과 시간의 경과와 새로운 친구들의 위로가 슬픔을 치유하는 역할을 했으나 후에는 그것 역시 진정한 치유를 가져오지 못함을 깨닫는다. 왜냐하면 그것들 역시도 변하는 하나의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은 하나님 안에서만 참된 안식과 행복을 만끽할 수 있다. 피조물과는 달리 전혀 과거로 지나가시지 않으시며, 언제나 한결같음으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사랑을 받으시는 하나님만이 사랑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 외에 피조물들을 사랑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안에서 인간이던 사물이던 모든 피조물들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밖에서 그것들을 흠모할 때 고통과 슬픔의 결과가 따르지만 하나님 안에서 그것들을 사랑할 때 우리에게는 기쁨과 행복이 주어진다. 즉 질서가 바로 잡혀 올바른 사랑의 지평이 열리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또한 다른 사람들의 판단과 평판에 휩쓸리어 누군가를 사랑하였던 자신을 돌아보며, 진리에 서지 못한 영혼들의 특성을 파악한다. 이런 영혼들은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으로부터 사랑 받기를 원하며,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전존재가 흔들려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진리 되신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있어 하나님을 인간에 빗대서 변화하는 존재로 이해-교만-하였던 지난날의 잘못을 고백한다.

4권을 읽으면서 사랑의 대상에 대한 어거스틴의 깊은 통찰을 엿볼 수 있었다. 그는 존재의 계층을 인정하면서 우리의 전존재는 하나님께로 향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최상에 계시고 불변하시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우리의 영혼은 잠잠하여지고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을 비롯한 나 자신까지도 하나님을 벗어나 인간과 물질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고, 그 대상의 변화와 소멸로 인해 헛된 슬픔에 사로잡히며 살고 있다. 우리는 허황된 사랑에 빠져 서로 유혹하며 속고 속이는 자기 왜곡의 길에 치닫게 되었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이러한 사랑은 우리의 영혼을 분열시키는 것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죄인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안에서 피조물들을 사랑해야함을 속히 깨달아야 한다. 그것만이 참된 사랑을 경험하고 주님의 빛을 받게 되는 길인 것이다.

제5권 마니교의 감독 파우스투스와 기독교의 감독 암브로시우스

어거스틴은 자신의 영혼으로 하여금 주님을 찬양하게 해달라는 기도로 5권을 시작한다. 뒤이어,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피할 수 없으며 누군가 주님을 버렸어도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피조물을 버리지 않으시며 그들을 창조하시고 재창조하시어 위안을 주신다고 고백한다.

어거스틴은 29세 때 카르타고로 마니교의 감독인 파우스투스가 왔던 일을 회상하면서 마니교와 자연철학자(천문학자)들의 학문을 비교한다. 이 둘 중에서 어거스틴은 철학자들의 이론이 훨씬 더 합리적이며 세계를 바로 인식하고 판단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철학자들은 세계를 관찰함에 있어 하나님과 자신들의 재능의 근원을 알지 못했고 주님께 자신들을 헌신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비판을 발전시켜 그는 참 행복은 창조주가 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mensura, humero, pondus)을 아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밝힌다.

어거스틴은 경건의 지혜를 모르고 마니 스스로 주님의 보혜사 성령이라고 거짓 증거하였던 마니와 더불어 마니교의 교리를 어리석은 것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그 당시 자연철학의 내용들과 불일치하는 마니교에 대한 의심이 생겼다고 한다. 어거스틴은 그러한 의심들을 마니교도들에게 털어놓고 함께 해결하기를 원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정확한 답변을 하지 못하면서 감독인 파우스투스가 모든 해답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 결과 그는 카르타고에 방문했던 파우스투스와의 토론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비록 언변과 화술에는 능통하나 그 내용에 있어서는 여느 마니교도들과 다를 바 없었던 파우스투스를 보고 실망한다. 그리고 어거스틴이 파우스투스에게 의심했던 여러 문제들을 털어 놓을 때마다 그의 무지와 겸손을 발견할 뿐이었다. 이에 따라 점점 어거스틴은 마니교에 대한 회의를 느끼게 된다.

그러던 중 그는 카르타고 학생들의 태도에 대한 회의로 인해 로마로 이적한 뒤 처음으로 겪었던 열병사건을 회고한다. 그리고 어거스틴은 로마에서 역시 마니교도들 및 성직자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되는데 이러한 관계가 나중에는 어거스틴이 마니교로부터 떠나려는데 걸림돌이 된다. 그 때, 어거스틴은 회의론을 이야기하던 아카데미파와 접촉하게 되면서 마니교에 대한 관심이 거의 사라진다.

어거스틴은 카르타고 학생들에게서 느꼈던 회의를 로마 학생들에게도 똑같이 느끼고 로마의 시장 추천을 통해 밀라노의 수사학 교사로 삶의 자리를 옯긴다. 그 때 드디어 어거스틴은 밀라노의 김독인 암브로시우스를 접촉한다. 그는 처음에 암브로시우스의 친절함에 깊은 호감을 느꼈으나 점차 그의 우의적인 설교 내용과 그 형식에 빠져들었다. 기독교에게서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던 어거스틴은 암브로시우스를 통해 확실한 구원의 교리를 들을 수 있었고 이에 따라 기독교에 관심을 갖는다. 어거스틴은 점차 암브로시우스의 도움과 아카데미파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회의 예비 신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어거스틴은 지난 날 마니교에서 기독교로 옮기게 된 경유를 회상하면서 하나님의 은밀한 인도하심과 그분의 섭리를 강조한다. 카르타고에서 로마로, 로마에서 밀라노로 장소를 옮긴 것은 자신을 올바른 잣대 위에 세우시려던 하나님의 계획하심 가운데 일어난 일임을 고백한다. 또한 로마에서 겪었던 열병이 치료된 일도 하나님의 은혜로 영광을 돌리고 있다. 5권을 읽으면서 어거스틴의 이러한 고백들이 지난 날 나의 삶에도 역시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인도하심에 달려있음을...

(질문)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강조하다보면, 자칫 결정론/운명론에 빠질 수 있다고 보는데 어거스틴은 운명론적 입장을 지닌 사람이었나요?

