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주간의 어느 날이 안식일인가?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계 1:10)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행 20:7)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전 16:2)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히 4:9-10)
첫날인가 일곱째 날인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한 주간의 첫날에 예배를 드립니다. 유대인들은 제7일에 예배를 드립니다. 회교도들은 제6일에 예배를 드립니다. 일주일 중 하루에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한다는 것을 이제 막 알게 된 사람에게는 이 모든 것이 매우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혼란은 연륜이 깊은 그리스도인들에게까지 거침돌이 되어 왔습니다. 그것은 또한 어떤 사람들에 의해 제4계명을 폐지해야 한다는 이유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제4계명은 창조 시에 하나님께서 쉬셨음을 상기시켜 주지 않습니까? 우리 주 예수께서도 안식일에 관해 가르치실 때 하나님께서 창조를 완성하시고 쉬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이날은 제7일이었습니다! 세상이 시작된 때로부터 그리스도의 때까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른 모든 사람들은 제7일을 지켰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한 주간의 첫날에 예배를 드리게 되었을 때,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본보기를 포기한 것일까요? 그들이 예배드리는 날은 하나님께서 창조를 마치시고 쉬신 것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들이 제4계명을 무시한 것일까요? 이것은 많은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는 문제입니다.
가장 손쉬운 대답은 신약의 성도들이 예수님의 부활 후에는 한 주간의 첫날에 예배 드렸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제1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습니다. 우리의 구세주께서 성도들에게 맨 처음 나타나신 것은 제1일이었습니다.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모여 있을 때’(요 20:19), 예수님은 처음으로 제자들을 만나셨습니다. 그때 도마는 거기에 없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 다음 제1일에 그 의심하는 제자에게 자신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요 20:26). 한 가지 유형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한 주간의 제1일에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함께 모이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습관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사도 시대에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습니다. 바울은 궁핍한 자들을 위한 특별한 헌금에 관해 교회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 주간의 제1일에 헌금을 드리라고 지시했습니다.(고전 16:1-4). 갈라디아서 교회와 고린도 교회는 제1일에 모임을 가져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제1일에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으로 향한 여행을 하던 중 드로아에서 신자들에게 개인적인 인사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성도들의 모임에 참석하기 위하여 여행을 1주일 동안이나 지체해야 했습니다. 그들이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모이는 날은 제1일이었고, 바울은 그 모임에 참석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행 20:6,7).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 유배되어 있을 때, 하나님의 그와 우리에게 놀랄 만한 계시를 주셨습니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영감된 책들 중 마지막 책이었습니다. 그는 ‘주의 날에’,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그 놀라운 환상들을 보았습니다. 그 당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주의 날을 주님이 부활하신 날, 어디에서나 주님 아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모이는 날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보편적인 교회의 주님께서는 자신의 날을 가지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날은 바로 한 주간의 제1일입니다.
사도들과 초대교회의 이러한 예는 알기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질문은 계속됩니다. 주님의 날은 제4계명의 안식일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완전히 새로운 것입니까?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제1일 하루를 온전히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제4계명은 유효하게 남아 있었고 1주일 중에서 안식일로 지키는 날만 바뀐 것입니까? 제7일에서 제1일로 날이 바뀐 것은 제4계명을 완전히 뒤엎은 것입니까? 제7일에 예배를 드리는 것이 제4계명의 본질이기 때문에 제1일에 예배를 드리는 것은 율법 전체를 무너뜨리고 사라지게 하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까?
그러한 문제들에 대한 대답들은 길고 꾸불꾸불한 신학의 산길과 계곡길을 따라 구비칠 것입니다. 이 길들은 때때로 여행하기에 무척이나 어렵고 또 빨리 지나갈 수 없는 것들이기도 합니다. 처음으로 그 길을 걸어가려는 사람들에게는 여행이 시작될 때 주의사항과 안내가 주어질 것입니다. 그런데도 만족한 대답을 얻게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의 경험과 기자긴 사상의 등반이 요구될 것입니다.
