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계명은 신령하다.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 (사 58:13-14)
양심에 멍에
당신은 모세오경을 읽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렇게 하는 동안 레위기 전체나 출애굽기의 후반부를 읽는다는 것이 무척이나 부담스럽다고 느끼지 않았습니까? 어쩌면 당신은 내가 영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이 기다란 규칙과 규정들의 목록들이 딱딱하고 설득력도 없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은 아닌가 하고 걱정했을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딱딱한 법에 따라 살아야 했던 가엾은 유대인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당신이 마음속에 그런 생각을 한 것 때문에 죄책감을 느낀다면, 베드로가 당신의 양심을 편안하게 해 줄 것입니다.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총회에서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이방인에게 할례를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한 제안은 고대의 골동품만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개혁주의’ 노선의 교사들 중 어떤 사람들도 비록 바리새인들처럼 강제로 할례를 주어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그리스도인들과 더 나아가 모든 사회가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신중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대의(또한 오늘날의) 제안에 대하여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행 15:5-10).
아마 그것은 상세하기 이를 데 없는 모세 율법의 규정들을 지루하고 지겨우며 우리의 영을 억압하는 것으로 보는, 영적이지 못한 태도는 아닐 것입니다. 그는 유대인의 사도로서 유대인들의 제도 아래 산다는 것은 못할 노릇이라는 것일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규칙들은 노예의 목에 지우는 멍에와 같았습니다. 복음의 제자들을 그런 지배 아래 두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날의 세상을 모세 시대의 사회로 환원시키려는 사람들은 베드로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도덕법을 모세 율법의 볼품없는 시민법과 의식법의 범주 속에 집어넣어 함께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반영하고 있는 도덕법은 그리스도인에게 귀찮거나 곤란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기쁨입니다. 예루살렘 총회에서 베드로의 편에 섰던 바울은 나중에 도덕법에 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롬 7:22, 14). 비록 모세가 제4계명에 많은 시민법 적이고 의식법적인 요소들을 첨가했지만,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요구 자체는 대단히 영적인 법입니다.
이사야는 가끔 복음적인 선지자라고 불리 웁니다. 그것은 그의 책이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시대를 분명하게 드러내 주는 언급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신약시대에 그의 예언 후 우리가 이사야 58장에서 안식일에 관한 논의가 영적이고 아름다운 필치로 언급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 본문에는 안식일법이 시민법이라는 우중충하고 설득력 없는 옷을 걸치지 않은 채 선명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거기서 도덕법은 복음의 화려하고 밝은 옷으로 치장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안식일의 영적 본질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이사야가 강조하고 있는 의미로 지키는 사람들에게는 매력적인 14절의 약속이 주어집니다. 그것은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는 출애굽기 20:11에 대한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주석입니다. 이 약속들은 가장 신령한 축복입니다! 또한 그것은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는 엄숙한 선언으로 보장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즐거운 기대는 의심스러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에 의해 강조되고 있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데 대하여 3가지의 특별한 축복이 틀림없이 임할 것입니다.
안식일의 3가지 축복
안식일을 지키는 자를 위한 축복으로서 맨 처음 언급된 것은 여호와 안에서의 즐거움입니다.