제6권 기독교 신앙은 알았으나 세상의 욕망 때문에 고민함

밀라노에 찾아온 어머니 모니카는 어거스틴이 마니교를 버리고 교회에 나가게 된 것을 보고 기뻐한다. 모니카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를 온전한 주의 사람으로 이루어 주실 것을 굳게 믿는다고 고백한다. 모니카는 어거스틴을 변화시킨 암브로시우스를 존경하였기 때문에, 암브로시우스가 아프리카에서 제사를 지내던 관습을 금하자 순종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에 충성한다.

어거스틴은 마니교를 버리는데 암브로시우스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여전히 진리에 대한 많은 궁금증들이 어거스틴을 사로잡는다. 어거스틴은 암브로시우스와의 대화를 통해 그 답을 찾기를 원한다. 하지만 암브로시우스는 교회 사역으로 너무나 바빴기 때문에 좀처럼 그와의 대화는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따라서 어거스틴은 단지 주일 말씀을 통해 암브로시우스가 성서를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해 주는 것을 보고 성서를 새롭게 바라보는 눈을 갖게 된다. 즉 성서는 문자 그 자체로 볼 것이 아니라 문자 너머에 있는 진정한 영적인 의미를 발견해야 함을 깨닫게 된다. 또한, 성서를 바르게 보기 위해서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믿음을 통해 성서를 바라볼 때, 성서는 합리적인 하나님의 말씀이 되고 진리를 발견하게 해 주는 통로가 된다고 고백한다.

그 당시 어거스틴은 여전히 헛된 행복을 추구하였다. 그것은 명예와 돈과 결혼으로, 어거스틴은 그러한 세상의 행복들을 점점 쫓을수록 아주 쓰디쓴 곤경을 당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어거스틴은 그러한 옛일을 바탕으로 하여 행복의 목적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른 엄청난 차이를 이야기한다.

이제 그는 알리피우스와 네브리디우스라는 친구의 삶과 그들과의 대화를 고백하면서 영혼을 파멸로 이끌고 하나님을 떠나게 하는 습관의 폭력을 다룬다. 알리피우스는 투사 경기를 즐기는 습관에 빠졌던 경험이 있다. 그가 한 때 투사 경기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나, 그 습관을 버리는데 있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힘을 믿었기 때문에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고 말한다. 또한, 친구들과의 대화 가운데 진리와 지혜를 추구했으나 결국은 세상의 것들을 버리지 못했던 것을 이야기하면서. 그것들을 버리지 못한 이유는 확실한 진리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고백한다.

그 뒤, 결혼을 위해 동거녀를 떠나 보내야했던 일, 약혼녀와의 결혼을 기다리는 2년 동안에도 습관적인 정욕을 이기 못하여 다른 여자를 취했던 일들이 나온다. 앞에서 알리피우스가 투사 경기를 좋아하던 습관의 폭력에 사로잡혔던 것처럼 어거스틴 역시 정욕의 습관의 폭력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마지막에는 또 다시 친구들과의 대화를 언급하면서, 죽음과 심판을 두려워했던 일과 어두워진 눈으로 인하여 사랑의 목적으로 삼았어야 할 덕과 미의 빛을 식별하기 보다는 친구를 사랑하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삼았던 것을 회고한다. 이렇게 하나님을 떠나 살았던 자신의 불행한 과거를 빗대어 하나님 안에서 평온한 안식을 주시기 위해 죄 많은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을 고백한다.

나는 행복을 어디에서 찾고 있는가? 나를 계속하여 죄짓게 만드는 습관은 무엇인가? 나의 영혼은 어디를 안식의 장소로 찾고 있는가? 이것들은 내 실존에 대한 물음으로 다가왔다. 나 역시 하나님 안에 거하지 못했던 때의 어거스틴처럼 내 행복의 기준을 세상의 가치에 두었고 헛된 가치를 추구하다 허망함에 쓰러지곤 한다. 그 쓰러짐에 나는 여러번 쓰디쓴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세상의 것을 성취하고 싶은 욕망들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눈 앞에 보이는 것들을, 지금까지 세상의 것을 좋아했던 습관들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런 나에게 어거스틴은 하나님을 바라볼 것을 요청하고 있다. 나의 열망들을 하나님께로 드릴 때, 초월자이지만 나와 함께 계시고 내 안에 존재하는 하나님께 내 전 존재를 맡길 때 나는 비로소 사라지지 않을 행복에 안착할 수 있을 것이다.

성어거스틴의 고백록

제7권 어거스틴의 지적 회심

어거스틴은 장년기의 일들을 회상한다. 먼저, 그는 철학 공부를 통해 하나님이 인간의 형체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 어떤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물체와 같은 존재로 생각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은 불멸하는 존재요, 침해될 수 없는 존재요, 불변하는 존재로서 그렇지 못한 존재들보다 좋다고 고백한다. 그 이후, 악신의 존재를 이야기하는 마니교의 비논리성을 비판하면서 강력히 마니교를 거부한다. 악에 대한 마니교의 이해를 거부한 어거스틴은 악은 인간 자신의 의지와 인간이 당하는 고통, 잘못에 대한 벌로 이해한다. 어거스틴에게 끊임없이 던져지는 물음은, 선하신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은 모두 선한 것인데 그렇다면 악이 어디 있을까라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들을 던지면서도 서서히 어거스틴의 마음에는 신앙이 자리 잡는다. 그는 이즈음 피르미누스라는 사람을 만나면서 미래의 사건을 미리 알아내는 기술이란 없으며 혹 맞더라도 그것은 우연의 일치라는 사실을 알고 점성술의 오류에서 벗어난다. 이로 인해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보살피시고 심판하신다는 것을 깨닫는다.

어거스틴은 존재의 계층을 알고 하나님의 심판하심을 깨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악의 원인에 대한 질문을 풀지 못했다. 그러한 가운데 어거스틴은 플라톤 철학의 책들을 접하게 되는데 그 책에는 어느 정도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나타나 있으나, 성서에 기록된 겸손을 행하신 하나님은 없었다고 말한다. 아무튼 어거스틴은 플라톤 주의 책을 통해 주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자신의 영혼 안에서 변하지 않는 신적인 빛을 보게 된다. 그에 따라 존재의 계층은 더욱 확실해졌고 그에 따라 하나님께 의지하고 사는 것이 선한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본래 선한 것으로, 악은 실체가 아니라 선한 것의 결핍이라는 답을 얻는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창조된 모든 것에는 계층이 있고, 악은 사실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창조된 세계는 함께 화합해서 조화되어 있어 좋다. 따라서 하나님이 창조한 어떤 것이라도 싫어하는 자들이 있으면 그들의 마음은 온전치 못하다. 더불어 그는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과 모든 것은 하나님 안에서 유한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던 중 그는 이성을 통해 스스로 계신 존재자에 도달한 신비체험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는 육체의 정욕의 습관과 그의 약함으로 인해 계속해서 하나님을 즐기지 못했다.

