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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바랜 안식일 8 (월터 챈트리)

월터 챈트리

by 김경호 진실 2013. 4. 1.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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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을 지키는 동기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눅 15:17-20)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찐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눅 15:28-30)

탕자의 속셈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은 참 종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구약에서도 그렇고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는 산상수훈에서의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억할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우리의 소중한 주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고 말씀하셨습니다. 계명에 순종하고 착한 행실을 하는 것은 기독교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의해 제4계명을 시행하는 것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착한 행실을 포함합니다.

예수님의 탕자 비유는 안식일 계명을 지키는 방법에 있어서 순종의 주제에 관한 가르침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순종의 문제는 이 비유의 주요 교훈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주목할 만한 이야기 속에는 한 가지 이상의 교훈이 들어 있습니다. 순종에 대한 태도가 이 이야기에서 매우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이 비유에는 3가지의 서로 다른 분위기가 착한 행실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유산을 나누어 달라는 작은아들의 요구 배후에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아버지의 집에서 규범에 따라 살고 싶지 않다는 마음입니다. 이 작은아들은 모든 제한으로부터의 자유와 아버지에게 순종하지 않을 자유, 그리고 도덕의 기준을 버릴 자유를 갈망했습니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못된 속물의 사고방식을 발견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율법을 싫어하고, 1주일 중 하루는 하나님께 바쳐져야 한다는 자유를 구속하는 요구를 증오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불순종하는 사람을 지으셨고 그에게 지상의 부요함을 보여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반역적인 죄인은 그 계명들로부터 떠나기를 원합니다. 먼 나라(하나님을 멀리 떠난 곳)에서 그는 하나님의 규범을 잊어버리고 그 규범들을 무시하며 삽니다. 그러한 마음가짐은 제4계명을 거부하고 무시하는 우리 시대의 정신 속에 있는 주요한 요소입니다.

착한 행실에 대한 그와 반대되는 마음가짐은 바로 그 작은 아들에게서 나타납니다. 순종에 대한 이 두 번째 태도는 죄와 세상 ‘친구들’의 이기적인 무감각으로부터의 쓰라린 결과를 맛보게 된 재난 속에서 생겨났습니다. 외로움과 궁핍함 속에서 그 탕자는 아버지의 집에서 일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는 모든 일꾼들에 대한 아버지의 처리가 공정하고 선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때서야 그는 아버지의 현명한 규범 아래 사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 고집 센 아들은 자신이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아버지를 위하여 일할 특권을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너무나 큰 죄를 범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아버지가 관대하고 친절한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께로 돌아가 가장 비천한 종으로 받아 주실 것을 간청하기로 작정했습니다. 이제 그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선한 삶을 사모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상상의 날개는 작은아들이 돌아온 것을 축하하는 즐거운 잔치 뒤편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만약 그 탕자가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는 따뜻한 침대와 먹을 빵을 얻기 위하여 일하겠다고 작정했었다면, 살찐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고 아들이라는 최고의 영예가 그에게 회복된 후에 다시 아버지를 섬기게 된 그의 마음은 얼마나 기뻐 뛰었을까요! 그는 감사와 사랑과 마음을 다하여 아버지께 순종하겠다고 얼마나 다짐했을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감정의 이 두 번째 상태는 회심을 경험한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특징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범죄로 인한 고통스럽고 슬픈 경험 속에서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규범이 선하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분의 계명들은 결국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최고의 유익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킴으로써 얼마나 즐겁고 풍성한 축복이 넘치게 됩니까! 당신은 회심할 때 여호와의 모든 거룩한 뜻을 지키겠다고 맹세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그분의 도덕법과 제4계명을 포함하지 않습니까?

그분의 율법을 범한 우리의 수많은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가 다시 그분을 섬기도록 허락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삼으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제사장과 왕으로 삼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엄청난 관대함을 맛본 후에 우리의 마음에는 사랑의 순종이 넘쳐나야 합니다. 만약 내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그분을 기쁘시게 한다면, 나의 마음은 그 임무를 수행하는 기쁨으로 달음박질하게 될 것입니다. ‘오, 나에게 무한히 자비롭고 친절하신 분께 뭔가를 돌려드릴 수 있다니!’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확실히 순종을 돌려드리는 일의 일부분입니다.

큰 아들의 속셈

이 비유에 우리 주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지적하셨습니다. 순종에 대한 그들의 경향은 큰아들의 분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 탕자의 형은 자신이 아버지에게 봉사한 것에 대해 화를 냈습니다. 아버지를 위한 그의 노동은 겉으로 보기에는 착한 행실로 채워져 있지만, 이 행실들은 마지못해 한 것들이었습니다. 온통 불순종한 삶을 살았던 동생이 관대한 환영을 받게 되자 그의 마음은 시기로 가득 찼습니다. ‘집에 남아서 겉으로 보기에 충실하게 일한 사람에게 아버지의 가장 좋은 보상이 있을 것’이라고 그는 확고하게 믿고 있었습니다.