‘네가 여호와의 안네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어떤 종교적인 사람들은 우울한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불평불만을 털어놓음으로써 여호와 안에서의 즐거움을 많이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비참하고 유쾌하지 못한 마음을 품은 채로 공적인 예배에 참석하거나 성경을 읽거나 기도를 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렇게 되면 여호와 안에서의 즐거움이란 전혀 없는, 모든 것이 고된 일이며 의무이며 성가신 일이 되는 고통스러운 종교가 되는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의미를 이해하고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들은 여호와 안에서의 즐거움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아주 친한 사람들과의 우정이 가장 즐거운 것이라는 것을 느껴 본 적이 있습니까? 가까운 친척이나 친한 친구와의 우정은 깊은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나 때때로 먼 친척이나 그저 알고 지내는 사람을 방문하는 것은 긴장과 부담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친근한 아버지와 격의 없는 친구가 되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였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의 장막에 찾아오셔서 그와 함께 식사를 하시고 마음속에 품고 있는 비밀을 털어놓으셨습니다. 그와 비슷하게 성자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친숙함이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낸 후에야 생기는 감정입니다. 아버지나 친구라 할지라도 규칙적인 교제의 시간을 갖지 못하며 서먹서먹한 관계가 될 것입니다. 어쩌다가 한 번씩 만나 교제한다면 친근감으로부터 오는 기쁨은 사라질 것입니다. 매주 하루는 주님과 함께 보내야 합니다. 그렇게 그분께 나아가고 그분께 자신을 위탁함으로써 그분 안에서의 기쁨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전(全)존재는 하나님의 미소의 밝음과 그분을 찬양하는 기쁨, 그리고 그분의 집과 그분의 백성과 그분의 나라의 풍성한 사랑으로 환호하게 되는 것입니다. 1주일 중에서 하루를 거룩하게 지키는 습관을 가진 사람들은 그날이 그들에게 여호와 안에서의 즐거움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사람들에 대한 이사야의 두 번째 약속은 승리입니다.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이 고대적인 표현은 전차를 타고 높은 곳에 오른 정복자의 모습을 암시합니다. 진정한 성공을 거둔 자의 모습입니다. 승리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당신은 분명히 두들겨 맞아 쓰러지는 모양을 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비굴해집니다.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 당신은 그들이 상실되어가고 있으며 그들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것입니다. 믿음의 삶은 그런 삶이 아닙니다.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반복해서 ‘이기는 자’에게 약속을 하고 계십니다. 바울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 요한은 확신을 가지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신자들은 죄, 죽음, 지옥, 마귀, 세상과 육신 등에 대해 승리했다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은 종류의 것이 아닌 영적인 승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은 이국의 포로였지만, 강력한 정복자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누군가가 이 사악한 세상에서 우리를 구하러 올 때까지 우리의 손톱이나 물어뜯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세상을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뒤바꾸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큰일을 시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주위의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진리와 의를 생각하도록 변화시켜야 합니다. 우리는 승리하여 높은 곳에 올라야 합니다.
그러한 승리와 정복은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떤 우연에 의해 누구에게는 주어지고 누구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사업에서의 성공은 열심히 일한 결과입니다. 운동에서의 성공은 엄격한 훈련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은 지속되지 못합니다. 주 안에서의 진정한 정복 역시 시간과 훈련과 노력을 요구합니다. 때때로 초신자들에게 박식하고 정중한 그리스도인들은 놀라움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그들이 성경과 하나님에 대해서 그렇게 많은 지식을 갖게 된 비밀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그들이 매년 52일 동안 성경을 공부하고 기도했으며, 매년 적어도 52과의 성경 수업과 104번의 설교를 들었으며, 매년 52일 동안 공적이며 개인적인 기도의 시간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들이 그렇게 20년 동안 주님과 동행한다면, 1,040일, 그러니까 꼬박 3년 동안을 성경을 공부하고 기도하는 데 몰두하게 되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전투를 위해 칼을 갈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승리의 삶을 준비하도록 하는 훈련의 날입니다.
세 번째로 이사야는 맛있는 음식들을 차려 놓은 잔치를 약속으로 제시합니다.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잔치는 풍요로움을 연상시키며, 마음은 맛있는 음식들로 들뜨게 됩니다. 그것은 수고의 달콤한 열매를 만족 가운데서 행복하게 먹는 것을 의미합니다. 잔치는 통상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풍요를 축하하며 즐기는 것을 뜻합니다. 혼자서 잔치를 즐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번에도 당신은 가진 것이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이는 ‘그리스도인들’을 찾기 위해 먼데까지 바라볼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결코 다윗처럼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목사에게 상담하러 가는 어떤 사람들은 굶주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배고픔과 목마름을 느낍니다. 그들은 너무나 외롭습니다. 그들은 쓸쓸함 가운데서 빈약한 식탁을 대할 뿐입니다. 그렇게 제대로 먹지 못한 ‘양’들은 주님의 날에 푸른 초장으로 가는 길을 결코 찾을 수 없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1주일 주의 하루를 주님께 바치는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맛있는 음식들을 차려 놓는 날은 바로 안식일입니다. 이날에는 우유와 포도주를 값없이 먹을 수 있습니다. 영혼은 풍요로움 속에서 기쁨을 만끽합니다. 잔치가 벌어졌지만, 제4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은 참석하지 못하는 핑계를 댑니다. 반복해서 잔치에 참석하지 못하겠다고 핑계를 대는 사람들은 아무도 그 풍요한 잔치를 맛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날에 하나님의 집에서는 먹음직한 음식들이 잔뜩 차려져 있지만, 그들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뼈다귀를 집어들뿐입니다. 카세트테이프나 책, 또는 비디오테이프 등은 거룩한 잔칫날에 맛볼 수 있는 성령 충만한 사역에 비하면 빈약한 부스러기에 불과합니다.