그는 하나님과 인간의 중보자이신 인간 예수 그리스도를 받들어 모실 때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즐길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어거스틴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해 초기에는 예수의 인성의 탁월성만을 주장한 오류에 빠졌으나 이후에 그 이해를 수정하였다고 밝힌다. 어거스틴은 다시 한번 플라톤주의의 길과 기독교의 길의 차이를 언급하면서 그리스도의 겸손과 사랑이 적힌 성서, 그 중에서도 사도 바울의 책을 붙들었음을 이야기한다. 성서를 통해 어거스틴은 하나님 찬양과 온유와 겸손, 가장 중요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했음을 고백한다.

창조된 모든 것은 선하며 악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어거스틴의 이해는 성서적이며 바람직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이러한 이해는,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아야한다는 것을 실천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돕는다. 이것은 인간 사이의 사랑을 뛰어넘어 자연까지도 사랑으로 돌볼 것을 선포하는 생태계 보존으로까지 확장될 수 있다고 본다. 나와 너, 그리고 그것들(창조된 모든 피조물)과의 조화를 받아들이고 지키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일구는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거스틴의 세례와 모니카의 죽음

8권에서 회심을 한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종으로, 이전의 허망한 것들을 버리고 오로지 하나님을 쫓으며 하나님 안에 거할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한다. 그리고 혀를 사용하여 거짓말을 일삼았던 교수직을 그만두고 싶어 한다. 그 때 마침, 어거스틴은 폐가 약해져 호흡을 하기가 힘들게 되는데, 어거스틴은 학교를 그만 둘 수 있는 정당한 이유가 생겼음을 다행으로 여긴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방학이 될 때까지 인내하기로 결심한다.

곧이어, 어거스틴 일행에게 별장을 빌려 준 베레쿤두스의 회심과 죽음, 네브리디우스의 회심을 언급한다. 어거스틴은 그것을 대단히 기쁘게 여기며, 베레쿤두스의 죽음에 깊은 애도와 기도를 올린다. 드디어 방학이 되자 어거스틴과 일행은 카씨키아쿰에 있는 베레쿤두스의 별장으로 간다. 거기서 친구들과 학문적인 대화를 나누고 하나님께 향한 자신의 독백을 정리하여 책을 쓴 것과, 그 곳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정신세계와 마음을 다듬으셨던 것, 그리고 알리피우스를 회심시키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다. 그러면서 참 행복은 불변하시는 하나님 안에서만 누릴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자기가 치통을 겪었다가 중보기도를 통해 치유받은 경험을 이야기 하면서 영과 육을 치유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한다.

어거스틴은 방학이 끝나자 수사학 교수직을 그만둔다. 그리고 세례를 받기 위해 다시 밀라노로 온다. 어거스틴은 아들 아데오다투스와 알리피우스와 함께 세례를 받고 과거의 그릇된 생활에 대한 불안이 전부 사라졌음을 경험한다. 그리고 밀라노에서 찬송이 불려지기 시작한 유래-유스티나에 의한 암브로시우스의 박해를 막기 위해 교인들이 모여 철야를 하던 중, 동방교회를 본받아 교인들이 찬송을 부름-를 이야기한다. 또한, 암브로시우스의 꿈에 의해 게르바시우스와 프로타시우스의 유골을 발견하여 사람들이 병고침을 받고 소경이 눈을 뜨는 기적이 체험되면서 암브로시우스에 대한 박해가 멈춘 일을 회고한다.

이제는,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에 대한 회상이 계속 이어진다. 모니카는 어린 시절, 술을 조금씩 맛보다가 나중에는 술을 좋아하는 습관을 지니게 되었는데, 하녀의 질타를 통해 그 습관을 단절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모니카는 남편에게 순종하면서도 지혜있게 행동하여 화목한 부부로 남았음을 말한다. 어거스틴과 그 일행이 모니카와 함께 아프리카로 돌아가던 중, 오스티아에서 어거스틴은 모니카와 함께 신비체험을 하게 된다. 하나님의 지혜와 접촉한 것은 비록 매우 짧은 순간 이었지만 하나님을 직접 대면한 것으로 매우 강력한 것이었다. 이후, 모니카는 열병으로 눕게 된다. 그녀는 원래 고향에 묻히기를 원했던 사람이었지만, 믿음이 성장하여 임종에 이르렀을 때는 어디에 묻히던 상관이 없고 다만 자식들에게 자신을 주님의 제단에서 기억해주기를 요청한다. 이 말을 남기고 모니카는 세상을 뜬다. 어거스틴은 겉으로는 태연했으나 그 마음에는 이중적인 슬픔으로 괴로워했으며 결국 홀로 울었던 일을 회상한다. 이어서, 하나님께 어머니와 아버지를 긍휼히 여겨주실 것을 간절히 기도하면서 9권을 마친다.

어거스틴은 9권을 쓰는 내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고백한다. 즉 자신이 회심하게 된 것과 세례를 받게 된 것, 어머니와 함께 했던 신비체험, 어머니의 죽기까지의 과정 등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계획하심에 따른 것임을 고백한다. 어거스틴에게 그러하셨던 것처럼, 나의 삶에도 은밀히 개입하시어 내 삶을 이끄시는 주님의 은혜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9권을 읽는 동안, 어거스틴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행복과 기쁨을 누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과연 그 기쁨이란 어떤 것일까...? 내가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인지 아직 그렇게 깊은 체험은 하지 못했다. 여전히 돈과 명예와 욕망을 채우는 일들이 더 흥미롭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행복을 누리게 될 그 날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조금은 막막하지만, 주님께서 내 마음에 주신 인내를 가지고 주의 말씀을 묵상하고 진리를 추구하면서 나를 온전히 변화시키실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할 것이다. 그 때, 주님 안에서 누리는 참된 기쁨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기를 소망한다.

