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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바랜 안식일 7 (월터 챈트리)

월터 챈트리

by 김경호 진실 2013. 3. 31.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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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의 준수 : 모세의 방법과 그리스도의 방법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 거할 때에 안식일에 어떤 사람이 나무 하는 것을 발견한지라 그 나무 하는 자를 발견한 자들을 그를 모세와 아론과 온 회중의 앞으로 끌어왔으나 어떻게 처치할는지 지시하심을 받지 못한 고로 가두었더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 사람을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진 밖에서 돌로 그를 칠찌니라 온 회중이 곧 그를 진 밖으로 끌어내고 돌로 그를 쳐 죽여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하니라" (민 15:32-36)

"또 두로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하며 물고기와 각양 물건을 가져다가 안식일에 유다 자손에게 예루살렘에서도 팔기로 … 내가 경계하여 이르기를 …다시 이같이 하면 내가 잡으리라 하였더니 "(느 13:16-21)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갈 3:23,25)

모세의 준수 방법

모세가 살던 시대에 어떤 사람이 광야에서 나무를 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범한 그 사람을 돌로 쳐 죽이라고 직접 명령하셨습니다.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하여 이스라엘 회중은 그를 돌로 쳐 죽였습니다. 유대인들의 안식일 관례는 매우 엄격했습니다. 이스라엘 국가는 가장 강력한 형벌이 가해지는 제4계명에 의해 강화되었습니다. 백성들은 형벌이 집행되는 것을 구경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 모두가 집행자였던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공적인 의를 세우는 데 매우 열정적이었습니다. 안식일 준수에 대한 열정 때문에 그는 상인들에게 만약 그들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법을 위반하고 장사하면 체포하겠다고 위협했습니다. 느헤미야가 마음속에 어떤 생각을 품고 있었는지를 알기 위해 우리는 그가 이방인들과 결혼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행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책망하고 저주하며 두어 사람을 때리고 그 머리털을 뽑고 이르되 너희는 너희 딸들로 저희 아들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 아들들이나 너희를 위하여 저희 딸을 데려오지 않겠다고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라”(느 13:25). 느헤미야나 혹은 다른 어떤 유대의 행정장관이 도덕적인 문제로 분노했을 때 그의 앞에 선다는 것은 실로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모세 치하에서 안식일이 지켜질 때, 제4계명은 대단히 엄격하게 적용되었으며, 어떻게든 그것을 범했을 때는 가혹한 형벌이 내려졌습니다. 모세의 체제는 정확하고 엄격하게 인정이 없고 완고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모세의 언약하에 살았던 베드로가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모세의 율법을 메지 못했다(행 15:10)고 말한 이유입니다. 그것은 또한 누구보다도 엄격한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이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갇혔느니라”(갈 3:23)고 말한 이유입니다.

모세 치하에서 하나님의 율법이 집행되었던 엄격하고 전체적인 유형에 대한 2가지의 비성경적인 반응이 있습니다. 먼저 오늘날 성경을 연구하는 어떤 사람들은 우리 주위에 편만해 있는 윤리적인 혼동 상태를 바라봅니다. 도덕의 붕괴와 의에 대한 완전한 무시에 직면하여, 이들은 모세의 엄격함만이 공동의 도덕을 회복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믿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모세시대 문화의 엄격함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을 너무나 두려워한 나머지 구약성경 전체를 삭제하려고 합니다. 이들은 구약의 율법을 보존하는 것을 아무런 가치도 없는 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6~4:7은 모세의 체제에 대한 위의 2가지 입장과는 완전히 다른 견해를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이 관점은 오늘 우리 시대에 제4계명을 어떻게 이해하고 적용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아는 데 필수적입니다.