당신은 당신의 삶이 여호와 안에서의 즐거움과 승리와 하나님의 맛있는 음식들이 차려져 있는 잔치로 충만하게 되기를 원합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사람들에게 약속하신 것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보물들은 제4계명을 올바로 지키는 사람들에게 지금 그리고 영원히 넘칠 것입니다. 이 법은 당신의 즐거움을 망치도록 고안된 것입니까? 하루를 온종일 하나님과 함께 보내는 것이 당신을 즐길 시간을 잃어버린 우울한 사람으로 만듭니까? 여호와의 입은 그와 정반대의 것은 선언하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안식일 규정으로 당신을 즐거움과 승리와 잔치로 인도하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사야 58장에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도록 하기 위해 매력적인 영적 즐거움으로 우리를 유혹하십니다. 만약 당신이 즐거움과 승리와 잔치를 맛보고 싶다면, 이사야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당신은 그것들이 안식일을 지키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약속들만큼 영적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세부적인 지시 사항들의 복잡한 목록이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해야 할 것들과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의 색인도 제시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도 여호와의 선지자는 태도에 관해 말합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의 마음가짐이라는 것입니다. 당신의 속사람의 모습이 어떠한가 하는 것이 그날을 거룩하게 지키는 데 있어서 본질적이라는 것입니다.
안식일의 데이트
가장 중요한 것은 1주일 중의 하루를 구별하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사람들 속에서 즐거워하는 태도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 하시느니라”(고후 9:7)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은 물질적인 헌금의 경우뿐만 아니라 1주일에 하루 온종일 우리 자신을 전능하신 분께 바치는 데 있어서도 해당됩니다.
우리의 마음은 안식일을 가장 좋아하는 날, 가장 멋진 날로 기다리게 되어야 합니다. 당신은 이 세상에서 그날과 그날의 즐거움을 항상 사모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다른 곳에 가기를 더 원하면서 입을 삐죽거리고 마지못해 발을 질질 끌면서 주님 앞에 나아간다면, 그것은 그분께 무례한 일입니다. 당신은 마치 애인을 만나기로 한 사람처럼 흥분되는 마음으로 그분께 나아가야 합니다. 사업과 세상의 쾌락을 제쳐두고 우리가 가장 사모하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과 하루를 보내는 일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 것입니다.
고대 동방에서는 신하들이 슬픈 기색을 띠고 왕 앞에 나오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그러한 태도는 왕을 모욕하는 것이었습니다. 불행한 모습을 한다는 것은 그 지배자와 함께 있다는 것이 즐겁지 못하다는 것을 암시했습니다. 그 한 예로 느헤미야는 “어찌하여 얼굴에 수색이 있느냐?”라는 왕의 질문에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그의 마음은 두려움으로 떨었던 것입니다(느 2:1-3).
불행하게도 우리 하나님께 즐거운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제대로 깨닫고 있는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시편 100편의 말씀을 한 번 읽어 봅시다.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부를지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지어다.”