성경에 있는 모든 것들이 똑같이 이해하기 쉬운 것은 아닙니다. 어떤 문제들은 증거본문에서 평이하게 말해집니다. 한 구절이 그 자체로서 모든 구원의 길을 제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문제들을 그 구절만 가지고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어떤 문장들은 그 구절이 들어 있는 장 전체를 주의 깊게 연구해야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어떤 성경구절의 의미는 다른 많은 구절들의 빛 아래에서 보지 않으면 이해되지 않습니다. 미숙한 그리스도인들은 복잡한 대답을 발견하는 기나긴 과정에서 그만 지치고 말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물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내가 1주일 중에서 제1일을 안식일로 지키기를 원하신다면, 그렇게 말하는 분명한 구절이 하나라도 있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도대체, 그 문제 때문에 성경 전체를 연구할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앞에서 지금까지 살펴본 사실들을 한데 모아 봅시다. 매주일 마다 하루를 거룩하게 지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십계명의 한가운데 놓여 있습니다. 다른 9개의 명령들도 모두 의식법이나 시민법이 아니라 도덕법입니다. 이 십계명은 의에 관해 말하는 신약에 의해 계속해서 지지됩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성경의 가장 탁월한 도덕법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가르침을 통해 제4계명의 영적 성격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깊게 하셨습니다. 그분은 그 주제에 관해 종종 교훈하셨습니다. 그의 가르침 가운데서 그분은 매주일의 안식일에 관한 명령을 그의 왕국의 한 특징으로 삼겠노라고 서약하셨습니다.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선언하심으로써 그는 안식일에 엄청난 중요성을 부여하셨습니다. 예수님과 가장 가까웠던 사람들(사도들)이 1주일의 제7일 대신 제1일에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고, 그 후 교회는 그렇게 해 왔습니다.
이 모든 것은 평이 하고 분명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아마 아직 만족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당신은 왜 그날이 바뀌었는지에 대한 보다 분명한 설명을 원할 것입니다. 물론 그에 대한 대답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심한 연구가 필요합니다. 그 대답은 위에서 제시한 성경적인 정보가 없이 그것 자체만으로는 성립될 수 없습니다. 이 성경구절들은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읽는 즉시 확신할 수 있을 만큼 선명하게 빛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리의 아주 작은 요점을 말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다음의 질문들에만 대답하는 것입니다.
1. 무슨 이유에서 안식일이 매주일의 제7일에서 제1일로 바뀌었는가?
2. 그러한 변화는 그 도덕법의 타당성이 지속되는 것과 완전히 조화를 이루는가?
3. 이렇게 날이 바뀐 것은 제4계명을 훼손시키는가?
때때로 어린아이들은 매우 불합리합니다. 그들은 질문에 즉각적인 대답을 요구합니다. 그 대답은 쉽게 이해될 수 없는 내용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말에 그들은 간단한 설명을 해 달라고 더욱 요구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는 히브리서 5:11말씀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은 신학적이고 성경적인 사상체계에 익숙해져야 하지만, 그들은 아직 고기를 먹을 수 없는 아주 어린아이들과 같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우유와 이유식을 먹어야 합니다. 이 ‘아기들’은 때때로 가장 어려운 진리들을 그들의 신학의 우유병에 넣어 달라고 끊임없이 울며 보챕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것들을 이해하기 위하여 매우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어떤 진리들을 음미할 수 있게 되기 전에 먼저 우리의 마음이 훈련의 습관에 의해 성숙되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신약은 안식일이 제7일에서 제1일로 바뀐 것에 관한 대답을 해 줍니다. 그것은 히브리서에서 발견됩니다. 당신도 그것을 예상했을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이방인들이 결코 경험할 수 없는 갈등에 직면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쓰여진 책입니다. 그들은 모세의 언약하에서 주님을 섬겨 왔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새 언약하에서 그리스도를 섬기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메시아가 오시기 이전의 영적 축복에 대한 추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전과 제사장 제도와 희생제사와 유대교의 전통들을 사랑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제도들속에서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은 단호하게 그들이 사랑했고 익숙해져 있는 삶과 예배와 섬김의 체계를 철회하려 하고 계셨습니다. 물론 그들은 앞으로 지속될 그리스도의 교회륽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대교와 기독교의 예배 방식이 공존했던 몇 년 동안의 삶은 너무나 편안했습니다. 그런데 성전과 제사장 제도와 유대교의 다른 모든 제도들은 A.D. 70년에 예루살렘의 함락과 함께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히브리서의 권고
히브리서의 많은 부분은 기독교의 새 언약이 어떻게 유대인들의 옛 언약을 대신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새 언약이 어떻게 성취되며 또 그 언약이 영적인 유대인들이 사랑했던 모든 것들을 영광 면에서 어떻게 능가하는지를 설명합니다. 가끔 히브리서 기자는 좀 더 깊이 들어가려 하지만, 그의 독자들의 마음이 그 이상을 받아들일 만큼 훈련되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걸음을 늦춥니다. 어쩌면 그들은 그가 이미 말한 것들 가운데서도 많은 것을 놓치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 실망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위로하는 것 외에도, 히브리서 기자는 그들이 옛날의 모세 언약을 더 좋아하여 그리스도를 떠나는 특별한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책은 그들에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을 지키라는 강력하고 긴 권고로 채워져 있습니다.
