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새인들의 안식일 오해
바리새인들의 두드러진 실수 가운데 하나는 안식하는 날의 목적이 가능하면 아무런 일도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는 그들의 믿음이었습니다. 이러한 오해는 바리새인들로 하여금 안식일에 사람이 집어들 수 있는 무게가 어느 정도이며, 걸어갈 수 있는 거리는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 등에 관한 산더미 같은 규정들을 만들을 내도록 했습니다. 제자들이 배고픔을 면하기 위하여 이삭을 잘라 먹었을 때 바리새인들로 하여금 그것은 노동을 한 것이라고 비난하도록 한 것은 바로 그러한 규정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1, 2절). 예수님의 치유행위를 금지된 일로 오해한 것도 그러한 궤변 때문이었습니다(9, 10절). 금방 나음을 받은 사람이 자기가 깔고 누웠던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을 본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분노했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요 5:1-10).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코 안식일의 요점이 아닙니다. 그날은 인간이 꼼짝도 하지 않거나 수동적이 되기 위한 날이 아닙니다. 만약 안식일이 바리새인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면, 안식일을 가장 잘 지키는 사람은 꼼짝도 하지 않고 있을 수 있는 식물인간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행할 수 있는 3가지 유형의 활동을 옹호하시고 변호하심으로써 바리새인들의 이러한 오류를 폭로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2장에서 그는 그 3가지 유형의 일을 열정적으로 행하는 것은 언제나 안식일에 합당하다고 대담하게 주장하셨습니다. 시민법적인 제한으로 가득했던 모세의 시대에도 이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우리 구세주께서 변호하셨던, 인간이 안식일에 행할 수 있는 일의 가장 분명한 범주는 경건의 행위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날에 우리의 일상적인 일로부터 쉬는 유일한 이유는 우리의 온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일에 우리의 모든 힘을 쏟을 수 있기 위해서입니다. 요한복음 5:17은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친다는 이유로 우리 주님을 핍박한 또 다른 경우에 우리 주님께서 대답하신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서 창조의 일로부터 안식하셨을 때 그분이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안식일에도 하나님은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유지하시며 섭리의 사역을 행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경우(안식일에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먹은 경우)에 예수께서는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마 12:5). 제사장들에게는 안식일보다 바쁘게 일해야 할 날이 또 언제이겠습니까? 이날에 그들은 찬양을 하고, 다른 날보다 더 많은 희생제사를 드리고, 백성들을 가르쳤습니다. 제사장이 죄가 없었던 것은 그의 힘이 여호와를 예배하고 섬기는 일에 쏟아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을 활동으로부터 쉬는 날이라는 견지에서만 본다면, 제사장들은 안식일을 범하는 주범들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결론은 얼토당토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배를 집행하는 데 행해진 노동은 합법적입니다. 그보다도 그것은 안식일의 주요한 취지입니다.
우리 주님은 또한 필수적인 행위를 변호하셨습니다. 열두 사도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에 고용된 사람이었습니다. 8절은 그분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6절은 그분이 성전보다 크다고 말합니다.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섬기는 일을 하는 것이 합법적이라 하는데 하물며 성전의 모든 상징적 의미를 성취하신 분을 섬기는 일은 얼마나 더 합법적이겠습니까? 그러나 그 문제가 아니라 하더라도 열두 제자들은 배가 고팠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자신을 바친 사람들은 안식일에도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충족되어야 할 일반적인 필요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의식주 문제를 충족시키는 행위는 안식일에 쉬어야 한다는 규정을 전혀 범하지 않는 일입니다. 이러한 필요들을 충족시켜 주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마음을 다른 데로 돌리게 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구약의 율법에서 완전히 용인될 수 있는 것으로 옹호하신 안식일의 행위 중 세 번째 유형은 자비의 행위입니다. 아마도 이것은 예수께서 바리새인들과 가장 자주 다투셨던 주제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광범위한 치유사역을 행하셨습니다. 그는 가끔 안식일에도 치유의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행동들을 불경건한 노동으로 제4계명을 범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마 12:12)고 말씀하신 것은 이것과 관련된 행위로서 고통을 당하는 인간에게 은총을 베푸신 경우였습니다. 메시아께서는 의도적으로 안식일에 바리새인들이 보는 앞에서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심으로써 그들에게 도전하셨던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의 논쟁은 성경의 원리들을 좁은 의미로 적용할 것이냐 넓은 의미로 적용할 것이냐 하는 문제와 관계가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에게도 ‘필수적인 것’은 안식일의 노동 문제에 있어서 예외 조항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곧 죽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누군가가 그 사람의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일을 하는 것은 합법적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하루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고 해서 당장 죽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을 그냥 지나치셨다 해도 그 사람은 살아 있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만약 양 한 마리가 구덩이에 빠졌으면”(마 12:11) 그것을 건져내야 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들은 이것을 ‘필수적인 것’ 으로 생각하는 것과 같은 특별한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요 7:22,23).