비록 우리는 더 나은 제사를 위하여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자비를 구해야 하지만, 예배의 분위기가 무겁고 슬픈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목사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즐거운 찬양을 하도록 인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계속해서 죄만 고백하도록 하는 것은 교인들을 우울하게 하고 주님의 날을 부담스럽게 만들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주님과 함께 하루를 보내는 것을 즐거움으로 생각하는 긍정적인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주님의 날에 관하여 어떤 인상을 갖게 될 것인지를 매우 주의해야 합니다. 어머니 아버지들은 그들의 자녀들에게 안식일이 기쁨이 되도록 하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청소년들이 예배드리는 날을 엄격하고 억압적인 것으로 생각하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부모들이 계속해서 ‘그렇게 하면 안돼’ 라는 말과 꾸중을 하면 자녀들은 자연히 그러한 인상을 갖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외부적인 세부 사항들과 끝없는 규범들에 모든 주의가 기울어져서는 안 됩니다. 그날이 얼마나 기쁜 날인가 하는 것에 가족들의 초점이 맞추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부모들은 어린아이들이 성장 과정의 연약함 가운데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은 몇 시간 동안이나 계속해서 성경을 읽거나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주의를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길어야 20분에서 30분에 불과합니다. 모임에 참여한 아이들이 무료하므로 몸을 비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신체적인 활동이 필요합니다. 아이들이 다른 날에 할 수 있는 활동을 금지당할 때, 그것은 그들의 시간과 마음을 기쁨으로 채워 줄 수 있는 다른 안식일 활동으로 대체되어야 합니다. 부모들은 주님의 날에 성경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성경 외우기 게임을 하거나, 창조의 위대함을 보여 줄 수 있는 곳으로 산책을 가거나, 찬송가를 함께 부르거나, 교리 공부를 함께 함으로써 자녀들과 함께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귀신들이 나가고 깨끗하게 청소되어 비어 있는 집은 금방 더 악한 귀신들의 차지가 될 것입니다. 안식일의 시간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어린아이들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연로한 어른들을 방문하고, 성경을 읽고, 친교의 시간을 갖는 등의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부모들이 그들의 자녀들에게 안식일이 즐거운 것이 되도록 할 때, 이 아이들은 주님의 날에 가졌던 즐거운 기억들을 영원히 간직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상의 세속적인 기쁨을 만들어 내는 데는 무척이나 재능이 풍부합니다. 그런데 왜 부모들은 자녀들을 영적 즐거움으로 인도해야 할 때 낙심하여 포기해 버리는 것입니까?
이사야가 얼마나 흥미 있는 약속을 하고 있는지 보십시오! ‘만일 네가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우리가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날이 즐거운 날이 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주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날이 우리에게 부담스러운 것이라면 어떻게 우리가 주님 안에서 즐거워할 수 있겠습니까? 조건과 희망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으며 상호의존적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에 관한 우리의 영적인 태도가 즐거워하는 것을 포함해야 함과 동시에 그것은 또한 그날이 특별한 날이라는 의식을 포함해야 합니다. 우리의 본문은 주님의 날이 다른 날들과 다르기 때문에 그리고 다른 날들보다 고귀하기 때문에 특별한 날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다른 6일보다 더 큰 존엄과 더 깊은 이해와 더 세심한 생각을 가지고 이날을 대해야 합니다. 가족 내에서 생일이나 결혼기념일이 특별한 날로 간주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님의 날은 인류라는 가족 내에서 매우 존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안식일과 다른 날들과의 차이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13절). 다른 6일에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오늘은 무엇을 해야 하나? 무슨 일을 끝내야하지? 오늘 내 가족들이나 직장 동료들과 무엇에 관해 이야기를 하면 좋을까?’ 안식일에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은 주님의 거룩한 날이다. 나는 그분의 위대하심과 그분의 생각에 관해 말해야겠다. 나는 오늘 그분의 뜻을 행하겠어.’ 안식일에 그런 생각을 하게 될 때, 당신은 주님의 즐거움과 승리의 삶과 맛있는 음식들로 가득한 잔치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태도가 불합리하고 제한적인 것으로 보인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깊은 이기주의적 성품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당신에게 아주 맛있는 사탕 7개를 주었다면, 나는 당신에게 6개는 갖고 하나만 나에게 다시 돌려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만이 7개 모두를 꽉 쥔 채 나의 요구에 침울한 표정을 지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7일을 주셨습니다. 그분은 하루를 다시 돌려달라고 요구하십니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그 하루에 돈을 벌어서는 안 되고, 낚시를 가서는 안 되며, 텔레비전을 보아서도 안 되고, 스포츠나 여가에 관해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부담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한 태도는 자기중심주의의 증상입니다. 자기도취는 또한 남자와 여자, 어린아이들을 파멸시키는 원인이 됩니다.