당신은 이 히브리서가 얼마나 복잡한 책인가 하는 것과 히브리서를 읽을 때는 3장과 4장에 초점이 맞춰져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2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월한 대제사장이시라는 개념을 도입합니다. 그러나 그 사상은 4장 마지막에 가서야 완전히 전개됩니다.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에 관해 말하는 2:18과 4:14사이에 있는 것은 참고 견디라는 기나긴 권고입니다.(3:1~4:13). 이것은 히브리서에서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에 관한 사상이 완전히 전개되기 전에 그 주제에 관한 꾸지람과 권고를 위한 또 하나의 기다란 권면이 전개되고 있습니다(5:11~6:20).
히브리서는 신자들에게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신뢰하라고 권고하기 시작하는데(3:1), 그리스도가 모세보다 얼마나 더 위대하신 분인가 하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 그 신뢰를 장려하는 것입니다(3:2-6). 여기서 그 권고는 히브리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음을 통한 영원한 축복에 미치지 못하는 자들이 되지 않도록 하라는 경고가 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3:7-11에서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시편 95:11의 긴 설명으로 그렇게 경고합니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는 위대한 대제사장이시라는 그의 논증과 그리스도는 모세보다 우월하시다는 논증이 안식일 문제에 종속됩니다. 안식일은 논의되고 있는 다른 문제들로 에워싸입니다.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만 그 논의를 따라갈 수 있습니다.
이 권고를 위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시편 95:7-11을 인용했다는 것은 무척 흥미롭습니다. 시편 95편은 다른 시편들의 유형과 완전히 다릅니다. 대부분의 경우 시편에 부정적인 어조가 있다면, 그것은 시가 시작되는 부분에 나옵니다. 시편 기자는 어떤 일에 낙심하여 그의 무거운 마음을 표현합니다. 그러나 그가 기도할 때 그의 태도는 점점 밝아지고 시의 끝부분으로 갈수록 희망적이 됩니다. 그런데 시편 95편은 밝고 행복한 찬양으로 시작해서 섬뜩한 저주로 끝납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시편 95편의 압도적이고 두려운 종결부분을 어떻게 해석하는지를 안다면, 당신은 더욱 놀랄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노하여 이렇게 맹세하십니다.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그것이 시편 95편의 마지막 끝나는 구절입니다. 이 사도는 그 말 속에서 어떤 사람들은 반드시 안식에 들어갈 것이라는 약속을 발견합니다(4:1,6)! 그는 이 압도적인 저주에서 약속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약속을 히브리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의 조상들이 광야에서 가나안에 미치지 못했던 것처럼(3:16-19), 그들도 그 약속에 미치지 못하는 자가 되지 말라고 권고하는 근거로 사용합니다(4:1). 시편 95편의 엄격한 경고는 희망의 씨앗을 배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안식일에 관한 이 짧은 책의 요점에 빨리 도달하려는 생각에서 그렇게 중요한 부분을 얼른 지나쳐 버립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3장과 4장의 권고 안에 있는 어떤 요소들은 절대로 무시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 중 한 가지는 ‘안식’이라는 단어에 대한 탁월한 논증입니다.