어거스틴

11-1.생애

아우구스티누스라고도 불리는 어거스틴(Aurelius Augustinus, 354∼430)은 고대 교회가 낳은 가장 탁월한 신학자, 교회 지도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로마 제국 말기의 라틴 교부로서 북아프리카의 누미디아(지금의 알제리)의 타가스테(Tagaste)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파트리키우스는 시의원이었는데 성질이 사납고 방종한 인물로서 거의 세상을 떠날 때까지 신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 모니카(Monica)는 독실한 신자였다. 그녀는 어거스틴을 어릴 때부터 열과 성을 다하여 신앙적으로 양육했다.

청소년기에 어거스틴은 카르타고 등에서 수사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라틴의 문학과 철학을 공부하고자 했다. 그러나 대도시의 퇴폐한 풍속에 물이 들어 품행은 그리 좋지 못하게 되었고 신앙도 잃고 말았다. 어거스틴은 17세 때부터 한 여자와 약 14년간 동거 생활을 했고 한 아들을 낳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감각적 본성에 일찍 눈뜬 것처럼 지성적으로도 일찍 깨었다. 19세에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를 읽고 감동을 받았고 그 후에 진리 탐구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는 처음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공부했으나 그에게서 지적 만족을 얻지 못하자 당시 유행하던 동방(페르시아)의 신비 종교인 마니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기독교에도 관심을 가졌으나 성서의 소박한 문체나 가톨릭 교회의 보수성에 만족하지 못하고 빛과 어둠이라는 이원론(二元論)을 주장하는 마니교의 합리주의와 미적 종교성에 이끌린 것이다. 마니교는 기독교와 이교의 사상을 혼합한 이원론 사상이었다. 어거스틴은 8년간 마니교에 몰두했으며 그 중에 마니교적인 미학서 《미와 적합》을 썼다. 그러나 마니교에 깊이 들어가자 거기에 내재해 있는 지적(知的) 도덕적 불합리를 보게 되었고 마침내 마니교에 회의를 느끼게 되었다.

마침내 어거스틴은 383년 로마에서 신아카데미아학파의 회의주의를 접하게 되어 마니교를 떠나게 되었다. 그는 친구들의 권유로 384년에 밀라노로 가서 수사학 교사가 되었다. 거기서 그는 플라톤과 신플라톤주의자들의 책을 많이 읽었으며 그러던 중 진리의 실재(實在)를 깨닫게 되었다. 그가 주로 읽은 책은 신플라톤주의의 학자 플로티누스의 작품이었는데 386년에는 [불변의 빛]을 보았다는 체험 곧 신플라톤주의의 신비적 황홀경 체험을 경험하기도 했다. 이것은 그로 하여금 회의주의에서 벗어나게 하는데 도움을 주었고 또한 마니교의 물질주의에서 벗어나 영적 실재에 대한 확신을 얻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밀라노에서 어거스틴은 여전히 방탕한 생활을 했다. 이 무렵이 그의 가장 암흑기였다. 그러던 중 함께 간 어머니의 기도로 인해 모종의 변화의 기회를 얻었는데 그것은 암브로시우스를 만나게 된 것이었다. 어머니의 노력으로 인해 어거스틴은 차츰 기독교 설교자인 암브로시우스의 인격과 메시지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는 스스로 바울의 편지에 관해 관심을 갖고 연구를 하게 되었으며 안토니우스의 전기를 읽기도 했다. 그런 중에 그는 점점 빛을 향하여 인도되었으며 마침내 근본적인 회심에 이르게 되었다.

그의 회심에는 특히 빅토리누스(Victorinus)로부터의 영향이 컸다. 빅토리누스는 로마에 살고 있는 신플라톤 학파의 유명한 학자였는데 말년에 기독교를 믿고 신자가 된 인물이다. 그는 신플라톤학파의 철학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었고 또한 바울의 사상도 깊이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었으므로 어거스틴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회심 후 그는 교수직을 그만두고 밀라노 교외의 산장에서 토론과 명상을 하면서 《독어록(獨語錄)》 등 철학적 대화편을 저술했다.

그 무렵 어거스틴은 아프리카에서 여행하고 온 폰티티아누스(Pontitianus)라는 사람에게서 애굽의 수도원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자신의 초라하고 타락한 생활과 너무도 차이가 나는 새로운 삶이었기 때문이다. 어느날 그는 자신의 삶에 대한 회의로 갈등과 번민에 사로잡혀 정원 풀밭에 누워있었는데 그때 마침 담 너머에서 아이들의 민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내용은 "취하여, 읽으라(Tole, lege)"는 것이었다. 그는 그것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알아듣고 즉시 일어나 성경을 집어 읽었는데 그 부분은 로마서 13:13,14이었다. 곧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투쟁과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는 말씀이었다. 이 말씀을 읽고 어거스틴은 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386년 늦은 여름에 맞은 이 체험으로 말미암아 어거스틴은 지금까지 찾지 못했던 마음의 평화를 찾았고 죄악을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느끼게 되었다.

다음해인 387년 그의 나이 34세 때 어거스틴은 암브로시우스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그는 밀라노를 떠나 고향 아프리카의 타가스테로 돌아갔다. 가는 중에 그는 어머니를 여의었다. 어거스틴은 고향에서 수도원을 세우고자 했다. 그 무렵 그는 아들을 잃고 실의에 잠겼으나 영적 소망으로 위로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수도원 건립 계획의 추진을 위해 힙포에 갔는데(391년) 거기서 그는 반 강제로 안수를 받아 성직자가 되었으며 4년 뒤 발레리우스 감독이 죽자 그의 뒤를 이어 그곳 감독이 되었다.(395년)

그는 북아프리카에서는 처음으로 힙포에 수도원을 세웠고 거기서 많은 성직자와 수도사를 배출했다. 어거스틴은 그가 관할하는 교회들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했고 이웃에 대해 사랑의 손길을 많이 폈으며, 말씀 증거와 새 신자를 위한 교육에 힘을 썼다. 뿐만 아니라 어거스틴은 계속 글을 써서 당시 기독교회의 신앙적 문제를 정통적 입장에서 잘 변증하였다. 특히 기독교회의 이단 종파에 대한 그의 변증과 변호는 유명했다. 그는 게르만족인 반달족이 힙포를 포위했을 때인 430년 8월 28일에 76세로 세상을 떠났다.