무엇보다도 신약은 구약에 계시된 도덕법을 결코 폐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입니다. 그는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총애를 얻고 그분과 교통하고 그분의 축복을 받기를 원한다면 그분처럼 의롭게 되어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우리 주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이 도덕적인 순결을 정의할 때, 그들은 완전히 구약성경에 의지했습니다. 그들은 몇 번 씩이나 십계명을 인용하고 언급하면서 그 도덕법으로 돌아갑니다. 더욱이 이 도덕법은 우리의 복음을 정의하는 데 필수적이며, 복음은 아담이나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윗 등의 시대로부터 그리스도의 시대까지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인간은 메시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습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하나님이 손으로 친히 쓰신 도덕법전의 한가운데 있는 명령입니다. 그것은 의에 대한 정의(定義)의 한 부분인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손에 들린 그 도덕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손에 들린 동일한 도덕법과는 다르게 사용되었습니다. 모세의 언약과 신약에서는 완전히 동일한 도덕의 기준이 발견됩니다. 그러나 이 도덕법의 시행은 대단히 다릅니다. 우리가 모세의 시행 방법과 그리스도의 시행 방법을 비교해 보면, 그 도덕법이 적용된 방법과 집행된 방법이 엄청나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가 영감을 받아 그 율법을 집행할 때, 그는 외형적인 세부 사항들을 정확하게 제시해 줌으로써 그것을 생활에 적용하도록 가르쳤습니다. 예를 들면 안식일에는 나무를 해서는 안 된다든가 (민 15:32-36), 안식일에는 그들의 처소에서 불을 피워서도 안 된다든가(출 35:3), 안식일에는 추가로 희생제사를 드려야한다(민 28:9,10) 등등 특별한 상황에 대한 엄격한 교훈들이 주어졌습니다.

우리의 구세주께서는 완전히 동일한 그 안식일법을 다른 차원에서 운용하셨습니다. 그분은 마음의 동기라는 내적인 문제를 강조하시면서 안식일 명령에 포함된 원리들을 명료하게 설명 하셨습니다. 그분은 훨씬 더 관대함을 보이셨으며, 인간에게 더 큰 자유를 부여하셨습니다. 그분이 안식일에 제자들이 이삭 잘라먹은 행위를 용납하신 것과 그 사건에 대해 그분이 가르치신 내용에서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의 경제 체제하에서 어떤 사람이 안식일을 범했다면, 국가로부터 분명하게 명시된 반응이 있었습니다. “무릇 이날(안식일)에 일하는 자를 죽일지니”(출 35:2). 세밀하게 명시된 그 조항을 범했을 때, 그 위반자에게는 엄격하고 가차없는 형벌이 내려졌습니다. 모세는 그 도덕법을 외적인 민사 사건으로 적용하는 데 있어서 추호도 용서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준수 방법

한편, 우리는 우리 주 예수께서 도덕적인 문제를 다루신 것이 모세의 방법과 대조적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분은 명령에 대한 위반이 어떤 생각과 의도에 의해서 행해졌는가를 먼저 살펴보심으로써 그 도덕법을 온전히 집행하셨습니다. 그 스승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상기시키시지만, 안식일을 범한 것에 대한 시민법적인 보복을 말씀하시지는 않습니다.

그 두 중보자들이 하나님의 다른 도덕법들을 다룰 때에도 그것과 똑같은 대조가 발견됩니다. 모세는 외부적인 순종의 항목들을 끝없이 자세하게 서술합니다. 형벌들이 넘칩니다. 마법사 - 사형, 수간(獸姦) - 사형, 우상숭배 - 사형, 매춘행위를 한 제사장의 딸 - 화형, 간음 - 사형 등등. 반면에 우리 구세주께서 그 율법을 취하셨을 때, 그분은 언제나 가혹한 시민법적 형벌을 선고하시는 일이 없이 그것을 영적으로 자세하게 설명하심으로써 그 율법을 강화하셨습니다. 모세와 예수님은 모두 십계명에 충실했지만, 양자는 대단히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 율법을 시행했던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과 4장에서 바울은 모세의 언약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제정된 새 언약 사이의 차이점을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 두 종교체계를 비교하는 것은 우리가 제4계명을 이해하고 시행하는 데 있어서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새 언약은 완전히 새로 시작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과거의 언약들을 모두 폐지하시려고 그의 아들을 보내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메시아는 구약 전체를 뒤엎고 새롭게 시작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분과 그의 제자들은 구약에 근거했으며, 그들의 입장이 옳다는 것을 논증하기 위해 구약을 사용했습니다. 신약에서 반복되지 않는 구약의 가르침은 거부해야 한다는 어떠한 암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바울은 우리에게 모세의 저작들을 포함한 구약의 모든 성경이 구원의 길은 오직 한 가지밖에 없다고 가르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것은 갈라디아서 3장 앞 부분에서의 바울의 요지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6절).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11절). 바울은 창세기에서 모세의 말과 모세적 질서하의 선지자 하박국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모세와 그를 계승한 다른 모든 선지자들에게 있어서 율법이 구원의 길을 제시하기 위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 너무나 분명했습니다. 안식일법은 죄인들이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는 길의 일부로서 고안된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사실 바울의 가르침에서 가장 강조되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로 말미암아 메시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죄인들이 구원된다는 약속은 모세가 율법의 언약을 받기 430년 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었습니다(갈 3:17). 그러므로 모세의 율법은 아브라함과의 약속을 없이 하지 못하며 그렇게 할 수도 없었습니다(갈 3:17b). 모세의 율법은 구원의 다른 길을 제시하지도 않았고 그렇게 할 수도 없었습니다.