이 단어는 시편 95:11을 인용함으로써 처음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히 3:11). 물론 시편에서 이 말은 가나안에 들어가는 데 실패한 모세 당시의 불순종한 히브리인들에 관해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예는 선지자 다윗에 의하여 그 당시의 사람들을 권고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 히브리서 기자는 이 시편 95편의 말 속에서 특별히 안식의 개념과 관련된 우리 시대의 복음을 발견한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비교를 합니다. 우리는 광야에서 고대의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전파된 복음을 가지고 있습니다(4:2). 복음을 믿는 우리는 안식에 들어가고 있습니다(4:3). 광야에서 하나님의 음성으로 복음을 들었던 사람들은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3:19;4:2). 이 믿음의 결핍은 그들의 불순종이나 죄의 증거가 됩니다(3:16-18).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고, 안식의 약속에 미치지 못하는 자들이 되지 않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신뢰해야 하는 것입니다(3:12-14). 우리가 끝까지 견뎠을 때만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3:14). 광야의 유대인들은 약속된 안식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믿음과 의 안에서 끝까지 견뎌야만 그 안식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안식
여기서 히브리서 기자가 매우 신중하게 말하고 있는 그 무엇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까지 그것은 우리가 살펴본 것 가운데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그 무엇이란 인간이 들어가도록 부름 받는 안식이 특별히 하나님의 안식이라는 것입니다!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시 95:11 ; 히 3:11). 그래서 3:18은 “그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에 관해 말하며, 4:1은 “그의 안식”에 들어간다, 4:3은 “저 안식”과 “내 안식”에 들어간다고 말합니다. 4:5에서도 “내 안식에 들어간다”고 말합니다. 4:6은 NIV 성경이 삽입한 것과 같은 “안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4:11의 마지막 권고는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월함의 논증 가운데서 사도는 복음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과 관련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 안식(유일무이한 안식)은 하나님의 안식입니다. 그들 자신의 안식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도로 하여금 4:3b, 4에서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었느니라 제 칠일에 관하여는 어디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 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라고 말하게 한 것은 바로 시편 95편에 있는 약속의 이 두드러진 모습입니다. 4:3a 이 주장하는 것처럼 오늘날의 복음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고 있다면, 하나님의 안식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정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4:3b,4에서 그것을 정의하고 있습니다.
창조의 제7일에 하나님은 그의 안식에 들어가셨습니다. 그의 모든 일을 끝내셨습니다. 그가 행하신 일 가운데 펼쳐진 하나님의 영광은 완전했습니다. 그래서 전능하신 하나님은 제7일에 그의 일을 쉬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으셨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행하신 일을 즐기셨으며 그의 손으로 행하신 일들로부터 영광을 받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혼자서
이 안식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창조의 제7일 이래로 인간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오라는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일의 기쁨과 만족을 하나님과 함께 나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미래의 어떤 개인적인 축복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끝내신 일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끝내신 일을 즐기고 그의 끝내신 일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인간이 안식일에 쉬는 것은 출애굽으로부터 연유한다는 생각이 얼마나 비성경적인가 하는 것을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끝내신 일로부터의 하나님의 안식은 창조의 제7일 이래로 그분의 안식에 들어오라고 인간을 부르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4:3에서 기자가 우리에게 말하는 정말 놀라운 사실은 복음을 믿는 우리가 창조의 1주일부터 존재하게 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창조로부터 하나님의 안식이 존재했다는 것과 인간은 하나님의 안식으로 들어오라는 부름을 받는다는 사실에 관해 말하고 나서 즉시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는 말씀을 우리에게 상기시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안식은 세상이 시작될 때부터 완전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창조의 제7일로부터 하나님과 함께 그 안식에 들어오라고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죄와 반역과 강퍅한 마음과 불신앙 때문에 인간은 그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인간은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안식에 미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거기서 하나님의 안식과 인간이 그 안식에 들어간다는 생각을 종결짓지 않습니다. 6절은 인간의 반역과 하나님의 안식에 미치지 못하게 된 것에도 불구하고(광야의 유대인들이 멸망한 것에서 잘 나타난 것처럼),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사람들이 남아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7절) 다윗의 시대에 하나님께서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고 다시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의 안식에 들어가도록 하겠다는 그의 목표를 포기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여기서 유대인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를 알고서 얼른 8절을 덧붙입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인간에게 안식으로 들어오라고 계속해서 부르셨다.