어거스틴은 다방면의 성격과 능력을 소유한 비범한 사람이었다. 그는 바울과 같은 회심의 체험을 가지고 가장 바울을 잘 이해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한 번 매료되었던 플라톤 철학의 흐름과 마니교의 색채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점도 있다. 그의 신학 사상은 이레니우스, 터툴리안, 빅토리아누스, 암브로시우스 등의 서방 신학자들의 사상으로 영향을 받아서 세워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또한 동방의 신학자들로부터도 영향을 받았다. 이처럼 그는 라틴 신학을 집대성하고 장래에 일어날 여러 가지 사상의 근원을 마련하였다. 그의 사상은 포용하는 바가 크므로 자연히 모순도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사상은 한편으로는 대단히 개인적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단체적이기도 했다.

민중들과의 접촉을 통한 어거스틴의 사색은 성경의 문구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내어 전달하려고 하는 '해석학적'인 방법을 취함으로써 더욱 깊어져 갔다. 그 동안 마니교도와의 논쟁, 타락한 성직자들을 인정하지 않는 도나투스파와의 논쟁, 인간의 자유 의지로 죄 없이 생활할 수 있다고 믿는 펠라기우스파와 같은 이단과 벌인 말년의 논쟁 및 로마 원로원의 이교주의(異敎主義)에 맞선 변증(辨證) 등을 계기로 그는 많은 신학적·철학적 작품을 발표하였다.

11-2.사상

1)신론

어거스틴의 신론의 주요 사상은 신을 '인격적 체험의 대상'으로 믿는 것이었다. 언제나 사람에게 참 만족을 줄 수 있고 선을 주실 수 있는 분과 인격적 관계를 맺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신을 철학적으로 생각할 때는 신플라톤학파의 용어를 사용했다. "신은 피조물과 구별되시는 순수, 절대자시요 모든 실존의 기반, 근원이다." 이런 관념에서 그는 삼위일체를 다룰 때도 신의 단일성을 강조했다. 그의 대작 {삼위일체론}(On the Trinity)은 이후 서방 사상을 결정적으로 지배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한 하나님이시다. 그는 자존하시며, 전지 전능하시고, 선하시고, 의롭고, 자비하시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지으신 분이시다." "성부 성자 성령은 한 본질에 속해 계시며 창조주 하나님과 전능하신 삼위 일체는 구별될 수 없다." "삼신(三神)도 아니고 삼선(三善)도 아니고 오직 선하시고 전능하신 삼위일체가 구별될 수 없는 상태로 하나로 일하신다." 터툴리안이나 오리겐, 아타나시우스는 성자와 성령이 성부께 종속된다고 가르쳤으나 어거스틴은 신의 단일성을 강조하여 삼위의 완전 동등함을 가르쳤다. "삼위는 너무도 동등하사 신성에 있어서 성부는 성자보다 더 크시지 않으실 뿐 아니라 성부 성자의 합체도 성령보다 더 크지 않으시다." 그는 삼위(三位) 곧 위격(位格, person)이라는 말보다 더 좋은 표현이 없으므로 그 용어를 쓴다고 했다. 그는 "삼위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인간의 용어는 너무 빈약하여 그것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을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수는 없어서 쓴다"고 말했다. 그는 여러 가지 비교법을 써서 삼위일체를 설명하려고 했는데 그 예로 기억(memory), 이해(understanding), 의지(will)로 표현한 것이나 lover, loved, love 등으로 표현한 것이 있다.

2)그리스도론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두 성품을 똑 같이 강조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요 참 사람이다. 온 세계보다 먼저 계신 하나님이시요 우리 세상의 사람이시다.....그러므로 그가 신(神)이신 점에서는 그와 아버지와 하나요 그가 사람이신 점에서는 그보다 아버지가 더 크시다.....그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니 그를 통해서만 죄가 용서된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서 그는 일관성 있는 분명한 설명 없이 단지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께 드린 희생 제물이며, 하나님의 택한 백성의 형벌을 대신 받으신 것이고, 죄악의 세력에서 해방시켜 자유를 주기 위한 대속물이라고 했다.

3)은혜론

어거스틴에 의하면 사람은 선하고 바르게 창조되었고 자유 의지를 가졌으며 범죄치 않고 영생할 가능성을 가졌기 때문에 그 본성에 아무 충돌이 없고 행복하게 하나님과 교제하였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로 이런 상태에서 타락했는데 그 죄의 본질은 교만이고, 그 결과는 선(善)의 상실이었다. 하나님의 은혜는 박탈되고 그의 버림을 받은 영은 죽었다. 영의 지배에서 떠난 사람은 정욕(육신)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아담의 죄의 결과는 온 인류를 포괄했으며, 만일이 아담 안에서 죄인일 뿐 아니라 다 정욕에서 났기에 큰 죄인들이 되었다. 결국 온 인류는 갓난 아기마저도 멸망할 자식이요 하나님의 진노를 받은 자식이 되었다. 이처럼 어거스틴은 죄의 원인이 의지에 있음을 말하였고 아담의 죄는 유전된다고 하여 죄의 유전설(traducianism)을 취하였다.

죄가 유전되고 의지는 죄 때문에 속박을 당하게 되었으니 인간은 자기의 의지로 구원을 받을 수가 없게 되었다. 이런 죄의 절망 상태에서 은총은 구주밖에는 없으며, 구주밖에는 인간을 구한 이도, 구하는 이도, 구할 이도 없다. 구원의 은혜는 값없이 주어지는 구주의 선물이다. 그런데 이 은혜는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에게만 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가 형벌하시고 구원하실 자들을 '예정'하시는 것이다. 이 같은 그의 사상에서 예정론이 나타난다.