주님을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분의 거룩한 날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존귀히 여길 것입니다. 그날은 무척이나 존중될 것입니다. 안식일은 특별한 방법으로 주님께 속하기 때문에 가장 존귀한 날입니다. 그날은 주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엄숙하고도 즐거운 모임으로 부르신 날입니다. 이 모임 가운데서 주님은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간구하는 사람들에게 특별히 가깝게 다가오십니다. 우리가 안식일을 별 볼일 없거나 아무것도 아닌 날로 생각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날은 가장 신성한 날인 것입니다.
13절은 우리가 오늘날 일반적으로 시행해야 할 것에 관해 말하는 구절로 시작됩니다.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 우리 주님께서는 자신의 안식일이 짓밟히는 것을 무척이나 슬퍼하신다는 것을 암시하십니다. 어떤 것을 발로 짓밟는다는 것은 경멸의 표시입니다. 그러나 그 일이 언제나 신중하게 행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나 가치가 없는 것, 또 우리가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을 그냥 밟고 지나갑니다. 심지어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밟고 걸어가고 있는지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것에 대한 모욕입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짠맛을 잃어버린 소금은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하여 그의 안식일이 아무 가치도 없는 것으로 취급되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안식일이 이사야 시대에 사람들의 발아래 밟히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추악한 태도와 똑같은 일들이 오늘날 사회에는 엄청나게 많습니다. 일요일은 프로와 아마추어 스포츠로 가득 채워집니다. 일요일은 시장이 북적대고, 고속도로가 붐비고, 캠핑을 가고 파티를 여는 날입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당연한 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모든 일들의 뿌리는 무엇보다도 악한 죄입니다. 안식일은 특별한 가치도 없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자기중심적이고 인간중심적인 활동들에 의해 짓밟히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집은 썰렁하고 쓸쓸한 사회적 기관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특별한 가치를 지니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날은 치욕스러운 것으로 전락했습니다. 안식일은 아무 쓸데없어 밖에 버리워 사람들의 발에 밟히는 것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날을 짓밟는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결핍되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이사야 58장 앞 부분에서 선지자는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몇 가지 질문을 제기합니다. 3절은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지도 아니하시고 알아주지도 아니하시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왜 주님은 우리를 찾아오지도 않으시고 축복하지도 않으시는가? 왜 주님은 우리를 버리셨는가? 예배드리는 하나님의 날을 조금도 존중하지 않을 만큼 그분을 사랑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이런 질문을 했다는 것은 참 이상한 일입니다. 만약 그들이 안식일을 짓밟는 행위를 그만둔다면, 만약 그들이 다른 날들과 구별하여 안식일을 즐겁게 존중한다면, 하나님은 자신의 영적 축복을 쏟아 부어 주실 것입니다.
이사야는 우리의 마음을 꿰뚫어봄으로써 문제의 핵심을 지적합니다. 신약의 정신으로 그는 영적 약속들을, 영적 원리들을 제시합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도덕법, 특히 제4계명이 얼마나 영적인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사야의 중심적인 요구는 우리의 속마음이 안식일을 기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것을 보다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시 84:10).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간 영혼의 뛸 듯한 즐거움에 비교될 만한 기쁨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은혜라는 방식에 의하여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배를 드리는 공적인 모임에 의하여 거주하고 계신 그분의 궁정으로 들어갑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그 하루는 다른 천 날보다 낫습니다. 경건한 사람들에게는 그날이 분명히 1주일의 다른 6일보다 달콤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궁정에 나아가기 전에 보통의 천 날이 지나가기를 기다려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 도덕법에 의하여 하나님의 보좌에 나아가는 특권을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이 제4계명을 읽는다면, 그는 이렇게 외칠 것입니다. “나로 주의 계명의 첩경으로 행케 하소서 내가 이를 즐거워함이니이다”(시 119:35).
http://thevine21.hompee.com/v2.0.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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