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어떤 유대인들이 광야에서 멸망한 얼마 후에 여호수아는 다른 유대인들을 이끌고 가나안의 안식에 들어갔다. 그래, 거기서 진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갔던거야.’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아니야!’라고 말합니다. ‘만약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다면,’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다는 약속이 성취되었다면, 하나님은 나중에, 즉 다윗의 시대에 다른 날에 관해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날 …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고 권고한 것은 여호수아가 아닌 다윗이었습니다. 여호수아를 따라 가나안에 들어간 것은 하나님의 안식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4:3).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타락한 인간을 하나님의 안식으로 인도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뿐입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안식에는 부족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의 일은 창조의 1주일에 모두 끝났습니다. 그는 그의 완벽한 안식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제7일 이래로 그는 그의 안식에 들어오라고 인간을 부르십니다. 부족한 것은 인간에게 있었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마음을 강퍅하게 했고, 하나님의 약속에 불순종했으며, 그의 안식에 들어오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역했습니다. 우리가 가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인간에게 부족한 것을 공급하여 하나님의 완벽한 안식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 줍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오라는 초청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기독교의 안식일에 관한 특별한 진술인 9절과 10절이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이 구절에 대한 영어 성경들의 번역은 제각기 달라서 혼동을 일으키게 하기도 합니다. 번역자들은 저자가 말하고 있는 것을 정확히 옮김으로써 그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명확하게 드러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구절은 복잡한 그 문맥 속에서 살펴볼 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안식에 관한 그의 논증에서 저자는 처음으로 안식일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안식할 때’ 혹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흠정역(KJV) 성경이 9절의 이 단어를 ‘안식’으로 번역한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3:11부터 4:11까지 ‘안식’이라는 단어가 12번 사용되었습니다. ‘안식’이라는 말을 위해 저자가 사용한 단어는 언제나 9절에서 사용된 그 단어와는 아주 다른 것이었습니다. NIV 성경은 12번이나 사용된 ‘안식’이라는 단어 대신 9절에서는 ‘안식일에 쉼’이라는 단어로 번역했습니다. 이 단어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 또는 안식일의 준수, 또는 하나님의 백성들에 의해 지켜져야 할 안식일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합니다. 신약에도 안식일이 있는 것입니다!
10절은 이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자기 자신의 안식에 들어간 그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데 하나의 대명사만이 사용되었습니다. 자기 안식에 들어가면서, 이 사람은 하나님이 창조의 제7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쉰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 자신의 안식에 들어간 그의 완료된 행위는 신약에서 하나님의 모든 백성이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것에 대한 설명이 됩니다.
NIV 성경의 번역자와 같이, 어떤 사람들은 ‘그’라는 대명사가 모든 그리스도인, 모든 신자를 가리킨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2가지 이유에서 불가능합니다. 전후 문맥을 살펴볼 때 저자는 신자가 자기 자신의 안식에 들어간다고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가 들어가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안식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행한 일에 만족해하며 그 일을 끝낼 수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행하신 일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또한 ‘그’는 이미 그의 일을 끝내셨습니다. 그는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제7일에 그의 일을 끝내신 것은 과거의 일입니다. 히브리서 4:3은 자신들의 안식에 들어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고 있는 신자들에 관해 말합니다. 그들은 안식으로 들어가는 과정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의 활동은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이 신약에서도 안식일을 지켜야 할 이유가 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아직 존재하지 않은 미래의 안식을 바라보고 안식일을 지킨다고 말하는 것이 그럴듯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이 구절의 내용과 전혀 일치하지 않습니다. 전체적인 문맥이나 어느 특정한 단어에서도 그러한 사상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미래 시제는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믿는 우리가 들어가는 것은 창조 때부터 완전했던 하나님의 완벽한 안식입니다. 약속된 안식에는 부족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의 강퍅한 마음과 불신앙, 불순종과 반역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안식에 미치지 못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인간의 죄를 치료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복음은 ‘오늘날’ 메시아를 통하여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오라고 죄인들을 부릅니다.