3:19에서 바울은 이렇게 질문합니다. ‘그런즉 율법(의 목적)은 무엇이냐?’ 이 질문에 대답하면서도 바울은 앞에서의 그의 주장을 반복합니다.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다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그러나 성경(구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갈 3:21-22).

(모세의) 율법의 목적은 무엇이었습니까? 3:19에서 바울은 그의 대답을 시작합니다.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모세의 언약은 아브라함의 언약을 대신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본래대로 남겨졌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율법 체계는 존재하고 있는 은혜의 약속에 ‘첨가된’ 것입니다. 그 첨가는 ‘범법함’을 인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도덕법은 하나님의 백성을 에워싸고 있는 모든 이방 국가들에 의해 극악무도하게 멸시를 당하여 메시아가 오시기도 전에 그 ‘범법함’이 유대인들마저 삼켜 버릴 지경이었습니다. 너무나 많은 죄가 그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는 자들의 방탕한 풍습이 하나님의 백성의 흔적마저 쓸어버릴 위험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몇 번씩이나 반복해서 일어났습니다.

그 명령들의 엄격하고 상세한 적용은 모세 치하에서 메시아가 오시기까지 하나님의 백성을 보존하게 될 가혹한 시민법적 형벌들과 결합되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4장에서) 히브리인들을 엄청난 재산을 상속받은 어린아이에 비유했습니다. 모든 것이 그에게 속한 것이지만, 아직 성숙하지 못한 동안에 그는 고대 세계에서는 가끔 노예들이 그 직책을 맡기도 했던 엄격한 몽학선생에게 맡겨져야 했습니다. 구약의 유대인들은 어린아이들과 같은 반면, 그리스도인들은 성년이 된 상속자와 같습니다. 상속자가 완전히 성장하면, 노예는 더 이상 그를 엄격하게 훈련할 수 없습니다.