개혁교회 안에도 절대로 술을 마시지 않고, 사창가 근처에도 가지 않으며 안식일을 범하는 법이 없는, 큰아들의 정신으로 순종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주의 깊게 안식일법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총애를 얻을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제4계명에 엄격하게 집착하는 것은 오늘날의 바리새인들에게 힘들고 어려운 일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미소를 얻어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그날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하여 하나님께 노예가 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는 자들보다 안식일을 범하는 자들에게 축복하실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당황합니다.

그 이야기에는 경건하지 못한 자의 불순종하는 악한 행실, 변화된 죄인의 순종하는 착한 행실, 그리고 잘못된 동기로 말미암아 결국에는 악한 행실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되는, 스스로 의로운 체하는 자의 겉으로 보기에 순종하는 착한 행실이 있습니다. 적어도 불순종하는 자들은 그것을 회개하든 않든, 자신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창기와 세리들이 자신들의 죄와 구세주의 필요성을 깨닫지 못하는 바리새인들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은 마음으로부터 주님께 순종하기로 결심한 진정으로 변화된 죄인뿐입니다. 자신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화목의 키스를 해 주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를 알고 있는 죄인들은 착한 행실을 하는데 열심입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피조물 중 가장 슬픈 존재는 겉으로는 순종하는 훈련을 하면서도 속으로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착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느라 오랫동안 그리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는 순종하기 위하여 애쓰고 희생했지만, 그의 마음은 하나님께 올바르지 않습니다. 슬프게도 그의 순종은 공허하고 쓸모가 없으며, 경건하지 못한 자들의 불순종보다 더 나쁜 것입니다.

그 비유에서 한 가지 두드러진 대조는 죄를 뉘우치는 아들의 순종은 ‘복음주의적’ 이지만, 큰아들의 순종은 ‘율법주의적’ 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계명과 도덕법과 착한 행실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언제든지 율법주의적인 순종과 복음주의적인 순종 사이의 구별을 마음속에 품고 있어야 할 절박한 필요성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주의적으로 제4계명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안식일법에 - 그리고 다른 모든 계명들에 - 율법주의적인 순종만을 하는 사람들은 바리새인들과 함께 멸망할 것입니다.

외적인 기준에 관한 한, 율법주의적인 순종과 복음주의적인 순종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큰아들은 아버지가 관리하는 규범 아래서 아버지를 위하여 오랫동안 열심히 일했습니다. 돌아온 탕자는 아버지의 명령과 규범을 따르면서 아버지를 위해 오랫동안 열심히 일하겠다고 맹세했습니다. 율법주의적인 순종과 복음주의적인 순종 사이의 모든 차이는 그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이 마음속에 어떤 생각과 의도를 품고 있는가 하는 것에 의해 생겨납니다.

율법주의적인 순종은 하나님과 그의 율법, 그의 백성 등을 엄격하게 생각한 결과입니다. 큰아들은 아버지에게 순종했지만, 그는 아버지를 엄격하고 너무나 많은 것을 요구하며 인정이 없는 분으로 생각했습니다. 비록 그는 아버지가 원하는 일을 했지만, 아버지가 자신에게 별로 친절하게 대해 주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의 법을 지키는 것은 그에게 마치 노예생활을 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다른 아들들은 하나님의 총애를 받을 만한 자격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처럼 외부적으로 엄격하게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행동을 경멸했습니다.

복음주의적인 순종은 하나님과 그의 율법, 그의 백성에 대한 부드러운 생각에서 생겨납니다. 회개한 탕자는 아버지를 따뜻하고 사랑이 넘치는 분으로 생각했습니다. 아버지를 위해 일하게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모릅니다. 이제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넘치는 아버지의 친절을 알았습니다. 그는 집에 남아서 아버지의 규범 아래 있기를 원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그에게 기쁨이 되었습니다. 그 방탕했던 아들은 아버지의 다른 아들들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고, 오히려 스스로를 집안에서 아무 쓸모없는 존재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착한 일을 한 사람들 중에서 가장 작은 자로 간주되어야 했습니다. 그는 가장 낮은 자리에 합당한 사람으로 취급되는 것이 기뻤습니다.