무덤으로부터 승리하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자기 안식에 이미 들어가신 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창조의 사역을 끝내신 것처럼, 자신의 구속의 사역을 이미 끝내신 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1주일의 제7일에 그의 일을 쉬신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제1일에 그의 일을 쉬셨습니다. 신약의 중보자인 그리스도께서는 안식일의 주인이 되셨습니다. 따라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그의 통치를 받는 것이며, 그의 왕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활동인 것입니다. 그가 끝내신 일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창조의 안식에 들어갈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러므로 신약에서는 1주일의 제7일이 아니라 제1일에 안식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9절과 10절을 그렇게 이해하는 데는 한 가지 심각한 난점이 있습니다. 그 난점이란 바로 앞에서 그리스도가 언급되지 않았는데 그 대명사가 그리스도를 가리킬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난점에 대한 매우 그럴듯한 대답들이 많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4:13에는 그것과 똑같은 형태가 나옵니다. 바로 앞의 문맥에 그리스도의 이름이 발견되지 않고 있지만, 거기서는 대명사를 사용하여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히브리서 전체의 주제는 모세의 제도에 대한 그리스도의 우월함입니다. 이 구절의 주요 주제는 우리의 위대하신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특별한 권고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세보다 훨씬 우월하신 분으로 높임으로써 시작됩니다. 이 권고의 한가운데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된다고 격려됩니다(3:14). 전체적인 논제는(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믿는 우리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는 죄인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길입니다. 여호수아는 아무도 그 안식으로 인도하지 못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4:9,10이 하나님께서 자기 일을 쉬신 것처럼(이미) 자기 일을 쉬고 안식에 들어가신 분에 대해 말할 때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를 떠올리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한 개인이 끝낸 일이 신약에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의 중심 주제가 되었다면, 우리가 그리스도만을 생각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신약은 우리가 안식일을 지켜야 할 이유가 우리 자신에게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죄인들로 하여금 아버지의 끝내신 일에 들어가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그리스도의 끝내신 일을 가리킵니다.
히브리서 3장과 4장을 이해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은 1주일의 제7일 대신 제1일에 예배를 드린 사도들과 모든 시대의 교회를 따르는 데 아무런 어려움도 느끼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 변화에 대한 모든 질문들은 눈 녹듯이 사라질 것입니다. 제4계명은 그리스도 안에서 최고의 영광에 도달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날이 바뀐 것은 창조에서의 하나님의 안식을 존중하며, 어떤 면에서도 안식일법을 손상시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제 칠일 안식일교인들과 도덕률 폐기론자들, 반(反)안식일주의자들의 모든 주장을 단번에 물리칠 수 있는 단 한 구절의 성경 말씀을 찾으려고 한다면, 실망하고 말 것입니다. 조급하게 대답을 들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당신처럼 히브리서 3장과 4장을 연구할 만큼 오랫동안 앉아 있지 못할 것입니다. 미숙한 성도들은 사도의 논증을 따라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성경을 가지고 씨름하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4:9,10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다른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겸손하게 성경을 연구하는 모든 분들이 모쪼록 이 구절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신약은 제4계명에 집착하고 있으며 우리가 실제로 예배를 드리는 날만 바뀐 것이라는 사실에 당신의 양심이 편안해지기를 바랍니다. 구약에서의 안식일이었던 제7일은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그의 안식에 들어간다는 약속과 특권을 상징했습니다. 신약의 안식일 즉 제1일은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그의 안식에 들어간다는 약속과 특권, 그리고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속 사역을 통하여 죄인으로서 안식에 들어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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