우리의 구세주께서는 필수적인 것과 자비와 경건의 문제들을 안식일의 행위에 적용하시는 데 있어서 훨씬 더 관대하셨으며 넓은 마음을 가지셨고 더 자비로우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배고픈 제자들에게 하신 것처럼 다른 사람들의 행위에는 훨씬 관대하셨으며, 다른 사람들을 위한 자신의 노력에 있어서는 훨씬 더 자유로우셨습니다.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의 대결은 원리들을 적용하는 데 있어서의 넓은 마음과 좁은 마음 사이의 불일치였습니다.
당신은 안식일의 행위를 적용하는 것이 어떤 문제에서는 명확한 반면, 어떤 문제에서는 분명하지 못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필수적인 것의 문제에 관해 생각할 때, 군대나 경찰이 안식일에도 국가를 지키는 것은 합당한 일이라는 것을 누구라도 금방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앰뷸런스 운전사나 간호사, 소방관이 하나님의 거룩한 날에 일하는 것은 합당한 일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아무런 의문도 제기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운동선수나 어릿광대, 잡상인 등이 안식일에 일하는 것은 전혀 필수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 역시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런 경우들은 검고 흰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매우 넓은 범위에 걸쳐 불분명한 경우들이 많습니다. 대학이나 유원지에서 학생들이나 관광객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하는 음식 서비스는 어떻습니까? 먹는 일은 안식일에도 필수적인 것 아닙니까? 병원이나 교회, 양로원등에 전기를 공급하는 발전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제철소의 용광로를 하루 동안만 식혀 둔다는 것을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의 복잡한 산업사회의 이 부분을 유지하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 아닐까요? 바리새인들은 미리 준비된 대답을 가지고 있었겠지만,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접근 방식에 있어서 보다 자유로우셨습니다. 세심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바리새인들은 경건과 필수적인 것과 자비의 범주를 사용하는 데 있어서 인간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과 같은 성에 살고 있는 사람보다는 자기들의 농장에 있는 짐승에게 더 많은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안식일법을 적용하는 데 있어서의 그들의 엄격함은 그들이 인간에 대한 사랑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규범들을 억지로 지키게 하는 데 잔인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에게 엄청난 고통과 불편을 초래한다 해도, 바리새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이 안식일이라는 틀에 들어가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의 머리가 잘려 나가야 한다고 해도, 바리새인들은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밭에서 그들의 점심 식사를 해결한 이 사건에 대한 마가의 기록에는 마태가 생략한 예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막 2:27). 다시 말해서 안식일은 인간의 복지를 위하여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인간의 행복을 위해 제정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안식일을 좋게 하기 위하여 고통을 당하는 것을 결코 의도하지 않으셨습니다. 제4계명의 해석이 그렇게 불합리하게 되어 그것이 우리의 행복을 무시하는 고통스러운 찡그림을 가져오게 될 때, 그 해석자는 커다란 실수를 한 것입니다. 고대나 현대의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지지하는 체하는 그 율법의 평판을 나쁘게만 합니다. 안식일은 인간의 행복을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고대의 바리새인들이 안식일법을 적용하는 데 있어서 우리 동료 인간을 무시했던 것과 같은 작태가 오늘날에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엄격하고 자신에게는 관대한 것이 타락한 인간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살펴본 것과 같이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날에 구덩이에 빠진 양을 건져내는 것이 당연히 합당하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이 그 손 마른 사람을 고쳐서는 안 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할례를 행할 수 있었지만, 예수님이 38년 된 병자의 엄청난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하여 그를 고쳐서는 안 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겉으로 나타난 모습에만 카다란 주의를 기울이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매우 엄격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동기가 순수한 체하면서 스스로를 용서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판단을 해야 할 경우 그와 정반대의 입장을 취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동기가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우리는 우리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그것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표준으로 강요하는데 더디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시험할 줄 알아서, 우리는 우리의 동기가 순수한 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형제들의 마음을 판단하지 말고,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동기를 가지고 행동하는 것으로 일단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롬 14:1-12).
우리 주 예수께서는 우리의 주의를 원리들과 마음가짐의 문제로 돌리게 하십니다. 안식일법은 인간의 행복한 복지를 위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이 그날을 축복하신 것은 인간이 그날에 의하여 복을 받게 하시겠다는 그분의 의도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날은 지극히 높으신 분을 영적으로 예배하고 섬기기 위한 날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가능한 한 일상적인 일을 쉬고 또 모든 사람들이 안식일을 주님께 바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일을 시키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요구는 필수적인 것과 자비에 관한 문제에까지 적용하도록 의도된 것은 아닙니다. 그날은 인간에게 특히 그의 영혼에게 축복을 가져다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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