이와 같은 상반된 마음은 율법주의적인 종과 복음주의적인 종이 자신들의 봉사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것을 잘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들은 왜 착한 행실을 하는 것입니까? 아버지에 대한 그들 각자의 개인적인 관계에서 그들의 순종은 어떤 역할을 하는 것입니까? 착한 행실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당신은 큰아들이 왜 아버지께 순종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행하는 착한 행실을 통해 아버지의 총애와 축복을 얻을 것으로 개대했습니다. 그는 주의 깊고 희생적인 순종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얻고 유산을 상속받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착한 행실로 아버지의 총애를 얻는데 실패했을 때, 그는 아버지에게 화를 내고 무례하게 굴었습니다. 착한 행실의 적절한 역할에 대한 이러한 오해 때문에 그는 축복을 놓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점점 더 엄격해져 갔습니다. 그의 아버지와 대화하는 중에 큰아들은 자신과 동생을 비교하면서 누가복음 18:10-12에 나오는 성전에 올라갔던 바리새인과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율법주의적인 순종의 핵심입니다.

회개한 탕자의 동기

회개한 아들의 동기와 목적은 그와 정반대되는 것이었습니다. 작은아들은 자신이 아버지의 용납과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착한 행실로써 스스로의 위치를 회복시킬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는 과거에 좋은 기회를 탕진했었습니다. 자신이 죄를 지었다는 심각한 인식은 그가 자신의 선한 행실로 하나님의 총애와 축복을 얻을 수 있다는 거짓된 희망으로부터 그를 영원히 구원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알기로 자격 없는 사람들에게까지 넘치게 부어졌던 아버지의 자비와 친절하심만을 바라며 아버지께로 나아갔습니다. 그는 오직 자비에 의지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작은아들은 겸손한 순종의 맹세가 없이는 아버지로부터 자비를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방탕한 생활을 그대로 아버지께 보여 드리면서 자비를 구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아버지께 순종하겠다는 새로운 결심이 서 있었습니다. 그 모든 계명들이 그 아들의 불순종에 대한 이유가 되었다고 해서 아버지가 모든 명령들을 취소할 것으로 기대할 만한 어떠한 암시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 명령들은 바로 아버지 자신의 성품과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탕자는 세상의 법칙에 따라 살았고, 결국에는 그 법칙들이 잔인하고 공정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버지의 법은 의롭고 선한 것이었습니다. 잘못을 뉘우치면서 작은아들은 아버지의 명령들에 동의했습니다. 그는 사악한 자들의 장막에 거하기보다는 아버지의 집 문지기가 되려고 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경영에 아무런 불만도 없었습니다. 위반자의 방법이 잘못된 것이지, 아버지의 방법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집으로 돌아온 그 악한 아들은 아버지가 즉시 자신을 받아들여 주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포옹을 받았고, 융숭한 대접을 받았으며, 즉시 가장 귀한 아들의 위치로 회복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가 얼마나 아버지를 섬기고 아버지의 규범에 순종하게 되었을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감사가 넘치는 마음으로 그는 이렇게 외칠 것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자비에 보답하기 위해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복음주의적인 순종은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베푸신 친절하심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그분의 명령들을 지키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선한 행실로 하나님의 총애를 얻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미 받은 엄청난 자비에 대하여 하나님께 뭔가를 돌려드리려고 애씁니다.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도덕법에 복음주의적으로 순종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제4계명은 우리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우리는 일을 하거나 다른 사람을 고용하여 우리를 위해 일을 하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총애를 얻기 위하여 이 명령에 순종한다는 것은 비참하고 절망적인 노릇입니다. 만약 당신이 안식일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얻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분노와 시기심의 근원이 될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안식일을 지킴으로써 당신에 대한 하나님의 평점이 높아질 것을 기대한다면, 당신은 좌절과 낙심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히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이 당신에게 끔찍한 일들을 행하실 것이라는 두려움 속에서 안식일을 지킨다면, 안식일은 당신에게 아무런 기쁨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한 두려움의 동기에서 순종할 때 그들 마음속에 살금살금 기어들어오는 것은 십계명을 지워버려야 한다는 도덕률 폐기론자들(‘도덕법’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입니다. 모든 율법주의적인 동기를 피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옳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이 언제나 율법주의적 동기를 산출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작은아들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바와 같이 사실이 아닙니다.

모든 진정한 신자들은 속사람으로부터 하나님의 율법을 기뻐할 것입니다. 그들은 기쁨으로 제4계명의 길 위를 달릴 것입니다. 용서받은 죄인들은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손에서 믿을 수 없을 만큼 값진 선물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어떤 일을 하는 데 열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기를 기뻐합니다. 안식일은 그들에게 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에서 사랑할 수 있도록 해 줍니다. 그들의 사랑은 주님의 날에 주님께 순종과 영예를 드리기를 원합니다.