어거스틴의 은혜의 교리를 한 마디로 말한다면, 자유 의지를 상실한 원죄의 인간은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에 의해서만 속죄될 수 있으며, 인간의 행위와 공로는 무용지물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는 불가항력적이며 구원받을 자의 선택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지(예정)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4)교회론

그는 교회를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로 구분하였다. 전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곳이요, 후자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하였다. 그는 또한 교회에서만 성령이 부어주시는 참 사랑을 찾을 수 있다고 하며 카톨릭 교회를 높이 평가했다. 그는 '교리와 조직면에는 정통이지만 배교자들을 용납하고 그들의 성례 집행을 허락한 카톨릭 교회는 참 교회가 아니라'고 부정한 도나투스파에 대해 '교회의 일치를 원치 않는 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 자들이다. 그러므로 카톨릭 교회를 떠나서는 성령을 받을 수 없다고 보는 것이 옳다. 이단들이 받는 것은 다 카톨릭 일치가 주는 특별 은사인 모든 죄를 가리우는 사랑이다' 라고 말했다. 또 성례는 하나님의 일이요 사람의 일이 아니므로 그 집행자에게 효력이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여 타락한 사제로부터 받는 세례나 성찬이 유효함을 말했다. 이를 통해 그는 인격(영)과 분리된 의식(儀式)의 의미를 인정하였다. 즉 의식은 그 자체로서 효력이 있는 것으로 본 것이다. 그는 "성례는 카톨릭 교회밖에서 받은 것도 유효하나 그 결실은 카톨릭 교회 안에서만 가능하니 이유는 거기서만 교회가 증거하는 사랑 곧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요소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5)성례론

어거스틴은 성례에 교회의 모든 거룩한 관습과 의식을 포함시켰다. 성례는 거룩한 것들이 의미하는 내용을 볼 수 있도록 나타내는 표시이다. 그래서 그는 마귀를 쫓아내는 축사(逐邪), 안수, 결혼, 세례후보자들에게 주는 소금까지 성례로 보았다. 그리고 세례와 성만찬은 특별 성례로 보았다. 그는 교회는 성례로 결속된다고 했다. "종교가 가짜건 진짜건 신자들을 맬 성례전이나 눈에 보이는 상징의 띠의 역할 없이는 종교 단체를 이룰 수 없다."고 했다. 더구나 성례는 구원의 필수 조건이라 하여 "세례를 받지 않은 자나 성만찬에 참여치 못하는 자는 구원과 천국, 영생을 받을 수 없다"고 했다.

6)인간론

젊은 시절 어거스틴은 《독어록(獨語錄)》에서 하나님과 영혼 외에는 어떠한 것에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그때 그의 사상은 이미 고대 철학의 우주론적 관심에서 벗어나 인간학적 지평을 열고 있었다. 우주 속의 미소한 존재인 인간이 존재의 근원인 하나님과 그 은총에 대해 감사하고 찬양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인간 존재의 의미라고 하는 사상이 그의 철학의 근저를 이룬다. 또한 그는 인간을 정신과 육체로 나누어진 존재가 아니라 몸과 마음이 하나로 된 통일체로 파악하였다.

어거스틴은 {利用}(uti)과 {누림}(frui)이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인간은 끊임없이 행복을 추구하는데, 저서 {행복한 삶}에서 그는 '행복이란 오직 하나님을 누리는 데 있다'고 말했다. 《기독교 교의》제1권 첫머리에서 누림(frui)이란 '이용(uti)'과 관계 있다고 말했는데, 하나님을 '누린다'는 것은 하나님을 그 자체로서 존경하고 사랑하며 그 안에서 안식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이용한다'(우티)는 것은 事物을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다른 것을 위해 이용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이용이 아니라 누림의 유일한 대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이용하는 행위나, 이용에 그쳐야 할 하나님 외의 모든 사물을 누리는 행위는 도착적(倒錯的) 사랑에 빠진 것과 같다고 했다. 이 세상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면서도 이 세상을 적극 이용하는 그의 사상은 이렇게 탄생했다.

이러한 어거스틴의 사상은 대체로 명료하지만 모순적인 부분도 많다. 그것은 그의 사상이 당시의 교회 전통에다 그의 종교적 신플라톤 철학을 혼합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구원은 하나님이 그의 기뻐하시는 사람에게 은혜로 베푸시는 것이라는 예정론을 가르치는 한편 성례전 특권을 가진, 눈에 보이는 교회에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기도 했다. 그는 진정한 경건이란 하나님을 믿는 것과 하나님과 사랑의 인격적 관계를 가지는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율법적 수도원적 금욕주의도 적극 지지했다. 이런 점에서 중세기는 어거스틴을 넘지 못했다. 그의 학설의 모순들을 조화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후대의 여러 가지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11-3.저술

어거스틴의 저서는 매우 방대하다. 철학적·신학적 저술 외에 일상의 목회 활동에 기초한 많은 설교집, 《시편 강해》, 《요한복음 강해》와 같은 성경 주해와 이단이나 이교도들과의 논쟁적 변증서 및 편지들도 남아 있다. 그 중에서도 지금까지 자주 읽히고 있는 책은 다음과 같다.

①《독어록》(2권, 386∼387) : 초기의 대표적인 철학적 작품이다. "하나님과 나를 알고 싶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다" 라는 대화로 시작된다. 이 책은 그가 진리의 근본이라고 믿던 '하나님과 영혼에 대해 탐구한 책이다.

②《그리스도교 교의》(4권, 396∼427) : 성경의 내용을 발견하는 방법(1-3권)과 그것을 전달하는 방법(4권)으로서의 해석학적 방법이 서술되어 있다.

③《Confession, 참회록》(13권, 397∼400) : 가장 유명한 책으로서 자신의 경험을 고백한 글이다. 11-13권은 창세기 첫머리를 둘러싸고 미래의 삶을 논하였다.

④《삼위일체론》(15권, 400∼421) : 하나님의 삼위일체성(三位一體性)과 인간 영혼의 삼위일체성을 비교하였다. 1-7권은 삼위일체론의 전통적 교리를 그대로 설명하고 있고, 후반부인 8-15권은 믿음의 세계를 이성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데 이미 주어진 삼위일체론을 더 깊이 이해하려고 하고 있다.