바울의 설명은 계속 이어집니다. 구약의 유대인들은 2가지 이유에서 어린아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갖고 있는 것과 같은 완전한 계시를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3:23-25). 그리고 그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같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도 못했습니다( 4:6,7). 계시의 충족성과 성령의 내주하심이라는 성숙의 2가지 요소들은 메시아의 오심과 함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비록 그들이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완전히 성장한 아들들로 대접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 - 언약은 어린아이들을 감독하기에 적합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성숙한 자녀들에게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가 그 자신의 안전에 필요한 정보를 모두 알지 못하고, 또 그런 정보들이 주어진다 해도 그것들을 이해할 수 있는 통찰력이 부족할 때, 우리는 그를 어떻게 인도해야 합니까? 우리는 엄격한 외부적인 제한들을 반복해서 말하고 고통스러운 형벌로 위협함으로써 그 아이를 인도합니다! 만약 당신이 아장아장 걷는 꼬마의 부모이며 호수 근처에서 살고 있다면, 당신은 아이가 호수에 빠져 죽지 않도록 하기 위해 많은 신경을 쓸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아이에게 혼자서 울타리 밖으로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반복해서 상기시킬 것입니다. 당신은 ‘물에 들어가지 말아라’고 말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안전을 위해서 더 엄격해져야 할 것입니다. ‘엄마 아빠랑 같이 가지 않고 혼자서 호숫가나 둑에 가면 안 된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언제 어떤 이유에서든지 아이가 둑이나 호숫가에 한 발이라도 내딛었다면, 즉각적인 벌로서 당신은 아이를 찰싹 때릴 것입니다. 당신은 그의 목숨을 보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 치하의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이 행하신 일도 그것과 똑같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나 그리스도 자신이라는 완전한 계시를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만약 그들이 그것을 가지고 있었다 해도 그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도덕법에 시민법과 의식법을 첨가하심으로써 나이 어린 그의 자녀들이 그들을 에워싸고 있는 범법함 때문에 스스로 자멸하지 않도록 인도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모세의 율법 아래 매여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을 보존하기 위한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당신의 자녀가 자라 어른이 되어도 당신은 여전히 그가 폭풍이 몰아치는 날과 같은 때에는 물에서 안전하기를 바랄 것입니다. 당신은 그가 어른이 되어서 호수에 빠져 죽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제 당신은 그에게 자유를 주면서 광범위한 원리 가운데에서 그에게 말합니다. 아주 엄격한 제한과 찰싹 때리는 일은 어른에게 적합하지 않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서구 사회의 새로운 이교 안의 도덕적 범법함에 주의해야 합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습관은 이 땅에서 빠르게 사라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해 낼 시간이 없습니다! 그분의 거룩한 날은 짓밟히고 있습니다.

그러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모세에게로 돌아가려는 유혹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일은 교회 안의 어떤 엄격한 도덕주의자가 스스로를 율법의 집행자로 임명할 때 일어납니다. 그는 안식일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행위에 실망하여 눈살을 찌푸릴지도 모릅니다. 그는 옛날 청교도적인 문화의 엄격한 방법을 찬양하거나 다른 시대의 스코틀랜드 고지대의 사회적 풍습을 흉내낼지도 모릅니다. 그는 엄격한 눈빛과 권위적인 어조로 안식일에 대한 그 자신의 결정만이 옳은 것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율법 그 자체보다 더 엄격하고 더 정확하다’는 것이 그가 늘 지껄이는 말입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모든 모세의 규칙과 형벌들이 행정장관에 의해서 재도입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런 믿음 때문에 모든 역사적인 개혁주의 신조와 모순이 되는데도 이들은 시민법과 도덕법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고 믿습니다. 안식일법은 모세에 의해 쓰여진 그대로 집행되어야 하며 그것을 범한 자들은 오경에 기록된 대로 처리되어야 한다고 그들은 말합니다.

그리스도와 베드로, 바울은 그것과는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어린아이에게 적합한 감옥은 어른이 된 아들에게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신 계시의 완전함과 성령의 충만한 분량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모든 도덕법에서처럼 안식일 문제에 그리스도의 영이 충만해야 합니다. 엄격함이나 모세의 막대기가 구약으로부터 신약으로 옮겨와서는 안 됩니다. 도덕법은 보존되어야 합니다. 시민법은 제쳐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시민법이나 의식법과 함께 도덕법도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는 것도 똑같이 실망스러운 노릇입니다. 우리가 간음한 사람들에게 가장 무거운 형벌을 주장하지 않기 때문에 부정(不貞)함이나 결혼생활에 충실하지 못한 것에 대한 시민법적인 재제가 더 이상 없어져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우상숭배자들을 처형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제2계명을 삭제해야 합니까?
우리의 구세주께서는 자주 제4계명에 대한 영적이고 신약적인 해설을 해 주셨습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기본적인 도덕적 의무입니다.
성령과 완성된 성경의 계시로 충만한 남녀들은 성인들로부터 도덕법을 받은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들은 시민법적인 부가물과 모세의 엄격함이 없이도 안식일 지키는 원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안식일의 아들들로서의 그들의 자유는 우리의 구세주 자신의 발걸음 안에서 이 계명 위를 마음껏 걷게 될 것입니다.
안식일의 영적인 본질은 유치한 신자들에게 주어진 모세의 가르침의 특색이 없어도 성숙한 신자들에 의해 지켜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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