복음 사역자들은 우리 시대의 무법함에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생활을 거룩함을 조금도 추구하지 않는 기독교의 분파마저 생겨났습니다. 우리의 이 세상은 마귀의 지배 아래 있습니다. 신자들은 하나님께 어떻게 순종할 것인지를 무시합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사역자들은 계명들에 대한 설교를 지나칠 만큼 많이 하려는 경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심한 고발과 심판에 대한 경고가 강단을 지배하기 시작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큰아들의 마음 형태를 갖게 됩니다. 율법주의적인 태도가 살금살금 기어들어옵니다. ‘나는 순종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나에게 화를 내실거야.’ 율법에 관한 많은 설교들을 들으며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착한 사람이 되어야해. 나는 안식일법과 다른 율법들에 순종해야 한다!’ 그들이 하나님의 부드러운 자비를 받을 만한 자격이 없을 때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셨다는 것을 아는 것이 그들의 순종의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작은아들의 순종은 그의 아버지의 선하심과 친절하심에 대한 즐거운 기억으로부터 넘쳐나는 것이었습니다. 돌아온 탕자는 일하러 가기 전에 아버지의 품에 안겼습니다. 사랑의 포옹을 받으면서 그는 부드러운 음성을 들었습니다. 작은아들은 그의 순종의 배경으로서 기쁘고 즐거운 추가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나님과의 즐거운 교제와 기쁨으로 드리는 예배는 성화(聖化)의 수단입니다.

큰아들의 엄격한 태도에 빠지는 것을 주의하십시오. 부모들은 자녀들이 그렇게 되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아이들이나 어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기를 원한다면 사랑과 친절함과 주님 안에서 기뻐함의 분위기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만약 아이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난다 해도, 하나님의 집에서의 행복했던 기억이 그들로 하여금 다시 돌아오도록 할 것입니다. 때때로 개혁주의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가정들이 하나님의 율법에 대하여 너무나 무겁고 엄격하고 부정적인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교인들과 자녀들에게 안식일이 기쁨이 되도록 함으로써 그들의 순종이 복음주의적인 것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오늘날 어떤 지도자들은 너무나 조급해서 은혜의 수단과 성령께 의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4계명과 다른 모든 도덕법에 대한 불순종이 일반적인 것이 되었기 때문에,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인간의 결단이 되었습니다. 오늘날의 사역 아래서는 진리를 가르치고 성령을 의지하는 일이 순종의 높은 정도를 산출하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로 하여금 착한 행실을 행하게 하는 다른 수단들이 강력하게 요망됩니다.

그래서 십계명을 경시하는 오늘날의 풍조 속에서 정통주의자들의 감시가 생겨난 것입니다. 장로들은 교인들이 안식일을 세부적인 사항까지 철저히 적용해서 지켜야 한다고 결정했습니다. 매우 세밀한 명령들이 모든 교인들에게 주어졌고, 그들은 제대로 시행하는지의 여부를 감시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장로들은 교인들의 영혼을 돌보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장로들의 엄격하고 횡포적인 지배가 안식일과 다른 도덕적인 문제들에 관하여 교인들에게 가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정통주의적인 전략은 예수 그리스도인들을 계시와 성령의 충족함에 적합하지 않는 어린아이의 상태로 다시 되돌려 놓았습니다. 잘못된 장로들의 결정으로부터 기인한 과도한 명령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율법주의적인 순종으로 몰아넣었으며, 기쁨도 없고 동기도 잘못된 선한 행실을 추구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안식일 명령을 가르치기를 원하는 개혁주의 지도자들은 그들의 교인들을 ‘큰아들’로 만드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명령을 가르치는 일과 그 명령에 순종하는 올바른 동기를 갖도록 해 주는 일이 균형을 이루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외적인 기준과 올바른 동기는 병행되어야 하며, 신자들을 가르치는 교사들은 우리 주 예수님처럼 먼저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다른 9개의 계명들과 마찬가지로 제4계명은 불경건한 반역을 정죄하고 스스로 의로운 체하는 사람들에게 구세주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도록 하는 데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세속적인 사람들이나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울 만하지 못하다는 것을 나타내 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의 탄원은 자비를 구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회개한 죄인들에게는 아버지께서 따뜻하게 받아 주신 것에 감사하는 가운데, 안식일법이 사랑의 섬기이라는 착한 행실을 향한 중요한 명령이 되는 것입니다. 비록 동일한 율법이 다른 많은 경우에서 외적 요구로서 사용될 수도 있지만, 교사들에게는 인간의 마음의 동기들이 매우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동일한 안식일의 요구사항이 그것을 듣는 사람들의 각각 다른 동기에 따라 다양하게 다루어지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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