⑤《Civitas Dei, 하나님의 도성》(22권, 412∼426) : 이 책은 어거스틴의 일생 일대의 대작으로서 412년에 쓰기 시작하여 14년 후에 완성되었는데 410년 야만인들이 침공하여 로마를 약탈함으로써 기독교의 도성 로마가 멸망의 위기에 처한 것을 보고 쓴 것이다. 어거스틴은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고찰하면서 결국 지상 나라를 망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다스리심)는 영구불변하다는 것을 변증하고 있다. 10권까지는 이교도에 대한 반론, 22권까지는 하나님의 나라와 지상 나라의 관계를 역사신학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어거스틴의 저술은 크게 다섯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성경 주석들이고, 둘째는 변증적 저술인데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도성이다. 셋째는 마니교, 도나투스파, 펠라기우스파 등의 교리에 대해 반박하는 논쟁적 변증서들이며, 넷째는 금욕적인 생활에 관한 것으로서 주로 독백과 명상으로 이루어진 책들이다. 다섯째는 자서전적인 책인데 그의 참회록 및 만년의 생애를 기록한 회상록과 270통의 서신이 있다. 이러한 방대한 저술에 대해 샤프는 이렇게 말했다. "어거스틴은 그의 풍부한 사상을 다 기록해 놓았다. 그가 이처럼 많은 저술을 한 것은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지식에 있어서 그는 오리겐이나 유세비우스, 제롬 등에 비해 떨어진다고 할 수 있지만 사상의 깊이와 풍성함에 있어서는 모든 헬라 및 라틴 교부들 중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다."

11-4.어거스틴의 잘못된 교회관

어거스틴은 서방 제국의 몰락을 보면서 자신의 유명한 책 {하나님의 도성}에서 "비록 지상 최대의 위대한 도시는 몰락될지라도 하나님의 도성은 영원하리라"고 말했다. 그러나 무엇이 하나님의 도성인가에 대한 견해에서 그는 잘못된 가르침을 낳고 말았는데 그것은 눈에 보이는 카톨릭 교회를 그 신국(神國)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오직 (카톨릭) 교회에 의해서만 그리고 교회의 성례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구세주의 손에서 구원을 빼앗아 인간의 손에 맡긴다는 것, 구세주와 죄인 사이에 인간이 만든 체계를 끼워 넣는다는 것은 복음과는 맞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친히 "내게 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어떤 사제나 교회도 그 사이에 끼어들 권한은 없다.

교회를 일치시키고자 하는 열망을 가진 어거스틴, 특히 교회가 하나로 일치되지 못하고 사소한 이유로도 분열되며 각색의 모양을 하고 있던 것에 대해 혐오하던 어거스틴은 거듭난 체험을 통하여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한 모든 성도들을 하나로 묶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실체를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지나치게 교회의 외형적 일치를 중시한 나머지 교회의 영적 생명력과 교회의 궁극적인 일치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는 각 지역 교회들이 그리스도 및 성령님과의 개별적이고 직접적인 관계를 통해 다른 교회들과 관계를 맺는다는 사실을 도외시하였다. 그는 교회가 성령 공동체임을 보지 못했다. 그 원인은 그가 교회도 세상 조직의 일부라고 보는 형식적이고 외형적인 교회관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며 또한 지나치게 눈에 보이는 일치를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도나투스파와의 논쟁에서 이런 글을 남겼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징벌이나 고통에 대한 두려움 飁문이 아니라 가르침에 의한 깨달음 때문에 이루어진다면 참으로 좋다. 그러나 가르침에 의해 더 좋은 사람이 만들어진다는 대의 명분 때문에 가르침을 거절하는 사람을 무시해도 좋다는 것이 아니다......베드로나 요한을 부르심같이 바울을 부르셔서 굴복시키기 위해 주님은 말씀(소리)만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눈을 멀게 하시는 방법도 사용하셨다. 그러나 교회는 잃어버린 양들을 찾기 위하여 강권적인 방법을 쓰지 않고 있다." 어거스틴의 이런 사상은 로마 교황으로 하여금 이교도였던 로마가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행했던 것과 유사한 잔혹한 박해를 교회들에게 행하도록 부추기고 독려했다. 비록 단순하고 정열적이며 온건한 기질의 소유자였지만 성경의 원리에 철저하지 못한 것 때문에, 그는 비록 선한 의도에서였다 할지라도 광범위하고 잔인한 박해 조직에 연루되게 되었던 것이다.

12. 펠라기우스 논쟁.

12-1.배경

동방 교회가 기독론에 대해 논쟁을 하고 있을 때 서방 교회는 죄와 구원 문제에 대해 논쟁을 했다. 그것은 라틴인들의 특성이 이론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문제보다 실제적인 문제에 더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헬라 교회는 主知的 성격을 띠었다. 종교는 하나님과 우주에 대해 옳은 지식을 가지고 이 지식 위에 세워지는 도덕이라고 보는 경향이 강했다. 인간의 현 상태에 관한 견해는 일반적으로 낙관적으로 기울었고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총에만 달린 것이 아니라 사람의 적극적인 반응에도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라틴 교회는 인성(人性)에 대해 그처럼 낙관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죄의 심각성에 대해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테르툴리아누스가 죄의 유전(遺傳)을 가르친 이후 암브로시우스나 힐라리우스 같은 학자들은 원죄의 관념을 기초로 하여 사람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구원이 전적으로 은혜에 의존한다고 주장할만큼 철저하지는 못했다. 그러던 것이 어거스틴 시대에 와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상이 분명하게 제시되었다. 이런 사상은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에서 더욱 분명하고 철저한 입장으로 확립되었다.

12-2.펠라기우스

펠라기우스는 영국인 수도사로서 5세기 초에 로마로 와서 도덕의 부패를 보고 이를 바로 잡기에 힘쓴 사람이다. 그는 성질이 온순하고 품행이 단정하고 지식이 많고 총명한 사람이어서 어거스틴조차 그의 인격을 인정했다. 그는 사람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보다 인간의 노력에 더 의존한다는 잘못된 주장을 했다. 그는 카르타고의 장로가 되려고 했으나 파울리누스의 반대로 되지 못하고 나중에 에베소의 장로가 되었는데 제자들에 의해 그의 학설이 널리 퍼져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431년 에베소에서 열렸던 세계 대회, 곧 네스토리우스 사상을 이단으로 정죄한 회의에서 펠라기우스의 사상 역시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12-3.하나님의 은혜와 자유 의지에 관한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논쟁

어거스틴은 생전에 펠라기우스(Pelagius)와 많은 논쟁을 벌였다. 평신도였던 그는 30세 경에 성경에 관한 잭을 저술하는 능력 있는 사람이었다. 펠라기우스는 일종의 개혁자였다. 신앙을 고백한 자들의 방탕하고 방종한 삶이 그로 하여금 인간의 책임과 자유 의지에 대해 강조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진리의 한쪽으로 너무 기울어졌다. 그는 인간의 책임에 대해 너무 강조한 나머지 인간의 자유 의지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지나치게 축소하고 말았다. 펠라기우스가 이런 주장을 한 것은 그가 어거스틴과 같이 인간의 죄와 무능에 대해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거스틴과 같은 깊은 영적 체험을 갖지 못했으므로 이 문제를 단지 원리적으로 해결하려는 경향을 보인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인간의 구원은 인간 자신의 '선으로 나아가려는 의지적 노력'에 의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어거스틴은 인류의 시조 아담은 본래 죽지 않아도 되도록 지음 받았지만 범죄로 인해 죽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펠라기우스는 '아담은 본래 죽을 인생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죽은 것이며 범죄 여부와 상관없이 죽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비록 아담이 범죄했지만 그 범죄는 아담 자신에게만 영향을 주는 것이며 인류 전체에는 무관하다고 말했으며, 아담의 죄는 죄의 성질 또는 도덕적 부패를 자손에게 유전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손들이 죄의 책임을 지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 그는 말하기를 '오늘의 인류는 아담이 처음 지음을 받았을 때와 같은 상태에 있으며 다만 죄의 유혹하는 힘이 강해졌을 뿐'이라고 했다.

그에 의하면 원죄란 없고 모든 사람의 죄는 자신의 행위의 결과였다. 그래서 펠라기우스는 {선택의 힘}과 {실제적 선택}과 {선택한 바를 실제로 행하는 것} 이 세 가지 중에서 첫째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지만, 둘째와 셋째는 (일단은 첫째 것에 의해 성립되기는 하지만) 선택의 주체가 사람이며 실행하는 것고 사람이라는 주장을 강하게 폈다.

또 어거스틴은 인간의 죄는 유전이 되므로 유아에게도 원죄가 있음을 주장했지만 펠라기우스는 어린 아이는 무죄의 상태서 태어난다고 말했다. 또 어거스틴은 인류의 죽음은 아담의 범죄와 죽음으로 인한 것이며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해 온 인류가 살아날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펠라기우스는 (인간에게 선을 택하여 실행할 능력이 있기 때문에) 율법도 복음과 같이 인류를 천국으로 인도한다고 주장했다. 또 펠라기우스는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시기 전에도 무죄한 자들이 있었다고 했다. 그는 유아 세례를 가르치긴 하였으나 카톨릭 교회들이 전통적으로 생각하는 바와 같이 그것이 중생의 수단이라고는 여기지 않았다. 그것은 단지 어린 아이를 은총의 상태로, 하나님의 나라로, 구원과 생명, 죄 씻음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세계로 한 걸음 나아가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그의 가르침은 카톨릭 교회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펠라기우스의 가르침에 반대한 어거스틴은 회중들 앞에서 150년 전 키프리안이 쓴 글, 곧 '어린 아이들도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세례를 받는다'는 부분을 인용하여 펠라기우스에게 교회의 교리와 관례로부터 벗어난 잘못된 가르침을 삼가라고 경고했다.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는 크게 논쟁을 벌였다. 그러나 펠라기우스의 주장은 널리 힘을 얻었기 때문에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한 회의가 소집되었다. 동방에서 온 사람들은 펠라기우스를 무죄라고 옹호하였고 서방에서 온 사람들은 그를 정죄하였다. 서방 교회의 이런 입장은 하나님의 의지를 인간의 의지보다 앞세우는 라틴 교회의 어거스틴의 영향력 때문이었다.

회의는 로마 교황 인노센트(Innocent)에게 판결을 의뢰하였고, 교황은 자신의 권위를 나타낼 기회를 가졌다. 교황은 펠라기우스와 그를 따르는 무리를 정죄하여 파문시켰다. 그러나 그의 후임자인 조시무스(Zozimus) 교황은 그들을 다시 복위시켰다. 이로 인해 서방 감독들이 다시 카르타고에서 모여 펠라기우스파를 파문시키고 재산을 압류시켰다. 이를 본 조시무스 교황은 자신이 불리해짐을 느끼고 자신의 견해를 바꾸어 펠라기우스를 정죄하였다.

펠라기우스의 가르침 속에는 진실하고 유익한 부분도 많으나 펠라기우스의 가르침의 전체적인 방향은 성경뿐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도 위배되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부패하고 타락한 본성과 죄의 종된 상태를 스스로 알고 있으며 삶 자체가 그것을 확증해 주고 있다. 우리가 첫 사람 아담과 생명과 본성을 공유함으로서 그의 죄를 지고 그의 죽음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은 명백한 것이다. 우리 자신의 선택과 노력으로써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할 길을 찾을 수는 없으며, 오직 그 자신의 선택과 노력으로써 그런 길을 열어주신 둘째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믿음으로써만 영생을 얻으며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의 신학적 차이

아우구스티누스 펠라기우스

구원 : 하나님의 예정, 불가항력적 은총 / 인간의 의지적 노력으로.

죽음 : 아담이 범죄함으로 죽음 / 처음부터 죽게 정해진 것임

죄의 유전 : 아담의 죄가 후손에게 영향 / 아담만, 인류에게 유전 안됨

원죄 : 유아에게도 원죄 있음 / 유아는 타락전 아담처럼 무죄

방법 : 그리스도만이 구원 / 율법도 사람을 천국으로 인도

오직 믿음으로, 세례를 받아야 함 / 그리스도가 오기 전에도 무죄한 자가 있었음

12-4. 반(半) 펠라기우스 설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논쟁 속에서 새로운 조화를 위해 반(半)펠라기우스설이 나왔다. 이 설은 마르세이유에 수도원을 세운 캇시아누스와 레이의 감독 파우스투스 등이 주장했다. 반펠라기우스설은 펠라기우스설처럼 인류의 죄악을 가볍게 보지는 않는다. 아담의 죄의 결과로 인류는 죄인이 되었고 죄로 인해 의지가 속박 당하고 자신의 행위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점에 있어서는 어거스틴의 주장과 같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제시되어 각 사람이 자기 의지대로 이것을 받든지 거절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알미니안의 주장과 비슷함) 어거스틴의 주장과 차이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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